• (完)산티아고를 걷다_신정민
  • ▶ <신정민 산티아고를 걷다>까미노 데 산티아고!!(최종)

  • 까미노 데 산티아고!!


     


     신정민(시인)





    착한 사마리아인을 만나다

    모니카는 2kg는 족히 될 듯한 카메라를 매일 가지고 다녔다. 걷는 것도 힘든데 사진을 찍느라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걸음도 느려져서 알베르게에는 항상 늦게 들어오곤 했다. 그녀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몸과 마음이 더욱 더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산티아고 가는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녀는 풍경 한 컷 한 컷 정성을 들였다. 그녀의 꿈은 아이들의 동화책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마치 동화에 나올 배경을 찾는 듯 산티아고 가는 길을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풍경을 그녀는 잡아당기기도 하고, 멀리 두고 한참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던 모니카에게 일이 생겼다.

    한 까페에서의 일이었다. 모니카는 모카 라떼를 시켜놓고 속이 좋지 않다며 화장실에 갔다. 그런데 커피가 다 식어가는데도 오질 않았다.

    너무 늦다 싶어 화장실 쪽을 기웃거리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기운 없는 소리여서 단 번에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모니카는 화장실 문 앞에 주저앉아있었다. ‘언니, 움직일 수가 없어.’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얼굴이 노랬다. 축 처진 어깨가 심상치 않았다. 이내 바닥으로 몸이 쓰러졌다.

    내가 재빨리 가까이 있는 의자의 쿠션을 머리에 받쳐주고, 겉옷을 벗어 허리 밑으로 넣어주는 동안 일이 벌어진 것을 안 주변 사람들도 모니카에게 다가왔다. 바에 온 주민들이었는데  모니카가 춥지 않게 옷을 벗어 덮어주고 다리를 높여주었다. 나는 숙소로 뛰어갔다. 모니카를 안전하게 숙소로 옮겨야할 일행을 찾아 뛴 것이다. 잠시 후 허겁지겁 일행들과 돌아와 보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니카의 얼굴빛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울음범벅이었다. 처음 본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체력이 고갈된 순례자들에게 가끔 생기는 일이라고 했다. 갑자기 기운이 떨어지면서 호흡도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마치 고산증세와 같았다. 이 증세는 약도 없어 그냥 푹 쉬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체온을 따듯하게 유지하면서 푹 잠을 자게 했다. 다음 날 모니카가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따듯한 사랑 때문이었다.


    포토마린 Portmarin의 옛 마을은 벨레사르 저수지에 의해 수몰되었다. 새로 지은 높고 긴 다리 밑, 미뇨 강물 속에서 잠긴 옛 다리가 보였다. 산 중턱의 흰 벽을 가진 집들이 이채롭다. 언덕 높은 곳에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었던 산 니콜라스 성당이 옮겨져 보존되어 있었다. 미뇨 강 위의 큰 다리를 건너서 계단이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시내가 나왔다.

    레스토랑과 숙소가 함께인 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모처럼 따듯한 물로 씻을 수 있었고, 양고기 수프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포토마린은 철제로 만들어진 아주 긴 다리가 있는데 오래 되어서, 새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야 했다. 절벽 사이 허공에 떠있는 가늘고 긴 다리 위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을 것이다. 세월의 시계 속 두 개의 바늘인 듯 두 개의 다리 아래로 째깍째깍 포토마린이 흐르고 있었다. 여러 개의 길이 생겼다 사라졌다. 포토마린의 숲길은 헛갈리기 쉬웠다. 노란 화살표를 놓치기 쉬운 곳이었다.


    수십 개의 수랑을 가진 산 로께 예배당. 17세기 건물이 있는 꼰벤또 광장. 그리고 평화로운 이소 강이 흐르는 팔라스 데 레이를 지나, 치즈 생산지로 유명한 아르수아 Arzua로 향했다.

    가파른 경사길이 끝나서 걸음이 편했다. 18세기에 세워진 교회와 분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모니카와 나, 그리고 5학년 2반 소녀, 벨라는 함께 걸으면서 가족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조를 짜서 움직였는데 걷는 것도 느리고, 행동도 빠르지 않아 미운 오리새끼 조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다가 정말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버린 일이 생겼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노란 화살표를 놓친 것이었는데, 되돌아가 찾은 화살표가 여기 저기 있는 것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과 다음 목적지로 가야할 길의 화살표가 교차된 듯 했다. 서로 흩어져 걸어보았지만 멀리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길을 찾는다고 멀리 나섰다가 혼자 낙오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알베르게가 있다는 화살표 쪽으로 걸어보았지만 좀처럼 일행들이 보이질 않았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약속된 숙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 지나는 경찰차가 있어서 세워 물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길을 잃은 순례자에게 직접 숙소를 찾아주진 않았다. 어느 쪽에 숙소가 있는지 방향만 가르쳐줄 뿐.

    알베르게 두서너 곳을 들어가 본 우리가 숙소를 찾지 못해 헤맨다는 것을 알게 된 독일인 부부 까미노가 숙소에서 나와 한국인들이 지나갔다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길을 잃으니까 화살표가 여기저기 중구난방이었다. 숙소로 가는 화살표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숙소에서 나오는 화살표가 한 길목에 있어서 헤맸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숙소를 찾아 들어갔지만 마음 졸이며 기다린 일행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또 말썽이군’. 그날 저녁, 우리는 단단히 눈칫밥을 먹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

    동행이었던 한 신부님께서 숙소 벽면에 그려진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파충류인 듯 보이는 밑그림. 이곳을 지나간 어떤 순례자가 그리다 만 그림이었을 것이다. 다리부분만 그려진 미완성 그림이었다. 신부님은 이 그림이 도룡뇽이 될지, 공룡이 될지는 그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했다.

    도룡뇽과 공룡은 얼마나 큰 차이인가. 크기나 종류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는 말씀이셨다.

    내 자신 안에 있는 미완성 그림들이 보였다. 가족들, 내 자신의 정체성, 신앙생활, 친구들 …… 그것들이 바로 내 삶의 그림이었다. 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어떤 꿈을 그리다 만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왕자의 모자 속에 들어있는 코끼리와 구멍 난 상자속의 염소들을 보았는가. 내 꿈이 그리고 있는 그림들. 누군가 시키는 대로 그리고, 일러주는 대로 산다면 나만의 그림은 완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보고, 묵상하고, 품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여유. 아침에 눈 뜨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낮잠을 자고, 친구들과 얘기 나누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밤을 기다리는 소소한 일상. 이 삶의 기적들을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웅장한 유적보다는 한적한 마을들이 어릴 적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아르수아를 향해 떠났다. 과테말라에서 온 母子 순례자와 독일인 부부 순례자를 또 만났다. 그들은 어디서부터인지 함께 걷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20여 명이나 되는 우리가 그룹으로 순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가며 만나는 까미노들 사이에 입으로 전해져 모두들 알고 있다고 했다. 아르수아 역시 오래된 옛집을 허물지 않고, 견고하게 보수를 해서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무너지거나 빈집도 많았지만 흉물스럽진 않았다. 바로 그 옆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집 한 채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은 큰 재산이 아닐 수 없었다.

    문어를 삶아 올리브유와 버무리고 그 위에 고춧가루를 뿌린 ‘뿔뽀’로 유명한 멜리데를 지날 때였다. 앞서 걷던 글로리아 형님이 걸음을 늦추며 다가왔다. 여행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섭섭했던 게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각지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움직이는 여행을 했으니 남모르게 받은 상처도 있을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여행 시작하던 날부터 코를 유난히 곯아서 슬쩍 불편했던 형님에게서 타인에게 주었을 상처에 대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모습을 배우게 되었다.

    용서를 구하는 낮은 자세가 얼마나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지도 따듯하게 다가왔다.


    -친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형제는 어려울 때 도와주려고 태어난 사람이다


    산티아고 길은 회개와 보속,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시작한 길이었다.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마지막 내리막길에 순례자들이 몸을 씻는다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작은 시냇가에서 몸을 씻는 순례자들을 그려보았다. 머리를 감고, 얼굴과 손발을 깨끗이 하면서 마음까지 빛나는 순례자들. 여기까지 걸어오긴 했지만 그들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씻고, 잘 자고 온 터라 개울을 지나는데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산티아고에 가까이 갈수록 길을 잃기 쉬웠다. 각 루트에서 길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꼼포스텔라로 가는 루트는 크게 아라곤 루트, 프랑스 루트, 기타 루트로 분류해볼 수 있다. (스페인 대사관 제공 축소 그림 참조)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가는 순례여행 루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놓은 프랑스 루트는 우리가 걸었던 길이다. 이 루트는 나바르레, 라 리오하, 부르고스, 발렌시아, 레온, 갈리씨아 지방으로 이어진다.

    기타 루트는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곳으로부터 출발하는 루트들. 다양한 곳에서 출발하여 꼼뽀스텔라로 들어오는 순례코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길보다는 새로운 오솔길을 이용하고 다소 덜 알려진 장소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적들을 볼 수 있는 루트이다.

    스페인 북부 해안을 따라 걷는 해안루트와 스페인 남부지방 어디에서나 시작할 수 있다. 해안루트의 주요 집결지인 살라망까와 산악 호수지역을 볼 수 있는 사모라를 거쳐 오우렌세 지역에 이르는 동쪽 루트 코스도 있다.

    그밖에도 영국으로부터 갈리씨아 북서쪽 항구로 들어가는 영국 루트, 포르투칼에서 오는 포르투칼 루트가 있다. 스페인 정부 관광국 한국대표부에서 제공하는 지도를 참조하면 좋다.


    2008년 12월31일 오후 5시. 벨라와 나는 얘기를 하며 걷다가 또 화살표를 놓쳤다. 닿을 듯 가까이 보이는 도시를 향해 걷다보니 아무래도 약속된 고소 알베르게를 지나는 듯 했다. 지나가는 현지인도 보이지 않고, 가끔 보이던 다른 순례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 곳곳에서 오는 까미노들이 많이 보인다던데 겨울이어서 인지 그렇지도 않았다. 추워서 잠시 쉬었던 작은 가게까지 가려면 한참을 더 가야했다. 그래서 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돌아가기로 했다. 산티아고로 내려가는 길목까지 갔다가 다시 길을 되돌아와야만 했던 것이다. 종일 걸었으니 몸은 잔뜩 지쳐 있었는데도 마음만은 가벼웠다. 목적지가 눈앞에 있다는 마음이 그랬다. 고소 알베르게는 규모가 컸다. 커다란 관공서의 주차장인 줄 알고 지나쳤던 그 곳이 바로 알베르게의 주차장이었다. 입구 푯말이 번듯하게 있었는데 놓치고 지나쳤던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온 페레그리노 연인이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갔다. 유러피안인 듯 보이는 남자는 흑인들의 레게 머리를 하고 있었고, 여자는 금발머리를 한 갈래로 질끈 묶었다. 키 보다 높은 베낭은 더 이상 짐이 아니었다.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한 에너지였다. 보헤미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커플이었다. 힘들고 지친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었다. 바람인 듯 가벼운 그들의 노랫소리에 커다란 등짐도 그만 둥실, 무게를 잊어버린 듯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피어 있는 웃음과 그들을 보고 있는 우리 얼굴에 피어난 환한 웃음. 그것은 여기까지 걸어온 순례자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란 것이 뿌듯했다. 그들은 고소에서 쉬지 않고 곧장 산티아고를 향해 내려갔다.

    몸은 저녁을 보내야할 숙소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들과 함께 걷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10시간 동안 34.6Km를 걸어 몬테 데 고소GOZO에 도착했다. 멀리 길 끝에 산티아고 데 콤뽀스텔라가 보였다. 맑은 날은 대성당탑도 보인다고 했다. 고소의 입구에는 1982년 이곳을 순례한 ‘페레그리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 기념상이 있었다. 산티아고를 가르키고 있는 커다란 순례자 동상도 언덕 위에 서 있었다. 다 왔다,는 감회 때문인지 순례자들은 사진에 자신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로 저기다‘ 라는 손짓과 스스로들 대견한 듯 눈 앞의 산티아고에 눈길을 던져 넣고 있었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의 손짓. ’저기가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입니다.‘ 

    고소 공립 알베르게는,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직전에 있는 숙소다. 3천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아주 큰 숙소였다. 순례자를 위한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8인 1실에 짐을 풀었다. 부엌 집기와 양념류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오후에 지친 몸으로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기서 쉬고, 다음날 오전에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매일 정오에 있는데 그 시간에 맞춰 들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이 곳 알베르게는 산티아고에 오가며 장기간 머물 수도 있었다. 순례자들은 자신의 배낭을 이 곳에 맡겨놓고 가볍게 산티아고에 다녀와서 집으로 돌아갈 때 배낭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이곳은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가 오기도 하는데 사무실에서 배차시간을 알 수 있다.

    지중해의 끝, 피니스테레로 가는 단체버스도 있었다. 가격은 25유로.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그동안 다녀간 한국인에게서 배웠다는 고소 숙소지기의 한국말이 반가웠다.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걷다보니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목적지 도착 하루 전이란 의미만 남은 밤. 간단한 세탁과 몸을 마음껏 씻을 수 있었다. 따뜻한 스토브에서 젖은 양말과 장갑이 마르고 있었다. 연말연시의 들뜬 무언가가 아닌, 무언가를 해냈다는 마음들이 조용히 술렁거렸다. 일행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 둘 한 방에 모였다. 모인 몇몇이 꺼내놓은 간식은 비스켓 한 봉지와 오렌지 쥬스 뿐이었다. 남은 것이 그 것 뿐이었다. 까미노들의 송년의 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힘든 여정을 같이한 벗들에게 가는 마음만큼 아름다운 길이 또 있을까.

    몇 걸음이면 닿을 듯한 산티아고에서 가는 해와 오는 해를 위한 축포소리가 들려왔다. 

    순례 마지막 날. 회개와 보속, 새로운 출발을 정리하는 날.

    산티아고 입성 하루 전.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면 며칠 동안은 신발도 신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알베르게 밖에 나와 서 있었다. 한 밤 중의 산티아고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걷는 것’이란 말이 생각났다. 걷고 있는 길의 화살표대로 가고 있다는 누군가의 고백이 들려왔다.



    나는 산티아고 데 까미노를 걸었다


    2009년 1월1일. 아침. 날씨 흐림.

    유럽의 한 귀퉁이.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에 있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들어갔다.

    산티아고를 알리는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비옷차림에 헝클어진 머리였지만 지친 기색은 간데 없고, 함박웃음만 사진에 찍혔다. 예쁘게 보이기 위한 포즈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웃기만 했다. 인근에 공항이 있었는지 비행기 오르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르테가에서 만났던 바찌와 고소에서 만난 일본 아가씨, 산티아고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간다는 에스파뇰 아줌마도 산티아고 시내를 함께 걸었다. 송년의 밤을 지새운 젊은이들이 손을 흔들며 ‘Happy New Year!' 하고 인사를 건냈다. 우리도 손을 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Happy New Year!"

    밤을 지샌 산티아고의 아침. 상점들은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서도 여전히 지친 기색을 볼 수 없었다. 한없이 담담한 사람들, 다시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몸과 마음이 가벼운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다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산티아고 꼼보스텔라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나는 출발지였다.


    바모스 Vamos! (가자!) 고소 알베르게에서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까지는 약 5Km였다. 산 나자로와 아쿠아리스를 지나갔다. 처음엔 넓은 도로를 걸었는데 점점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새해 특전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교회 근처에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순례자들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다. 힘든 길을 걸어 드디어 왔다는,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사들을 환영하는 듯한 무언가를 바랬던 모양이다. 산티아고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우리에게 힘든 여정을 권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힘든 여정은 내 것이었다. 산티아고는 환영받기 위해 걸었던 길이 아니었다.


    까떼드랄(Catedral- 9세기 경에 성 야고보의 묘위에 지어진 대성당)이 보였다.

     

    까떼드랄이란, 일반적으로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건물. 그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카떼드랄(대성당), 이글레시아 Iglesia(성당), 에르미타 Ermita(예배당)로 크게 구분된다. 에르미타가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작은 규모인데 반해서, 카떼드랄은 도심부에 있는, 말하자면 성당의 총본부에 해당하는 주교좌 성당을 말한다.

    걸어서 도착한 곳. 산티아고 성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진 성벽 안에 자리한 산티아고의 역사적인 구역. 오브라도이로 광장을 압도하고 서있는 대성당을 보니 콧등이 찡-해졌다.


    카테드랄 주변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이외에 칸타나 광장, 프라테리아스 광장, 안마쿨라다 광장 등 4개의 광장이 위치한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은 이 중에서 가장 넓을 뿐 아니라, 카테드랄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축물로 사방이 에워싸여 있어 볼거리가 많다. 카테드랄 왼쪽 편에는 헬미레스 궁전이 있으며, 예전부터 대주교좌가 있다.

    내부의 방을 몇 군데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다. 카테드랄 앞 오른쪽에는 옛 왕립병원이 있다. 1489년 가톨릭 부부왕이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 겸 병원으로 건립한 것인데, 현재는 별 5개의 파라도르이다. 광장 맞은 편에 있는 건물은 시청사로, 과거에는 궁전이었던 건물이다.


    칸타나 광장은 카테드랄의 뒤쪽에 잇으며, 면죄의 문, 성스러운 문에 면해 있다. 면죄의 문은 1611년 페르난데스레추가가 제작했고, 명장 마테오가 만든 예언자상 등으로 장식되어 잇다. 이 문은 7년에 1번 씩 7월25일의 성 야고보 축제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성스러운 해’의 그 날이 아니면 결코 열리지 않는다.


    대성당 옆에 있는 오성 호텔(성당을 바라봤을 때 좌측)에서 무료로 순례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호텔 가운데 하나로 처음에 순례자를 위한 호텔로 시작한 전통을 기억하고자 하루 세 번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7시에 선착순 10사람에 한하여 직원급 식사를 준다. 최소한 30분 전에 호텔 주차장에 줄을 서야 10명 안에 들 수 있다. 순례자를 증명하는 크레덴시알 복사본이 필요하고, 기다리는 장소는 호텔이 아니라 호텔 옆에 피니스테레로 가는 내리막 길에 있는 주차장이다. 호텔 안 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주방 밑에 있는 순례자 식사 전용룸에서 먹는다.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내리고 있던 빗물인지, 눈물인지 뜨거운 무언가가 온 몸에 흘렀다. 그 길을 함께 걸어온 까미노 동기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젖고 있는 광장에 주저앉은 순례자도 보이고, 회랑에 기대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례자도 보였다. 모두들 거기 머물렀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세상에서 제일 큰 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높이 솟은 쌍둥이 종탑 오른쪽에는 이슬람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아온 종이 달려 있다.

    스페인 역사에서 산티아고의 의미는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 국토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스페인에게 마침 발견된 야고보의 유골이 국가와 문화와 정신을 되찾는 기수가 되었었다.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성지로 선포된 뒤, 야고보의 무덤에 예배당이 지어졌고, 초라했던 교회는 15세기에 지붕을, 16세기엔 회랑을, 종탑은 17세기에 증, 개축하면서 1128년에 화려한 대성당으로 완공되었다.

    성당 정면 꼭대기에 사도 야고보의 형상이 있고, 한 단 아래 좌우에는 야고보의 제자 테오도로와 아타나시오의 형상이 서 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이 혼합된 부속건물, 궁전과 수도원이 대성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넓은 광장에 선 내 귓가에 ‘이번 순례의 목적지는 이곳, 산티아고가 아니라 바로 ’너‘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성당 안에 마련된 게스트 룸에서 걷는 동안 틈틈이 도장을 찍었던 크레덴시알을 보여주고 완보증을 받았다. 성당 오른편 건물 2층에 완보증을 발급해주는 순례자협회 사무실이 새해 첫날이라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병든 어머니를 위해 걷는다던 바찌가 완보증을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그의 지팡이에 달려있던 딸의 개구리 인형처럼 바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었다.


    스페인어로 진행된 미사는 장엄했다. 그 큰 성당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동행했던 신부님 세 분도 함께 집전하셨다. 성전에 울려퍼지는 그레고리안 성가. 언어는 달랐지만 믿음은 하나라는 것. 미사를 보는 내내 마음이 벅찼다.

    미사 중에 보타 후메이로(향을 담은 향로를 천정에 매달아 성당의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제사 의식)는 없었다. 누군가 봉헌을 해야만 행해지는 의식이었는데 그날은 봉헌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미사가 끝나자, 성당 안에 있는 유럽 예술의 걸작들을 둘러보았다. 제단장식 위에 있는 야고보의 흉상을 껴안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입을 맞추는 사람, 이마를 세 번 부딪히는 사람, 무릎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제단장식 아래에 있는 야고보의 무덤을 경배한 뒤 ‘영광의 문’을 통해 성당에서 빠져나왔다.



    대서양 땅 끝 마을, 피니스테레 Co Finisterre로 향했다. 산티아고에서 86키로 떨어진 곳.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멀미를 했다. 구불거리는 해안 길이어서였는지, 모처럼 버스를 타서였는지는 모르겠다. 피니스테레까지 걷는 사람들도 있다. 묵시아 Muxia길이 중간 중간 벌목상태이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좋지 않다고들 했다. 가는 도중에는 알베르게도 없어서 하루에 35Km를 걸어야만 한다.

    들녘에 가축들의 먹이가 될 어린 도토리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목초지에서 나온 돌들을 쌓아서 다른 밭과의 경계를 구분해둔 것이 제주의 돌담과 비슷했다. 올해는 이상기후로 많이 내린 눈비가 스페인 중남부 농민들에겐 즐겁다고 했다. 농사 지을 물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0.00Km.

    나는 산티아고 데 까미노를 걸었다, 라는 문장에 대서양의 수평선이 길게 밑줄을 그었다. 피니스테레의 등대는 바닷길뿐만 아니라 멀리서 찾아오고 있는 우리의 길도 열어주었던 것 같다. 길을 걷는 동안 분명해진 나의 목적지, 나 자신과 내가 온전히 사랑해야할 사람들을 생각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감했고, 또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내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피니스테레의 등대 표지석에 적힌 0.00Km는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을 알렸다. 여기까지 온 마음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첫 마음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절벽 아래 바위 틈에는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있었다. 순례자들이 입고 왔던 낡은 옷이나 신발 혹은 지팡이와 같은 것을 태우는 작은 소각장이었다. 한쪽에는 아예 콘크리트로 소각장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곳에 입고 온 옷이나 신발, 나무 지팡이, 스팻츠 등 소지품들을 상징적으로 던져넣었다.

    타오르고 있는 불길 속에 던져진 그 것.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가져가고 싶지 않은 짐, 욕심을 하나씩 던지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 아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것 사이에 있는 아주 먼 거리를 나는 다시 걷게 될 것이다. 가족과 이웃에게 행복한 파장을 주는 사람이 되었음 좋겠다고 다짐했다. 산티아고 꼼포스텔라를 향해, 스페인의 북서쪽을 향해 걷는 동안 발끝에서 떠나지 않았던 내 삶의 그림자들과도 아름다운 동행을 하게 되었었다. 걷는 동안 몸으로 배운 것들이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아디오스, 까미노 데 산티아고!! 하늘과 땅 그리고 함께 걸어준 길이여. 폭설과 궂은비도 안녕. 노란 화살표여 고마웠다. 길에서 만났던 의자들을 내 안에 들여놓으마. 열려있는 문을 보며 행복했다. 멀리 가던 종소리도 잊지 않으련다. 사람 사는 골목들. 오른 만큼 내려가던 길들. 비었다 차오르던 달과 어둠이 깊어진 뒤 찾아온 새벽도 기억해두리라. 내게 모두 스승이었던 까미노 친구들. 삶의 목적지가 죽음이라던 무덤들. 모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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