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산티아고를 걷다_신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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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민(시인)





     

    여행의 힘!
    Travel은 고생이나 노동, 고통 등을 의미하는 ‘travail'과 같은 말이었다.

    여행은 곧 고생이었다. ‘즐기기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 즉 ‘Tourist'는 19세기 중반에 출현했다. 관광객은 19세기 초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견문을 넓히기 위해 3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던 영국의 젊은 귀족을 말하는, 여행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그 후, 어두운 공장과 질식할 것 만 같은 작업장, 음침한 임대 아파트 단지로부터 자연으로 나가고자 하는 절박한 요구를 가지고 살아가던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은 앞 다투어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휴가였던 것. 휴가는 허락받아 떠나는 여행이란 뜻이었다.

    노동자들에겐 무엇보다 시간이 짧았고, 비용을 아껴야 했던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괴테의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여행하지 않고 도착했다‘고 했다.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이내 생활로 돌아와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여행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짧은 시간, 자신의 쉼을 위해 달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고 돌아와 다시 일해야 하는 관광객이 세계의 길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여행은 평화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힘이다.- J.F 캐네디

     

    아기예수가 해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나도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예수 탄생의 길처럼 험준한 길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마을을 만나기 위해선 약 5Km 정도 더 걸어야 했다. 지친 몸은 한 시간이면 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 길인지 벌써 알고 있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가장 힘들다고 소문난 길. 1300미터의 높은 산을 또 하나 넘어야 하는 마지막 난관코스를 향해 걸었다. 흰 눈을 둘러쓴 웅장한 산맥이 며칠 째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2시간 마다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황량하지만 비옥하다는 갈리씨아 지방에 들어서자 넓은 초지에 방목하는 소떼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소처럼 황금빛 터럭을 가진 소들이었다. 마을의 골목길을 지날 때에는 종종 초지로 가는 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길을 비켜주어야만 했다. 큰 덩치의 소들이 까미노들에게 먼저 가라는 듯 길을 비켜주기도 했다. 소들의 큼지막한 눈에서 다랑 다랑 귀여운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중해의 태양이 키운 싱싱한 풀들이 한 겨울인데도 마치 봄이 온 듯 착각에 빠지게 했다. 눈 녹은 물은 개울마다 넘쳐흘렀다. 낮은 곳으로 길을 내며 가는 저 투명하고 시린 물,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졌다. 걸어오는 동안 몸에 베인 땀 냄새를 씻어주고, 지치고 묵은 마음마저 씻어주는 듯 했다.

    게다가 길가에 서있는 키가 훌쩍 큰 유칼립투스 나무들은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오감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 돋은 잎에게 자리를 내주고 떨어진 잎들, 그 위를 밟고 걷는데 그 때마다 발밑에서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올라왔다. 씨방이 벌어진 유칼립투스의 열매는 작은 골무모양처럼 생겼다. 그 열매의 단면에 파인 열 십 자 모양은 마치 별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하여 신기했다.

    열 알 정도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몸에서 향기가 나는 듯 했다. 나만의 갈리씨아 지방 기념품이었다.

    코알라가 즐겨 먹는다는 유칼립투스 나뭇잎에는 알콜 성분이 있다고 한다. 코알라가 식사를 마치면 잠자듯 곯아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스페인에 있는 유칼립투스 나무는 수종이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키 큰 나무들이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듯 했다. 아름다운 나무들의 환송에 마음이 술렁, 취하는 기분이었다. 멀어지는 나무를 뒤돌아보았을 때 ‘울뜨레아 !!(힘내)’ 라는 나무의 외침을 들은 듯도 하였다.

    어떤 인디언들은 나무를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이 길을 지나는 순례자들을 위해 오래도록 기도를 해주고 있다는 느낌으로 내내 흐뭇했다.

     

    갈리씨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오레오(HORREO)’라는 직사각형의 씨앗창고도 인상적이었다. 구름인 듯, 새의 날개인 듯한 지붕 장식이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처음엔 그 마을을 지키는 신당과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알아보니, 식량의 씨앗들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쥐나 곡식을 노리는 짐승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긴 다리를 가진 곡식창고였다. 처음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는데, 지금은 벽돌로 만들어진 것이 많았다. 벽돌 사이에 난 구멍을 통해 환기가 잘되도록 되어 있었다.

    한 농가에 들어가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농부에게 오레오의 내부를 볼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기꺼이 문을 열어주셨다. 바디 랭귀지를 짐작하시고 열어주신 것이다. 그 안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씨감자와 대추처럼 생긴 마른 열매들이 한 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동양인 순례자가 찾아와 이것 저것을 묻는 것을 보고 그 집의 아들인 듯 보이는 젊은 남자가 친절한 웃음과 함께 나와주었다. 그는 영어가 조금 가능해서 짧은 영어지만 얘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 집에는 삼대가 농사를 지으며 함께 살고 있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손녀 둘이 수줍은 얼굴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간식으로 챙겨간 연양갱을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주었다. ‘팥’ ‘red bean'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착한 품성이란 것이 그냥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란 걸 그 가족들을 보면서 알았다.

    따듯한 미소로 배웅해주는 농부가족을 뒤로 하고 그림인 듯 보이는 목가적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축사에서 따라오는 냄새도 견딜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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