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산티아고를 걷다_신정민
  • ▶ 추억과 기억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 신정민 산티아고를 걷다



                                                                                             
                                                                                            신정민(시인)

     



     추억과 기억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15년 전. 내몽골의 추웠던 긴 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한여름이었지만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진 허허벌판. 마두금을 켜는 악사와 가늘고 높은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던 처녀의 목소리. 타닥타닥, 잉걸불 튀어오르는 모닥불, 세상에 남은 한 줌 불빛에 모여앉아 별에 닿는 영혼들을 보았었다. 가져간 옷을 다 껴입고도 추워서 내가 나를 얼마나 껴안아주었는지.
    멀리서 온 사람에게 환영의 인사로 부어주던 독한 술은 70도쯤. 아주 작은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켜는 것이 환영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 했는데, 삼키기도 전에 입안에서 온몸으로 파고들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독과 추위를 달랠 수 있는 그들의 지혜로 따뜻해진 몸도 잠시. 추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게르에서의 첫밤도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뜬눈으로 맞이한 새벽. 지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해를 보려고 고집 센 말을 타고 젖은 들판을 달렸던 것도 어제 일처럼 다가온다.
    그 밤, 어두운 벌판 한가운데 도착하기까지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탔을까. 낡고 어두운 역사에서의 시간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등짐을 지고 서성이는 사람들. 젖먹이를 업고 울고 있던 젊은 여자의 눈물까지 나는 기억한다.
     ‘무얼 내다버리는 걸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우는 그녀/ 그녀의 눈물이 정차하는 역은 모두 기억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둥근 바퀴를 가진 그녀의 울음은/ 슬픔이라는 뜨거운 동력으로 달려 붉은 눈시울에 도착한다/ 볼 위에 흘러내리는 기적을 스윽/ 그녀가 닦아낸다 훔쳐낸다/ 울컥 울컥 도착한 그녀의 슬픔은 연착하지 않는다.’(졸시「눈물」)
     우린 모두 떠날 뿐이다. 돌아가는 것도 결국 떠나는 것.
    떠나라!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가 들었고, 떠남이 죽음을 의미했던 아주 먼 유목의 선조들이 들었던 말. 두려움 많은 나를 부추기는 저 보헤미안의 피가 내 안에도 흐르고 있었다.

      
    나의 안온한 집들. 아집, 고집, 트집. 그 집들로부터 떠나는 여행, travel은 고생이나 노동, 고통을 의미하는 ‘travail'’과 같은 말이었다. 떠나는 것, 여행은 곧 고생이었다. 즐기기 위해 여행을 하는 사람인 ‘tourist'는 19세기 중반에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 견문을 넓히기 위해 3년 동안 유럽을 유람하던 영국의 젊은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행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였던 것이다.
    그 후, 어두운 공장과 질식할 것만 같은 작업장, 음침한 임대 아파트 단지로부터 자연으로 나가고자 하는 절박한 요구를 가지고 살아갔던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이 앞다투어 떠난 여행. 하지만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휴가였다. 휴가는 허락받아 떠나는 여행이란 뜻이었다. 노동자들에겐 무엇보다 시간이 짧았고, 비용을 아껴야 했던 여행.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이내 생활로 돌아와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여행. 하지만 그 후로 짧은 시간, 자신의 쉼을 위해 달려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하고 돌아와 다시 일해야 하는 관광객이 세계의 길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족의 배려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나의 여행은 휴가에 가까웠지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며느리, 봉사자 아무개, 803호 아줌마, 그리고 시인이라는 버거운 이름까지 나의 많은 이름들은 늘 여행을, 휴가를 희망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던 내게 여행은,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나의 유일한 사치, 여행은 기다림과 불편함과 외로움을 내게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러주었다. 돈과 시간과 건강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산티아고!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역인 생장 피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으로 가는 800Km 정도의 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다고 들었다. 자신이 꾸린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달 이상 걸어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라고 들었다.
    말로만 들었지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평화신문 ‘한켠에 실린 ‘산티아고 순례 동행자 모집’ 광고를 본 것이다. 보는 순간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알렸다.
    다녀와서 알았지만 그때 남편의 사업은 힘들어서 접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단 걸 알면 내가 편히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 복학 준비하는 아들이 있었고 딸은 고3이었다. 고3 엄마가 한 달 넘게 여행을 가다니…….
    하지만 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족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해 여름, 부산에서 서울까지 15박 16일을 걸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 열악했지만 발에 물집 한 번 잡히지 않고 즐겁게 해내는 것을 지켜본 가족들이 기회를 준 것이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야무지게 하는 편은 못되었지만 즐겁게 하는 스타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생각만 하고 있기 보단 해 보는 스타일인 나를 인정해준 것이다. 가족들의 반응은 ‘다녀 오라’였다.
    가우디의 성가족성당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천주교에는 3대 성지순례의 길이 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로마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성묘로 가는 예루살렘 가는 길.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가는 길마다 상징물과 걷는 이를 지칭하는 이름이 있는데, 산티아고 길의 상징은 ‘조개껍질’이며 걷는 이들을 ‘순례자’라고 부른다.
    8세기 동안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스페인은 1492년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무렵 이슬람권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으나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내란이 일었었다. 가톨릭 국가가 이슬람권과 끊임없이 싸우는 동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교회의 황폐와 무신론의 팽배로 스페인은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 정신을 무장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산티아고 까지 걷게 한 것. 1948년에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이 길을 걸었고, 그 고통의 과정에서 얻은 정신으로 믿음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알려지게 된 산티아고 가는 길은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으로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교황 방문을 계기로 1987년 유럽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1993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길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성찰을 위해 종교와 상관없이, 혹은 단지 걷는 것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다.                     
    안식년을 맞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려던 한 신부님. 그 길을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 ‘함께’ 걸음으로써 공동체 영성을 도모해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산티아고 순례 동행 모집’ 광고를 냈다. 전국에서 22명이나 신청을 했다. 혼자, 라는 것 때문에 망설였을 사람들이 함께, 라는 계획 때문에 많이들 신청했던 것이다. 순례자가 많은 시기(4월에서 10월)를 피해야 했다. 비수기인 겨울을 택했는데 겨울에는 현지의 알베르게(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문을 닫는 곳이 많은데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움직이려면 숙소나 식사 문제를 해결해 줄 차량이 필요했다. 그 수송차량은 우리의 덩치 큰 겨울침낭을 실어주었고, 여정 중에 생긴 환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역할도 해주었다. 한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배낭을 꾸렸다. 모든 여행의 제 1원칙이 ‘배낭은 가벼워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내 삶을 배낭 하나에 넣을 수 있을 만큼 간결한가, 라는 질문도 그때 배웠다. 포기하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넣을까 뺄까 망설여지는 것은 모두 빼라고 했지만 나는 까미노의 배낭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만일’과 ‘염려’를 넣었다 뺐다 했다.

    구엘공원의 입구
    <구엘공원의 입구>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으로 짐을 꾸린 뒤, 다시 그 짐의 절반을 덜어내라고 한다. 체중 감량이 아닌 삶의 무게 감량 능력. 그것이 신나는 인생을 위한 무기라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25키로 배낭이 빵빵했다. 겨울옷과 침낭 때문에 부피가 컸다. 어깨에 메는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이걸 매고 하루에 9시간 가량을 걸어야 하다니. 걷는 동안 안경도 무거웠다는 한 순례자의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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