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주정이 잡설 _쪽지 비행기
  • ▶ 하늘하고 한잔하다

  • 하늘하고 한잔하다 



                                                                                                                       주정이(판화가)

     

    내가 잠자는 방은 머리 밭으로 큰 창문이 나 있습니다. 잠이 깨서 바깥을 보면 밤중인지 날이 샌지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근래 들어 잠을 자다가 중간에 깨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가위눌린다고는 할 수는 없겠고 그렇다고 딱히 집어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밤중에 잠을 깨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지난밤에도 잘 자다가 느닷없이 잠이 깨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평시에도 간간이 있는 일이지만 근래처럼 잦지는 안했는데 아무래도 나이 든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개 사람은 잠이 깨면 밤중인지 날이 샌지 눈길이 창밖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지난밤에 눈이 뜨였을 때 천정의 서까래가 또렷하게 보일 만큼 방안이 훤해서 창밖을 확인 할 것도 없이 날이 샜구나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긋났습니다. 방안 밝은 것이 날이 새 밝은 것이 아니라 창문으로 가득 들어온 달빛 때문이었습니다. 무릎걸이로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밝은 달빛이 밤하늘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어중간하게 잠이 깨면 도로 누워 봤자 허삽니다. 한번 깬 잠이 쉬이 오지는 않을 거고 멀쑥하게 않자 있느니 밤술이라도 한잔 할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다 일어난 부시시한 몰골로 부엌으로 가 소주 한 병에 잔 하나 그리고 오이 몇 토막 썰어 왔습니다. 자다 만 빈속에 술이 들어가 술기운이 오르자 내심 자다가 괜한 잠이 깨 탈났다며 난감해하던 마음이 어느새 사그라지고 눈부신 달빛에 홀려 하늘에 대고 술잔을 치켜들었습니다. ‘보소, 보소. 이 보소, 하늘 보소! 내 술 한잔 받으시오!

     

    내 집이 강화도든가? 내 방이 마니산이 되고 내 방 창문의 창턱이 첨성단이 되었습니다. 절도 산사람한테는 한 번이지만 귀신한테는 두 번이고 하늘에는 세 번 올리는 것이 법도에 맞습니다. 하늘에 술 석 잔을 올렸습니다. 하늘은 정성만 받아드리고 술은 한사코 물리쳤습니다. 달 밝은 날의 밤하늘은 마냥 어둡지만은 않고 검푸릅니다. 그 검푸른 하늘로 가득 채워진 석 잔의 퇴주잔은 부득이 내가 대신 다 비웠습니다.

     

    그러자 목구멍을 넘은 검푸른 하늘이 내시경처럼 내 몸속을 샅샅이 비추는 밝은 달빛 따라 물길 빠른 경호강처럼 흐르며 몸속 구석구석에 더덕더덕 눌어붙은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할켜내렸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곰지락거리고 있는 군생각들도 말끔하게 쓸어내렸습니다. 몸과 마음이 바람 없어 풍경도 죽은 삼정산 상무주처럼 고요하고 여름날 소낙비 내린 앞마당처럼 개운해졌습니다. 한밤의 하늘하고의 주석이 꾀나 소득이 있는 밤이었습니다.


    <주정이 목판화 '동밖이모', 30*30cm>


    오전 약속이 있었습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늦어졌습니다. 약속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약속시간에 늦은 변명으로 ‘지난밤에 하늘하고 한잔하는 바람에’ 라고 한다면 진짜로 몽유환자라고 할려나? 에이! 그래도 거짓말로 둘러대며 가슴 찔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찻집을 향해 오래된 천식으로 숨이 턱에 차는 고통도 아랑곳없이 냅다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ㅡ

     

    경호강 / 함양군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산청군 생초면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의 물길로 지류인 덕천강(德川江)을 합하여 진양호를 이루고 모래톱과 잔돌들이 퇴적돼 있어 유속이 빨라 한강 이남에서는 유일한 래프팅 장소이기도 합니다.

     

    상무주 / 전북 남원시 사래면과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도경계에 자리한 삼정산 상부에 있는 토굴 같은 암자로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무주란 인가도 인기척도 없다는 무주공산보다 더한 허공위의 허공을 뜻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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