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인문의학 오딧세이_강신익
  • ▶ <강신익의 인문의학 오딧세이>생명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 생명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꿈꾸는 과학자가 되자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지난 7월 초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이틀 동안 열린 다윈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출간 15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의 주제는 “다윈진화론과 인간-과학-철학”이었다. 10개 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 모임에서 4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주최 측에서도 놀랄 만큼 많은 청중이 참여했고 언론의 관심도 높았다. 특히 전문 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참여가 많았다.

    올해 출판계의 화두 역시 단연 다윈과 진화다. 전공자마저도 제때에 챙겨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진화라는 생명현상을 알기 쉽게 설명한 것에서부터 그것을 사회현상에 적용한 논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의 단행본이 나와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국내의 저자가 직접 쓴 것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다윈기념학술대회에 참여한 10개의 학회 중 생물학 관련 학회는 동물분류학회와 유전학회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과학 또는 의학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철학이나 역사를 연구하는 학회들이다. 외국 책의 번역자들 중에서도 정통으로 과학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진화 관련 담론을 주도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철학과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이며 그나마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 한국의 진화 담론은 생물학이 빠진 수입 담론인 셈이다. 앞으로 생물학은 진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도브잔스키의 경구가 무색하다.

    서양에서는 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생물학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대가들이라는 사실과 비교된다.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을 넘어 철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사회생물학』의 윌슨은 개미를 연구한 동물행동학자지만 생물학적 원리를 사회 전반에 적용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만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나름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풀 하우스』의 굴드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박학다식가다. 일상적 현상을 빌어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은 언제나 감탄을 자아낸다. 이런 생물학의 대가들이 상호간에 또는 인문학자들과 벌이는 열띤 논쟁에는 일반인들도 적극 참여한다.

    과학이 본래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고 우리 과학자들이 대부분의 과학논문을 영어로 작성해 외국 잡지에 발표하는 마당에 국내의 과학담론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의 과학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지난 몇 해 사이에 SCI 게재논문의 수가 엄청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은 대중과의 소통에 너무나 소극적이며 그 방면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거의 없다.

    과학을 하나의 문화로 바라볼 때 우리의 과학문화는 아직도 성과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SCI 논문의 수가 늘어난다고 과학 수준이 갑자기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휴일도 없이 쉬지 않고 일한다고 금방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되는 과학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으로서의 과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과학, 즐기는 과학이 되어야 의미 있는 성과도 나오고 인문학과의 접목도 가능해진다. 인문학자는 과학을 모르고 과학자는 인문학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자와 과학자가 아무 맥락도 없이 서로 상대방의 학문을 배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자기의 전공이 아닌 분야를 공부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소용없을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두 학문이 대중의 일상적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연구의 소재를 찾고 그것을 대중문화 속에 녹여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인문학과 과학은 자꾸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만 한다. 소통의 방식도 무척 일방적이다. 과학자 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되거나 검증되지도 않은 연구결과가 갑자기 대단한 성과인 것처럼 포장되어 보도되는 일도 많다. 그러다보니 줄기세포파동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과학계 내부와 대중과의 소통에서 모두 실패했으니 인문학과의 만남이 순조로울 리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과학자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지금 여기는 누구나 시간적・경제적 여유와 지적 호기심만 있으면 과학 연구에 매진하여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다윈 시대의 영국이 아니다. 연구비 지원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중과의 소통이나 인문학과의 만남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일은 조직적이고 장기적이며 일상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먼저 과학을 성과가 아닌 하나의 문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험실 벽에 노벨상이 목표라고 적어놓고 머리띠 동여매고 밤새워 일만 한다고 그 목표가 달성되지는 않는다. 생명체의 진화에 정해진 목표가 없는 것처럼 과학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지만은 않는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의 자서전을 읽으면 어떤 주제에 완전히 매혹되는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노벨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러기위해서는 과학을 일상 속으로 또는 일상을 과학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다윈의 나라 영국에서 본 자연사박물관들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수시로 전시물을 교환해도 가진 것을 다 보여주려면 몇 년이 걸린다는 방대한 규모도 놀라웠지만, 박물관 자체 기획으로 어린이들을 여러 가지 체험 행사에 참여시키는 모습은 부럽기 그지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박물관을 놀이터 삼아 놀기도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과학자의 꿈을 꾸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다.

    두 번째로는 ‘이야기가 있는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과학은 지금까지 가치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자신의 연구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민을 소홀히 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 이야기에는 과학자 자신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고 그 연구의 영향을 받을 사람이나 돈을 벌 사람, 그리고 그 지식으로 변화될 이 세상의 이야기도 포함된다. 이야기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이해관계의 충돌도 있다. 다툼도 있고 화해도 있다. 과학자 자신들이 바로 그런 이야기 속의 주인공임을 인정할 때 인문학과의 만남은 자연스런 귀결이 된다.

    셋째로는 대중을 상대로 과학 이야기를 하는 과학저술가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작가도 많이 나와야 한다. 카스텔과 시스몬도가 『과학은 예술이다』에서 지적한 것처럼 과학은 완벽한 논리를 바탕으로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는 비인간적 작업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창조적이며 일상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예술 작업에 가깝다. 과학적 사실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면서도 그 속에 들어있을 철학적 의미를 놓치지 않는 과학저술이 많아져야 한다.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미래를 꿈꾸는 몽상가도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 의식 속에서 문과와 이과의 장벽을 지워버려야 한다. 이 장벽이야말로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을 가로막는 뿌리 깊은 편견이다. 과학과 인문학이 각자 고유한 연구의 영역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고 상대방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이 만든 세상을 살면서 과학을 모를 수 없고, 과학자라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에 눈을 감을 수도 없다. 문과와 이과가 편의상 학문을 구분하는 이름일 수는 있어도 과학자와 인문학자 또는 어린 학생들의 일상까지 갈라놓는 벽이어서는 안 된다. 이 장벽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인문학자와 인문학을 전혀 모르는 과학자의 학문적 게으름을 정당화해 줄 뿐이다. 정말로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아이디어는 다양한 학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생각 속에서 싹틀 수 있다. 이 학문들은 상호배타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상호보완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예컨대 신경과학과 면역학, 그리고 진화생물학의 연구 성과들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 심리학, 철학, 인류학의 판도를 크게 바꾸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런 인문학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연구계획에 반영한다. 이렇게 되면 과학은 관성에 의해 흘러가기보다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어 창의적 연구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섯째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뉴턴의 물리학은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했다고 자만했지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세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전학의 중심가설은 모든 형질을 유전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고 인간유전체계획으로 모든 염기서열이 밝혀졌지만 우리가 생명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었다고 자신하는 과학자는 하나도 없다.

    최근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유행하면서 인간의 욕망과 심리상태마저도 자연선택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예컨대 자연 상태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선택될 수밖에 없고 현대인의 성 행동에도 그런 경향이 남아있다는 등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이 분야야말로 생명과학과 인문학이 직접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 선택된 형질이 그대로 도덕적인 것일 수는 없다. 자연법칙을 그대로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아니라 과학에 의한 인문학의 지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유행하는 사회생물학과 그 트레이드마크인 통섭(統攝)에는 이런 위험성이 교묘히 숨겨져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이 말을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으로 풀고 있다. 생물학이 모든 학문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무척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은 자연 법칙과 사회 규범의 만남이다. 이 둘은 서로 사귀어 오가거나 그 만남을 통해 사물에 널리 통하게 될 뿐 상대방을 다스리지 않는다. 이런 만남은 통섭(統攝)이 아닌 통섭(通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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