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인문의학 오딧세이_강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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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한 성공의 교훈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지만 동시에 그 세상을 크게 바꾸는 힘이기도 하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고 17세기에 뉴턴이 지구를 포함한 천체들의 운동을 수학적 공식으로 간결하게 설명했을 때의 세상은 이미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꾼 과학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찬란한 기계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형태와 기능이 다른 다양한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진화론의 주장 역시 세상을 바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담긴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증거에 의해 충분히 검증되고 적용범위가 확대되었는데도 그 진실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의사가 없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진화론은 아직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 사유 양식으로 진화하지는 못했고 그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도 못했다.

    진화의 핵심은 변이와 선택이다. 우연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암수가 결합하여 유전정보가  뒤섞임에 따라 형질이 다양해진다. 이것이 변이다. 우리들이 키가 크거나 작고, 얼굴 생김새가 넓적하거나 길쭉하며, 몸매가 삐쩍 말랐거나 뚱뚱하고, 명석하거나 멍청한 것은 모두 어머니인 자연이 변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형질을 가진 생명체가 살아가는 가운데 그 중 특정 형질을 타고난 개체가 자손을 낳을 확률이 높으면 그 형질은 후대에 널리 퍼진다.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그러다가 그 형질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조건을 만나면 또 다른 형질을 가진 후손이 많아진다. 진화는 환경과 생명체의 끊임없는 상호적응일 뿐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다. 생명체는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새로운 형질을 발현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 멸종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화석 증거에 따르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의 99.9%가 멸종되었다고 한다. 진화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일 뿐 어떤 섭리나 목적에 따라 정해진 방향을 갖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체의 생존에 불리한 형질이 극단적으로 발달하기도 한다. 공작새의 길고 화려한 꼬리는 포식자의 눈길을 끌뿐 아니라 거동을 느리게 하므로 결코 생존에 유리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런 형질을 진화시킨 것은 그것이 암컷을 유혹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려한 깃털을 잘라낸 수컷과 그렇지 않은 수컷을 섞어놓고 관찰했더니 화려한 깃털을 가진 수컷이 훨씬 더 많은 짝짓기를 하더라는 실험결과도 있다. 이렇게 생존이 아닌 짝짓기에 유리한 형질이 진화하는 것을 성 선택이라고 한다.

    좀 더 극단적인 예로 약 1만 1천 년 전에 멸종한 아일랜드엘크가 있다. 사슴의 일종인 이 동물은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들 중 가장 큰 뿔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조그마한 머리에 전체 길이가 3미터가 넘고 무게도 40킬로그램이 넘는 뿔이 매년 새로 자란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큰 뿔을 진화시킨 것은 역시 그것이 생식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도한 투자가 이 동물의 멸종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암사슴은 수사슴의 큰 뿔을 선호한다. 아마도 큰 뿔을 가진 사슴은 그 밖의 다른 형질도 우수했으므로 그런 선호가 진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큰 뿔은 풀이 많고 나무가 적은 초원에서는 암컷을 유혹하는 장식물인 동시에 경쟁자인 수컷을 쫓아내는 무기였지만 그 다음으로 찾아온 혹한기와 마지막 빙하가 물러간 이후 나타났던 울창한 삼림에서는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거추장스런 부속물이 되었을 것이다. 전 세대에서 진화된 약이 다음 세대에는 치명적 독이 된 것이다.

    한 신인 여배우의 죽음을 둘러싸고 나라가 시끄럽다. 진실은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가려져 오리무중이지만 사건의 핵심에는 돈과 권력을 미끼로 성공을 갈망하는 여린 삶을 유린한 파렴치한 남자들이 있다. 그들이 부풀린 돈과 권력은 아일랜드엘크의 거대한 뿔과도 같다. 하지만 그 사슴들은 바로 그 거대한 뿔 때문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성공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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