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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풍호의 기억과 풍경>응답이 없어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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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이 없어도 1

                                                                                  조 풍 호(시인)



    청춘이라는 뒷동네
    소도시의 버스정류장 버스표 판매대에서는 ‘까치 담배’를 팔고 있었지만 어묵 국물에 잔술을 팔던 포장마차는 사라진 것으로 기억되는 해가 1990년도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을 선언하던 해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대학 동아리 방에는 화염병으로 제조되기 전의 술병들이, 울분과 눈물과 함께 여전히 쌓여 갔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은 안성으로 가는 길에 있던 산자락에 터를 잡은 터여서 ‘안골’이라 부르던 곳의 농가들은 농사일을 버리고 학생들을 상대로 밥집이며 술집을 열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지요. 그렇게 학교 후문의 오솔길을 따라 집을 개조하거나 마당에 천막을 친 술집들은 ‘너랑 나랑’ ‘새암집’ ‘학사촌’ ‘동인’ ‘목우’ ‘한우리’ ‘암벽’ ‘스페이스’ 등의 간판을 달고 뒤뚱뒤뚱 걸어간 듯 매달려 있었습니다. 맥주는 1300이던 고급이어서 우리들은 400원 하던 막걸리에 1000원 하던 파전을 먹거나 다섯 마리에 1000원을 하던 쥐포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지요. 술에 흥이 돌면 선배가 시키는 순서로 노래를 불렀는데, 저는 늘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불렀습니다. 혼자 살 팔자에 대한 예지였을 테지요. ‘한우리’ 할머니네는 알밤 까기를 잘했던 프로레슬링 선수 여건부의 주먹만 한 영계로 만든 삼계탕이 유명했는데 3000원으로 만만치 않은 가격이어서 자주 먹을 순 없었지요. 예전엔 지방의 소도시 출신들이 부자가 되던 때가 집에서 생활비를 부쳐오는 날에서 한 주일 가량입니다. 경주에서 올라온 후배가 때로 낮부터 삼계탕에 소주를 시켜놓고 있을 때가 있다면 그 기간이지요. 미적대며 몇 점 얻어먹으려 궁상을 떨지 않아도 멀리서부터 손을 들어 부르는 때입니다. 선배들이 선배같이 호기를 부리는 때도 대게 그런 때인데 기간 역시 일주일 안팎으로 비슷하지요. 그래서 선배들의 공통된 별명은 ‘왕자와 거지’입니다. 합리적 ‘호모 컨슈머리쿠스’는 아니었어도 따스한 청춘들이었던 것이지요.
     
    농가의 자취방들은 날림으로 지어져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가스중독으로 목숨을 버린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청춘은 몸으로도 뜨거워서 사건도 잦았지요. 동네 청년이 밤에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일도 있었고 술 취한 남자 대학생이 집으로 돌아가던 여중생을 성폭행하려다 붙잡히기도 했지요. 한 여자 선배는 ‘괴성’이라고 불렸는데 소문일 뿐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선배 자취방을 지나갈 때면 하마 교성이라도 들려올까 아랫도리가 뻐근해진 채로 천천히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던 논두렁길을 걸어서 길이 구불거리며 흩어지던 마을 끝에는, 축사의 똥을 치워주면서 딸린 방에 곁들여 사는 선배도 있었습니다. ‘똥치는 아이’로 불렸던 그 선배의 집에서 냉수로 머릴 감던 친구가 머리가 깨어질 거 같다며 킥킥거리던 겨울, 곰팡이 냄새와 소똥 냄새가 배어있던 수건 냄새는 잊히지 않는 냄새 중의 하나이지요.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부터 냄비 뚜껑에 퉁퉁 불은 라면을 캑캑거리며 후루룩 거리던 선배와 함께 하던 시절. 자리끼도 없이 일어나 숙취를 해소해보려고 국물만 남은 짠지 그릇을 먼저 차지하려다 담요를 죄다 적셔놓고 난감해하던 후배도 눈에 선하지요. 취중잠결에 미니 옷장의 지퍼를 열고 보송보송 말려서 개켜놓은 겨울 이불에 실례를 했던 후배이기도 합니다.
     
     

                                                                                                           사진 김영일 <응답이 없어도>




    김국진의 휴대폰
     
    얼마 전 모교의 동문에게서 6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삐삐가 필수품이 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꼭 20년이 흐른 뒤지요. 그때의 ‘우리들’이 다시 뭉쳐 보자는 이야기가 제겐 왜 그렇게도 스산하게 느껴졌을까요? 이젠 가족, 나라, 인종은 고사하고 전통적 소속감의 대표 격이라 할 ‘공간’에 대한 소속감도 재구성되는 시대입니다. 대면관계의 ‘현존’보다 ‘가상 대화’에 열을 올리는 술집 공간의 떠들썩함은 그 예전 동아리방이나 자취방에서의 ‘숙의적 토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십여 년 전이었던가요? 산을 타다가 폐쇄된 채 방치되어있는 ‘씨디폰 기지국’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받는 것밖에 되지 않던 삐삐에겐 가시버시 같은 기기였지요. 걸 수만 있던 씨티폰. 개그맨 김국진이 길게 줄을 늘어선 공중전화부스 옆에서 쉽게 통화할 수 있는 기기라는 걸 자랑하던 광고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 씨티폰. 그러나 웬 일인지 씨티폰은 몇 년 못 가 사라졌습니다. ‘호모 모빌리언스’의 등장이지요. 음성으로 호출로만 달려갔을 때의 삐삐 시대엔 그래도 ‘기다림’은 있었습니다. 이젠 기다림도 없고 맥락도 없지요. ‘던바(Dunber)의 수’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50명을 넘기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도 진심을 떠나서이지요. 쇼셜미디어 속 ‘관계의 과부하’는 상상의 청중과 친구들을 섞어 버리죠. 60주년 기념 동문회에 제가 가지 않기로 한 이유입니다. 멀리서 ‘상상의 친구’로 남는 게 덜 쓸쓸할 것 같다는 뜻이지요. 술을 몰래 들여오기 위해 기숙사 이 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한 계절 내내 다리를 절룩거리던 친구가 있던 1990년. 본격적으로 세계화가 시작된 해이지요. 시장이 필요한 자본주의는 결국 교통과 ‘통신’을 괴물처럼 발달시키며 다른 세기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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