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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풍호의 기억과 풍경> 다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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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길

    조 풍 호 (시인)
     



    꽃길

     학교에는 봉투를 가져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잔디 씨나 꽃씨를 담아 갈 때도 있었고 주운 이삭을 담아 갈 때도 있었고 비닐에 완두콩만한 채변(採便)을 담아갈 때도 있었지요. 학교가 가까워지면 코스모스가 길 양 옆에서 하늘거렸습니다. 햇살이 함성을 지르는 날이면, 점점이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요. 우리들은 코스모스를 살살이꽃으로 불렀습니다. 강아지 이름 중에도 살살이가 있었고 아이들 별명에도 살살이가 있었는데, 아주 밉지 않게 약거나 아양을 떠는 축을 이르는 말이었으니 예쁜 이름이지요. 그래서 전 아직도 그 이름이 표준어로 정착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읍내 가는 길

    1! 일반시민 여러분. 2! 이것보세요. 3! 삼양라면을. 4! 사 잡수세요. 5! 오 분만 끓이면 됩니다. 6! 육 그램짜리 스프가 들어있습니다. 7! 칠칠맞게 끓이면 안 됩니다. 8! 팔팔 끓여야 합니다. 9! 구수하게 드세요. 10! 십 원짜리 동전 세 개면 됩니다.
     라디오 광고였는지 말재주꾼 승재 아재가 지어낸 것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은 노래입니다. 라면 가격으로 봐서 네 살 즈음에 들었던 노래인데 아직도 남아있지요. 일도 못한 김일성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삼팔선을 넘어서 사방을 보더니…로 바꿔 부르기도 했습니다. 산을 두 개 돌고 비야 비야 오지 말아라~ 역말다리 떠내려간다아~ 노래 부르며 시멘트 다리를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왔습니다. 엿을 고는 집이 있이 엿고개로 불렸던 곳이 읍내 쪽이었고 갱치라고 부르는 곳은 개울과 산으로 통하는 곳이었지요. 상급 학교 형님들은 농번기가 아닌 때에도 갱치 뒷덜미로 방향을 틀기 일쑤였습니다. 농번기 때에야 모종을 나르고 소꼴도 베어야 하고 하다못해 나무삭정이라도 지게에 져 와야 하는 것이지만…육성회비도 못 내는 가난한 처지에 공부는 해서 뭐하냐 싶은 심정도 있었겠지요. 결석을 했다고 두 시간 반 거리를 돌아 가정 방문을 할 교사는 없다는 것을 알 만큼 맹랑한 형들입니다. 성적 통지표는 어른들에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수우미양가 중에 양과 가 뿐이었지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입도 덜고, 돈도 벌기 위해 서울로 ‘내빼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형들입니다. 기실 지금 생각하면 빼어나고(秀) 넉넉하고(優) 아름답지는(美) 못했어도 가족을 위해서는 옳고 어질고(良) 그래서 집안을 일으킬 자신이 있어서(可) 희생을 감내하려던 형들이지요.

            
                                                              김영일 사진  <b와 d 사이>



    명덕산 거지

     읍내에 당도하기 전, 명덕산이라는 산이 놀기 좋았습니다. 명덕산엔 문둥이*가 있어 병을 고치려고 아이를 잡으면 간을 빼먹는데, 사내아이는 생간을 빼서 참기름에 찍어 먹고 계집아이 간은 들기름에 들들 볶아 먹는다고 무서워하던 곳이었지요. 그 산엔 ‘명덕산 그지’라고 부르던 거렁뱅이 늙은이가 살았습니다. 거지도 문둥이와 경찰 면사무소 직원 등과 같이 무서운 존재였지만 명덕산 거지는 만만했습니다. “왜정 때 면장을 지낸 양반인데,  몰래 독립군들을 도와주다 들켜서 왜놈 순사들헌티 몇 날을 맞고 넋을 놓고 저리 되었느니라.” 이야기보가 따로 있는 것 같던 이야기 할머니가 사연을 들려주기도 했지요. 신발을 벗어 던져서 신발이 엎어지면 “오늘은 내가 굶는 날이구나아~” 하고 바로 떨어지면 밥을 빌러 마을로 내려가던, 신발에 밥그릇이라는 주술을 걸던 거지입니다. 돌 던지며 놀리는 아이들 틈에서 돌을 던지면서도 까닭 없이 슬퍼지면서 미안해지던 거지이지요.
     
    * 한센병 환자를 낮잡아 이르던 말 


    길 위의 식구들

     금용이 형 등굣길을 정한이가 지나가고 정례와 정교 남매가 지나간 하굣길을 막내 깐돌이가 지나가고 줄줄이 연년생인 까마귀네 형제들이 지나갔지요. 이젠 등굣길을 형제가 손을 잡고 가는 일은 없습니다. 일본말로 벤또로 부르던 양은 도시락이 달그락거리던 책보를 메고 가는 형들도 없고 산수책 표지처럼 멜빵 반바지에 일본 군대식 가방인 란도셀을 메고 가던 새침한 양조장 자매도 없지요. 그래서 이젠 지난 세기가 된 70년대,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산아제한운동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것이지요.
     ‘탈가족화’는 단순히 산업화나 양성 평등 의식 때문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가족으로부터의 이탈, 가족 범위·규모의 축소, 가족 형성의 유보 등 탈가족화 형태는 가족의 기능적 과부하에 수반된 과도한 개인적·사회적 위험에 대한 회피 노력으로 분석되기도 하지요. ‘위험 회피(risk aversion)’라는 말. 가족을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것이니, 참 서늘한 말이지요. 그래서 10월의 마지막 날 교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어린 여학생의 신발주머니가, 명랑하게 아주 명랑하게 흔들릴수록 애잔해지는 것이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행복하게 감수했던, 이제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70년대의 대부분의 시골 젊은이들이 아련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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