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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풍호의 기억과 풍경>자장면도, 짜장면도 있던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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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면도, 짜장면도 있던 날들



                                                                                                  조풍호(시인)


                                                        김영일 사진  <돌아보다>


      자장면이 500원에서 600원을 넘어갈 때쯤이 80년대 초반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청요릿집에서 짱게라 불렀던 배달부 일을 했지요. 배달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자전거로 했습니다. 랩이라는 것이 없어 짬봉 국물을 쏟지 않고 배달하는 것이 기술이었죠. 신기하게도 몇 달이 지나면, 철가방을 아무렇게나 들고 다녀도 국물을 쏟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단무지 남은 걸 다시 물로 씻어 올려놓아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주인 눈치 보면서 먹지만, 예전엔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단무지나 양파를 내 놓으면 큰 일 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칼을 직각으로 세워들고 단무지를 썰어 45도로 종지에 눕혀 놓는 것이었지요.


     매상기록장에 ‘노점상’이라고 적었던 단골 아저씨가 가장 잊히지 않는 손님입니다. 주공아파트 단지 내 땡볕 아래서 ‘달고나’라고도 했고 ‘뽑기’라고도 불렀던 군것질거리를 팔던 아저씨였는데, 거의 매일을 자장면 곱빼기만 시켰죠. ‘맛자랑 멋자랑’이 아니라 배만 부르면 버티던 시절. 세탁소에서 양복을 빌려 입고 선보러 나온 노총각 이야기가 저절로 떠오르게 하던 사내입니다. 자장면으로 미리 배를 채워 데이트 비용을 아끼려고 청요릿집에 들렀다가, 옷을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옷을 내려다보다 면발이 굴러 떨어지면서, 더 큰 돈을 세탁소 주인에게 물려주었다는 슬픈 사내 이야기이지요. 노총각이었을, 왠지 지금도 노총각으로 늙었을 것 같은 아저씨들 이야기입니다.

     

    수타면 만드는 걸 어깨 넘어 슬쩍 슬쩍 눈에 익혀두긴 했지만 제대로 배우진 못했습니다. 몰래 연습을 하다 들켜서 면발을 도마에 치듯이 두들겨 맞은 기억때문이지요. 기술자의 위엄은 한창 노동자들이 모여들던 신발공장에도 있어서 고주파 기사였던 오복이 형은 작은 오랑우탄처럼 털로 뒤덮인 못난이였지만 시급이 시다의 3-4배도 넘었습니다. 주식회사 ‘성화’는 전량 수출만 하던 공장입니다. 나염을 놓고 고주파를 찍고 실밥을 뜯고 마무리 공정으로 철야를 수두룩하게 하면서도 그 멋진 신발은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조장이나 반장이나 계장들은 간혹 명절 날 몇 켤레씩 숨겨나가는 모양이었지만 시다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지요. 공장 안에는 라이터나 성냥을 반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화장실에 스위치를 올리면 달구어지는 열선에 불을 붙여 뻐끔 담배를 피워야 했지요. 쉬는 시간엔 담배 연기로 작업 시간엔 원단에서 날리는 먼지로 목은 텁텁해서 술이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포장마차 어묵 국물, 잔술 한 잔에 집에 오자마자 곤한 잠으로 나가떨어지곤 했지요.


     어느 날, 배달한 빈 그릇을 거두러 나간 것 까지는 좋았는데, 막걸리 한 잔 취기 때문이었는지 언덕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지요. 편하게 내려오진 못했습니다. 브레이크 핸들이 튕기면서 언덕을 내달려 차도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 때문에 자전거만 죽고 저는 살아남았지요. 그 어느 날처럼 세월이 튕겨진 것 같은 날들입니다. 가장 고급 신발을 가장 값싼 신발을 신고 만들던 사람들과 함께 하던 시절이-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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