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장편소설 관계_ 조풍호
  • ▶ <장편소설>관계(15) _조풍호
  • 장편소설 연재 14

     

                                  관   계

     

                                                                                          조 풍 호

     

     

     

    경주가 남편을 만나던 날을 만들어서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드라마 대본

     

    스무 살에 쓰는 그림일기

     

    나오는 사람들

     

    김평화(20. 학생. 라벤더 향기가 날 것 같은 외모. 눈빛)

    정경주(20. 학생. 등꽃, 꼭 등꽃 같은 눈빛. 수선화 같은 손, 수선화 이파리 같은 손가락, 너무 예쁨)

     

    #1. 하늘

    많이 맑지만 구름 몇 점. 구름 하얗고 작다. 어린이 엉덩이만할 것.

     

    #2 옥탑방(, 아침)

    일어나요 서방님. 좋게 말할 때 일어나요. ! ! ! 알람소리. 손으로 더듬어 시계의 알람 버튼을 누르는 평화. 쾌쾌한 느낌의 방 전경.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마치 퍼붓듯.

     

    #3 아파트()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리나.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있다. 급하게

     

    #4 2번 장소의 욕실 세면대

    푸아 푸아 소리를 내며 세수를 하고 있는 평화. 역시 급하게

     

    #5 리나의 방

    화장대에 앉는 리나. 시간에 쫓기는 듯.

     

    #6 다시 평화의 옥탑방

    거울 속의 평화. 뽀드득 소리 날 것 같은 말간 얼굴. 스킨 덜어서 양 손바닥으로 얼굴에 탁탁 바르는 모습. 시간에 쫓기는 듯.

     

    #7 3번 아파트(외경)

    바쁘게 걸어 나오는 리나, 들고 있던 책-전공 서적 같은-을 떨어뜨린다.

     

    #8 버스 정류장

    떨어진 책들을 황급히 주워 들고 버스에 오르는 평화-책은 같은 종류로-

    막 떠나려는 버스로 달려와 문을 두드려 버스에 겨우 오르는 리나. 리나가 평화의 손잡이 잡은 손을 실수로 잡는다. 리나의 가늘고 예쁜 손 클로즈업시키고 나서 죄송하다고 꾸벅 인사하는 리나 얼굴 잠시.

     

    #9 만원 버스 속의 리나, 평화. 흔들리며 사람들에게 밀려 버스의 창문에 교대로 뺨을 부딪치며 짓눌려지는 두 사람. 약간 코믹하게.

     

    #10 강의식 복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며 뛰어 들어오는 평화, 뒤따라 뛰어오고 있는 리나. 둘 다 헐레벌떡.

     

    #11 강의실()

    뒷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빠끔히 들어서는 평화. 뒤따라 들어서는 리나. 칠판에 쓰인 논리학 개강 다음 주 화요일로 한 주 딜레이커다란 글씨. 낭패감에 젖어 동시에 한숨 쉬는 두 사람. 그제야 서로를 의식한 듯 마주보며 멋쩍게 웃는 두 사람. (dissolve)

    ( 칠판의 글씨를 보기 전까지 경쾌한 음악 ‘happy happy shack' 적당한 시점에 시작해서 마무리)

     

    #12 카페(외경)

    그댈 처음 만난 그때라고 쓰인 네온사인

     

    니가 작가회의 회원이라 써 있길래 거기 전화해서 연락처 알았다 아이가. 니 서울 올라가고 나서 처음이니까 벌써 십오 년이 넘었네.

     

    , 자슥아. 작가라는 눔이 기억력이 그리 형편 없어가 우짤래? 니 나하고 초등학교 말고도 중학교 2학년 때까지도 같은 반 아니었나. 니 고등학교 그만두고 여사여사하다가 검정고시 졸업장 따고 대학에 붙었다고 내 집에 와서 하룻밤 자고 안 갔나? 솔담배 떨어져서 우리 집 근방 골목길에 버린 장초 찾는다고 돌아 댕기다, 여자 우째볼라꼬 하는 놈 만나가, 니 거기서 지금 뭐하는데 새끼야, 그러니까 그 자슥이 죽기 싫으면 꺼지라, 하면서 칼 디밀어가 우리 둘 다 바로 하이방 놨다 아이가. 난 그때 그 여자한테 가끔 미안타. 우째 됐을까 생각하면. , 근데 와 다시 부산에 내려와 사노?

     

    다른 놈들? 몰라, 쭈욱 보던 놈은 몇 놈 안 된다. , 아직도 시골에선 씨족 마을이 있다카지만 벌써부텀 부산은 직할시 아니었나. 육이오 땐 피란민들 몰려오면서 길어지고 칠십 년대엔 공장 때문에 콩나물시루처럼 만들어진 도신데, 주소지에 그대로 있는 아들이 몇 명이나 되겠노. 졸업장 뒤에 주소지에 남아 있는 애들은 손꼽는다. 아닐 말로 태어난 병원도 사라지는 마당에 뭐. 암튼 아까 말한 상진이 갸가 시 의회 의원되고 하면서 동문회장 맡고 나선 일일이 알아보고 연락해서 작년부텀 그래도 쪼매 모인다 아이가. 니는 동문회 광고 나는 신문도 안 보나? 신문.

    경주? 그래, 누군지 알겠다. 얼굴 갸름하고그 아가 동문회에 딱 한 번 나왔었다. 육학 년 때야, 여자가 먼저 크는 아들도 안 있드나? , 키 작진 않던데 육학 년 때처럼 누부로 보일 만큼 크진 않더라. 그때 크고 만 거겠지. 그때 내가 고무줄 많이 자르고. 경주 등 때리고 도망도 많이 했제. 가스나들하고만 얘기하느라 바쁘길래 내가 잔 들고 자리에 안 갔나? 결혼했냐? 그랬더니 좋은 사람하고 잘 산다카데.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갔는지 안 보이더라. 근데하긴 니야 모르겠구나.

     

    손이 아주 예뻤던 경주를 경탁이도 만난 적이 있었다. 시내 대형학원에서 부산일보에 내던 재수생 모집 광고에 경탁이의 사진이 실린 적이 있었다. 그 광고를 보고 경주가 먼저 연락을 했었다. 경주는 경탁에게도 남편과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경탁이는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다워 옛날식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기억했다. 경주는 구겨가지고 숨겨 온 거 같은 졸업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자신을 찾아보라고 했다. 졸업 사진은 피사체 거리가 멀어서 얼굴도 있는 둥 마는 둥 해서 경탁이는 경주의 손을 알아볼 수 없었다. 경주는 맨 뒷줄에 키가 크고 추리닝을 입고 있는 자신을 가리켰고 경주는 스스로도 자신인지 모르게 먼 아이 하나를 경탁이 이게 너 아이가. 짚어 주었다. 니가 전교에서 일 등은 안 놓쳤다 아이가. 그러다 5월말 고사인가에서 전교 2등으로 떨어졌다고 한, 반시간은 울더라. , 나 같은 애들은 통지표에 노력 요함. 미미미양가 어쩌다 우 체육이나 수였는데, 니는 다 수수수수수수였다. 그래 나는 저 노마가 큰 놈 될 놈인갑다 그랬다. 니 눈은 작아도 초롱초롱해서 참 영특해보였는데. 경주는 작지 않은 키에 눈이 동그래서 나이치곤 예뻤으나 눈길이 자주 흔들렸고 만나자 마자부터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탁이는 여자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경주는 무언가 결심했으나 무너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경주는 술을 마시려다 말았다. 경주의 악수는 일부러 그러는 듯 짧았다. 경탁이도 그때는 옛날을 거기에 두고 싶어서 경주의 손으로 눈길을 던지지 않았었다. 경탁이는 기범이와 헤어지면서 경주의 사랑 이야기를 앞부분 조금을 제외하곤 뒷부분을 전부 지워버리기로 했다.

     

    대마초라카믄 그냥 우황청심환 택이다아이가. 그지만 뽕은 정말 뽕이다. 들리는 말로는 경주 그 아 서방이 뽕쟁인데다가 의처증이라카데. 영실이한테 와서 지 서방 죽여줄 사람 소개해 주면 돈 주겠다 카면서 울드라더라. 경주 손등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있더라안카나. 누군 누꼬. 그 새끼가 한 짓이겠제. 영실이 서울 가고 나선 나도 그 다음은 모린다.

     

     

     

    옥순이가 식당에 손님으로 와서 함께 살게 된, 보육원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고아처럼 쓸쓸해보이던 새 남편을 처음 만나던 날을 기억하는 방식-일일연속극 대본

     

    For King's

     

    #135 신문사()

    기사를 정리하던 사진부 기자에게 청소부 아주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온다. 손짓을 하며 계단으로 마악 사라지는 남자를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 전한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 칸막이 너머 채환에게로 가는 기자. 채환, 여기자가 전한 꽃을 들고 창문 쪽으로 간다. 멀리 개미 같이 보이는 민수. 꽃 사이 라벤더 향기가 날 것 같은 메모지. 메모지 내용 인서트-오늘 13,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꽃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으며 창가로 다시 시선을 돌리는 채환. 개미 민수는 없다.

     

    #136 **분수대()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들고 나오는 민수. 시계를 들여다본다. 비둘기들 날아다니고, 모이도 쪼고. 주말이라 제법 붐비는 광장. 여기저기 연인들 스케치. 민수가 빵 봉지를 뜯어 빵 조각을 조금 던지자 비둘기 눈치 보지도 않고 뒤뚱뒤뚱 걸어와 빵조각을 쫀다. 우유를 먼저 마시고 입을 아 벌려서 한 입에 구겨 넣는 민수. 바로 앞에 깔끔한 정장차림의 채환이 빙그레 서 있다. 빵을 입에 문 채, 무안해 하는 민수. 쩔쩔맨다.

     

    채환(예의 그 웃음을 잃지 않고):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빵을 다 쑤셔 넣듯이 먹고 캑캑 거리는 민수.

     

    민수(기침을 멈추기 위해 가슴을 두드리며): , 안녕하세요? , 책이지요. .

     

    #137 분수대 옆 주차장

    민수의 찌그러진 차를 향해서 걸어오는 두 사람. 민수 채환에게 무슨 말인가 좀 반경이 큰 손짓 섞어 떠들며 오다가.

     

    민수(차 키를 돌리며): 제가 채환씨에게 보여주려고 봐 둔 곳이 있어요.

    다른 앵글로 희미하게 웃으며 차에 오르는 채환.

     

    #138 교외

    경쾌하게 달리는 민수의 차. 속력을 낸다. 민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채환이 속도계를 보고 민수에게 속력을 줄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몸짓, 손짓. 달리고 있는 민수의 차 위로 태양. 민수의 외치는 말이 하늘로 오른다.

     

    민수: 괜찮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달려서 바람이라도 되야죠. 좋아요?

     

    #139 국도

     

    가로수가 양쪽으로 그늘을 만들고 있는 국도. 추수가 끝난 들판. 살짝 기운 햇살. 민수의 차가 털털거리며 오다가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민수. 자동차 보닛을 열어 본다. 걱정되는 눈빛으로 차창으로 고갤 내밀고 보는 채환.

     

    채환: 갈 수 있겠어요?

    민수(보닛에 고갤 처박은 채): , 갈 수 있습니다.

     

    차에 오르는 민수

     

    민수(시동을 다시 걸어보며): 차가 워낙 고물이라서요. 정이 들어 바꿀 수도 없고.

     

    다른 앵글로 출발하려는 민수의 차 측면. 얼마 가지 못해서 퍽 소리와 함께 보닛에서 오르는 연기.

     

    민수(핸들을 주먹으로 치며): 제기랄.

     

    차에서 내린다. 뒤따라 내리는 채환. 완전히 고장이 난 차 앞부분을 보며 민수 낭패감.

     

    민수(차를 발로 차며): 얘가 오늘따라 속을 썩이냐. (채환을 보며) 안 되겠어요. 카브레터가 나갔어요. 허구한 날 병원에 다니더니, 오늘은 응급실에 가기도 전에 숨을 거두는 군요.

     

    #140 그 국도(오후)

     

    차를 밀어 한쪽으로 옮겨 놓은 두 사람.

     

    #141 언덕(늦은 오후)

     

    해가 많이 기울었다. 노을을 받으며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언덕 밑에 고장 난 민수 차.

    민수(담배를 붙이며): 미안합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채환(언덕 아래 들판을 바라보며): 괜찮아요. 오랜만에 풀냄새도 맡아보고싫지 않은데요.

    노을에 반짝이는 억새풀들. 바람에 휘감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채환 야릇한 감정에 싸인 표정. 민수 풀밭에 손깍지를 끼고 털썩 드러눕는다.

     

    #142 그 언덕()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람.

     

    민수(웃옷을 벗어 채환의 몸에 걸쳐주며): 춥죠?

    채환: 견딜만해요.

     

    민수 불을 쏘삭이면 날아가는 불티. 불티 너머로 어두운 비전

     

    비전1

    보육원 전경. 아이들이 놀고 있다. 어린 시절의 민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구석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다.

     

    민수(E): 우리 집은 아주 컸지요. 형제들도 많았어요.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이 외로움처럼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죠.

     

    비전2

    화면으로 떨어지는 흙. 신부의 추도사. 기도 웅얼거림처럼. 무덤에 빙 둘러선 사람 속에 민수 보인다. 옆에 민수가 들고 있는 영정 사진보단 젊은 중년의 남자 울고 있다.

     

    민수(E):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다른 아버지가 이젠 내가 너희들 아빠다 그러셨지요.

     

    그 언덕

    웃옷을 여미며 얘기를 듣고 있는 채환의 얼굴 위로 얼룽거리는 노란 불빛.

     

     

    정우가 수강한 교양 과목

     

    강의 계획서

     

    과목: 문화 인류학 개론

    (Introduction to Cultural Anthropology)

    시간: 5-7 교시, 2304

    담당: 김용욱(02-358-8780)

     

    강의 요지

     

    인류학의 범주는 매우 넓고 그 관심사 또한 무척 다양하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간 집단을 그 연구 대상으로 하는 만큼, 이 과목을 통해서 인류가, 인류의 출현 이후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동안 적응생존을 가능케 한 문화적 수단의 독특함과 다양성에 대해 고찰하고, 이로써 자기사고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는 틀에 박힌시각으로부터 열린 시각인 인류학적사고로의 전환을 꾀하고자 한다.

     

    교재

     

    주교재:

    1. 권이구 역, 현대문화인류학, 탐구당, 1981.

     

    부교재:

    2. 한상복, 이문웅, 김광억 편저, 문화인류학 개론, 서울대 출판사, 1985.

    3. 전경수 역, 현대문화인류학, 현음사, 1985.

     

    참고문헌:

    4. 강신표 역, 나의 인류학 자서전: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종로서적, 1981.

    5. 문화의 유형, 종로서적, 1981.

    6. 조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1), 또 하나의 문화, 1982.

     

    기타: 필요에 따라 시청각 자료를 이용할 것임.

     

    강의 평가

    중간고사40%, 기말고사60%

     

    강의 내용 및 진도표

    0108-24 인류학이란 무엇인가? (1) 1, (2)1

    0208-31 인류학적 시각 및 인류학의 발달 (1) 1, (2)2, (6)

    0309-07 인류학의 제 분야 (1) 2, (2) 2

    0409-14 문화의 개념 및 속성 (1) 4, (2) 3, (5)

    0509-21 문화와 언어 (1) 5, 6, (2) 12

    0609-28 문화와 인성(Personality) (2) 11(4)

    0710-05 문화와 종교 (1) 8, (2) 10

    0810-12 중간고사

    0910-19 결혼과 가족 (1) 10, (2) 5

    1010-26 친족 (1) 9, (2) 6

    1111-02 사회조직 (1) 10, (2) 7

    1211-09 문화와 환경 (1) 11, (2)14

    1311-16 경제체계 (1) 13, (2) 8

    1411-23 문화변동 (1) 12, 13, (2) 15

    1511-30 현대사회와 인류학 (3) 5(copy)

    1612-07 기말고사

     

     

     

     

    민정이

    이혼에도 순서가 있었다. 마지막은 이혼의사확인서 등본을 서류를 교부받은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관청에 신고하는 것이었다. 신고와 신고로 끝나는 혼인으로 이룬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은 군번과 학번은 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3학년 446번 중학교 2학년 때 기억이 20년이 지나도 안 떠나? 46번 짝지 이름도, 신세민이. 주민등록번호를 잊어버리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남편은 군 시절 얘기를 딱 한 번 했다. 대학생은 빨갱이 물이 들어서 색깔을 빼야 된다고, 좀 힘들었지. 민정이는 대학 때 녹화 사업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민정이는 거기다 학력을 고깝게 보는 고참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겨우 떠올렸다. 열등감은 존재하지 않는 y축에 자기 자신의 막대그래프를 낮게 그리는 것이었다. 민정이가 보기엔 아버지에게도 그런 그래프가 있었다. 민정이는 열등감이라는 그래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폭력의 세기가 느껴져, 그 얘기를 듣던 날 남편에게 몸을 주었다. 춘추 시대나 전국 시대 때는 덕망이 높은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로 백성들은 옮겨갈 수 있었다고 했다. 국경이 두루뭉술해서 나라가 있는 듯 없는 강산에 엎드려 있던 백성들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갔을까? 산미테 할머니의 어떤 이야기에도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식의 결말은 없었다. 영웅들은 승리했을 뿐이었고 춘향이는 풀려났을 뿐이었다. 민정이는 대전으로 이사 와서 새로 사귄 동무의 집에 갔을 때가 잊히지 않았다. 소년 소녀 동화 전집에 실린 글들의 대부분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났다. 민정이는 엄마가 가끔 환하게 웃던 것을 기억하지만 엄마가 오래오래 웃던 것이 기억나지 않았다. 행복은 환하게 웃지 않아도 입 꼬리가 살짝 움직이는 곳에서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민정이는 엄마의 미간에 세로 두 줄이 생겨나는 것이 더 잦아 숨겨놓은 행복을 엄마가 누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뭐여. 매일매일 계속 행복해서 실실 웃고만 댕기믄 그기 미친년이지, 정상이여. 민정이가 뇌까리는 소리에 동무는 무슨 일이여? 눈이 똥그래졌었다. 산미테 할머니는 슬프다 대신 서글프다고 했고 기쁘다 대신 흥겹다고 했다. 풍경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담는 것이라는 말을 해서 민정이는 이 빠꼼한 눈에 저 산천을 어떻게 담는 것인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사랑은 꽃바구니에 담긴 꽃과 같아서 오래잖아 시들어서 남녀는 애인이 되면 못 쓰고 정은 들고 쌓이는 것이므로 남녀는 정인情人이 되어야 올바르다고 했다. 조광조라는 어른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는디, 궁궐의 잡인들을 시키서 나무 이파리에 어른의 성인 조 씨를 파짜를 혀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떠억 하니 적고 그 우에 꿀을 발랐더니라. 조 씨가 왕이 된다 이런 글이 이파리에 새겨진 것이니 그기 진실이었다믄 상서로운 기운이겠으나 꾸며낸 것이니 사기邪氣가 그 으른 집안에 그득했지. 할무니는 우트케 그 많은 이야기를 알구 있는 거예유? 근디, 꿀은 나비나 벌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벌레들은 이파리의 맥을 따라 식량으로 삼는 거라서 그건 그짓말이 분명허다고 그러드라. 숭악한 웃사람이 궁녀들을 시켜서 바늘루 이름 대루 구멍을 뚫었을 거라구. 민정이가 물었을 때, 산미테 할머니는 본가에 있을 때 유랑하다 깃든 머슴 아재를 조금 얘기하다 말았다. 그때 할머니의 눈이 방 바깥의 먼산바라기를 할 때처럼 천장 쪽을 향했고 침묵했다. 재산관계 소멸. 소멸이란 말은 자꾸 꽃바구니에서 일어나는 꽃들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구나, 사랑은. 민정이는 혼인 초에 휘어잡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을 적용할 수 없었다. 결혼한 지 두 달이 지나면서, 평소엔 멀쩡하던 남편은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처음으로 손찌검을 한 다음 날. 장문의 각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팔뚝 위로 복사를 하였다. 금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은 말 그대로 삼가거나 억제하는 것이지 자르고 결별하는 뜻이 아니었다. 풀 수 있는 것을 끊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담배도 끊었다고 하는 말을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금연 역시 언제든 다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이어서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담배를 삼가다 갔다라고 한다가 옳은 말이라고 했다. 민정이 남편은 몇 달을 잠잠하다 다시 가구들을 부서뜨렸다. 민정이는 술이 죄려니 하던 생각들을 바꾸고 있었다. -몸은 몸으로 갸륵하고 존엄하니라. 할머니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도 민정이에겐 손찌검보다 더 손찌검 같은 것이 욕설이었다. 내가 왜 그지 같은 년이여. 니가 날 그지루 맹글어 놓구 왜 욕을 혀! 민정이 엄마는 아버지의 지게 작대기를 뺏어서 휘두르며 울음 섞어 외쳤었다. 이 년이 이젠 환장을 혀다 혀다 미쳐버렸구나. 웬 일인지 불같은 성미의 아버지는 엄마가 휘두르는 지게 작대기에 등짝을 맞고도, 지게 작대기를 던져 놓고 주저앉아 우는 엄마를 멀거니 보다가 마루에 걸터앉았을 뿐이었다. 민정이는 엄마가 아버지에게 지게 작대기를 휘두를 때, 엄마가 다시 아버지에게 지게 작대기를 뺏기고 아버지의 그 우악스런 손이 휘두르는 힘에 엄마가 단매로 죽을 거 같았었다. 미안했을까? 아버지는 신문지에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하늘 쪽으로 뿜었었다. 네 엄마가 친정에 있을 때, 할아부지 손에 한학을 배우고 혀서 천상 현모양처였는디, 까막눈인 니 아부지하구 부대끼믄서 저리 억척이루 변한 거여. 동네 사람들은 엄마를 두고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었다.

     

    살림들을 나누고 이사 준비를 하면서 민정이는 시골에서 돼지를 잡던 때를 떠올렸다. 대야의 흥건한 피를 쏟을 때는 암마야! 눈을 감았지만 돼지의 털을 긁어내고 배를 가르고 내장과 몸통과 머리와 다리들이 나누어지는 것은 온전히 보았었다. 돼지의 몸이 해체되듯이 살림살이들이 나누어지는 환영에 민정이는 남편에게 -내가 이사하는 날엔 당신은 집에 있지 말아요, 라고 말했다. 법원의 건물은 너무 웅장했다. 가정법원 이혼판결을 받으러 온 남녀들은 팔짱을 지르고 외면한 채로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래전에 저 팔들은 각각 그들의 아내나 남편의 팔에 둘러져 있었을 것이었다. 대기실의 고요는 다른 어느 곳에서의 고요와도 달랐는데, 민정이는 그것이 눈이 무서워진 여인네들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고 나중에 떠올렸다. 소곤소곤 얘기하는 부부들도 있었는데, 헤어지는 마당에 다시 다정해지는 것인가? 민정이는 알아지지 않았다. 민정이 대학 친구 중엔 헤어지고 나서도 헤어진 남자와 잠자리를 가끔 갖는 친구가 있었다. 몰라, 그냥 버릇이 된 거지 뭐. 친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었다. 잠자리는 걔가 더 편해. 사랑은 헤어지고 나서 시작되는 것인가? 민정이는 예전 대학 때 민정이를 좋아했던 남자의 잉크자국 번진 편지가 불현듯 떠올랐다. 사랑은 함께 할 땐 잘 모르는 것이죠. 지금 민정 씨처럼 싱그러울 때는 더 더욱이요.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민정 씬 아름답죠. 그러니 지금은 아름다운 청춘을, 저보다 더 멋진 사람과 함께 하세요. 그렇게 살다가, 세월이 지나 늙고 병들어서, 이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그땐 제가 가장 예쁘게 사랑할게요. 이승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부부가 되어 주세요. 제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요. -오십 년 전쯤의 청혼

     

    좌청룡 우백호는 가랑이를 벌린 여인네라고 했고 명당이라고 하는 안산 밑은 여자의 음부라고 했다. 물길은 명당을 감싸듯 안고 흘러 땅이 기름지다고 했다. 페미니스트인 거 같았던 국문과 여교수는 여자를 땅으로 분류한 음양오행론자들을 공격했었다. 민정이는 여자가 땅인 것이 더 맞다고 느꼈다. 여인은 몸으로 받아낸 씨앗을 담아서 키울 수 있었다. 민정이는 남편이 정기를 밖으로만 보낸 것이 결말을 짐작해서였나?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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