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장편소설 관계_ 조풍호
  • ▶ <장편소설> 관계(14)_조풍호

  • 장편소설 연재 14




                                              관       계 

     
                                                                                     조  풍  호




    20년 전, 경탁의의 리포트

    황혼의 스타, 혹은 스타의 황혼
                    -영화 ‘선셋 대로’를 보고

    감독: 빌리 와일러
    주연: 월리엄 홀든
          글로리아 스완슨

                                영화가 끝나면 배우는 다시 배우가 되고 극중 인물은
                                극중 인물로 남는다. 그러나, 그 동일성으로부터 조화
                                로운 창조물이 태어난다. 이것이 곧 스타다.
                                                 -Allen Robert . Gomory Douglas

    줄거리
     헐리우드 선셋 가에 있는 황량한 저택의 풀장에서 각본 작가 존 크리스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플래시백의 영상과 그의 해설을 통해 그려 나간다. 밀린 월부금 때문에 빚쟁이에게 쫓기던 크리스는 선셋 가에 있는 한 저택(1920년대, 영화인들이 무대로 사용하던)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그 저택에는 무성영화 시대 대스타 노마 레스몬드와 과거에 대감독이며 그녀의 남편이었던 집사 막스가 살고 있다. 크리스는 노마가 은막에의 복귀를 노리며 쓴 ‘살로메’의 각본을 다시 써 줄 것을 부탁받고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된다. 노마는 차츰 크리스의 젊은 육체에 반하게 되지만 화려한 시절의 환상에 사로잡힌 노마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크리스는 저택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노마의 자살소동으로 둘은 동거에 들어가고 이윽고 각본이 완성되어 옛날의 친구인 세실 테미 감독에게 보여 주러 노마와 크리스는 촬영소로 간다. 그러나 테미 감독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각본이 아니라 그녀의 오래된 자동차였다. 막스도 크리스도 노마에게는 이것을 비밀로 한다. 이제는 늙어버린 육체에 대한 노마의 광적인 노력, 그즈음 크리스는 마침내 막스의 팬레터와 형편없는 각본과 과거의 환상에 빠져 있는 노마의 실체룰 폭로한다. 환상이 깨져 버린 노마는 크리스를 살해하게 되고 미쳐 버린 노마는 체포되면서 대스타가 된 것 같은 포즈를 취한다.

    스타체계
     미디어 텍스트 내에서 존재하는 스타는 그 미디어 속성상 다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튜디오 시스템의 산업적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던 스타 체계는 상품에 붙여지는 브랜드로서의 기능이 더 큰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그 시기의 집단 무의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스타는 그 사회의 어떤 필요성, 충동, 불안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타는 대중에 의해서 창조되면서 동시에 대중을 창조한다. 브랜드의 교체 간격은 넓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품들은 관객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대중의 집단 무의식 혹은 새로운 조건에 의해 선택 되어지는 선매품임이 분명하다.

    황혼의 스타
     무성 영화 시대를 통해서 스타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스타는 신화 속의 신들로 만들어졌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그것은 스타들이 대사 없이 이미지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 증폭되었다. 그러나 토키영화는 ‘치밀하게 계획된’ 그들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소리는 놀랍게도 영화를 사실적으로 만들었고 대사를 메우기 위한 무성영화 스타들의 과장된 제스처를 형편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서서히 버려지고 있었다. 영화제작자는 담보가 가능한 새 상품을 찾았고 ‘대사는 필요 없고’ ‘얼굴만 있었던’ 무성영화 배우들은 복합적인 새로운 우상성과 대중의 신화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스타의 황혼
     빌리 와일더는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선셋 대로’의 주역에서 물러나고 월리엄 홀던으로 교체되면서 각본을 수정한다. 극중의 인물과 유사한 무성영화의 대인기 여배우 스완슨과, 마찬가지로 대감독, 연기자였던 슈트로 하임을 배역으로 정한다.  주요 배경은 지금은 초라해진 대저택, 환상과 신화의 탄생지였던 저택은 그대로 무성영화 스타들의 개인사의 상징이다. 이 영화는 스타덤의 신화를 역으로 반추한다. 죽은 사람에 의해서 깔리는 독백의 뉘앙스. 종종 인생의 밑바닥에서 부에 도달하는 모티브가 낡고 오래된 저택, 물이 차여있지 않은 풀장의 시체에서 쉽게 배제된다. 히스테리적이고 광적인 여주인공 노마(스완슨)는 그녀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그녀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악한 것을 쫒아낼’ 힘이 없다. 스완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견습 생활을 지겹도록 거쳤고 아무것도 아닌 무명의 시절을 겪을 만큼 겪었다. 스타가 되면 철두철미하게 스타 노릇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영화사의 수위부터 행정 간부까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정한이 딸 한월이
      요기 이렇게 물결치듯이 물이끼 자국이 선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쟈? 응, 왜 와부지? 응 이게 뭘 의미하느냐하믄 작년 여름에 폭우가 쏟아졌을 때 물이 요까지 불어났었다는 걸 의미하는 거여. 그러니께 우리 한월이는 어디 계곡 같은 데로 학교에서 야영갈 일 생기믄 텐트를 물이끼 선 바깥에다 치거라, 알았쟈? 야, 아부지. 또 한 가지! 한티 놀러간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믄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혀도 덥석 물에 뛰어드는 게 아니여. 그게 아부지여두유? 오냐, 그게 아부지여두. 대신 구해주고 싶은 맘은 굴뚝같을 거 아니여. 그람, 옷가지를 벗어 서로를 연결혀서 던져주거라. 잘 날라가지 않을 지 모르니께 끝에다 작은 자갈을 달아서. 또 너무 큰 돌을 달아 던져서 물에 빠진 사람 맞춰 죽이지 말고. 야, 잘 알겠어유. 정한이는 화양계곡 관리실에서 안전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한이는 놀이꾼들 구듭치는 직업일망정 사람들의 목숨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정한이는 물결처럼만 돌아다녀 물결로만 보이는 옛날 계곡의 버들치나 쉬리처럼만 살고 싶었다. 이젠 쌍곡도, 화양도 물고기들이 살기엔 조금씩 더러워지고 있었다. 늦은 장가는 심청이를 인당수에서 건져내듯 이루어졌다. 여자들은 열 명씩 들어와 섰다. 노래방 도우미들을 빠꾸시키고, 고르듯이 정한이는 여인들을 줄여나갔다. 브로커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만 정한이는 여인네들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정한이는 노모의 성화를 더 이상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산미테 할머니는 심청이가 아버지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절통한 삶이 눈을 뜨게 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대추나무 연 걸리듯 결혼업체 브로커는 거느린 사람들이 많았다. 정한이는 자신이 심청이가 된 거 같은 착각에 빠졌다가 고갤 흔들었다. 장가는 든다고 했고 시집은 간다고 했다. 들고 나는 것에 사랑이 있을 턱이 없었는데도 정은 만들어지듯 하는 것인지, 노모는 생전의 아버지와 금슬이 깊었다. 베트남 여인들 중엔 심청이의 심사를 지닌 이도 있을 것인가? 정한이는 텃골 마님이 콧숨 엷은 노인네의 방으로 들어가 눕는 마님의 첫날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정한이는 가져간 돈이 이국땅에서 헐어지기 전에 읍내 다방의 오봉순이를 고르듯 골라야 할 것이었다. 베트남 여자들 중엔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달아나는 여인들이 있다고 했다. 정글보다 더 험악한 한국의 도시로 흘러들어 돈을 모아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정한이에게는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혼례를 두 번 올렸고 나이가 같은 장모와도 사진을 박았다. 딸 같은 여인에게서 자식을 바라는 것이 옳은지 정한이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한월이 엄마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한월이 엄마는 중학교 선생이었다. 통역은 한월이 엄마의 말을 다 옮기지 않았고 자신의 말도 다 옮기지 않는 것 같았다. 정한이는 한월이 엄마에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잘 해준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읎소.

     근데 아부지! 학교에서 애들이 날 외국인이라구 놀리구, 워리워리 개새끼 불르듯이 불러서 놀려유. 지는 지 이름 한월이가 좋은디. 그라구 우리 엄마는 외국인이 아니라 주민등록증에두 우리나라 사람으루 나와 있다 해두 안 믿어유. 엄마는 그냥 아부지 아내구 내 어머니구 그런 건디. 그려두 엄마 태어나신 나라는 프랑스두 무찌르고 중국군두 무찌르구 미군까정 무찔러서 장한 나라라는디. 그럼 우리나라처럼 독립심 강하구 의협심 강한 나라루 쌍벽을 이루는 좋은 나란디. 그라구 지들보다 내가 이 강산을 더 쏘대니구 해서 더 잘 알아서, 물잠자리 빛깔이 물빛이구, 벌거숭이 고추잠자리 빛깔이 발가숭이 애들 빛이구, 꽃잎에 앉는 나비들은 다들 꽃잎이구, 황새 둥지 튼 나무 밑 새똥냄새가 을매나 지독한지까지 다 아는디, 지가 우트케 외국인이 될 수 있어유. 지는 지 이름 지어주신 뜻대로 한국에서두 일등되구 월남에서두 일등으루 알려지는 여자가 될 거구먼유.


     동기
     
    어!
    어!

     여자들이라면 두 손을 마주잡고 펄쩍 펄쩍 뛰면서 야, 지지배 진짜 몰라보겠다, 어쩌구 오두방정이라도 떨었겠지만 머스마들의 오랜만의 만남은 들고 있던 가방이나 갈마쥐고 악수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이의 가깝고 멂을 악수를 쥐는 손의 악력으로나 알까? -영민이는 경수와 제오전술공수비행단 군대 동기였다. 경수는 고향인 김해에서 군복무를 했다. 경수가 입대하던 해부턴가 방위병은 근무 기간이 6개월 늘어나면서 단기사병으로 불리고 있었다. 단기사병들은 유머의 대상이었다.“‘애지중지 키운 딸 하나 방위사위 웬 말이냐!’ 너 이런 말 안 들어봤냐?” 라거나 도시락 폭탄을 들고 다니는 특수부대라며 친구들이 놀리면 단기사병들은 그래에, 특수부대 맞아. ‘UDT(우리 동네 특공대)’니 ‘KGB(코리아 지역 방위)’니 하는 영어 이니셜로 응수했다. 단기사병들의 훈련은 4주였다. 야, 다른 훈련소에서는 모다 에무십육을 지급한다카는데, 엠완이 뭐꼬,  엠완이. 이거 봐라. 제작년도가 오십삼 년이다, 오십삼 년. 내 기가 막혀. 우리나라가 지금도 6.25전쟁 중이란 말이가. 훈련소는 김해 비행장과 잇닿아 있었고 나중에 배치될 자대 내에 있었다. 근처 활주로에는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 새떼와의 충돌사고를 막기 위해 설치한 무인 폭음기 소리와 샷건 소리 같은 소리들이 때때로 번갈아 울렸다.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과앙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여. 산뽕우리에 해가 뜨으고 해가아 지일 적에…. 훈련을 일주일 남겨 놓고 훈련병들은 트럭에 태워져 부대 근처의 골프장으로 차출되어 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클럽하우스는 캐디 말고는 일반사병들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다. 훈련병들은 트럭에 실려서 티그라운드를 제외한 골프장 이곳저곳에 짐짝처럼 내려졌다. 훈련병들은 갈퀴로 검불을 긁어서 쌓아 두었다 거두러 오는 트럭에 싣기도 했고 다른 트럭이 실어온 잔디의 떼를 할당된 만큼 그린에 새로 입히기도 했다. 나이스 샷! 멀리서 여자 캐디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훈련병들은 일을 하다가도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야 했다. 아, 씨발. 누구는 가시나 끼고 골프 치고 누구는 뺑이치며 일하다가 포복이나 하고 이게 뭐꼬? 우찌된 게 총알을 피하라고 받은 훈련을 골프공을 피할라꼬 써먹노. 지랄하지 마라, 저 골프공에 맞으믄 머리에 빵구난다 안하드나. 골프장은 오른쪽으로 굽어지며 벙커라 부르는 모래웅덩이나 물웅덩이들을 새알처럼 품고서 길고 짧은 잔디들이 뻗어갔다. 경수는 골프장의 능선을 보면서 놀이기구를 타는 착각이 들었다. 골프장은 넓었기 때문에 훈련소에선 작업병들을 감독하는 일반사병을 클럽하우스에서 차출해 한 명씩 붙여주었다. 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쫄따구냐. 내가 육 개월을 넘게 후임병을 굶었는기라. 여거를 니들 뭐라 부르는지 모르제? 여기를 도살장이라 하는 기라, 도살장. 점심 배식 때 말고는 아무도 안 온다 아이가. 이 넓은 골프장에 니들 중 하나 죽었다고 사람들이 알겠냐? 하우스 일병은 훈련병들에게 원산폭격을 시키고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시키면서 집 개 다루듯이 장난을 치다가 을러대었다. 이것들 군기 빠진 것 봐라. 빳다를 몇 대 맞고 시작해야지 안되겠구만. 하우스 일병은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훈련병들을 괴롭혔다. 왕이 행차 나가신다아. 훈련병들은 하우스 일병을 목말태워서 나무를 한 바퀴 돌아주기도 했다. 야, 넌 귀엽게 생겼네, 넌 이리 와서 내 첩지를 받고 일 열외! 일병은 공상볼기 치듯 영민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대었다. 훈련소로 돌아오면서 영민이가 말했다. 우리가 귀신도 모르게 죽는 곳이라서 도살장이면 하우스 이 새끼가 죽어도 모르는 곳 아이가. 내일은 그 노마가 또 지랄하면 내가 신호를 줄 테니까, 니들 다 내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된대이. 금방 영민이 말 못 들었나. 원산폭격 하라잖아, 실시! 알았제? 다음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 실제로 영민이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처음엔 머뭇대던 훈련병들도 용기를 내서 하우스 일병을 에워쌌다. 하우스 일병은 어, 이 새끼들 봐라. 니들 이거 하극상인 거 모르나? 뻗대다가 영민이가 삽자루를 거꾸로 쥐자 쪼그라들듯이 무너졌다. 다음 날부터 하우스 일병은 훈련병 감독 지원을 나오지 않았다. 경수 조에 있던 훈련병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식수로 세수를 하면서 약을 올리는 놈이 어디 있노.

     훈련소의 퇴소 하루 전 10시 취침 점호 뒤에도, 훈련병들은 마음이 설레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열두 시에 연병장 집합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군장은 훈련복이나 속옷을 일체 걸치지 말고 군용우의만 걸친 채 집총 상태로 하는 집합이었다. 총이 없는데 말입니다. 총은 이런 거 아무 거나 주워 와서 총이라고 우긴다, 실시! 훈련 조교는 나무젓가락을 들어보여 주었다.  비켜. 우로 찔러. 우로 돌며 위로 막고 차고 찔러. 좌 베어. 우 베어. 좌하 제치고 때려. 길게 찌르고 돌려 쳐. 경수는 잔인한 육박전 훈련을 이렇게 킥킥 거리면서 해도 되는지 무안했다. 아이들은 주워 온 나뭇가지들로 총검술 동작을 성의 없이 하다가 구령에 따라 멈추었다. 그동안 훈련을 받느라 고생 많았다. 훈련이 국방을 튼튼히 하는 단기사병으로 거듭나게…  자, 지금부터 반동 간에 군가 한다. 대신 오늘 반동은 정반동과 다르니까 시범에 주목해라. 조교는 훈련병 하나를 연단에 오르게 해서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반동은 군용우의 단추를 풀고 양 깃을 양 손으로 각기 따로 잡고 펼쳤다 닫는 것이었다. 훈련병들의 맨살은 10월 초의 밤바람에 소름이 조금 돋았고 자지는 덜렁거렸다. 흐흐흐, 이게 멀리서 보면 우의가 박쥐 날개 같아서 ‘황금박쥐 놀이’라 칸단다, 아까 조교가 그러드라. 니덜 오늘 추억 만들어줄라꼬 집합시키는 거라고. 경수는 훈련병 때를 생각하면 겨자 최루탄이 터져 있던 화생방실이 떠올랐고 전쟁이란 이렇게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눈물로 가득 차는 것인가, 생각했다. 경수는 명함을 들여다보다 무녀리처럼 꾀죄죄하던 영민이를 만날 일이 없을 거 같아 명함을 버렸다. 경수는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연락을 취하고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동창과의 대화는 한 시간의 추억담으로 바닥이 났다. 경수는 생계 수단이 달라진 동창에게서 타인의 냄새를 느꼈다. 경수는 생각했다. 미안하다. 추억쪼가리로 만나기에는 내가 좀 바쁘다. 휴대폰에는 은정이의 문자가 와 있었다. “자기 어디야?”

     

    경길이
     구십 년대로 넘어오면서 군용담배는 한산도에서 은하수로 바뀌었다가 솔로 바뀌었다. 한산도는 200원짜리 청자보단 독하지 않았지만 텁텁했고 은하수는 장미보다 부드러웠지만 밍밍했다. 여자들에게 장미 담배가 최고라면 솔은 담배의 왕이어서 고소했다. 지원대는 말 그대로 부대의 병사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부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원대는 취사실과 세탁소, 이발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발소는 다시 사병 이발소와 하사관 이발소, 장교 이발소, 참모 이발소로 나뉘었다. 사병 이발소에선 현역 이발병과 문관 한 명 그리고 단기사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하사관 이발소에는 이발을 담당하는 문관 두 명, 나이가 오십 줄에 든 여자 면도사 한 명이 있었고 장교 이발소에는 하 문관이라고 부르던 말더듬이 이발 문관과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면도사가 있었다. 참모 이발소는 여자 공알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아서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었던 문관과 서른쯤 된 면도사가 있었다. 단장은 거의 매일 이발소에 들렀는데, 면도사는 단장을 엎드리게 해 놓고 어깨를 무릎으로 짓누르기도 했고 단장 얼굴을 스팀으로 데운 수건으로 덮어 놓기도 했다. 경길이는 문득 문득 단장님은 수건 속에서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해 했다. 세발에도 기술이 있다 아이가. 일단 손톱을 세워서 요렇게 이렇게 시원하게 해야 하고 마무리는 뽀드득. 고참 이 상병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감아 돌리는 시늉을 하였다. 난로 위 물통에서 데워진 물은 찬물과 섞어서 손잡이 달린 바가지로 뿌렸다. 신 문관은 바리캉으로 뒷머리를 먼저 밀어 올리고 옆머리를 밀어올린 뒤, 빠른 가위질로 다듬었다. 경길이는 귀얄 붓이 짧아지면 이럴까? 생각하며 머리를 감겼다. 하사관 이발소는 하루에 오륙십 명의 하사관들이 쿠폰을 내고 머릴 깎고 갔다. 경길이는 군복 대신 흰 가운을 입고 있어 하사관들에게 거수경례도 손날을 삐딱하게 구부려 건성으로 했다. 김 하사님, 필숑. 경길이는 단장의 머리를 감겨보지 못했다. 단장은 참모 이발소 면도사가 직접 머리를 감겼다.

     하사관 이발소와 장교 이발소와 참모 이발소는 입구를 달리 했지만 한 건물에 있었다. 군대의 건물들은 녹색 페인트만 칠하면 다 건물이 된 듯 지어져 있어서 시멘트 벽돌 냄새가 났다. 이발소 건물 옆에는 장교들이 식사를 하는 장교회관이 있었다. 장교 회관에선 가끔 이름을 알 수 없는 연회 같은 것이 열렸는데, 한여름에 회관으로 독수리 모양의 얼음 조각상이 배달되어 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에어컨이 흔하지 않았는데, 장교회관은 에어컨이 돌았다. 회관은 늠름한 독수리상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시끌벅적거렸다. 연회가 끝나고 저녁 무렵, 회관의 식당 아주머니가 돈가스와 불고기 등 남은 음식을 이발소로 가져다주었다. 경길이는 수라간 궁녀들을 떠올리다 말았다. 세탁소에선 다림질 기술이라도 배우고 사병 이발소에선 이발 기술이라도 배우고 취사병은 하다못해 삽질로 근육이라도 만들 수 있었다. 경길이는 군대에서 젊음을 썩히기만 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 세발을 배워서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써 먹노? 머리 감겨 주는데 이천 원인데예. 함 하실랍니까? 이러고 다닐 수도 읎고. 

     
    경길이 아들 중영이
     중영이는 군대에 와서 가장 의문스러웠던 것이 부대 밖을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중영이 입장에선 그 ‘사회’라는 곳에서는 학교만 다녀서 정작 처음으로 겪는‘사회’는 군대가 처음이었는데, 왜 군대는 사회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알아지지 않았다. 학교나 군대나 같은 부분이 있긴 했다. 갇혀 있었고 규율이 엄했고 규율을 어기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소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끝낸 성인들이 득시글거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학교와는 다른 ‘사회’임이 분명했다.

     영창은 간수가 지켜보는 중앙 감시실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빙 둘러서 있었다. 수감실은 간수를 보호하는 성곽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형 경기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평지 성곽의 해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간수의 텔레비전 화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간수는 영창의 죄수들을 감시하기 위해 앉아 있으면서도 눈을 마주치는 것을 하극상으로 취급했다. 이동하겠습니다. 바닥은 아파트 계단의 끝에 있는 계단의 미끄럼방지용 놋쇠를 가늘게 자른 것처럼 금이 그어져 있어 직각보행의 기준이 되었다. 실상 군대에서는 직각이 될 수 없는 모포와 베개가 직각이 되어야 했고 행동도 직각이 되어야 했다. 사회에서는 둥글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누차 들어왔는데, 군대에서는 왜 직각을 요구하는지 직각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질이 군대를 일사분란하게 하는 것인지, 중영이는 다가오지 않았다. 군대에서의 하루는 직각으로만 꺾여 있어서 일어날 때와 근무할 때와 식사할 때마다 중영이는 직각의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일어나겠습니다. 앉겠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은 복창 뒤에 시작되었다. 중영이는 자신의 몸의 근육과 관절로 움직이면서도 자신의 몸의 관절마다 간수가 실을 달아준 것 같았다. 영창의 햇볕은, 높고 작은 쪽창으로 잠시 배추흰나비가 날아오다 날아가듯 왔다 갔다. 아니, 어떨 땐 밖-그러니까 그 ‘사회’라는 곳에서 쏘아대는 영사기의 흰 빛이 영사막에 닿지 못해서 이야기도 들려주지 못하고 달아나는 것과 같아서 그곳의 영사기 속에 담겨 있을 필름의 내용이 궁금했다. 중영이는 여자의 마음이 어떻게 연인의 남자 친구의 마음에 닿고, 어떻게 고백해도 되게 하는 지점을 느끼게 하는지 알아지지 않았다. 중영이의 여자 친구는 시시였다. 여자 친구와, 동기 중 가장 친한 놈은 면회를 자주 함께 왔다. 중영이는 그들이 서울에서 철원까지 오는 길에서의 대화를 몰랐고 가는 길의 몸짓이 알아지지 않았다. 아유, 우리 희원이 철중이가 모셔오신 통닭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중영이가 너무나 보고 싶던 둘과 반갑게 인사하고 둘보다 더 반가운 통닭에게도 인사하던 대기실에선 ‘사회’의 필름은 이미 부대 정문 입구 헌병대 앞에서 끊어진 채였다. 중영이는 고등학교 때, 클럽에서 만난 군인들과 시비가 붙어 군화에 가슴을 맞은 적이 있었다. 군화발자국은 피멍으로 가슴에 남았다. 군화는 찔림 방지용으로 스텐철판을 박았다. 마모 방지용 무늬는 넓어서 가슴에는 군화자국이 오랫동안 굴욕의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중영이는 한때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자와 한때는 자신의 친구였던 남자에게 그런 자국 말고는 다른 자국을 남기지 못한다는 것에 절망했다. 중영이의 가슴 한편에는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철심 발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영창에서는 독서 시간이 있었다. 어떤 정치가는 교도소에서 영어를 독파했다고 했다. 중영이는 군대가 왜 ‘사회’와 구분되는지 영창에 들어와서야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일종의 복화술 인형 같았다. 인형들이 감히 사람들의 ‘사회’를 구성하진 못할 것이었다. 중영이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서를 독파하기로 마음먹었다. 성서 속의 이천 년 전 사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예수라는 젊은이의 말들로 가득했다. 중영이는 여자들이 만드는 원수와 성서 속의 원수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중영이는 키 낮은 칸막이 화장실에 앉아서 똥을 누려고 힘을 쓰다가 불현듯 떠올렸다. 중학교 이 학년, 좋아한다고 말했던 여자의 남자 친구에게 공원에 끌려가 맞아서 갈비뼈에 금이 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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