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장편소설 관계_ 조풍호
  • ▶ <장편소설> 관계(8)_조풍호

  • 장편소설 연재 (8)

                                        관   계 


                                                           조 풍 호
      


    아버지

    참매미의 울음은 푸석해서 장마의 흔적을 들어내기에 좋았다. 얼마 안 있어 쓰르라미가 이슬을 불러와서 곡식을 익게 할 것이었다. 성조는 햇살 쨍한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 나와 송방의 미닫이문을 밀었다. 학교 앞 송방의 미닫이문의 드르륵 소리는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보다 더 진저리치게 했다. 달달한 과자와 젤리와 서부소년 차돌이나 황금박쥐가 그려진 딱지가 없다면 성조에겐 들어오고 싶지 않은 곳 일 순위였다. 진열대 위에는 먼지에 쌓인 과자봉지들이, 무슨 재미난 얘긴지를 속닥거리다 남학생이 나타나자 얌전한 척 하는 여학생들처럼, 앉아 있었다. 라면땅은 화중지병이어서, 일 원짜리 만만한 눈깔사탕을 집으려다 성조는 큰 맘 먹고 오 원짜리 김일성 과자를 골랐다. 김일성 과자는 동그란 거죽을 살짝 깨물면 좀 더 작은 과자가 나오고 또 살짝 깨물면 좀 더 작은 과자가 나오기를 반복하다 맨 안쪽에 별사탕을 품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다스린다는 북한엔 늑대 얼굴을 한 병사들이 백성들을 채찍으로 몰아세운다고 했다. 성조는 왜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살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아버지는 병신이 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아마도 김일성 과자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손 뼘을 컴퍼스처럼 돌려서 땅따먹기 하는 것도 승패라는 게 있는데, 본래 그어졌던 삼팔선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휴전선을 긋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죽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고 보면 김일성은 김일성 과자처럼 파고 파도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이가 맞는 것 같았다. 성조는 언뜻, 아마도 김일성 목에 붙어 있다는 혹에, 괜한 심술을 부리는 도깨비가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스스로가 기특했다. 죽으러 가고 다치러 가는 용사들한티 꽃다발이 가당키나 한겨? 저승 재촉하는 꽃가마두 아니구. 성조는 월남에서 죽은 백운이 형이, 툭 튀어나온 앞짱구 얼굴을 들이밀며 자신의 양 볼때기를 잡고 이눔 안 보는 사이에 으른이 다 되었구나,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성조가 보기엔 아버지 몸속엔 바람이 사는 것 같았다. 평소엔 얌전한 산들바람이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황소바람으로 변해서 들깐으로 욕을 쏟아내다 이내 잦아져서 소슬바람이 되었다. 나는 아무캐두 꿈이 진짜 같구 겪은 일들이 꿈만 겉으니라. 아버지는 꿈에서, 성조를 무등 태워주기도 하고 배나물에서 반두로 물고기를 몰아 올리기도 하고 지게에 삭정이나 져 내리던 스무 살 때를 살고 있었다.

     

    - 왜 읎는 다리의 종아리가 이리두 간지러울꼬.

     

     

    아이 엠 어 보이

    상준이는 후남이 누나를 어릴 적엔 언니라고 불렀다. 후남이 언니는 엄마나 아버지가 장날 출타라도 하면 상준이에게 치마를 입히고 엄마의 루즈를 발라주고는 야, 우리 동생 입성 좋다, 라고 외거나 아휴, 경미네 엄마 오랜만이유. 그래 경미 아부진 요즘에도 술 자시는 게 여전하신가? 술을 을매나 드셨길래 그래, 경미 엄마 배 위에서 잠을 자유. 아휴, 망측해라. 쿡쿡거리며 상준이를 앞뒷집 아주머니로 만들었다. 상준이는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보다 후남이 언니와 소꿉놀이하는 게 좋았다. 상준이는 곱돌을 맞부딪혀 불을 피우는 시늉을 하며, 솥단지 하나 가득 콩나물밥을 익히고 들기름에 볶은 나물에, 달걀부침을 곁들이고 벽에 걸린 시래기에 된장을 풀어서 국을 끓여 한 상 차려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일 거 같았다. 도적같이 구레나룻 덥수룩헌 남정네가 되고 싶으냐. 꽃양산 받히고 나들이 가는 고운 여인네가 되고 싶으냐. 삼신 할멈이 점지할 때 한 번만이라도 물어 봤어야 옳은 것이었을 거라고, 상준이는 어른처럼 한숨을 쉬었다. 상준이는 어깨끈으로 걸어줄, 파티 드레스나 쇠별꽃 무늬를 수놓은 원피스를 문구용 가위로 오리면서, 10원 짜리 종이 속의 미스 코리아의 찰랑이는 금발을 부러운 눈으로 들여다보다가 후남이 쪽으로 고갤 돌렸다. 후남 언니! 나두 백설 공주 맨키로 독사과 먹으믄 여자가 될 수 있는 겨?

     

    동생의 손은 남자애 손이라고 하기엔 곱고 가늘고 길었다. 손만 긴 게 아니라 속눈썹이 외양간의 우걱뿔이 같이 길고 숱까지 많아서 큰 눈망울을 반은 가렸다. 그래서 언뜻 보면 코뚜레를 달던 때의 소처럼 눈물이 금세 그렁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남이는 상준이가 여동생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따로 시집이라도 가면 영영 못 만나질 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곧 도리질을 쳤다. 볏짚가리에 올라가 누워서 별들을 보며 여자가 여자로 되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은 좋았으나 이리 이쁜 동생을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서글픈 일일 것이었다. 후남이는 실뜨기로 동생을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다. 동생은 양 손목에 실을 감고 예의 그 긴 손가락을 걸어 돌려 쟁반으로 시작해서 젓가락으로, 베틀로, 방석으로, 실을 떠가면서도 좀처럼 엉키는 법이 없었다. 손이 고우믄 펜대만 굴리구두 잘 살 팔자라는디 뭐. 후남이는 어린 마음에도 동생의 일생도 실뜨기처럼 순탄하기를 바랐다.

     

    슈사인보이

     

    이상무의 만화엔 주인공으로 대부분 독고 탁이 등장했다. 빡빡머리 시원한 앞이마에 애교머리 두 가닥이 하늘거리는, 웃음이 활짝 피어난 꽃 같아서 사랑스럽던 아이였다. 슈사인보이들 중엔 속된 말로 찍새라고 부르던 애들이 있었다. 커피숍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다방은 데이트 장소나 맞선 장소로, 늙은이들의 소일 공간으로 번성했다. 다방 레지들은 입술 화장이 밝은 빨강이어서 웬만한 뒤죽이 박죽이 아니고는 요염했다. 늙은이들은 레지들의 궁둥이를 찰싹였고 허벅지를 문질렀다. 김주사님은 점잖으신 줄 알았는데, 응큼시럽기가 보통이 아니네. 레지들이 과장되게 눈

     

     

     

    을 흘기면, 쌍화차에서는 달걀노른자가 한가위 때의 보름달처럼 떠서 출렁였다. 슬리퍼를 들고 다니며 구두를 걷어 가는 슈사인보이들은 재주에 따라서 일거리가 노가 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심리전에 강했다. 늙은이들에게는 쪽진 머리 마담 앞에서의 위신을 이용했고 젊은이들에게선 앞자리 여자 앞에서의 자존심을 이용했다. 중늙은이들은 호칭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걷어갔다. 슈사인보이들이 들고 간 구두들은 광이 나서 번쩍여 돌아왔지만 그럴수록 슈사인보이들의 얼굴은 무연탄 집하장의 인부처럼 얼굴의 얼룩이 늘어갔다. 경탁이는 정교가 부산으로 내려와 처음 가졌던 직업을 떠올리며 정교가 창원에서 보험설계사로 성공한 것도 구두를 걷어 가던 그 실력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때는 다방에 띠별로 운세 보는 재떨이가 막 나올 때였지. 미리 돌돌 말아 넣어 놓은 종이에 있는 글이 무슨 운명을 점지했겠냐, 마는.

     

    이상무 만화 중에 ‘아빠 안녕!’이라는 만화가 있었다. 구두를 닦으면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네 살배기 탁이가 등장하는 만화였다. 지금 생각하면 네 살짜리가 무슨 구두를 닦았겠나 싶게 엉뚱한 이야기였지만 경탁이에겐 잊히지 않는 만화였다. 그 만화에서도 탁이는 예의 그 꽃 같은 웃음을 웃고 다녔다. 만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환하게 웃으면서 구두를 닦고 있는 탁이에게 중년의 신사인 손님이 너 왜 만날 웃고 다니니? 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경탁이 기억에는 탁이의 대답은 짧고 단단했다. - 웃지 않으면 울고 싶기 때문이에요.

     

    「혹여 사는 게 힘들다 느끼는 때가 계시면 탁아-라고 낮게 불러 보세요. 그러면 분명 멀리 있던 지난날의 행복한 순간이 박두하듯 떠오를 겁니다. 제 이름도 같으니까 잊지 마시구요.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주는 제 선물이자 신라의 처용이 만들었다는 주문입니다. 탁아 ―

     

     

    견묘득주犬猫得珠

    …산미테 할멈 같은 선한 할멈이 병으로 자리보전한 할아범을 위해 잉어를 잡았는데, 잉어가 울었다. 니 눈물 보니께 니가 사람이었으믄 우리 마님처럼 가슴이 문드러진 사람들이 홀로 흘리는 눈물이구나. 살려준 잉어는 할멈을 이끌고 용궁으로 갔다. 잉어는 용왕의 아들이어서 용궁에 간 할멈은 역청 덩이처럼 달착지근한 산해진미를 대접받고 낮달만한 구슬을 선물로 받았다. 용궁은 단청을 할 필요가 없더니라. 형형색색 집채만 한 산호들이 등藤이며 갈葛처럼 얽혀서 빛까지 뿜어내었더니라. 구슬을 문질러서 기와집과 쌀섬과 항라로 부귀해진 할멈과 할아범을 시기한 이웃이 구슬을 훔쳐 갔다. 할멈은 기르고 있던 충직한 개와 고양이를 불러 명을 전하였다. 개는 두 눈 위에 두 눈 같은 점이 있어 이름이 네눈박이였고 고양이는 매화 같은 갈색 점이 등과 목으로 돌아올라 있어 갈매라 불렸다. 너희 둘이 합심하여 구슬을 찾아오너라. 내가 너희 둘을 똑같이 일등공신으로 봉할 것이니라.

     

    -네가 정녕 구슬을 내어 주지 않는다면, 내 발에 숨겨 있는 삼 척 발톱을 사용해 심장을 긁어 낼 것이다.

     

    -네가 토설하지 않아도 내 눈이 네 개여서 구슬을 찾을 수 있으나 네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고자 인내하고 있음이니라.

     

    「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선 새끼 수고양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개의 사연이 방송되고 있었다. 정우는 토미의 여동생이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었어야 할 젖을 죽어가는 사내에게 물려주던 ‘분노의 포도’의 한 장면을 떠올렸고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리는 분노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되던 때가 떠올랐다. 」

     

    견묘쟁주犬猫爭珠

    바르고 포개고 소복하게 뿌려서 만들어진 음식은 띠를 두르고 보에 쟁반 째 싸였다. 내장을 빼낸 곳엔 대추가 들어가고 지단들을 얹어서 잣가루 냄새가 나는 닭은 금전지를 꿰매어 단, 보에 싸였고 보의 네 귀는 오므려졌다. 건어물을 꽃으로 만드는 고장도 있다는 폐백 음식은 남자와 여자가, 칼질로 오려서 곶감의 살을 꽃으로 만들듯 서로의 일생을 꽃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기실 꽃이 아닌 것들이 꽃이 될 리 없으니 남녀의 일생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풀고 헤집어 술을 곁들였다.

     

    버스 여차장이라는 직업은 열여덟 살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나이만큼의 시간을 오라이를 외치며 버스를 탕탕거리면 숨죽은 파김치가 되는 몸도 힘들었지만 마귀할멈에게 센터를 당하는 모욕은 더 힘들었다. 어느 버스회사에선 사장 아들이 대놓고 동석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정춘이는 남자들의 시선이 어떻게 몸에 혓바닥처럼 닿아 침처럼 발라지는지 알고 있었다. 정 기사가 그랬고 주 계장이 그랬다. 기숙사비와 식권비를 제하고 집에 부칠 돈을 돌려놓고 나면 월급은 속옷 한 벌 살 돈도 남아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삥땅은 고요히 번성해서 삥땅을 삥땅치는, 정말 마귀 같은 감독들과 기사들이 즐비하다는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버스 안내양은 화장을 할 수 없었다. 배치기로 꾸역꾸역 밀어 넣어야 하는 처지에 혹여 실수로 승객의 옷에 파운데이션 자국이라도 묻히면 성가신 실랑이만 벌어질 것이었다. 정춘이는 버스에 승객이 토해놓은 토사물을 치우거나 해서 기숙사에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설 적이 많았다. 그런 정춘이의 밤은 시동 걸린 경운기처럼 코를 곯다가, 꼭두새벽에 화들짝 비명을 지르면서 일어나는 것으로 끝났다. 여차장 생활 이태가 넘어서면서 윷판의 외동무니처럼 정춘이는 서서히 번지는 외로움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모는 이모부와, 하객도 없고 폐백도 없는 달랑 사진관의 사진 한 장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이모부는 늘 같은 시간, 같은 정거장에서 버스 첫 차에 올랐고 고데기로 모양을 낸 상고단발에 미니스커트도 입지 않은, 하늘색 빵모자의 그저 그런 여차장인 이모를 선녀처럼 느꼈다고 했다. 이모부는 이틀에 한 번 돌아오는 이모의 휴무일이 되면 용두산 공원으로, 몰운대로, 서면 지하상가 막걸리 코너식당으로 이모의 눈과 귀를 호강시키며 데리고 다녔다. 이모는 삥땅 친 돈을 더 이상 몸에 숨기지 않고 버스에서 이모부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이모는 부전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복개되기 전의 개천가에서 이모부와 데이트를 즐기다 건달들과 시비가 붙을 때를 잊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열차에 올랐던 이모부는 태권도 도장에 들어갔다. 이모부는 몇 년도 안 되어 관장도 감탄할 만큼 운동 실력이 늘어 사범 자리를 꿰찼다. 당수로 맥주잔을 깨뜨린다기에 난 농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손날로 병목을 날리는 거야. 그런 이모부한테 시비를 걸었으니… 난, 박노식이 영화에서 뛰쳐나온 줄 알았다니까.

     

    정우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이유는 어둑하게나마 알아졌지만 왜 사랑이 의심으로 번지는 지는 선뜻 알아지지 않아 아득했다. 이모부는 이모를 사흘 도리로 두들겨 팼다. 성훈이를 기르며 살림살이를 똑 부러지게 해내는 이모와 산지 해를 넘기면서부터였다. 이모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당수도로 깼다는 맥주병처럼 눈엔 늘 먹이 배어, 삶은 달걀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다. 성훈이가 네 살이 넘어가면서 이모부의 폭력은 더 잦아졌다. 그리고 급기야 성훈이도 이불을 씌워서 짓밟기 시작했다. 성훈이를 처음 때리던 날부터 이모의 눈은 무서운 눈으로 박혔다. 내 씨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 말이다. 아무한테나 벌리는 갈보의 씨를 어찌 믿느냐구.

     

     




    사람을 찾습니다

    생물은 먹는 것으로 냄새를 가진다고 했다. 육식만 하는 동물도 누린내가 났고 풀만 먹는 동물도 누린내가 났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동물들은 그나마 먹을 만했다. 서양 것들은 고기를 즐겨, 누린내가 진동을 해서 잠자리가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여, 아낙네들은 쿡쿡거렸고 양치를 하지 않은 노인네들의 입에선 저승 냄새가 났다. 아기들의 젖 냄새에선 늘 젖보다 더 흥건한 물기가 묻어 있어 아낙들 중엔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몸이 다는 축도 있다고 했으나 아이를 가지고 몸을 푼 여자들은 남정네의 손길을 지네다리처럼 여기는 경우가 다반사라고도 했다.

     

    I was found near the building of Holt Children's Services Inc, in Daegu. At that time, I was about four years old,,,, with a spot on the left chest, I wich I could see...

     

    정우는 전날 새로 사 입힌, 까만 반바지에 멜빵을 하고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성훈이가 꼭 본 듯 떠올랐다. 전자인간 337이 그려진 배낭 안에는 자야나 맛동산 등속의 과자들 사이에 이모의 편지가 있었을 것이었다. 정우는 전화기를 들고 방송 화면의 자막에 나오는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영화 이티에 나오는 어린이 엘리엇과 E,T는 첫 모음과 끝 자음이 같았다. 정우는 성훈이가 최성훈이 아니라 엘리엇으로 남길 바랐고 선하지 않았던 E,T에 대해 모르길 바랐다. 성훈이는 단지 하우 두 유 두를 하우리라고 발음하는, 미국의 북부 지역 사투리가 간혹 튀어나오는, 누린내가 나는 외국인 엘리엇이어야 한다고, 정우는 리모컨을 쥐기 위해 팔을 뻗었다.

     

    「 이모는 성훈이가 입양 되던 해에 죽었다. 이모부와 함께였다. 사인은 연탄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사였다. 정우는 이모가 새로 이사 간 집의 장판을 들치고 방바닥의 미장이 솜씨를 가늠하는 모습을 떠올렸고 추위를 핑계로 창문에 비닐을 덧씌우는 모습을 떠올렸고 이모부에게 아양을 떨며 소주를 따라주는 모습을 본 듯 보다가 죄다 지운 적이 있었다. 이모가, 죽음만큼은 예수의 동무였던 나사로의 죽음처럼 편안한 죽음이어야 했고 깊은 잠이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이모가 정우의 상상 속에서 뒷모습으로만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함박눈

    시골에선 내리는 비들은 다 달랐다. 보슬비는 모시를 겹겹이 널어놓은 듯 내렸고 소낙비는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며 이무기로서의 몸을 비우듯 쏟아졌다. 장대비가 영사막 같아서 어린 나이에도 더 어린 나이의 추억이 끌어 당겨지게 내려 툇마루는 시원하고 눈은 먼눈이 되었다.

     

    눈은 푸짐했다. 눈 쌓인 들판 논두렁길을 상여가 지날 때도 있었는데, 상여는 꼭 떡국 위의 고명처럼 흔들렸고 눈꽃들이 풀석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들릴 듯이 소복했다. 마당 위의 눈은 넉가래로 길을 내었다. 변소로 가는 길과 외양간으로 낸 길은 웃거름처럼 칡국수색으로 단정했다. 외양간엔 구멍 난 돌이 달려 누렁이의 다산을 기원했고 노간주나무 코뚜레는 문 위에 달려 벽사辟邪 했다. 변소의 바람은 선득해서 오줌은 말갰고 똥은 가래 썰듯이 뚝 끊어졌다. 영자는 서울의 바람이 후덥지근해서 싫었고 눈들이 차바퀴 자국에 흙으로 얼룩이 지는 게 싫었다. 눈은 독구들의 발자국이 그림처럼 난 정도에서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이나 꾹 눌러져 있어 고드름이 저절로 햇살 속에서 개구리 알 같은 물방울들을 떨구며 사라지듯이, 하얀 그대로 사라져야 했다.

     

    먼 친척이라는 분들은 영자 같은 식모에게는 친척이 될 수 없었다. 사모님은 강아지를 길렀는데 애기처럼 얼르며 길러서 영자는 고향의 골골이의 앙상한 뼈가 불쌍해졌다. 개 팔자가 상팔자고 무자식이 상팔자라는데, 영자는 포대기에 싸인 개가 될 수 없었고 고향 엄니의 자식이었다.

     

    -내가 몸에 신열이 나고 속이 갈해서 아무캐두 니가 곁에 누워 있다가 자리끼를 갈아주어야겠다.

    -열일곱이라, 꽃받침이 만지기에 좋구나.

    -니가 내 방으로 찾아 들었다 하면 아이들이 너를 어찌 보겠느냐. 잠시만 참으면 되느니라.

    -우니까 예쁘다. 다음부터도 조금씩 울되 소리는 삼켜라.

     

    영자는 고향의 누렁이가 와서 쇠문을 박차고 자신을 태우고 싸움소처럼 고향으로 육박하는 꿈에서 깨어나, 고향엔 다시는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다시 울었다. 처음엔 아랫도리가 아팠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명치 위쪽이 찢어진 듯 펄럭였다.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간 사모님은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너를 좀 데리고 있다 세상 물정도 가르치고 혀서 혼례까지 시켜준다고 약속허드라. 진득하니 음식 장만하는 거부터 서울 신식 문화를 얼른 얼른 배워야 헌다.」

     

     

    빠삐용

    나비는 꽃잎처럼 날개를 접어서 꽃잎 위에 앉고 나방은 나무 등걸처럼 날개를 펴서 나무 등걸에 앉았다. 새들은 꽃잎 속에서 나비를 발라내고 등걸 속에서 나방을 발라냈다. 나비나 나방들이 막 날아오르려던 참이었다. 빠삐용 스티브 맥퀸의 가슴에는 나비의 문신이 있었다. 여자는 빠삐용이 될 수 없을 것이었다.

     

    숙희는 불을 끄고 벗길 바랐으나 남자들은 불을 켜고 옷을 벗길 바랐다. 불빛은 푸줏간의 그것을 닮아 있어 숙희는 부위별로 잘려 쇠갈고리에 걸리는 고깃덩이가 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군인 손님 중엔 벗어 놓은 옷을 네모지게 개켜 놓는 치들이 간혹 있었다. 그들 말로 각을 잡는 것이었는데, 숙희는 사내들이 자신을 그렇게 각을 잡아 개켜 놓고 들여다만 보다 갔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흥분되는지 사내들 중엔 보지라는 단어를 일을 끝낼 때까지 입에 다는 축도 있었다. 부인 이리 오시오. 숙희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헛담장을 넘어 이어져 있던 종을 흔드는 선비를 떠올리고 싶었으나 떠올려지지 않았다. 키스는 안 되예.

     

    을규는 대학생이었다. 을규는 안개꽃으로 숙희의 벽을 돌려가며 달아주었다. 시를 써서 가져오기도 했는데, 필체가 수려해서 내용은 이해되지 않아도 마음에 들었다. 을규는 이야기만 나누다 가서 술에 곤죽이 되어 일을 치르지 못하고 용두질로 끝내는 손님보다 미안했다.

     

    안개꽃 꽃말이 사랑의 성공이야. 난 수잔을 진짜 사랑해. 기다려줘. 숙희는 을규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왔을 때, 몸을 열었다. 천천히 열어서 보듬었고 입술을 열어서 당겼다. 을규는 조금 떨었고 윤활제를 바르고 나서야 들어 왔다. 숙희는 을규의 신음이 작고 낮아서 애처로웠다. 안개꽃 꽃말은 그냥 맑은 마음이지예.

     

    을규가 떠나던 날, 숙희는 고향에 놀러와 며칠을 묵고 간 오빠뻘 소년이 눈에 본 듯 떠올랐다. 어매요, 복점을 첫사랑한테는 보여줘야 복이 나가지 않는다는 말을 엄마가 지한테 빠져 먹은 거 맞지예?

     

    「숙희는 하굣길에 봉고에 태워졌다. 열여섯 여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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