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야기 긴 여운_조명숙
  • ▶ <짧은 이야기 긴 여운>고장이야, 고장_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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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장이야, 고장

                                                                       조 명 숙

     

    차임벨이 울리고 현관문을 열자 승자의 남편 나용만은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얼른 남편의 손부터 살폈다. 행여나 싶었지만 역시나 빈손이었다. 승자의 입꼬리가 샐쭉하게 비틀어졌다. 며칠 전부터 그렇게 말했는데도 결국 빈손이라니. 너무나 화가 나서 남편의 윗도리도 받아주지 않았다.

    나 목욕한다.”

    남편이 욕실로 들어가면서 왜 그러냐는 듯이 큰 소리로 한 마디를 툭 던졌지만 승자는 하릴없이 베란다로 나갔다. 7층은 주차장에 들고 나는 사람을 알아보기 딱 좋을 만큼의 거리였고, 베란다는 아래층 부부가 퇴근해 돌아오는 장면을 잘 살필 수 있는 지점이었다.

    석 달 전, 아래층 여자가 이사떡을 들고 왔을 때, 남편의 직장 동료라니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잡은 뒤 승자는 몇 가지 의례적인 것들을 물어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라일락 좋아하세요?’ 하고 슬쩍 물어본 것은 식탁 위에 마침 귀하게 구한 라일락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래층 여자는 어머 라일락. 무지 좋아해요.’ 했는가 하면 새로 들여놓은 김치냉장고를 보더니 같은 회사 제품에 용량도 똑같다며 신기해했다.

    그리하여 아래층 딸은 전학 수속을 마치자 승자의 딸이 다니는 단지 내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됐고, 아래층 남자 유 과장과 승자의 남편 나 과장은 아래층 위층 번갈아 다니면서 바둑을 두거나 축구 경기를 보거나 조깅을 했다. 많은 점에서 어쩜 그리도 비슷한지 승자도 아래층 여자와 곧 허물이 없어지고 말았다. 음식 접시가 왔다갔다하고, 아이들은 아래층 위층 아무 데서나 놀다가 잤다.

    그런데 어느 날, 베란다에서 아래층 부부가 퇴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승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래층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서 여자가 앉아 있는 앞자리로 가 정중하게 차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좀 의외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그냥 좋게만 보았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아내가 차에서 내릴 때 남자가 차문을 열어주는 것은 일상적인 예의에 속하는 일이었으니까. 아래층 남자도 어쩌다 한 번 그래 본 것이겠지 여겼다.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라도 아내의 생일이라든가 결혼기념일 같은 날에는 뭔가를 해 보기도 하는 법일 테니까.

    어디 다음에도 또 그러나 보자 하는 야릇한 심정으로 이튿날도 아래층 부부를 관찰했다. 그리고 승자는 너무나 엄청난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침에 출근할 때나 저녁에 퇴근할 때나 아래층 남자는 일일이 차문을 열어 여자를 태우고 내리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흘 나흘도 아니었다. 귀부인이 따로 없었다.

    그때부터 승자의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기가 승자의 남편과 다를 것 없어 보이던 아래층 남자에게 그처럼 섬세하고 젠틀한 습관이 있었다니. 승자도 남편에게 그만한 대우를 못 받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직장 있고 능력 있는 여자가 대우받는 세상이라지만, 주부라는 것도 탁월한 재능과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엄연한 전문직업이었다. 게다가 말하기 좀 치사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아직도 이십대 못지않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승자에 비해 아래층 여자는 뚱뚱하고 키가 작은데다 몇 푼 안 들이면 만들 수 있는 그 흔한 쌍꺼풀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어디 외출이라도 할작시면 너야 타든지 말든지 자기 먼저 운전석에 올라 시동 걸어놓고 어서 타라고 버럭 소리나 지르기 일쑤인 남편을 생각하면 분하다 못해 서글퍼지기까지 하는 승자였다.

    승자는 베란다 난간에 기대 아래로 목을 뽑았다.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날씨라 눅눅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누라 생일에도 탈래탈래 빈손으로 들어오는 저 철면피를 어째야 쓰누? 얄밉다, 정말 얄미워, 하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지르는 사이 낯익은 아래층 승용차가 경비실을 통과하는 것이 보였다. 숨을 몰아쉬고 아래층 승용차가 주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가 멈추자 언제나처럼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반대편으로 걸어가, 허리를 구부리고 정중하게 차문을 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은 아래층 여자가 장미 한 아름에 케이크까지 들고서 잔뜩 으스대는 품새로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여자의 뒤로 차문을 잘 닫은 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 열쇠로 잠갔다.

    더 이상 그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어 거실로 돌아와 에어컨을 켜고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았다. 남편에게 저만한 대우를 받고 사는 여자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한 아래층 여자가 얄미웠고, 무뚝뚝하고 덤덤하기가 돌덩이 같은 남편이 야속했다. 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배고프다. 밥 먹자.”

    돌아보니 욕실에서 나온 남편이 수건으로 승자의 어깨를 툭 치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승자는 소파에서 발딱 일어서며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래, 밥이나 먹어라. 밥이나 먹어.”

    멀뚱해 있는 남편 앞에서 승자는 일부러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갔다. 속에서 오뉴월 태양이 맹렬히 타오르는 것 같아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저녁을 차리는 사이 남편은 식탁에 앉더니 시장끼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먼저 내놓은 반찬을 수저로 집적거리며 의뭉스레 말했다.

    수저 두 벌 더 놓지. 유과장네 오라고 했는데.”

    승자는 남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누구 맘대로? 밥 없어!”

    그럼 조금씩 담아서 네 그릇 만들어.”

    싫어!”

    참았던 말을 화산처럼 뿜어올리려는 순간 차임벨이 울렸고, 남편은 문을 열러 가버렸다. 저런 벽창호, 꼭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하면 자리를 뜬단 말야. 지그시 어금니까지 물고 씩씩대고 있자니 남편이 아래층 부부를 대동하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아래층 남자가 한아름의 장미를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채인 승자에게 내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요.”

    아래층 여자가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놓자, 남편이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언제 넣어두었는지 냉장고에서 샴페인 병을 꺼냈다. 이러지들 말라고 말릴 겨를도 없이 뻥 소리를 내면서 샴페인 뚜껑이 열렸다. 아래층 여자가 재빨리 유리컵을 찾아왔다. 아래층 여자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승자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자 아래층 남자가 말했다.

    나 과장이 회사에서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오늘이 아주머니 생일인데 장미 한 아름을 사 주고 싶다, 그런데 한 번도 안 해 봐서 쑥스러워서 도저히 못하겠다, 하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한 번 해 보기로 했습니다. 대신 집사람 생일 때 나 과장이 장미를 사 주기로. 이건 품앗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지. 여자의 맘을 어쩌면 저리도 몰라. 첨 장미를 사주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소문까지 내고 난리람. 기분은 점점 나빠졌다. 더 비참한 기분이 들기 전에 그만 돌아가 달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래층 여자가 덧붙였다.

    며칠 전 일부러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취향이 비슷하니 사모님이 좋아할 만한 주얼리 하나 부탁한다고. 이거 고민해서 고른 건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참 좋으시겠어요, 나 과장님 댁은.”

    아래층 여자는 조그만 보석함을 승자 앞에 열어보였다. 하얀 진주로 된 목걸이는 오래전부터 승자가 꼭 갖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승자는 쌀쌀맞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이런 스타일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유 과장님 댁에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적어도 남편이 차 문 열어주는 정도는 돼야 진주도 빛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자 아래층 남자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농담이 좀 지나치십니다. 돼지 목에 진주라고요? 그리고 차 문은 고장난 겁니다. 그것이 말이에요, 저 사람이 열면 안에서나 밖에서나 절대 열리지 않는단 말이에요. 어서 고쳐야 할 텐데 귀찮아 죽을 지경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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