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야기 긴 여운_조명숙
  • ▶ <짧은 이야기 긴 여운> 깊고 푸른 밤_ 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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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고 푸른 밤

                                                                       조 명 숙 ​

     

    시외버스가 터미널에 닿자 승희는 종종걸음으로 대합실을 빠져나가며 시계를 보았다. 지하철 막차까지 꼭 오 분이 남아 있었다. 시외버스로 세 시간을 꼬박 달려와 몸은 천근같이 무거웠지만 택시비가 족히 이만 원은 나올 것이고 보면 우선 지하철을 타고 봐야 했다. 시골에서 공부하러 온 대다수의 학생들처럼 만 원짜리 한 장도 승희는 아껴 써야 했다. 여름 태풍으로 복숭아밭이 엉망이 된 데다가 콩이며 참깨, 벼농사까지 흉작이라 부모님의 시름은 말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만으로도 생활비는 충분하다고 해도 꼬깃꼬깃 접은 오만 원을 찔러 넣어 주며, 그걸로 되겠냐,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거라, 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엄마를 생각하면 택시 같은 건 엄두도 내어서는 안 되었다.

    헐레벌떡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 다행히 막차는 아직 남아 있었다. 승희는 밑반찬이 든 가방을 어깨에서 내리고 잠시 숨을 돌렸다. 혜미는 잘 있을까. 주말에다 정시 모집 면접 전형으로 이틀이나 휴강하는 사이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뾰루퉁 입을 내밀던 혜미였다. 집이 제주도다 보니 일 년에 한두 번 다녀오는 것이 고작인 혜미는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다녀오는 승희에게 이번에도 눈을 흘겼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갔다 오자고 해도 너 없는 사이 실컷 자유나 누리겠다며 큰소리를 치더니,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문자가 날아왔다. 빨리 와. 나 심심하단 말야. 알았어, 문단속이나 잘해. 요즘 도둑 많대. 저번처럼 열쇠 잊어먹지 말고, 도시가스 밸브 잘 잠그고. 덜렁이 혜미가 마음에 걸렸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시골집 일을 거들다 보면 혜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자 승희는 혜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몇 번이나 걸어보았지만 도무지 응답이 없었고, 문자를 보내고 음성을 보내도 회신이 없었다. 도서관에라도 틀어박혀 있다면 다행이지만 설마 저번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내처 그대로 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쩐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가자고 한 번 더 졸라볼 걸 그랬나. 그때 기운이 쭉 빠진 혜미에게 죽을 끓여 먹이면서 승희가 혀를 차자, “넌 좋겠다 어쨌든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갈 수 있어서하며 말꼬리를 흐리던 혜미였다. 혜미도 따뜻한 부모님의 품이 그리울 텐데. 그리운 집.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다락방에 있고, 오래 묵은 솜씨로 된장국을 끓여주는 엄마가 있는 집. 승희도 그래서 시골에 가는 것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용돈 한 번 넉넉히 받아쓰지 못했지만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보고 오면 힘이 났다. 헌데 혜미는 그럴 수 없었다. 제주도까지 다녀오는 여비면 족히 한 달은 살 수 있고, 방세도 절반, 외로움도 절반으로 나누며 살기로 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혜미의 깊은 외로움을 승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아 미안했다.

    지하철 역에서 자취방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늦은 밤, 깊은 어둠이 도사린 골목을 지나는 일이 썩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승희는 그렇게 곳곳에 도사린 어둠이 드리우는 어딘지 푸르스름한 긴장감이 좋았다.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과 키 큰 외등이 지키고 있는 밤의 골목은 삶이란 그렇게 깊숙한 어둠과 푸르른 긴장이 가득한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기 때문이었다. 그 깊고 푸른 밤의 기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승희를 에워싸고 있었다.

    자취집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니 혜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걷던 승희는 그러나 현관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현관 유리는 박살이 나 있었고, 여기저기 유리파편이 널려 있었다. 여학생 자취방을 넘보는 도둑이란 물건만 훔치러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승희는 잘 알고 있었다. 승희는 가방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신발을 신은 채 좁은 거실로 뛰어들었다. 웬 남자가 혜미의 방문 앞에 서서 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승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의 등판을 떠밀고는 다급하게 혜미를 불렀다. 혜미야!

    초인적인 승희의 힘에 떠밀려 방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밟고 넘어서 승희는 혜미의 침대로 다가갔다. 엉망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혜미가 옷을 입은 채로 엎드려 있었다. 혜미야. 정신 차려. 마구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지만 혜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떡하니. 119를 부를까, 경찰을 부를까. 어떡하니. 승희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되도록 크게 소리를 질러야 했다. 조금만 크게 음악을 크게 틀어도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해대던 주인집이 바로 벽 너머에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승희는 있는 힘을 다해 쇠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혜미야! 혜미야! 목이 꽉 잠기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떠밀려 방바닥에 누웠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승희를 확 잡아챘다. 승희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바로 자기가 지금 부르려던 주인집 아저씨였다. 주인집 아저씨는 빽빽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승희를 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뭐를 잘못했다고 이라노. 저 학생이 술을 묵고 대문을 발로 막 차고현관문을 돌멩이로 콱 부수고내가 머슨 죄를 지었노참한 여학생들이그라믄 안 된다고 머라 캐도 저래 자빠져가지고 대답도 안하고 복장이 터지는 거는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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