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야기 긴 여운_조명숙
  • ▶ <짧은 이야기 긴 여운> 그녀의 고객들_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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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고객들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온 오후부터 무거워진 주철 씨의 마음은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얘야, 이제 함께 살면 안되겠니?

    아들의 직장에 전화하는 일을 청와대에 전화하는 일 만큼이나 어렵게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한 말이었으니 무심하게 넘길 수 없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 년 동안 혼자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크게 잡아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우선 주철 씨 집은 열여덟 평에 방 두 간이었다. 아들 우철이와 세 식구가 그냥저냥 살기에는 괜찮았지만 아버지를 모시자면 너무 좁고, 방도 한 간 모자랐다. 우철이 학교와 주철 씨와 아내의 출퇴근길을 생각하면 교외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세 식구가 몽땅 옮길 수도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해서 주철 씨나 아내 중 누군가가 집안일을 하며 아버지 곁에서 있을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내는 경력 삼 년의 텔레마케터였다. 아침에 허겁지겁 달려나가면 저녁에 녹초가 되어 돌아왔고, 걸핏하면 회식이고 모임이었다. 혼자 벌어서 언제 평수를 늘이겠느냐며 용감하게 맞벌이에 나선 아내의 늦은 귀가나 엉망인 집안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실지 의문이었다.

    생각할수록 막막했다. 형편이 넉넉하다면 좀더 넓은 아파트를 구해서 아버지와 함께 오순도순 살 수도 있었다. 또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집안일을 대신해 줄 가사도우미를 불러 일손을 덜며 살 수도 있었다. 아들 손주와 함께 살고 싶은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따져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사정이 그랬다.

    지하철을 내려서도 주철씨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힘없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엘리베이터가 7층에 닿자 역시 힘없는 동작으로 벨을 눌렀다. 문을 열어준 것은 아들 우철이였다.

    엄마 왔어?

    조금 전에요. 할아버지도 오셨어요.

    할아버지께서?

    현관을 들어서자 좁은 거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버지의 등이 어쩐지 너무 좁고 어깨는 너무 축 처진 것 같았다. 그러나 주철 씨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 저 다녀왔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멈 차 타고 잘 왔다. 어멈이 일부러 날 태우러 왔더구나.

    그랬어요? 집안이 엉망이라서 죄송해요.

    아버지께서는 아내에게도 전화를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바쁜 아내가 일부러 아버지를 모시러 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엉망으로 어질러진 집안 풍경에 안절부절하면서 주철 씨는 아내를 기다렸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우철이의 옷과 주철 씨의 옷은 그렇다 치고 자기의 브래지어까지 눈에 잡히고 있는데도 치울 생각은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저녁은 드셨어요?

    어멈이 뭘 사러 가나 보더라. 배 고프냐?

    , . 그럼 맥주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냉큼 달려가 냉장고를 열었지만 맥주는커녕 생수도 없었다. 민망해진 주철 씨는 집안을 왔다갔다하며 어질러진 것들을 집어서는 안방으로 던져넣었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는 비누며 샴푸며 수건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벗어놓은 양말과 속옷이 널려 있었다. 사는 꼴이 이 모양일 걸 보시고도 함께 살고 싶어질 만큼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니 미처 아버지의 외로움을 살피지 못한 자신의 무심함과 못남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고 한참 요란스럽게 세수를 하고 있으려니 욕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범아. 다 씻었으면 어서 나오너라. 어멈 왔다.

    허겁지겁 얼굴을 닦고 욕실을 나온 주철 씨는 거실에 차려진 밥상을 보고는 그만 기가막혔다. 상 위에는 보쌈과 메밀국수와 통닭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고 아내는 의기양양 아버지 앞에서 캔맥주를 따고 있었다. 뭘 사러 갔다던 아내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간 것이 아니라 아예 식당을 순회하며 먹을 것을 사들고 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오신 아버님께 이게 무슨 법도냐는 말을 하려고 마음을 다져 먹는 사이 텔레마케터 삼 년 경력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객님, , 아니, 아버님. 죄송해요. 제가 직접 저녁을 지어드려야 하는데 말이예요. 딱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 아니 아버님.

    주철 씨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하려던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텔레마케터 삼 년 경력 아내는 고객님 소리가 아예 호흡처럼 입에 붙어 있었다. 아무리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편해진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시아버지께 고객님이라니. 주철 씨와 우철이야 하도 들어서 그러려니 여기고 있지만 아버지는 얼마나 황당하실까를 생각하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괜찮다. 두루 사 오느라 고생했다. 보쌈은 아범이 좋아하고, 나는 메밀국수 좋아하고, 또철이는 통닭을 좋아하잖냐. 그리고 말이다, 나는 어멈의 그 고객님이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 요즘 젊은 사람들 시부모 안 모시려고 이혼도 불사한다던데, 어멈이 나를 평생 고객으로 대해주겠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너털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에 주철 씨는 자기도 모르게 푹 수그렸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아버지와 캔맥주을 맞부딪치며 아내는 여전히 재잘대고 있었다.

    고객님, , 아니 아버님. 아예 중개사 사무실에 들러 집을 내놓고 왔어요. 평수가 적기는 해도 위치가 좋아서 금방 팔릴 거래요. 이제 남은 일은 아버님께 맡기겠어요. 이이도 직장에 나가야 하고 저도 그래야 하니까 나머지 일은 아버님께서 처리해주세요. 친구분이시라니까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어멈아 고맙다. 우리가 그 집을 산다면 그 친구가 고마와할 거다. 캐나다 아들네 집에 가려고 했지만 오래 살던 집을 팔지 못해 몇 년이나 미뤘다더구나. 마당도 넓고 방도 네 개나 되지만 아범 직장이 좀 멀어서 어떨지 모르겠다.

    아이, 고객님, , 아니 아버님 괜찮아요. 이이가 차를 타고 다니고 제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 돼요.

    주철 씨는 아내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뭘 팔고 사고 하는 모양이었고, 그런 일이라면 구태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주철 씨는 젓가락으로 김치에 고기를 싸서 입을 크게 벌리고 집어넣었다. 아내에게 아버지 일을 말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아버지와 아내가 뭔가 일을 해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삶아진 보쌈 고기는 부드러웠고 김치는 칼칼하고 싱싱한 맛이 났다. 주철 씨는 얼른 입에 든 보쌈을 다 삼키고 다시 접시로 젓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아내가 옆구리를 꼬집으며 귓속말로 전했다.

    좀 천천히 드세요. 아버님 고객님께서 보시면 아들 고객님 늘 굶기는 줄 아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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