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야기 긴 여운_조명숙
  • ▶ <짧은 이야기 긴 여운> 예능의 순간_조명숙
  •  

     

                         예능의 순간

     

     

                                                                   조 명 숙

     

    ~! ~! 미스 짱! 큰머리 대회 나가 보지 그래? 그렇게 큰 머리 달고 다니기만 하면 뭐해? ~! ~! 미스 짱! 큰가슴 대회는 어때? 네 쌍둥이쯤 거뜬 키울 수 있는 가슴이잖아. 자식 귀한 집에서 뭣하나 몰라. 미스 짱 같은 보물 안 데려가고. ~! ~! 미스 짱! 허벅지나 엉덩이 대회는 어때?

    아침마다 유리를 두고 한바탕 예능을 하는 사장이 오늘따라 잠잠하다. 잠잠뿐만 아니라 헛헛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군다. 선을 보러 간다고 했겠다? 땟물이 줄줄 흐르는 점퍼 대신 양복에 넥타이 매고, 선 보러 간다고 미리 연습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다고 짱~ ~까지 생략하다니, 웃긴다 정말.

    입엣말로 구두덜대지만 속은 탄다. 술을 먹나, 담배를 피우나, 커피를 마시나, 취미가 있나, 자가용이 있나, 재밌는 데라곤 없는데다가 냉장고만한 휴대폰에, 몇 번을 기운 구두를 신고 다니지만, 몇 달 전에 6층짜리 빌딩을 사들인 사장이다. 뚱뚱하고 나이 많고, 살 빼고 쌍꺼풀수술하는 데 쓰려고 모아둔 3년짜리 적금 외에 가진 게 없는 유리에게 사장은 바로 봉이다. 넉 달만 참아주면 되는데, 넉 달 뒤 적금을 타면 어떻게 좀 해 볼 텐데 그 새를 못 참고 또 선이란다.

    홧김에 커피라도 마실까 하는데 사장이 또 느끼하게 질러댄다. 장유리 씨~. 나 돌아올 때까지 퇴근하면 안돼요. 알았지요? ~ ~ 미스 짱! 생략도 난데없는데 존댓말까지?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생긴댔는데,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불안하고 조바심이 난다. 유리의 불안과 조바심은 아랑곳 없다는 듯, 사장은 후렴처럼 읊던 짱~! ~! 미스 짱!도 생략하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주 아주 옛날 초등학교 교실에서 쓰다가 내버린 듯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 사장은 서식에 맞게 정리가 안된 문서며 원고를 편집해서 질서정연 일목요연 완벽하게 척척 만들어낸다. 서류와 원고를 많이 다뤄서 그런지 또 얼마나 유식한지 모른다.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 숨은 보석이 따로 없다.

    또 있다. 사장은 남몰래 좋은 일도 많이 한다. 양로원에 자매결연 맺은 어르신만 해도 서른 명이고, 결식아동 결연이다 장학금이다 해서 여기저기 솔솔하게 내놓을 뿐 아니라 저 멀리 아프리카 난민 돕기 기금까지 꼬박꼬박 적금 붓듯이 넣고 있단다.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알뜰살뜰 모아서 좋은 일까지 하다니,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보석이다. ~ ~ 미스 짱! 촐랑댈 때는 바람에 폴폴 날아가는 낙엽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사장은 사실 가벼운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사장의 행동에 신경이 쓰인다. 하는 짓이고 생긴 거야 어떻든 돈만 좀 있으면 착착 여자가 달라붙는 세상이다. 저렇게 공을 들인 걸 보면 반쯤 마음이 기운 상대를 만나는 것일 게다. 초조하다. 말 한마디 못해보고 어이없이 다른 여자에게 가는 꼴을 봐야 하다니, 억울하다.

    어떤 여자를 만나는 걸까? 자기가 빼빼해서 그런지 뚱뚱한 여자 취향이라고 실실 웃으며 알려주던 건너편 편의점 사장의 말은 농담일 것이다. 외모 같은 건 안 따진다고 하지만, 그건 외모를 보강해 줄 배경이나 재력이 있을 때 얘기다.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게 없는 유리로서는 빼빼마르고 무취향인 노총각 사장도 그림의 떡이다. 어떤 여잔지 모르지만 좋겠다. 알지게 돈 모아놓았겠다, 일밖에 모르겠다, 호강은 떼어 놓은 당상이겠네.

    그럼 난? 이참에 그만 둬야 하는 걸까? 사장이 데리고 오는 여자를 좋은 맘으로 봐 줄 수 없는 터에,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유리는 마음이 복잡하다. 하지만 희망복사를 박차고 나갈 용기를 선뜻 낼 수가 없다. 대학 졸업하고 5년 동안 퇴짜맞은 이력서만 무려 수백 통이다. 뚱뚱하고 못 생긴 여자에게 일자리는 결혼상대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다. 뒷돈 대줄 사람은커녕 구박덩어리 신세가 될 게 뻔하다.

    한숨이 나온다. 한숨과 함께 힘껏 복사지 뭉치를 집어던지는데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사장이 한마디 한다. 장유리 씨. 왜 그래요? 나 지금 엄청 집중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어서 처리하고 선 보러 갈 수 있거든요? 어이없어 사장의 뒷꼭지에 대고 고개를 젓는다. 계속해서 존댓말이라니, 안면몰수하겠다는 거야, 뭐야? 이것도 직장이라고 적금까지 부었는데, 여길 나가면 이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서 적금을 붓나. 아득하다. , 자를 테면 그냥 곱게 자르고 말지, 웬 꼼수냐고.

    사장이 외출한 오후, 유달리 땀이 난다. 자린고비 빼빼마른 남자가 운영하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88만 원을 벌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몸에서 서글픔 같은 땀이 흐른다. 잘못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그마처럼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마음을 다잡고 복사기 앞에서 제본실로, 제본실에서 제본하고 다시 복사기 앞으로 부지런히 오간다. 대량복사 건이 내일까지 두 건이다. 쉴 틈이 없다.

    꾸역꾸역 일을 처내고 있는데 백 원짜리 손님이 든다. 오늘 장사 안해요! 눈까지 흘겨 손님을 쫓아보낸다. 그렇게 여러 명을 쫓아버린다. 사장이 알면 길길이 뛰겠지만, 속이 시원하다. 희망복사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해고할지도 모르지만, 젠장, 그랬으면 좋겠다. 복사기가 고장이 나버렸으면 좋겠다. 정전이었으면 좋겠다. 젠장~ 젠장~ 젠장!

    욕을 하는 순간 힘이 솟는다. 다시 욕을 해 본다. 누가 들을까 봐 입술을 달싹이며 노래하듯이 해 본다. 젠장~ 젠장~ 젠장! 노래가 된 욕을 입에 달고서 복사지 한 장을 뽑아들고 훨래훨래 부채질을 한다. 땀은 계속 흐른다. 젠장~ 노래를 아무리 불러도 땀은 계속 흐른다. 큰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땀이 큰 가슴을 타고 굵은 허벅지와 큰 엉덩이를 적신다.

    에어컨 좀 켤까? 그러나 곧 머리를 젓는다. 에어컨 켰다 끈 걸 사장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칠월이 되기 전엔 선풍기 사용금지, 팔월에 딱 보름 동안 에어컨 사용이 희망복사의 냉방 원칙이다. ~ ~ 미스 짱! 전기도 아끼고 살도 빼고 일거양득이잖아. ~ ~ 미스 짱! 올 여름 지나면 날씬해지겠네. 그럼 컵라면 한 번 사기다? 세상에, 그런 걸 농담이라고 하는 사장이다.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가지.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가지! 라고 투덜대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확 달라진다. 맞아.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가지. 아무리 돈이 좋은 세상이라지만 피골상접에 지지리궁상인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라 하려고. 당신이나 나나, 시집 장가 못 가기는 피장파장,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다는 거야? 까짓 돈, 조금 더 있으면 뭘 하냐고, 있어 봤자 쓸 줄 모르는 거나 없어서 못 쓰는 거나!

    멋대로 생각하고 나니 제법 기운이 난다. 젠장~ 노래를 부르면서 유리는 생각한다. 조금만 더 버티다가 적금을 타면, 비만치료수술을 받고, 쌍꺼풀수술도 하고, 피부관리도 하자. 그런 다음 다른 일을 알아봐야지. 아니 뭐, 다른 데 알아볼 거까지 있겠어? 날씬하고 예뻐지기만 하면 멋진 남자가 줄을 설 테니까 돈 많고 잘 생긴 남자로 골라서 시집이나 가야지. 젠장~ 대신에 콧노래가 나온다.

    콧노래와 함께 땀도 점점 많이 흐른다. 흘러라, ! 쭉쭉 살 빠지게 흘러라, ! 손부채질을 멈추고 유리는 셔츠 자락을 들썩인다. 시원하다. 내친 김에 옷을 벗기로 한다. 어차피 일반 손님은 안 받기로 작정한 마당, 어차피 자를 테면 잘라라 마음먹은 마당, 출입문을 닫아 잠그고 셔츠를 훌렁 벗어던진다. 너무너무 시원하다. 내친 김에 바지도 벗는다.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유리는 복사기 앞에서 제본실로, 제본실에서 복사기 앞으로 왔다갔다한다. 옷에서 해방된 살이 제멋대로 출렁거린다. 도대체 내 살이 어떻다고? 내 살은 내 것이지 남의 살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푸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든다. 벗은 몸으로 거울 앞에 선다.

    유리는 찬찬이 제 몸을 들여다본다. 사장 말대로 머리 크고 가슴 크고 엉덩이 크고 허벅지 굵다. 그래도, 그래도 거울 속의 살은 유리다. 유리의 전부다. 유리는 거울 속에 꽉 찬 자신을 들여다본다. 넉 달 뒤 적금을 타면 살 빼고 쌍꺼풀수술 하고……. 살 빼고 쌍꺼풀수술 안해도 봐주는 남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살 너, 좀 정리할 필요가 있겠어. 여기, 그리고 여기, 그리고 여기…….

    두 팔을 치켜들고 여기저기 제 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거울 속에 누가 또 있다. 빼빼사장이다. 출렁이던 살이 그대로 빳빳 굳어진다. 언제 돌아왔는지 기척을 몰랐다. 놀란 유리는 대책없이 소리부터 지른다. 온다면, 온다고 전화라도 해야지요! 그리고 허겁지겁 닥치는대로 가려 보지만 가슴을 가리자니 허벅지가, 허벅지를 가리자니 엉덩이가, 엉덩이를 가리자니 가슴이 출렁출렁 흔들린다. 손으로 가려질 살도 아닌데 애꿎은 손만 바쁘다.

    울고 싶다. 넉 달만 더 참으려고 했는데, 이것으로 끝장이 나는구나 생각하니 아득하다. 풀썩 주저앉은 채 엉엉 울기 시작한다. 장유리 씨~ 왜 울어요? 세상에, 왜 울다니. 터져나오는 욕을 참으며 유리는 더 큰소리로 운다. 자신이 왜 벌거벗은 채 사장 앞에 앉아서 울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있는 건 아닌데, 꼭 영화를 보는 것 같다. , 그렇다면 어서 이 장면이 지나가버렸으면.

    그때 사장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르고 강단있는 손이다. 유리는 흠칫 떨며 울음을 멈춘다. 사장이 말한다. 장유리 씨~. 내가 컵라면 두 개 사 왔걸랑요. 우리 컵라면 먹으면서 우리들의 장래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 좀 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 나 장유리 씨~ 첨 보는 순간 홀딱 반했잖아요. 오늘은 꼭 청혼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네요. 맨살 본 김에 첫날밤부터 치르면 안될까요?

     

     

  •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