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이야기 긴 여운_조명숙
  • ▶ <짧은 이야기 긴 여운>첫눈 내리는 날_조명숙



  • 첫눈 내리는 날

     



      조  명  숙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승환 씨는 내뿜던 담배 연기의 마지막 모금을 꿀꺽 삼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삼 층 기사대기실에서 내다보는 시가지는 짙은 구름과 어우러진 회색이었고, 그 위에 덧칠해지는 흰색 눈발은 더할 수 없이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교대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던 총각 기사들은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한 마디씩 조심스레 터뜨렸다.

    진짜 눈이야. 그 약속,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난 어젯밤 꿈이 좋았어. 아침에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장가갈 꿈이라더라.

    괜스레 우리만 김치국물 마시는 거 아냐? 따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나 승환 씨의 마음속에는 스산한 바람이 휭하니 스며들었고,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이제 그녀를 향한 남모를 사모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싶자, 가슴 한 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흰색 스웨터에 빨간 장미 코사지를 달고 그녀가 나타난 것은 작년 이때 쯤이었다. 경리과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그녀는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릴 만큼 청순하고 예뻤다. 몇 사람 되지 않는 총각 기사들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웃음을 보내는 그녀는 사내에서 단연 인기 탑이었다.

    총각 기사들은 날마다 그녀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살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경리과를 기웃거리고, 그녀가 식당에 나타나면 괜스레 얌전을 빼거나 점잖은 체 했다. 하지만 원래 숫기없는 노총각 승환 씨에게는 그녀와 눈 한 번 마주칠 기회도 오지 않았다.

    간신히 승환 씨가 자신의 이름이나마 그녀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그녀의 생일 덕분이었다.

    가을 어느 날 그녀의 생일이 잔잔한 파문처럼 사내에 알려지면서 총각들은 너도나도 선물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한 나머지 자칫하면 살벌한 풍경을 연출할 뻔 했었다. 그때 승환 씨는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모든 총각 기사들이 일정한 금액을 갹출해서 딱 한 가지의 선물을 사기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총각이 한 둘이 아닌 만큼 그렇게라도 원칙을 정해 정정당당한 대결을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일 것 같아서였다. 그녀에게 서로 어필하려던 각축전은 사원들끼리의 단합과 친선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며,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사태를 사전에 막아보자는 생각에서, 정정당당한 대결을 제안한 셈이었다.

    모두들 승환 씨의 의견에 찬동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며칠 동안 옥신각신한 끝에, 흰색 스웨터와 빨간 장미 코사지를 선물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녀가 처음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축하 카드에다 다음과 같이 쓰고, 그녀를 사모하는 총각들의 이름을 다 적었다.

    ‘유광택시 주식회사에 근무하는 일곱 명의 총각기사들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흰색 스웨터에 빨간 장미 코사지를 달고 나오셔서 당신이 선택한 사람의 차에 장미 한 송이를 꽂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로 첫눈이 내리기까지 모든 총각들은 손꼽아 기다렸다. 더러 그녀에게 남몰래 선물을 하거나 데이트 신청을 하며 반칙을 하기도 했지만 총각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그녀에게 선택되는 것이었다. 총각들이 저지르는 그 많은 아부와 수상쩍은 눈빛은 첫눈이 내리는 날 자신이 선택되기 위한 간절한 마음에서였다. 그녀는 총각들의 성화와 애타는 기다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결같이 친절했고 정중했다.

    그러나 승환 씨는 다른 총각들처럼 반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정당당하게 첫눈 내리는 날까지 기다리면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게 되리라는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승환 씨는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스스로 평가해 보아도 남보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택시 기사라는 직업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며, 서른을 넘겼으니 나이도 너무 많은 데다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라, 어느 모로 따져 봐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첫눈이 내리자 왜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려가 봐야겠어. 좀이 쑤셔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한 총각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쳇. 김치국물 마시고 있네.

    한 총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이나 하러 갑시다. 교대 시간 다 됐네.

    승환 씨는 총각들이 설레든 투덜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대기실을 나왔다. 어쨌든 정정당당이 통하지 않는 세상인데, 그동안 아무 공도 들이지 않은 것이 잠시 후회스러웠다. 혹시라도 좋은 선물을 하거나 남보다 유별나게 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다 지나간 일이었다.

    스산한 마음을 달래며 교대차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나온 승환 씨는 마구 쏟아지는 눈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몇 송이의 눈이 승환 씨의 손바닥에 떨어지더니 금방 사그라져 버렸다.

    해운대 손님이나 걸렸으면 좋겠다.

    승환 씨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교대자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거리는 마치 축제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드는 운전자며, 폴짝거리며 보도를 뛰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첫눈이 마냥 반가운 모양이었다. 도시는 마치 축복이라도 받은 듯이 보였다.

    눈발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워 조심스레 앞뒤를 살피며 회사 앞 사거리를 지나자 마침내 첫 손님이 나타났다. 우산도 없이 눈 속에 서 있던 여자는 승환 씨가 차를 대자 냉큼 앞자리에 올라앉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무심결에 행선지를 물으며 옆자리를 돌아보던 승환 씨는 그만 깜짝 놀랐다. 그녀였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모자를 눌러썼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코트와 모자를 벗었다. 코트를 벗자 흰색 스웨터가 나타났고, 가슴에는 빨간 장미 코사지가 달려 있었다. 청순한 그녀의 긴 목덜미를 타고 길고 검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좋아요. 정정당당한 사람은 더욱 좋구요. 그게 제일 큰 재산이죠. 승환 씨는 정정당당하고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더군요. 이 옷, 회사에 늘 두고 다녔어요. 첫눈이 내리면 꺼내 입으려구요.

    그녀가 핸들에 놓여 있는 승환 씨의 손을 살그머니 잡으며 말했다.

    해운대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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