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연극소설 궁리(窮理)_이윤택
  • ▶ 궁리(窮理)<22> 19장. 근정전 조회(하)
  • 궁리(窮理)

    <22> 19장. 근정전 조회(하)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 저 장영실을 위해 왕권을 행사해야 한다

    - 하지만 내 몸이, 입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유교주의 논리로 철저히 무장한 대신들
    아버지는 저들을 여지없이 굴복시켰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성을 얻지 못하는 것
    나는 아버지와 다른 새 나라를 꿈꾸었다

    내가 장영실에게 사면령을 내린다면
    저들은 나를 철저히 고립시킬 것이다
    벌떼처럼 달려들어 처벌을 복창한다
    나는 그만 맥이 풀린다 "그렇게 하라"


    황희가 조회를 진행한다. 

    "경기도 관찰사는 회암사의 중을 검색한 사유를 계문하라."

    장영실의 목숨은 이제 주군 세종의 명에 달렸다.
    세종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진=국립극단(촬영 심철민)

    불려 나온 경기도 관찰사에게 나는 엄중하게 사유서를 쓰게 한다. 

    "경은 누구 허락으로 회암사를 수색하고 도첩이 없는 사람과 기록된 명부가 없는 중을 체포하려 했는가? 그래서 회암사의 중들이 놀라 산골짜기에 도망 가 숨어 지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법을 어기면서 수색한 사유를 일러라."

    "사헌부의 지시 통첩을 받았습니다."

    "사헌부에서 공문으로 보낸 증거가 있는가?"

    "…없습니다."

    "이 놈을 옥에 가두고 주리를 틀어 답변을 얻어 내도록 해라. 만일 사헌부에서 지시 통첩을 내렸다면, 그 자도 긴급 체포 압송하라. 불교는 태조 이래로 궁내 임금 가족들이 숭상하는 종교다. 이런 순수 종교적인 행위를 유교와 배치된다 하여 핍박하는 자는 바로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알 것이다. 내가 3월 초 이천 온천으로 떠날 때도 흥천사 경찬회가 열리는 열흘 동안은 도첩이 없는 중들도 서울을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런데 왜 사헌부에서는 도첩이 없는 중들을 4대문 도성 안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했는가? 사헌부  대제학은 나와서 답변을 해 보시오."

    정갑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선다.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실 때, 임금이 계시지 않은 기간 동안은 의정부와 육조 대신들이 의논해서 정사를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헌부에서 의정부에 공문을 올렸고 의정부 회의를 거쳐 도첩이 없는 중들의 서울 출입을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임금이 내린 교지는 어떻게 되는가?"

    "임금이 서울에 계시지 않은 기간에 내린 결정이라…."

    "…정당한 논리다. 내가 한 입으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말을 했으니 내 불찰이다."

    태형 80대의 운명 앞에 선 장영실.




    나는 여기서 한번 기세가 꺾인다. 지금 여기는 칼날 위에서 춤추어야 하는 얼음판이다. 사헌부의 기세를 초반에 꺾으려는 나의 시도는 보기 좋게 패배한다. 황희가 느릿한 걸음으로 나선다. 평소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황희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때는 이미 결론이 준비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저런 능구렁이 심보가 싫다. 그러나 저런 모습으로 처신하지 않으면 대신들이 무수하게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더 이상 궁에서 서로 물어 뜯고 죽이는 피의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 황희의 미덕은 어느 한쪽 편에 치우치지 않는 결론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저 불편부당 복지부동의 입장이 이 궁을 지키는 힘이다.

    "임금에게 불경한 죄를 지은 박강 이순로 이하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의 죄의 형량을 결정하여 주십시오."

    "의금부에서 올려 보낸 조서에 의하면, 이천 행궁 서까래가 무너진 일이나 안여가 부서진 일 등은 관리자의 소홀과 부주의로 인한 단순 사고인 것이오. 그리고 이번 일은 모두 나의 요양 행차와 관련된 사고요. 좋지 않은 날씨에 길을 떠났고 사전 답사도 하지 않은 초행길을 가다 보니 생긴 일이니 선처해 주시기 바라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 입장을 밝혔다. 선처해 주시기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젊은 사헌부 관리들에게 내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 발언을 계기로 자신이 얼마나 깨끗하고 강직한 언관인가를 증명하려 들었다. 유교주의의 나라에서는 논리와 명분에서 권력이 나온다. 그들의 용맹심은 분명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온다.  

    "박강과 이순로 이하의 죄는 형률에 의거하여 곤장 80도에 해당됩니다."

    먼저 의금부에서 형량을 내 놓는다. 

    "박강은 개국공신의 후손이라 다만 그 관직만 파면시키고, 이순로와 이하는 곤장 90대를 속물로 대납하게 하고 직첩을 회수하도록 하라."

    "박강은 임금이 사용하시는 온천 욕실을 관리하는 책임자로서 오활하게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그 죄는 대역죄에까지 적용됩니다. 관직만 파면시키는 것은 너무 경하다고 판단됩니다."

    사헌부의 젊은 지평 백효삼이란 작자가 나섰다.

    "박강은 행궁이 축조된 후에 부임한 관리 책임자이므로 실무자인 이순로 이하 등과 그 죄가 다른데도 관직을 파면했으니 무거운 죄를 받은 것이다."



    젊은 사헌부 관리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임금의 사용물인데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마땅히 중한 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나는 그만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공무상의 착오이다! 관직을 파면시켰는데 왜 가볍다고 하는가."

    화를 낸 것이 결과적으로 화를 불러 들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헌부 관리들이 한 무리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 나와 '통촉하소서-' 고함을 치며 엎드린다. 그 중의 가장 입담 좋은 자가 나선다. 역시 이사철이다. 저 놈은 왕가 종친이면서도 가장 지독하게 비판적이다.

    "신하의 죄는 불경한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임금에 대한 불경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용서치 않는 법입니다. 의금부에서 행궁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그러면서 조사 보고서를 읽어 나간다) 애시당초 내부 구조가 견고하게 건축되지 않았으며,이 부분은 분명 박강의 죄는 아닙니다. 엣헴, 비가 올 때 서쪽 기와가 몇 개 내려 앉았는데 즉시 걷고서 고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못을 쳐서 진흙으로 덮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 관리 책임자 박강의 오만함입니다. 다행히 사고를 당한 자는 없었습니다만, 만약 떨어지는 진흙더미나 서까래가 임금의 보좌 가까이였다면 박강 등의 몸뚱이는 만 번 죽어도 어찌 보상하겠습니까? 다행히 사고가 없었다고 가벼운 죄에 처하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박강은 직첩을 회수하고 이순로와 이하는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되, 모두 곤장 80도를 쳐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쥐새끼 같은 녀석의 말을 들어 주는 체 하면서 장영실의 형량을 의논하기로 마음 먹는다.

    "사헌부의 소는 잘 알아 들었다. 이 문제는 장영실 등의 죄를 먼저 탄핵한 연후에 다시 형량을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자."

    그리고나서 임금께 상소를 잘 올렸다는 명목으로 이사철을 사헌부 집의로 승진 발령을 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주둥이를 발로 차 버리고 싶지만, 다음의 일을 생각해서 참아 내었다. 하기야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으니까…."

    의금부에서 아뢴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함에 있어 삼가 견고하게 만들지 아니하여 부러지고 수레 바퀴가 빠져 달아나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여 직첩을 박탈하고 곤장 1백대 를 쳐야 할 것이며, 선공직장 임효돈, 녹사 최효남도  안여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견고하게 아니했으며, 대호군 조순생은 안여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이 정도면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여 직첩을 빼앗고 곤장 80도를 쳐야 할 것입니다."

    "…."



    일순 침묵이 흘렀다 이상하게 사헌부 관리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나는 갑자기 길을 잃는다. 이 침묵은 무엇인가? 눈을 들어 둘러보니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귀만 조심스레 열어 놓은 당나귀 모습들이다. 내게서 어떤 말이 튀어 나오면 히히힝- 소리를 지르며 말발굽 높이 쳐들고 달려들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엇험, 황희의 낮은 헛기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황희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이 침묵이 얼마나 절박한 긴장의 순간인가를 안다. 아버지는 포은 정몽주와 대면했을 때도 삼봉 정도전과 힘겨루기를 할 때도 거침이 없으셨다. 거침 없었던 아버지의 행보를 뒤따른다면, 나는 이 숨막히는 침묵의 대결국면에서 결국 승리할 수 있다. 내게 그런 아비의 근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내 논리가 내 근성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유교주의 논리로 무장한 대신들의 희망사항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다. 그들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백한 태도와 품위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다. 그들은 자신이 배운 지식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각오까지 하고 있다. 더러운 이름을 살아가느니 죽어서 깨끗한 이름 석 자 남기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 아버지는 이런 지식인들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변절자로 만들었다. 유교란 신념체계를 제왕의 의자 밑에 굴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지식인이었으므로 자신의 폭력에 결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것이 국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와 다른 나라를 꿈꾸었다.



    황희의 결정이 떨어졌다. 

    "장영실은 비록 비천한 출신이지만, 조선을 위해 많은 일을 한 발명가로서 그 공적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나이도 이제 육순에 들었으니 그 형량을 2등 감형하고, 임효돈과 최효문도 형평성의 논리에 의거하여 같이 1등 감형하고, 대호군 조순생은 박강과 마찬가지로 선공감 관리 책임자이지 제조 실무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조순생은 개국공신의 자손이오니, 임금께서 '죄는 미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군주의 특권을 행사하시여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꼼짝달싹 할 수 없다. 나의 마지막 특권은 당연히 장영실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 그 바둑이나 두러 다니는 한량에게 사면이라니. 나는 어떻게든 장영실을 위해 내 특권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생각만 절박할 뿐, 내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내가 만일 장영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개국공신의 자손에게 곤장을 치게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 이 조선은 아마 내전상태에 돌입할 것이 틀림없다. 임금이 천민 출신의 기술자를 감싸고 개국공신의 선비를 초주검으로 내몬다면….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입었던 혈겁을 걸치고 나서야  한다. 대신들은 내 주위의 젊은 인재들을 박멸하면서 나를 고립시키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꿈꾸었던 세계는…. 젊은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창조했던 시간들, 언어들은….

    "허락하여 주십시오-"

    대사헌 정갑손이 그제서야 성큼 걸어나와 큰 소리로 외친다. 모두 따라 복창하라는 듯하다. 그러자 사헌부 관리들이 모두 걸어 나와 엎드리며 복창하고, 대신들의 복창소리가 잇달아 터진다. 끝까지 버티고 서 있던 예문관 대제학 정인지가 급기야 나서서 통곡을 한다.

    "백년대계를 위하여 허락하여 주십시오, 주군-"

    나는 그만 맥이 풀린다. 

    "그러하라."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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