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연극소설 궁리(窮理)_이윤택
  • ▶ <21> 18장. 세 정승의 밀담(하)
  • 궁리(窮理)

    <21> 19장. 세 정승의 밀담 (하)
    궁리(窮理) 장영실을 어디로 사라졌는가?






    - 이윽고 나(세종)는 근정전으로 나아간다. 조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조회에 참석하는 대신 관리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죄를 받으러 온 피의자도 있고 죄 주기를 청하는 간언자도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토론장이며 재판정이 되기도 한다. 사진=국립극단(촬영 심철민)






    왕이 근정전에 섰다 "의정부에 넘긴 권력을 도로 거둬들이겠노라"

    "사헌부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되겠구만."

    황희가 은근히 내게 힘을 실어 주면서 정갑손에게 사태 해결의 책임을 지운다.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대부 어른 말마따나 사헌부 내에는 지금 철모르고 날뛰는 언간 장령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중국의 앞잽이들인가?"

    "잘못된 애국심이지요…. 아시다시피 이 조선은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고민하고 서로 생각이 다를 때는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면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임금은 대신들을 멀리하고, 시정잡배들을 궁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시는 것 같습니다."

    "시정잡배가 아니라, 천문학자 수리학자 산학자들이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왜 그들을 궁에서 밀쳐내고 때려 잡으려 드는가?"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습니까? 조선의 시간을 만들고 별자리를 몽땅 조선으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임금은 지금 비밀리에 나랏말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조선은 중국이 없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수나라가 망하면서 고구려가 망했고, 원나라가 망하면서 고려도 망했습니다. 지금 조선은 명나라와 운명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명나라가 망하면 조선도 망합니다."

    "지금 임금은 명이 망해도 조선은 망하지 않는 독립국가를 꿈꾸는 것일세."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불가능하다고 대사헌은 생각하는가?"

    "불가능합니다."

    "임금은 그런 대조선을 꿈꾸는데, 대신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어찌되는가?"

    "그래서 지금 젊은 언간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애국심입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중국에 맡기는 게 애국심인가, 예끼 이 망할 것들!"

    "그래서 제가 잘못된 애국심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국과 유학과 한문 없이 어떻게 이 조선이 설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은 지금 중국도 유학도 한문도 없이 조선이 조선으로 성립되기를 바라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사헌은 어떻게 할 참인가?"

    "임금의 꿈은 비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신들은 현실적인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현실은 영원한 중국의 소수민족 변방국으로 살아야 하네."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글쎄요…."





    황희가 대사헌 정갑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제 황희가 나설 차례다. 황희는 노련하다.

    "임금이 아무리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하더라도 대신들은 실제 하루하루 살아가는 백성들의 처지를 결코 외면할 수 없네."

    "그럼, 황희 정승은 조선의 백성들이 중국의 하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란단 말씀이오?"

    "백성들은 중국이건 조선이건 자신들을 전란에 빠뜨리지 않고 배불리 살게 해 주는 정부를 택할걸세. 조선 백성들은 어차피 지금도 하인 노릇을 못 면하고 살지 않는가."

    "임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소. 임금은 조선 백성들이 조선의 말과 글을 가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오. 유학과 한문을 쓰는 자는 양반이 되고, 못 배워서 글을 모르기 때문에 하인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백성들이 글을 가지면 생각을 하게 되고 조선도 백성의 힘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 그런 백성들의 힘을 당신들은 두려워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 명나라 조정이네."

    "지금 만주 여진족이 계속 강을 넘어 와 살고 있는 이 마당에 잘못하면 명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승록대부의 뜻을 잘 알아들었소. 지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겠네.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중국의 눈치도 봐야 하는 형편 같으니, 허참, 정승 노릇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황희가 혀를 끌 차고, 정갑손이 말을 맺고 싶어 한다. 이제 장영실의 목숨은 이들에게 달렸다. 황희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 위인이다. 이제 장영실의 목숨은 건졌다고 생각해도 무방한 것이다.

    "오늘 이렇게 셋만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공식회의를 부쳤으면 열흘 내에 북경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정갑손이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쉰다.

    "이제 내 경거망동은 끝났소. 이번 5월 단오절이 지나면 고향으로 내려가겠소. 임금께 윤허를 받아 주시오."

    나는 깨끗하게 이번 일이 내 마지막 정치적 거래라는 언질을 그들에게 준다. 장영실의 목숨을 구하는 것, 그것이 내 마지막 정치적 업적이 되는 셈이다.

    "동생은 고향이 어딘가?"

    황희가 그제야 내게 따뜻하게 대해 준다.

    "양주요."

    "멀지 않네."

    "성님은 어디요?"

    "개성 가조리네."

    "멀지 않네."

    "살펴 가시게. 나도 곧 뒤따라 고향으로 돌아갈 참이니까, 그때 내 한번 들리겠네."





    나는 손을 허이허이 흔들면서 걸어 나온다. 그래도 이대로 헌신짝처럼 골방에 처박혀 죽지 않고, 내가 임금을 위해 무슨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온다. 태종이 내게 아들을 잘 보살피라고 했는데, 그 아들은 왜 그렇게도 나를 멀리 했는가. 아비가 미워서 아비의 수족인 나까지 미워한 것인가. 그래도 결국 이렇게 나를 불러준 임금께 감사해야지. 하이구 이제 사라지자 그러면서 의정부 문을 나서는데 어느새 정갑손이 따라붙었다.



    "좀 전에 대부 어르신께 경거망동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이구, 이 녀석 보게. 제 아무리 기개가 바른 강직한 관리라 하더라도 영락없는 인간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 녀석에게 농을 던지기로 한다.

    "나 망령든 늙은이 맞네. 그래서 망령든 말 한 마디만 더 하지. 자네 임금의 몇 번째 되는 장인 아닌가. 조심하게. 임금 장인치고 제 명대로 산 위인은 없으니까."

    "장인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장인인지 임금은 아마 잊어 먹었을 겁니다."

    정갑손이 유쾌하게 내 농을 되받아친다. 역시, 유머감각이 있는 인간이 사헌부 대사헌이란 직책에 갇혀서 그렇게 딱딱하게 굴었구나 생각하니 너털웃음이 터진다.









    19장. 근정전 조회(상)


    (1442 임술 /명 정통 7년 세종 24년 5월 1일)

    두 전하께서 경복궁으로 돌아오다



    나와 세자가 입궐하는 모양새는 예문관 대제학 정인지가 연출한 것이다. 아니, 솔직히 털어놓자면, 내가 지시하였으니 내가 나 자신을 연출한다.

    먼저 그동안 수고한 강원도 관찰사가 들어온다. 그다음 바다 건너 대마도주 종정성이 보낸 왜 사신 28인이 들어온다. 그 뒤로 만주로 건너간 여진족 오도리가 보낸 저리 등 6인이 들어온다. 만주의 홀라온족 지휘첨사 격증가 등 14인이 들어온다. 우리 조선을 포함하여 동쪽의 오랑캐는 다 모였다. 그들 모두 토산물을 바친다. 나는 그들에게 답례를 보낸다. 호조에게 명하여 수해로 실농한 강원도 고을의 상공 포육을 감면해 주라고 일렀다. 북방 야인들에게는 의복 갓 신 면포를 내렸다. 예조에 명하여 대마도 배가 내이포 부산포 염포에 돌아가면서 정박하도록 일렀다.



    (1442 임술 /명 정통 7년 세종 24년 5월 3일)

    영의정 황희 우의정 신개 좌찬성 하연 세 정승을 내전으로 불러 들였다. 좌참찬 황보인 예조판서 김종서 도승지 조서강이 동석했다 .

    "옛날에 이르기를, '문왕이 정사에 근심하고 부지런함으로써 삼 년의 수명을 감소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찌 정사를 근심하고 부지런하다고 수명이 감손될 이치가 있겠는가? 후세 아첨하는 자들이 문왕의 일을 빙자하여 임금에게 고한 것뿐인 것이다. 오히려 군주가 정사에 태만하면 타고난 수명을 보전해 마치지 못할 것 아닌가….

    내가 눈병을 앓은 지 벌써 10년이나 되었고, 근래 5년 동안은 더욱 심했다. 처음 병이 났을 때 이같이 중한 병이 될지 모르고 잘 휴양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에야 후회가 된다. 이번 이천 온천에서 달포 가까이 목욕을 한 후에는 병의 증후가 조금 나은 것 같다. 지금부터 내가 정사를 보는 일을 좀 줄이고,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2, 3년만 조신 한다면 낫지 않겠는가….

    그러니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일, 무예를 연습하는 일, 일상적인 조회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합시다. 세자가 미리 사대부를 접견하면서 정치 방법을 습득하여 알게 한다는 것이 무어 해롭겠는가. 황희가 이 뜻을 대신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따르도록 하시오….

    나는 2, 3년 동안 요양을 하면서 책을 읽고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과 조선의 미래를 위한 연구에 매진할까 하오. 자 지금부터 조회를 시작합시다."



    나는 오랜만에 제법 긴 정견 발표를 했다. 요지는 내가 세자에게 정권 이양을 하고 뒷자리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요 근래 몇 달 동안 의정부에 이양된 권력을 회수하겠다는 의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행정은 세자에게 맡긴다는 것이고, 이 또한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윽고 나는 근정전으로 나아간다. 조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조회에 참석하는 대신 관리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죄를 받으러 온 피의자도 있고 죄 주기를 청하는 간언자도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토론장이며 재판정이 되기도 한다.

    나는 다시 세상의 한가운데 섰다.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