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연극소설 궁리(窮理)_이윤택
  • ▶ <20> 18장. 세 정승의 밀담(중)

  • 궁리(窮理)

    <20> 18장. 세 정승의 밀담(중)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대사헌 정갑손이 말한다. "대역죄를 어떻게 의금부에만 맡길 수 있나? 그래서 임금은 동행하던 이천을 병조에 돌려 보내고, 이천을 통해 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전언을 내렸네." 사진=국립극단(촬영 심철민)






    - "임금의 천체지도와 측우기 제작을 북경에 알리면 가만 두지 않겠네"

    정갑손은 두 가지 새로운 시책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 녀석이 명 조정에 불면 화근이 된다.

    "장영실이를 죽이면 안 되네"
    정갑손이 내 말귀를 알아들었다.
    "측우기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지요"


    "임금은 이번 일이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지 않는 것 같소. 멀쩡한 안여가 왜 부서진단 말인가?"

    나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말로 먼저 선수를 친다.

    "장영실이 부실하게 만들었고 선공감 관리들이 감리를 제대로 못했으니 그 책임을 져야지요."

    정갑손은 계속 장영실이를 물고 늘어진다.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도 누가 수레바퀴 나사 하나를 슬쩍 풀어 놓으면 가다가 바퀴가 빠져 나갈 수밖에 없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부서졌다 하니까 무게를 못 이겨서 스스로 부서질 수도 있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사헌부에서는 수레 만든 당사자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그러는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정갑손의 말투가 은근히 딱딱해진다.

    "그렇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지. 그래서 주군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조사 하라는 거지."

    나는 이제 대놓고 주군의 지시임을 은근히 밝힌다.

    "조사는 의금부에서 합니다. 관여치 마십시오."

    정갑손이 드디어 정면으로 나선다.

    "대역죄를 어떻게 의금부에만 맡길 수 있나. 그래서 임금은 동행하던 이천을 병조에 돌려 보내고, 이천을 통해 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전언을 내렸네."

    정갑손이 또 말한다. "장영실을 죽이면 안 되오.
    팔도에 측우기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겠지."




    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내 공갈성 엄포가 어느 정도 먹혀 드는가부다.

    "숭록대부의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네. 그런 심각한 문제라면 임금이 당연히 궁을 지키고 있는 내게…."

    "명할 일이지, 왜 궁 뒤 칸 방 하나 얻어서 빌붙어 있는 옛 태종시대의 도승지인 내게 사람을 보내었는가 이말 아니오? 모르것소? 임금은 지금 당신네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정녕 모르것소?!"

    나는 이왕 이렇게 될 바에는 더욱 단도직입적으로 나가 버리기로 한다. 이게 태종의 방식이었고, 임금이 이천을 통해 내게 사태 해결을 맡겼다면, 내가 할 일은 이런 방식 뿐이다.

    "당치도 않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오!"

    황희가 오랜만에 노기를 잔뜩 머금고 흰 수염을 부르르 떤다. 잘 되었다. 나는 조선 최고로 악명 높은 싸움닭이었다. 황희는 지금 옛 일들은 잊어 먹고 내 앞에서 패착을 두고 있다.

    "당치도 않다니?! 한 이십년 태평성대를 누리시느라고 배에 기름끼가 잔뜩 끼셨구만. 우리가 어떤 시대를 가로질러 오면서 이 조선을 세웠는지 기억들 못하시는구려, 황희 정승은 옛 일들은 모두 잊어 버렸소? 내가 아니었다면 성님은 벌써 저 세상 가도 몇 번 갔을 처지 아니었소?!"



    나는 이제 계급장 떼고 한번 털어 보자는 심사로 성님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지금 여기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드는 건가?"

    그러자 황희는 나를 달래려는 듯 같이 하대를 하며 친근감을 표해 준다. 이때다 싶어 나는 더욱 그들의 불안감 깊숙이 파고 들어 간다. 관리들에게 유일한 불안감은 언젠가 자신의 목이 잘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 정승 판서들이 명의 눈치를 보면서 임금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지 제법 되었지요? 북경에서 온 명나라 사신이 온갖 간섭을 다 하고, 하루가 멀다 않고 이조에서 북경에 불려 다닌 것이 언제부터였소? 임금을 모셨던 젊은 학자 무인 기술자 사냥꾼까지 모두 변방으로 밀어내니 임금이 무어 할 일이 있었겠소? 그래서 올 2월 임금이 세자까지 이끌고 명나라 사신 전별연을 베풀고 나서 무어라 하셨소? '내 눈병이 날로 심하니 세자로 하여금 정사를 보게 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셨소? 그러자 여러분께서 울고 불고 매달리면서 "성상께서 아직 춘추가 성하시므로, 어디가서 온천이라도 하시면 안질은 곧 나으실 것이니 갑자기 세자에게 정사를 보게 하여 신 등을 놀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셨소? 차라리 그때 못 이기는 체 하고 임금의 뜻을 받아 들이는 게 좋았을 것이오. 그래서 임금이 3월 삼짓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이천으로 병요양 하러 떠나셨소. 5월 단오절 이전에는 돌아 오겠다 하고 떠나는 노정에 임금이 탄 수레가 부서져 내렸단 말이오. 이게 무슨 날벼락이오?"

    "장영실이가 안여를 제대로 만들지 못 해서 그리된 것입니다."

    정갑손이 계속 장영실을 물고 늘어진다. 이 꽉 막힌 관리와 이번 기회에 한 차례 입씨름을 벌여야 할까부다.

    "장영실이는 천문기구를 만드는 기술자이고 지난해 비를 재는 측우기 도면을 바친 과학자일세. 왜 그런 인재가 임금 수레를 만들고 있어야 하나?"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갑손이 잡아 뗀다.

    "그럼 왜 지난달 이순지와 김담에게 직책을 주려 했는데 사헌부에서 막았는가?"

    "그들은 명에서 약초를 밀수입하다가 적발된 범죄자들입니다."

    "그 둘은 이 조선에서 둘도 없는 천문학자요 수리학자라는 것은 모르는가?"

    "물론 알고 있지요. 그러나 중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온 자에게 벼슬을 내릴 수는 없지요."

    "그럼 왜 정작 약초를 밀수입한 장본인인 이조참의는 복직되었는가?"

    "명 사신 오양의 청탁이 있었지요."

    "그럼 곁에 같이 있었던 이순지와 김담도 복직시켜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

    "참 딱하십니다. 지금 우리 처지를 모르고 그러시는 겁니까? 북경에서는 조선에서 온 과학자나 기술자라 하면 모두 도둑놈 취급을 합니다. 자기네들 천문역법 수리 기구들 제조법을 다 베껴간다고 난리들이지요. 그래서 이순지와 김담은 지금 벼슬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초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장영실은 임금이 워낙 아끼는 작자라 경상도 채방별감으로 내려 보냈는데, 아니 이놈이 그냥 죽은 듯 고개 숙이고 있으면 될 일을 임금에게 필요치도 않은 철이며 구리를 바치면서 생산량을 보고 하기 위해 임금을 만나야 한다고 우기고, 틈만 나면 무슨 도면을 그려와서 임금께 드려야 한다고 보채니, 이게 얼마나 임금에게 성가시고 부담을 주는 일인지 아십니까? 하도 임금 곁에 있고 싶다고 어린애 처럼 보채니, 임금이 측은해서 궁의 잡일이라도 하면서 곁에 있으라고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아, 그런데 이 천둥벌거숭이 같이 천한 놈이 내가 임금 수레나 만들라고 서울에 와 있나 불평을 해 대며 오만방자하게 일을 게을리 하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한 것 아닙니까? 이놈은 이번 기회에 임금 곁에서 완전히 떼어 놔야 임금도 편하실 겁니다."

    "만약 임금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어떻게 하겠나?"

    "그럴 리 있습니까?"

    "그럴 일이 있지. 내 일러 줄 테니 단단히 들어 두게. 임금은 이번달 말에 서울에 와서 5월 단오절 전에 두 가지 새로운 시책을 발표할 것이네. 한 가지는 조선의 하늘에 천체지도를 펼쳐 보일 것이고, 그 다음 장영실이 구상한 측우기를 서울 종루 한가운데 세우고 조선 팔도 관청 마당에 하나 씩 다 세울 계획이네."

    "…그런 일은 사실 의정부에서 다루는 일은 아니지."

    황희가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뒷짐을 진다. 임금이 저 혼자 독단적으로 하는 일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노련한 책임 회피다.

    "그렇지요. 그건 서운관이나 예문관에서 하는 일이니까 관여할 것 없지요?"

    "그러나 명에서 가만 있을까요? 그게 중국의 제왕학과 관련된 사항이라 결코 소홀히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정갑손이 바짝 긴장을 한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더욱 분명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이 입바른 녀석이 명 조정에 불면 내 말이 화근이 될 것이다.

    "자, 어떻게 하겠나? 자네가 임금과 이 조선 보다 명을 더 섬기겠다면 당장 북경으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리게. 그렇다면, 나는 자네가 두만강 국경을 넘기 전에 따라 가 자네 목을 따 버릴테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외통수를 던진다.

    "어허, 나이 칠순 고령에 무슨 그런 거친 발언인가? 이 사람아 이제 나이를 알고 좀 경거망동 말게."

    황희가 얼른 내 말을 막는다.

    "나야 경거망동을 하다가 외직으로 몰려 삼 십 여년을 떠돌고 있고, 성님은 하도 과묵 신중하시니까 이십년을 영의정으로 지내지 않소? 그러나 때로는 경거, 가볍게 빨리 걷고, 망동, 미친 개 처럼 짖어야 될 때도 있는 거요. 지금이 바로 그때요.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어붙일 것이고, 이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어디 젊고 유능한 자네가 말해 보게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겠는가?"



    나는 공을 대사헌 정갑손에게 넘겼다. 그는 당대 최고의 강직한 청백리다 .올해 정월 그는 개국공신이자 집정 대신인 하연의 친척 윤삼산을 사간원 장령으로 임명하는데 끝까지 반대 했다. 반대의 강도가 너무 무례해서 형조에서 그를 불경죄로 가두고 임금은 화가 나서 대사헌 벼슬까지 박탈한 것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자 임금도 하는 수 없어 열흘 만에 복직시키고 윤삼산을 장령으로 임명하지 못 했던 것이다. 선택은 황희가 아니라 이 자에게 달렸다. 이 자가 지금 조선의 논리를 쥐고 있다.



    "제가 어떻게 선택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북경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문제이지요."

    "전쟁이 일어난단 말인가?"

    "칠정산은 이미 내편을 정인지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으니까, 젊은 학자들이 외편을 만든다 한들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측우기는 자기네들 것이라고 저렇게 우기니까 조선의 것으로 세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자네는 조선에 측우기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비의 양을 측정해서 농사 짓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조선 백성이라면 누가 마다 하겠습니까? 대부께서는 자꾸 저를 중국사람 대하듯 하는데, 저는 엄연한 조선 사람이고 조선 관리입니다."

    "그러나 북경의 조종을 받는 앞잽이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내친 김에 더욱 정갑손을 몰아간다. 그의 깊이 숨어 있는 애국심을 끌어내어야 한다.

    "…망령된 노인의 말이라 생각하고 귀를 씻겠습니다."

    "이왕 망령이 들었으니 좀 더 하지 그럼…."

    "그만 하십시오! 어른이 이렇게 걸음을 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나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 쉰다. 이제 내 말귀를 알아 들은 것이다.

    "장영실이를 죽이면 안 되네."

    나는 한 번 더 다짐을 한다.

    "측우기를 종루에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지요."

    정갑손의 말이 무겁고 넉넉하게 들린다.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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