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연극소설 궁리(窮理)_이윤택
  • ▶ <17> 15장. 감옥에서 꾸는 꿈
  • - 보루각의 자격루. 1434년(세종16)에 장영실, 이천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자동 시보 장치가 부착된 물시계를 만들어 보루각과 흠경각에 설치하였다.






    고요한 옥 안, 황홀한 자격루 시계소리가 들린다

    이 물시계는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저절로 움직이는 열두 개의 나무 인형
    고수가 없어도 울리는 종소리 북소리…

    그 소리에 맞춰 도성문이 열리고 닫히고
    순라꾼들이 통금시간 맞춰 순라를 돌고
    왕자님과 공주님, 조선의 모든 아이들이
    몇날 몇시에 태어났는지 알게 만들었다


    "아, 자격루, 자격루라, 그걸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 내지? 나는 그만 자격루 만드는 법을 잊은 거 같소."

    "어허, 거 무슨 소리 내가 직접 봤는데."

    조순생이 혀를 끌끌 차고,

    "나도 봤어."

    "나도."

    "나도 자격루는 보았소. 그러나 그 물시계를 당신이 만든 줄은 몰랐소."

    백호사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다.

     
    물시계에 등장하는 나무인형들. 사진=국립극단(촬영 심철민)
     




    나는 그만 피가 끓는다. 그 옛날 주군과 함께 했던 시절이 내 맺힌 명치 끝에서 분화구처럼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한다.

    "먼저, 먼저 큰 대가 있어야 돼."

    "대? 대라면 여기 고문기구를 놓아두는 나무 궤짝이 적당하겠구먼."

    백호사령이 먼저 나선다.

    "이걸 모두 옮겨 봅시다."

    "맨 위에 파수호라 불리는 큰 물통 세 개를 층층이 배열하고…."

    "여기 물 담는 그릇은 얼마든지 있어. 이거 모두 물고문에 쓰는거지."

    "그걸 층층이 놓아서 흘러 내리게 하는 거요." 조순생이 앉은 채 말을 거든다.

    "나도 보아서 알고 있소. 잔소리 마시오." 최효문이 아는 체 한다.

    "긴 원통꼴로 된 파수호를 그 밑에 놓습니다."

    "통마다 구명을 내고 이어야 하는데." 임효돈이 눈치를 보고,

    "그냥 팍팍 뚫으시오, 젠장!" 백호사령이 더 신이 난다.

    "자 이제 11개의 잣대를 만들어 이렇게 물 통 안에 부표를 띄우고 잣대를 꽂습니다."

    "잣대는 대나무를 쪼개서 만들면 되오?"

    "그렇게 하시오, 아무려면 어떻소. 이제부터 내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보았던 자격루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오. 먼저 열두 개의 나무 인형을 상상하고, 여러분이 익히 들었던 종루의 종소리 북소리 징소리를 들어 보시오."


     


    장영실이 감옥에서 만든 물시계 자격루.




    옥 안은 일시에 고요해진다. 나는 그 황홀한 자격루의 시계소리를 듣는다. 사람도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열두개의 나무 인형과 고수도 없이 저절로 울리는 종소리 북소리 징소리를 듣는다.

    "이 물시계는 매시간 자동적으로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려주는 신기하고 오묘한 것이오. 1시간가량으로 물이 떨어져 차면 자동적으로 사시신이라고 불리는 나무인형이 종을 쳐서 시간을 알려 줍니다. 종이 울리면 이 종소리가 몇 시인가를 알려주는 보시신이 시간을 알려주는 패를 들고 자동적으로 슬그머니 나타나지요. 보시신은 모두 열둘인데, 십이지신, 즉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유예 무해의 이름을 가집니다. 경을 알리는 사경신은 숫자대로 북을 울리고, 점을 알리는 사점신은 점의 숫자대로 징을 울립니다. 이렇게 삼신과 십이신이 주군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물시계의 시간에 따라 종루에서 종을 울리면 궁성문과 도성문이 닫히고 열리지요. 북한산성을 쌓는 역군들도 시간에 맞춰 작업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절기에 따라 통금시간에 소리를 내 주어서 민생이 편안해지고, 순라꾼들은 시간에 맞추어 순라를 돕니다. 이 조선에서 태어나는 왕자님과 공주님뿐만 아니라, 이 조선의 모든 아이들은 자기가 몇날 몇시에 태어났는지 알 수 있지요. 이 자격루는 자동입니다. 돌보는 관리가 없어도 나무 인형이 저절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고 징을 두드려 시간을 알려 줍니다. 세상에 이런 신기하고 오묘한 것을…. 주군이 만드셨습니다."

    "대호군 장영실이 만들었지." 조순생이 다가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그럼, 그래서 대호군이 되셨지." 임효돈이 내 손을 잡아 준다. 나는 그만 설움에 겨워 눈물을 왈칵 쏟는다 .

    영실아아-

    그런데 이게 왠 소린가? 낯익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멀리서 들리는 것이다. 나는 급히 눈물을 훔치고 귀를 기울인다.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드세. 곤장 맞을 일만 남았네."

    임효돈의 말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어디선가 내게 다가오고 있는 저 소리.

    "영실이 게 있느냐아-"

    아, 저 소리 저 소리는 바로 주군의 음성이다.

    "네, 주군, 저 여기 있습니다아-"

    "이거 왜 이래? 누구에게 말을 하는거야?"

    최효문의 목소리도 물 먹은 소리로 들린다.

    "저런, 실성했소."

    백호사령의 혀 차는 소리도 환청처럼 들린다.

    "그냥 내버려 두시오. 저러다가 쓰러져 잠들 것이오."

    이건 조순생의 음성이다.

    아, 그러나 봐라, 주군의 거소에 등불이 켜진다. 내시 둘이 총총걸음 긴 마루바닥을 쥐새끼처럼 달려 간다. 바로 그때, 주군이 흰 바지 적삼 차림으로 벌컥 문을 열고 긴 마루바닥을 지나 내게로 오시고 있다.

    영실아아-

    밤의 장막을 여는 주군의 음성이 크게 울리면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뒤로 물러나고 주군이 계시는 침소의 긴 낭하가 다가온다.

    "네에 주군- 영실이 달려갑니다."

    나는 달린다. 달리다가 무언가에 세게 부딪혀 코에 아찔한 충격이 온다. 엉겁결에 손을 대니 코뼈가 스르륵 내려앉는다. 이걸 어쩌나 주군이 나를 부르는데….

    "영실이 이놈, 내 침소 밖에 있으라고 했는데 어디로 사라졌나?"

    "저 여기 있다굽쇼."

    어, 이거 왜 이래. 무언가에 부딪혀 주둥이가 띵나발이 되었는가. 말이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안타까워서 엎어지듯 내달아 주군 발밑에 엎드린다.

    "이놈아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

    "네 저 여기 오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넘어도 넘어도 산이었습니다. 산에서 철도 캐고 구리도 캐고 해서 주군께 바칠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늦었습니다."

    "내가 지금 등창이 너무 심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나를 좀 대궐 마당으로 데리고 나가 주렴."

    "네, 어느 어르신 명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그런데 계단을 내려서시는 주군께서 다리를 저신다.

    "아니, 왜 다리를 저십니까?"

    "이놈아 내 왼쪽 다리 관절염이 십 년째다.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글쎄요, 제가 요즈음 제 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그럼 황송하지만, 제 등에 업히시지요."

    "그래도 괜찮겠느냐?"

    "아무렴입쇼."

    "나보다 나이가 열댓 살이나 많은데."

    "하늘 같은 주군께 나이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올해 마흔다섯이니…."

    "예에, 낼 모레가 육십입니다요. 어서 업히시지요."

    주군은 내 등에 업히셨다.

    나는 그만 짜릿한 황홀감에 젖어든다. 주군의 몸은 크지만 부드럽다.

    내 살갗에 닿는 주군의 피부가 얇은 모시 저고리 사이로 비져나와 내 등을 애무한다. 아,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살아 왔는가.

    "영실아 저기 하늘을 봐라. 저기 뭐가 보이냐?"

    "별이 보입니다."

    "저 별자리들을 내게 알려다오."

    "네, 여름 하늘 별은 가장 밝게 빛납니다. 북에서 동쪽으로 길게 은하적도가 흐르고 그 위로 백조가 날고 있지요. 그 양쪽 하늘 강변에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습니다."

    "내 별은 어디 있느냐?"

    "당연히 저기 가장 밝은 별 북극성이지요."

    "그럼, 네 별은?"

    "저는 별이 없습니다."

    "왜?"

    "상놈은 죽어서 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 어디서 빛나고 있을지 모르지만 네 별은 어둠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아, 빛이 약해서 잘 안 보인단 말씀입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좀 섭섭하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내 별이 여름 하늘에서 동쪽 끝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구나."

    "아, 저 별자리야 중국 하늘에서 본 별자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하늘 별자리를 갖지 못했구나."

    "그렇습니다 주군."

    "나를 내려 놓거라."

    "화가 나셨습니까?"

    "슬프다. 내가 하늘 모서리에 저렇게 처박혀 있다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별자리를 옮겨 놓아 버리지요, 뭐."

    "네가 어떻게 저 여름 하늘 수백 수천 개나 되는 별자리를 옮긴단 말이냐?"

    "저는 주군이 명하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구나."

    "저도 한없이 기쁩니다. 주군."

    "그럼,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중심으로 별자리를 옮기도록 해라."

    "그럼 똑바로 서 계십시오. 제가 주군을 중심으로 별을 관측하겠습니다."

    "영실아-"

    "네, 주군."

    "이렇게 서 있기가 힘들구나. 한쪽 다리가 짧고 아파서 나는 항상 이렇게 삐딱하다. 그래서 바로 서 있기가 힘들구나. 네가 대신 좀 내 자리에 서 있어주렴."

    "그럼 그러지요."



    "거기 서서 하늘을 보거라."

    "보고 있습니다."

    "별을 세거라."

    "별 하나 별 두울 별 셋 별 네엣 별 다섯 별 여섯 별 일곱 별 여덟…. 내 별자리 하나 가져도 되겠습니까, 주군."

    "…."

    주군이 사라져 버렸다.

    "주군, 어디 계십니까?"

    "…."

    "주군…."

    나는 문득 무서운 느낌이 들어 별을 본다.

    맙소사! 밤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다.





    ※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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