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연극소설 궁리(窮理)_이윤택
  • ▶ <11>9장.세종의 천문 역법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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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리(窮理)

     

     

    이 윤 택

     

     

    <11>9장.세종의 천문 역법 프로젝트

     궁리(窮理)-장영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장영실은 세종의 침소를 관리하는 내시 노릇을 자청하였다. 세종의 눈병 등창 관절염 등 병수발을 맡은 치료사였고, 세종과 하늘 별자리의 운행을 토론하는 과학적 동반자이기도 했다.(장영실 역 강학수, 세종 역 이원희)






    - 영실이가 아니면 누가 한 밤중에 내 등창 고름을 빼준단 말인가


    자격루를 경복궁에 세우는 그 해
    나 이천과 장영실은 갑인자라는 구리 활자를 보급했다.
    활자보급이야 말로 성리학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나와 장영실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나 이천과 장영실이 다시 만나 궁에 별을 관측하는 간의대를 짓기 시작한 세종 14년(1432년)부터 장영실이 자동 물시계 옥루를 만들고 내가 흠경각을 세운 세종 20년(1438년)까지 7년 동안은 조선의 천문 과학이 르네상스를 이룬 시기였다. 물론 주군의 측근 대신 정인지가 없었다면 물적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이순지와 같은 천재 수리학자 김담과 같은 천문 역법 전문가가 없었다면 이론적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세종의 천문 역법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5인방(정인지, 이천, 장영실, 이순지, 김담)은 서로 간에 출신 성분이 다르고, 공부한 분야와 직책도 달랐지만, 최고의 팀 워크를 유지했다.


    정인지가 '칠정산 내편'을 펴내면서 조선의 별자리를 정리했고, 이순지는 불가사의한 산술 원리로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일식 시각을 영점 이하 초 시간대로 맞췄다. 천문 기구 제작 원리는 주로 김담의 지식에서 나왔고, 그 지식을 구체화시킨 자는 장영실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로서 지중추원사로 발령을 받은 후 호조판서까지 승진하였다. 천문역법이나 수리학은 원래 호조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다. 내가 호조판서로 발령이 나자 왜 국경 수비대를 관장하던 장군을 병조에 발령 내지 않고 호조에 발령내느냐고 말들이 많았다. 그 시절 의정원 육부는 이미 새로운 성리학파들의 권세 아래 있었다. 태종과 함께 했던 부국강병의 주역들은 하나 둘 밀려났고, 황희 맹사성 등 두문동 은둔 학자들이 관직에 등용되었다. 주군은 아버지와 다른 자신만의 의정원 대신들을 등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군은 병조만은 예외적으로 태종의 신하들로 남겨 주었다. 급진적인 성격의 조말생 대감이 병조판서직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말생은 병조판서를 끝으로 궁의 뒷방 신세로 밀려났다. 개국공신에게 내리는 지팡이(궤장) 한 개 받아 들고 궁 뒤뜰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만 것이다. 나는 호조판서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432년(세종 14년) 명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영실이 지중추원사로 발령받은 이천과 함께 제작한 관천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이끄는 조선은 학문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그들은 성리학적 사유와 청빈의 실천을 통해 만인의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반면 나 이천이 이끄는 호조에서는 '마이더스의 손' 장영실이 존재하면서 조선의 과학 르네상스를 구가하였다. 황희를 중심으로 한 의정원 조직은 주군으로부터 상당 부분 권력을 분점 받아 행사하고 있었다. 이조 형조 공조 뿐만 아니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까지 행정 감찰 경찰 분야는 각 부서가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태종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태종은 정도전을 박살내면서 군주 독재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이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꿈꾸었던 신권(臣權)정치가 주군에 이르러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군은 병조, 호조, 예조를 직할 통치했다. 행정 검찰 권력은 황희를 중심으로 한 의정원에 넘겨주고, 병조와 호조 예조만 직할 관리로 둔 것이다. 병조를 직할하겠다는 것은 당연히 유사시에는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군의 호조와 예조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예법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 어떤 창의적인 일을 실현하기 위한 직할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고, 창의적 지식은 예조에서 실천적 작업은 호조에서 전담하여 일을 진행하게 한 것이다. 예조에서 정인지를 중심으로 이순지와 김담의 이론이 연구되고, 호조에서 나와 장영실의 기술이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주군의 부름을 받고 내가 영실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이듬 해(세종 15년,1433년) 조선 최초의 자동 물시계 '자격루'가 첫선을 보였다. 영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물시계는 가히 세계 최초 최고 기능을 지닌 시계였다. 무엇보다 인간의 도움 없이 물의 흐름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였던 것이다. 이 공으로 영실은 정4품 호군 벼슬에 오른다.

    그러나 영실은 정4품 호군 벼슬에 올라도 여전히 천민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료들이 말을 놓고 지내던 버릇을 바꾸지 않았고, 영실 또한 개의치 않았다. 이순지 같은 새파란 나이의 문신들도 연상의 영실에게 자네, 이것 좀 해 보게 식으로 하대를 했다. 그러면 영실은 네, 우리 천재 학자님의 가르침인데 어련하실라구요… 매사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순지의 말 버릇을 문제 삼아 호되게 질책한 적이 있다. 어린 문사 이순지는 상당히 당황스러워 했지만, 오히려 영실이 부담스러워 했다. 벼슬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벼슬이 오른다고 출신 성분이 바뀌겠습니까? 그럼, 저는 벼슬이 떨어지면 양반이 됩니까?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제가 벼슬 없이 양반 행세를 하려 들면 세상의 우스갯거리가 될 겁니다. 저는 그냥 지방 관노비 출신으로 사는 게 맘 편합니다. 그러나 지방 관노비도 호군 벼슬에 오를 수 있고, 천문 역법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귀중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조선에서는 결코 천민 신분을 벗어날 수 없으니, 차라리 중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라고 했던 내 권유에 영실은 그때 별스런 응답을 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영실은 출신 계급 그 자체에 대해 별스런 의미를 두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영실은 천민이 양민을 꿈꾸고, 양민이 양반을 꿈꾸는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 있었다. 영실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인간 그 자체,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영실은 호군 벼슬에 올라서도 자신의 거처를 궁 바깥에 별도로 두지 않았다. 영실은 궁궐 내시와 함께 생활하면서 주군의 침소를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또 궁내 대신들이 말이 많았지만, 주군의 명령이 분명했다. 



       
      지중추원사 이천, 집현전 직제학 김돈, 호군 장영실의 팀 워크가 창조해 낸 금속활자 갑인자. 조선의 인쇄술은 갑인자에서 완성되었다.
    "도대체 어느 의원이 한 밤중에 벼락같이 달려와 내 등창 고름을 빼내준단 말인가? 의원을 부르면 두 서너 시간 뒤에야 오는데 그동안 내 고통을 어이하란 말이냐. 어느 내시나 궁녀가 밤새도록 내 아픈 관절을 주무르고 침을 놓아준단 말인가. 그럴 의지도 의술 능력도 없지 않느냐. 그래서 영실이가 내 침소를 관리하는 것이다. 영실이는 내 단방약이다. 내가 영실아, 등창이 쑤시는구나, 하면 열 셀 동안에 등창을 터뜨려 고름을 짜 내고 고약을 발라준다. 너네들이 그런 애정과 능력이 있느냐…."

    주군이 자신의 병세와 음식에 대한 투정을 부리면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주군은 넷째 왕자로서 일찌감치 권력과 거리를 두는 지혜를 익혔다. 맏형이 태종의 권세를 자신에게 주어질 권세인 양 착각하다가 4대문 밖으로 내쳐지는 것을 목격한 이후 특히 아비의 권위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이었다. 임금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된 바로 그해에 장인어른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장모님을 종으로 귀양 보내면서도 주군은 아무 힘도 없는 임금으로 존재해야 했다. 나이 어린 임금과 역시 어린 소헌왕후는 며칠 밤낮을 소리 죽여 울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주군의 음식에 대한 탐욕과 병치레는 태종도 어쩌지 못했다. 몸이 비대해져서 고기를 삼가야 한다는 의원의 진단대로 식단을 꾸려 바쳤더니 왕자는 밥상을 엎어버렸다. 운동을 권하면 아프다고 드러눕고, 태종의 명으로 사냥을 다녀오면 사나흘을 드러누워 끙끙 대었다. 태종도 이런 주군의 인간적 약점에는 관대했다. 태종이 임종을 맞이하면서 상중에도 임금은 육식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주군에 대한 아비로서의 배려는 각별했다.

    여기에다 여탐까지 겹쳐졌다. 소헌왕후의 집안이 임금 처족으로서 권세를 부리려다 박살이 난 이후, 태종은 한꺼번에 세 명의 후궁을 어린 임금에게 붙여주었다. 일종의 희귀한 권력 분산 방침이었던 것이다. 소헌왕후는 멸족 당한 가문의 충격 탓으로 가능하면 궁 밖에 나가 살기를 원했다. 진성대군을 낳은 후 소헌왕후의 뜻은 이루어져 아예 궁 밖에 나가 살았다. 궁에는 다양한 궁녀들이 존재했고, 주군은 식탐만큼 여자를 즐겼다. 그러나 주군의 여탐에 사랑은 없었다. 그냥 맛있는 고기를 먹 듯 그렇게 여자를 먹어 치운 것이다. 주군의 사랑은 단 한 사람 소헌왕후 뿐이었다. 비운의 운명 속에 살아야 했던 소헌왕후를 주군은 끔찍이 아끼고 존중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성리학적 교훈도 주군의 병치레와 식탐과 여탐에 대해서는 예외 조항이 되고만 것이다. 배운 자의 체면과 태도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로 구성된 의정원 대신들이 왜 주군의 이런 비상식적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주군은 권력에 대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다양한 대신들의 논의를 들어주면서도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정치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일방적인 주장을 경멸했고,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큰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희 맹사성을 위시한 이름난 학자와 예술가를 존중하는 임금이었다. 태종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독재를 겪은 정치가와 학자들은 새로운 주군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임금이 바뀌니 이런 세상이 오는구나…. 태종 치하에서 숨어 살던 성리학자들은 새로운 주군의 배려에 힘입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임금의 사생활은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임금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러나 주군이 성 밖의 사냥꾼, 승려, 의원, 산학자, 무예가, 점성술사, 연금술사, 천문 역법학자 등 다양한 방외인(方外人)들을 궁에 불러들이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영실이 상의원 별좌 벼슬을 얻을 때 이조판서 허조는 천민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 반대하고, 병조판서 조말생이 병조나 호조에서는 기술적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채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때 영의정 황희는 묵묵부답, 침묵으로 반대의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자격루의 완성으로 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결정적 결과를 낳았다. 그 이듬해 경복궁 보루각에 자격루를 설치하고 조선의 표준시계로 채택하면서 의정원 대신들의 반대는 설득력을 잃었다. 이때 다시 영실을 정4품 호군벼슬로 특진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을 때, 영의정 황희는 극구 찬성의 입장을 보였다. 내가 보는 황희는 참으로 이중적인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세상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읽고 그 흐르는 물줄기 따라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인간인 것이다. 

    그 점에서 나 이천과 장영실은 결코 정치적 인간이 되지 못할 위인이다. 세상의 흐름에 아랑곳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죽자 사자 몰두하는 인간은 언젠가 세상으로부터 뒤통수를 맞기 마련이다. 조말생 대감은 궁의 뒷방 처지로 물러나면서 내게 황희를 경계하라고 귀띔을 준 적이 있다.



    "이천 장군, 자네가 태조 태종조의 무장으로 이제 새 정권의 호조판서직에 오르지만, 그 자리가 참 칼날 위에서 춤추는 자리일세. 무엇보다 의정원을 장악하고 있는 성리학자들로부터 주군의 왕권을 보호해야 하는 자리일세. 이때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자는 병조를 장악하고 있는 김종서 대감 뿐이네. 황희를 조심하게. 그는 지금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지만, 사실 태종조 하급 관리일 때 뒷돈을 받아먹다가 내게 걸린 적이 있는 위인일세. 내가 황희의 학문과 사람됨을 안타까이 여겨 가볍게 훈방 조치해 주었지. 그런데 그 황희가 결국 내 뒤통수를 쳤거든, 핫하하. 나야말로 어리석은 태종의 앞잡이였을 뿐이네, 나처럼 실패한 정치가가 되지 말게, 그러나 내 한 가지의 충고는 반드시 듣게, 결코 두 임금을 섬기지는 말게,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자네의 주군은 한 사람 뿐이어야 하네, 설사 주군이 자네를 오해하거나 미워하고 내치더라도 서러워 말고 묵묵히 그 곁을 지키게, 그게 후대에 자네 이름 석자를 깨끗이 남기는 길일세, 나는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한 정치가야, 태종과 함께 사라졌어야 옳았다구…."



       
     
    지금 와서야 조말생 대감의 충고가 얼마나 앞을 내다 본 식견이었는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나와 장영실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 했다. 자격루를 경복궁에 세우는 그 해 나와 장영실은 갑인자라는 구리 활자를 보급했다. 활자보급이야 말로 성리학 발전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나와 장영실 프로젝트는 세종 20년(1438년) 자격루를 보완한 신형 자동 물시계 옥루 제작과 천문관측소인 흠경각을 새우는 것으로 사실상 끝났다.



    주군은 어느 날 갑자기 장영실을 경상도 채방별감 발령을 내었다. 경상도에 가서 광산 일을 하라고? 이때, 나나 영실이나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깨달았어야 했다. 영실은 가라면 가야지오 하는 생각으로 내려가서 열심히 일했다. 창원 영해 의성 등지 경상도 곳곳을 뒤지면서 철을 캐어 바쳤다. 나는 영실이 없는 천문 프로젝트라면 일찍 사직상소를 올리고 몸을 피해야 옳았다. 나는 그 이듬해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삭탈관직 당하고 천안으로 유배되었다. 함경도 여진족 자치구에서 이탈한 무리들이 관군을 해치고 마을을 약탈했다는 것이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십년도 전에 내가 평정한 여진족 자치구의 약탈 사건이 지금 호조판서로 일하고 있는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졸지에 천안으로 유배되어 두해를 보내었다. 무고죄에 가깝다고 몇 번의 상소를 올린 끝에 지난해에야 유배지에서 풀려나 내게 새로운 관직이 주어졌다. 태조 이성계의 능을 수리하고 지키는 산릉수리도감 제조 노릇을 하란다. 핫하, 태조 태종시대를 가로질러 온 호조판서에게 선대 능을 지키라고…. 기막히는 세상이구나,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지 하는 판국에, 앗뿔싸, 영실이 만든 임금의 수레바퀴가 빠져 달아나 버린 것이다! 


    ※이 기획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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