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韓獨 생태시인 100인>단절 없는 생명의 길_송용구


  • <제7회>


     한국과 독일의 시인 10인(7)
     단절 없는 생명의 길



     


    송용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고재종, 오규원, 김지하, 이건청, 정호승

    *독일 시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 사라 키르쉬, 아르님 유레, 크리스티네 티임트,

    예르크 부르크하르트

     

     

     

     

     

    단절 없는 생명의 길

    - 고재종의 「들길에서 마을로」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 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그 싱그러움에 이르러선 문득 들이 넓어진다. 그 넓어짐으로 난 아득히 안 보이는 지평선을 듣는다. 뿌듯하다. 이 뿌듯함은 또 어쩌려고 웬 쑥국새 울음까지 불러내니 아직도 참 모르겠다, 앞강물조차 시리게 우는 서러움이다. 하지만 이제 하루 여미며 저 노인과 나누고 싶은 탁배기 한잔. 그거야말로 금방 뜬 개밥바라기별보다도 고즈넉하겠다. 길은 어디서나 열리고 사람은 또 스스로 길이다. 서늘하고 뜨겁고 교교하다. 난 아직도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게 좋으나, 그 어떤 길엔들 노래 없으랴, 그 노래가 세상을 푸르게 밝히리.

     - 고재종의 「들길에서 마을로」

     

    *「들길에서 마을로」: 1957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한 시인 고재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등의 시편을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시에서 펼쳐지는 ‘농촌’, ‘들’, ‘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흙’, ‘들’, ‘농촌’은 농민들의 생활공간이자 터전이다. 그러나 이곳은 농민들이 독점하는 소유지가 아니다. 고재종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이 공간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집’이다. ‘본향’이라고 말해도 좋은 생명공동체의 ‘집’이다. 가족들의 삶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곳이 ‘집’인 것처럼 농촌의 ‘흙’과 ‘들’에서는 농민들, 아이들, 녹두꽃, 참새떼, 까치, 청대숲, 미루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의 삶이 가족의 핏줄처럼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고재종의 시를 ‘농민시’ 혹은 ‘농촌시’로 규정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세계를 ‘농민시’의 농촌적 정서에만 묶어둘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농촌의 ‘들’과 ‘흙’ 위에 살고 있는 뭇 생명들의 초록빛 네트워트가 그의 시 속에서 정정淨淨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고재종의 시를 “ ‘농민시’의 토대 위에 ‘생태시’의 생명의식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는 서정시의 모델”이라고 정의해본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날랜 사랑』(1995),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1997), 『그 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 등이 있다. 시 「들길에서 마을로」는 1997년 ‘문학동네’에서 간행한 고재종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에 수록되었다. “들길”에서 “마을”로 흐르다가 또 다시 마을에서 들길로 되돌아오는 생명의 순환 시스템이 “해거름”의 노을빛을 받아 눈부시게 살아 꿈틀거린다. “망초꽃들”의 모습은 “산그림자”에 젖어 “눈물방울”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그 눈물방울은 망초꽃들을 길러낸 물방울이기도 하다. 물방울들은 “벼”의 몸 속에 “점점”이 맺혀 진주보다 귀한 “쌀알”이 되었다가 “벼 끝으로 올라가”서는 투명한 “수정방울”로 변용된다. 이와 같이 물방울들은 망초꽃과 벼 사이에 생명의 길을 연다. 그 길이 “수정”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망초꽃도, 벼도, 시인도 오늘은 “모두” 어제의 몸이 아닌 “새 몸”으로 거듭났다. 신생新生을 체험한 이는 그들만이 아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영원한 노래의 맞수 “새”가 있지 않는가? 시인의 노래를 닮은 새들의 “울음”을 먹고 “또랑물 소리”를 마시며 “벼들”의 키는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란다.” 쏙독♬ 쏙독♬ 초록빛 울음의 멜로디로 “저녁들”을 물들이는 “쏙독새”는 “들”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의 생명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생태적 전령傳令인가? 쑥국♬ 쑥국♬ 쑥빛이 흐르는 노래의 연금술사 “쑥국새”는 “또” 어떤 존재인가? 쑥국새는 만물이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 받는 공생共生의 “뿌듯함”을 시인의 영혼 속에 더욱 뿌듯이 채워주는 정서적 영양사營養士인가? “대숲”이 병풍처럼 감싸주는 농부들의 “마을”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가? “밤꽃”보다 “환한” 마을의 밥짓는 연기는 싱그러운 “밤꽃 향기”를 품어 안고 대숲을 넘어 “강물”과 함께 “들”을 어루만지며 “지평선”을 향해 흘러간다. 마을의 연기는 단절 없이 흘러가면서 마을과 들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들은 “쑥국새 울음”을 품은 연기를 먹고 뿌듯하게 살찐다. 들은 밤꽃 향기를 머금은 연기를 마시며 지평선을 향해 넓어진다. 농민들, 망초꽃, 벼, 쏙독새, 쑥국새, 강물, “개밥바라기별”, 밤꽃 사이에 생명의 “길”이 “열린다”. 그 길은 밥 짓는 구수한 연기로 연결되어 “들”이라는 공생의 네트워크를 점점 더 넓혀간다. “들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지워진 경계의 주막 의자에 앉 아 마을의 농투산이 “노인”과 함께 “탁배기 한 잔” 기울이며 부르는 시인의 “노래”여! “그 노래”는 연기를 닮은 “오롯한” 생명의 기운이 되어 마을에서 들로 열리는 생명의 길을 “푸르게” 채색한다.

     


    시인의 고향인 전남 담양의 “대숲”.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정겹다.










    길을 단절시키는 구름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퇴로退路  



    시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1917~1994)

     

     

    지평선 나무가 입은 옷은

    은백색 과일들

    추수꾼들이 입은 옷은

    방독의防毒衣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는

    익숙한 노래 속에

    어김없이 비쳐드는

    아침 노을

     

    태양을 기다리던 추수꾼들

    독한 공기의 구름층을 머리에 이고

    또 다시 빈 손으로

    물러나는 추수의 길

     

    남은 것은 사과를 갈구하는 마음뿐

                             -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퇴로」

     

     

    *「퇴로 Rückweg: 1917년 독일 반네-아이켈Wanne-Eickel에서 출생한 여류 시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Hildegard Wohlgemuth. 그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독일 문단에 확고히 각인시킨 시기는 1960년대였다. 특정 장르에 편중되지 않는 창작능력을 발휘하였지만 문단과 대중에게 인식된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위상은 ‘시인’이었다. 특히 ‘61 그룹’의 멤버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했던 작품들은 급진적 산업화 현상이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시들이었다. ‘사회문제’와 ‘생태문제’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 ‘생태시’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1965년에 발표한 『시집. 새로운 공업문학』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생태의식과 사회의식을 대변하는 시집이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시집. 새로운 공업문학』(1965), 『일요일 저녁의 공업도시는』(1971), 『누구를 장미들에게 보내야만 하는가?』(1971), 『평화』(編著. 1981) 등이 있다.

    「퇴로」는 1981년 뮌헨의 체. 하. 베크C. H. Beck 출판사에서 간행한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수록된 작품이다. 엔솔로지를 편찬한 마이어-타쉬 교수는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생태시’ 2편을 이 책에 수록하였다. 한국 시인 고재종과 독일 시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 사이의 정신적 접점을 찾아보자. 고재종 시인은 “들”과 “마을” 간의 경계를 허무는 농촌의 생명공동체 속에서 ‘생명’을 가진 만물 사이에 열리는 소통의 “길”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농민들의 밥 짓는 “연기”를 닮은 시인의 사랑 노래가 그 “길”의 네트워크를 자애롭게 안아주고 있다. 길을 감싸 안으려는 시인의 모성적 손길은 ‘저항’의 또 다른 몸짓이다. 과학기술과 공업의 급진적 발전에 따라 도시의 공간이 확장되는 반면에 농촌의 “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농민들의 “길”은 갈수록 끊어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생겨나는 ‘본능적 저항’이 들과 길을 지켜내려는 모성적 사랑을 낳았다. 독일 시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시 「퇴로」에서도 이러한 서정적 저항의식을 읽을 수 있다. ‘생태시’의 문학적 정체성은 서정적 저항의식에 있음을 두 시인의 작품이 대변하고 있다.

    시 「퇴로」에서 ‘사회’를 향한 비판의식을 낳는 저항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농민들을 향한 시인의 사랑이다. 공장 지대는 넓어지고 “들”은 왜소해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농민들에게 당면한 ‘생태위기’를 도시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능동적 노력도 시인의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포위망을 좁히듯이 밀고 들어오는 공장 지대로부터 바람에 실려 오는 “독한 공기”는 “들”을 점령하여 두터운 “구름층”을 쌓아올린다. 맑은 햇빛 대신 독한 공기를 마시고 자라난 “과일들”은 여름 내내 “은백색”의 창백한 입술로 “때 이른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익숙한” 현실이 되었다. 추수할 때가 되었지만 “또 다시 빈 손으로 물러나는” 농민들이여! 건강한 과일의 배꼽에 연결될 “태양”의 탯줄을 갈구했던 농민들이여! 당신들의 희망조차도 “독한 공기” 속에 갇혀 질식해가는가?  

     

    1981년 라인베크Reinbek‘로볼트Rowohlt’ 출판사에서 간행한 시와 산문집 『평화』의 표지.
    편자編者인 힐데가르트 볼게무트의 반전의식反戰意識이 잘 나타나 있다.

     












     식수 공급차와 숨결 트럭의 상호부조 
     - 오규원의 「나무 속의 자동차」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밤낮없이 물을
    공급하는
    나무
    나무 속의
    작고작은
    식수 공급차들


    뿌리 끝에서 지하수를 퍼 올려
    물탱크 가득 채우고
    뿌리로 줄기로
    마지막 잎까지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나무 속의
    그 작고작은
    식수 공급차들

    그 작은 차 한 대의
    물탱크 속에는
    몇 방울의 물
    몇 방울의 물이
    실려 있을까
    실려서 출렁거리며
    가고 있을까

    그 작은 식수 공급차를
    기다리며
    가지와 잎들이 들고 있는
    물통은 또 얼마만할까


     - 오규원의 「나무 속의 자동차」

     

     

    *「나무 속의 자동차」: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시인 오규원. 그는 1968년 『현대문학』지에 추천완료 되어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관념성이 짙은 시작품을 발표하였지만 중기 이후엔 자본주의 체체의 폐단에 대한 비판적 안목이 강해지면서 관념성을 탈피하는 ‘해체주의’적 경향의 시들을 발표해왔다. 사람의 관념과 시인의 주체 속에 갇혀 있는 ‘사물’을 해방함으로써 ‘사물’의 고유한 모습과 속성을 직관적直觀的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날(生) 이미지’의 시학이 펼쳐졌다. 1987년에 발표된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를 비롯하여 1990년대에 이어진 오규원의 시집 속에는 주관적으로 변용된 ‘사물’이 아니라 타자他者로서 독자성과 독립성을 누리는 ‘사물’의 고유한 존재가 살고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오규원 시인의 시집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존재의 집”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고, “사물의 마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직관은 ‘사물’ 내부의 움직임과 사물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한 직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규원의 시에서 사람과 사물, 사람과 자연 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생태시’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을 초청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사랑의 기교』(1975), 『가끔은 주목받는 생(生)이고 싶다』(1987),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나무 속의 자동차』(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등이 있다. 2007년 2월 서울에서 타계한 후 2008년 유고 시집 『두두』가 출간되었다.

    「나무 속의 자동차」는 1995년 ‘민음사’에서 간행한 오규원 시인의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와 2008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개정판으로 간행한 같은 시집 속에 수록되었다. “나무”라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역할과 존재의 의미를 애니매이션처럼 명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무의 역할과 존재의미란 무엇일까? 나무는 살아있는 ‘몸’으로 끊임없이 활동하는 유기체다. 나무는 지구를 숨쉬게 만드는 ‘초록빛 허파’다. 나무는 지구 전체의 생물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생태계의 ‘생명 파이프 라인’이다. 그 파이프 라인의 내부를 들여다 보자.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핏줄처럼 생명의 길이 열린다. 그 녹색의 도로道路를 따라 혈액과 같은 수액樹液을 “공급”해주는 “식수 자동차들”이 있다. 그들은 나무의 세포들이 아닌가? 그들은 “가지” 마을과 “잎” 동네에 “물”을 실어 나른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나무의 세포들이 비밀스런 역할을 시인에게 들키고 있다. 사랑의 카메라처럼 밝은 시인의 눈빛 안에서 그들은 “작은” 식수 트럭의 임무를 촬영당하고 있다. 식수 자동차의 “물탱크” 속에는 나무의 혈액인 수액이 “가득 차” 있다. 싱싱한 열매를 신생아처럼 키워낼 양수羊水 같은 수액들이 식수 트럭의 물탱크 속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물을 공급 받은 “가지” 마을과 “잎” 동네는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공장으로 변하여 식수를 가공한다. 식수를 원재료로 삼아 모든 생물에게 공급할 무형無形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마을 어귀를 닮은 가지 끝의 공장으로부터 생태계 전체를 향해 유통되는 천연天然 제품이여!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생필품, 산소여! 모든 존재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가장 행복한 재화는 바로 그대 ‘산소’가 아닌가? 나무의 세포들이 수액을 실어나르는 “식수 공급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데 이어 “가지” 마을의 공장에서 생산된 천연 재화인 ‘산소’가 이제는 스스로를 운반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사람의 숨통 속에 숨결을 불어넣는 ‘숨결 공급차’여! 산소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숨결 트럭’의 운송 본부는 “나무”다.

    러시아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은 생태계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자연법칙을 만물의 “상호부조”로 보았다. 대우주大宇宙뿐만 아니라 “나무” 라는 소우주小宇宙 안에서도 뿌리, 줄기, “가지”, “잎”, “물”이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시스템을 만나게 된다. 오규원의 시 「나무 속의 자동차」는 ‘유기체적 시스템’을 녹색의 언어로 형상화한 ‘시적詩的 마이크로코스모스’다. 

     


    나무의 세포 조직. 세포들의 활동을 “식수 공급차”의 운송에 비유할만하다.

     

     

     

     

     

     

     


     

    인류에게 띄우는 묵시록의 편지

    - 사라 키르쉬의 「그 때 우리에겐 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라 키르쉬(1935~2013)

     

     

    그 때 우리에겐 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지는 열기로 가득 찰테니까요

    숲에선 증기가 피어오르고, 모든 바다들은

    용솟음치고, 구름들은 젖무덤 같은 동물 무리를 이루어

    몰려 오겠지요 어머어마한 구름 나무들

     

    찬란히 빛나는 태양의 얼굴이 창백합니다

    공기(空氣)는 손에 잡힐 것만 같아서 나는 그것을 한 움큼 쥐어봅니다.

    거만한 소음을 윙윙거리는 바람이

    공기를 눈(眼) 속에 쑤셔 넣어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벌거숭이 몸으로 걸어가는 우리는

    문(門)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거주지에

    단 한 사람의 동행자도 없이 둘이서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잠자리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개들도 말을 잃었습니다 내 옆으로 누가 다가오든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개들의 혀는

    소리 없이 불쑥 부풀어 오릅니다 청각이 마비된 그들

     

    하늘만이 우리를 에워싸고 비(雨)속엔 거품이 일어날 것입니다

    추위는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돌들도, 가죽꽃들도, 우리의 육체도, 비단도

    모두 다 열(熱)을 토해낼 것입니다 청명한 광택이

    우리 안에 남아있을 것이니 우리의 육체는 은빛으로 빛날 것입니다

     

    내일 그대는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

      


    1984년에 출간된 사라 키르쉬의 시집

    『고양이의 삶 Katzenleben』표지.

     

     

    *「그 때 우리에겐 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935년 독일 하르츠 지방의 림린게로데Limlingerode에서 출생한 시인 사라 키르쉬Sarah Kirsch.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독일민주공화국(DDR 東獨)의 시민이 되어 1954년부터 1958년까지 할레Halle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다. 생물학사 학위를 받은 바로 그 해(1958)에 시인 라이너 키르쉬Rainer Kirsch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 생활은 사라 키르쉬에게 있어서 문학 인생의 본격적 출발점이 되었다. 1960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키르쉬는 ‘서정시 파도Lyrikwelle’라는 문학운동을 주도하였다.

    ‘독일민주공화국(DDR)’ 정부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의 역할만을 작가들에게 강요해왔다. 동독의 작가들은 이른바 ‘건설문학’ 혹은 ‘도달문학’이라는 획일적 문학의 형태 속에 구속되어 예술가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당하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동독 당국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인민을 지배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문학’을 보조적 도구로 활용해나가는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내고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들은 당국의 제재와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인 사라 키르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1976년 동독의 가수 겸 시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에게 내려진 당국의 추방령에 대해 항의하는 공개 서한에 직접 서명을 했다는 이유로 동독의 작가 동맹에서 제명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듬해(1977) 사라 키르쉬가 남편 라이너 키르쉬를 두고 서독으로 이주한 것은 자연발생적인 사건이었다. 서독 문단에서 ‘동독의 사포’라는 애칭을 받을 만큼 문학적 성과를 거둔 시인 사라 키르쉬. 그는 동독 당국의 문학 강령인 ‘건설문학’이라는 획일적 문학경향으로부터 억압당하는 작가의 주관성과 문학의 서정성을 해방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그 당시 동유럽 문학의 주류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지나친 낙관주의와 현실주의에 의해 질식당하는 서정적 자아와 진정한 개인주의를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서정적 자아와 자연 간의 관계, 사람의 내면세계와 자연 간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자연시’ 작품들이 문학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사라 키르쉬의 ‘자연시’는 전원시풍田園詩風의 자연친화적 서정성이 풍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 문학의 전통에 예속된 ‘자연시’도 아니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카를 리하Karl Riha가 “교정된 자연시”라고 명명하였듯이 사라 키르쉬의 ‘자연시’는 사람과 자연 간의 분열에 따른 세계의 파멸을 경고하기도 한다. 묵시록적 편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흔들리는 지구와 몰락해가는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산’, ‘새’, ‘개’, ‘곰’, ‘당나귀’, ‘해초’, ‘물고기’ 등의 삶을 통해 대변하고 있다. 그의 자연시는 필자가 명명한 바 있는 “비판적 자연시”이자 “리얼리즘的 자연시”로서 생태시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라 키르쉬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시골 체류』(1967), 『순풍』(1976), 『연날리기』(1979), 『지상의 나라』(1982), 『고양이의 삶』(1984), 시선집 『시골길』(1985)이 있다

    「그 때 우리에겐 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는 사라 키르쉬가 서독으로 이주하기 전 1967년에 간행된 시집 『시골 체류』에 수록된 작품이다. 시의 첫 행부터 반어적反語的 언어의 “불”이 “피어 오르고” 있다. “불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대지”가 불의 “열기”로 “가득 차서” 지구가 파멸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한국 시인 오규원의 시에서 “식수 자동차”의 “물탱크” 속에 “나무”의 혈액인 “물”이 가득 차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마구 잡이의 개발 행위와 탄소의 과잉 배출로 인하여 “태양”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공기”는 점점 더 잿빛으로 변해간다. 독성에 젖은 공기들은 열대 지역의 영양羚羊 무리처럼 “구름 무리”를 이루더니 토네이도처럼 소용돌이치는 “구름 나무들”의 기둥으로 일어선다. 이 구름 나무들은 식수 공급차가 아니라 산소를 질식시키는 ‘독성 공급차’의 운송 본부다. 산소의 농도가 흐려지고 산소의 양이 줄어들수록 공기의 온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시인의 말처럼 “대지는 열기로 가득 차게 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중단 없이 추구해왔던 핵개발과 핵실험도 인공적인 “나무들”을 만들고 있다. 원폭原爆과 핵폭核爆의 구름 나무들이다. 오규원의 시에서 만났던 나무 속의 식수 공급차는 혈액 같은 생수로 가득 차 있었지만, 사라 키르쉬의 시에서 만나는 “구름 나무” 속의 군용 트럭은 방사능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구름 나무의 뿌리에서 가지끝까지 방사능 병사들을 실어 나르는 군용 트럭의 질주가 멈추지 않는다. 방사능 군단軍團은 탄소 부대와 연합하여 “대지”와 “숲”을 점령한다. 회색빛 연합군은 “열기”와 “증기”로 생물들을 서서히 질식시킨다. 대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유독성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숨이 막혀 죽어갔던 유태인들처럼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은빛”의 증기를 마시며 질식해갈 것이다. “사람”의 살색 “육체”도, 나무의 초록빛 육체도 모두 은빛으로 변색될 것이다.

    “내일 그대는 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입니다”라는 시인의 예언은 시의 첫 행과 함께 반어反語의 쌍생아 역할을 한다. 더 이상 “불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기와 증기의 혼합된 폭발로 인하여 ‘파이어 파라다이스Fire Paradise’로 변해갈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의 지구여! 그러한 비극적 개연성을 예방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않는다면 “천국”이라는 낱말은 지옥의 은유로서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독일 ‘림린게로데’의 생가生家 문지방에 기대어 앉은 시인 사라 키르쉬.
    넬리 작스,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함께 전후
    戰後 독일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경”을 주고 받아야 할 생명들

    - 김지하의 「새 교회」

     

     

    풀잎들 신음하고흙과 물 외치는 날

    나 오랜만에교회에 간다

    산 위에 선 교회

    벽만 있는 교회

    지붕 없는 교회

     

    해와 달과 별들이

    나와 함께 기도하고

    혜성이 와 머물고

    은하수와 성운들 너머

    먼 우주가 내려와 춤추고

     

    여자들이 벌거벗고

    웃는다

    흰 수건 흔들며 노래한다

     

    유혹인가

     

    나의

    새로운 교회

    풀잎의 흙과 물의 교회

     

    예수회 교회

     

    꿈인가

     

    - 김지하의 「새 교회」전문

     

     

    *「새 교회」: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시인 김지하. 그는 『시인』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8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는 가운데 투옥과 재투옥을 거듭했다. 이러한 정치적 저항 운동은 그의 시를 움직이는 경험적 에너지가 되었다.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적五賊」을 비롯한 그의 시작품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1970년대와 80년대 진보세력의 저항운동에 정신적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민중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던 김지하의 ‘저항’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모든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생명운동’으로 변화하였다. 저항의 대상, 방법, 범주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전개하는 저항의 행동방식은 시적詩的 언어로써 ‘생명’을 향한 자애와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 수록된 시 「새 봄. 8」에서 “오늘/ 풀 한포기 사랑하리라/ 나를 사랑하리”라는 다짐이 이를 증명한다.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억압적 세력에 맞서 “사랑”의 힘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그의 문학인생에 있어서 변함없이 살아 돋히는 핏줄의 용솟음이었다. 저항의 면모는 바뀌었어도 본질적 성격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시인이 ‘사랑’해야 할 존재는 가난한 자, 낮은 자, 소외된 자,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들을 포함하여 ‘우주’ 안에서 시인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으로 확대되었다. 그가 저항해야 할 대상은 독재권력과 독점기업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병들게 하는 사회적 병인病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시 「나는 지금」에서 “파괴된 산/ 오염된 공기/ 흩어진 삶”을 바라보며 시 「봄살이」에서 “부서지고 더럽혀지고/ 깨어져나가는 지구”의 아픔을 어루만졌던 시인 김지하. 이러한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물 상호 간의 상생을 추구하는 김지하의 ‘생명운동’은 그의 시를 서정적 생태문학으로 발전시켰다고 평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황토』(1970), 『애린』(1986), 『오적(五賊)』(1993), 『중심의 괴로움』(1994) 등이 있다.

    「새 교회」 1994년 ‘솔’ 출판사에서 간행한 김지하 시인의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 수록되었다. “교회”는 인공적으로 건설한 성전聖殿이 아니라 자연의 세계다. ‘자연’이라는 열린 세계 안에서 시인은 형제들과 자매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 형제와 자매는 누구인가? “풀잎”, “흙”, “물”, “해”, “달”, “별”, “혜성”이다. 하얀 꽃들은 “흰 수건”을 손에 든 “여인”의 합창대가 되어 ‘님’을 향한 찬미가를 “노래한다.” 또 다른 시 「공경」에서 “사랑은 공경/ 높여야 흐르는 법”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은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만물을 “높여” 주고 있다. 시인은 지금까지 사람에 의해 지배당하고 이용당하였던 낮은 자들을 동등한 동반자로 “공경”한다. 혜성, 별, 달, 해, 물, 흙, 풀잎 등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시인의 영적靈的 반려자가 된다. 시인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가 “산”이라는 예배당에서 공경을 나누고 있다. 생명권生命權의 평등을 실현하는 ‘녹색 사회’가 열리고 있다. 이보다 더 새로운 “교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김지하 시인의 또 다른 시 「그날」에서 “살아/ 넘치는 지금 여기/ 끝없는 그날이 있다// 그리움도/ 그러매/ 나를 향하라// 내 속에/ 님/ 이토록 살아계시어// 나날이/ 이리 죽지 않고/ 삶.”이라고 노래하였듯이 ‘자연’이라는 녹색의 교회 안에서 공경을 주고 받는 모든 ‘생명’은 “지금 여기”에서 “끝 없는 그날”을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시인을 포함한 이들 모두의 ‘생명’이 죽어서 보이지 않는 때가 온다고 해도, 어느 하나의 형제는 다른 형제의 ‘생명’ 속에 스며들어 영향을 주게 된다. 시인이 죽어서 흙 속에 묻혀 뼈만 남는다고 해도 그의 살(肉)은 흙의 ‘생명’을 키우는 흙의 자양분이 된다. 시인의 말과 같이 “나”는 죽어도 “나날이 이리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다. ‘우주’라는 대성전大聖殿, ‘자연’이라는 교회 안에서 “님”의 사랑으로 함께 공경하며 살아왔던 형제와 자매들은 “나”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죽을지라도 “나”의 몸은 이들의 생명을 지탱시키는 생명의 기운이 되어 이들과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흙이 “나”를 키워주고 물이 “나”를 길러주었듯이 ….

     


    숲 속에 살고 있는 독일의 어느 교회.
    만물이 형제와 자매로서 공생하는 ‘자연’의 품 속은 녹색의 “새 교회”다.

     


























     

    인류는 “마지막 종”이 될 것인가?

    - 아르님 유레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 시편 8」

     

    나의 하느님! 솔직하게 말씀 드립니다.

    당신의 이름이 이처럼 값싼 것이 되다니요

     

    어찌하여 당신은

    사람을 그토록 강한 존재로 높여 놓으셨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운 혹성 위

    흙과 영(靈)으로 빚으신 아담의 자손,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당신은

    사람의 손에 당신의 작품인 그 혹성을 맡기셨단 말입니까?

     

    새들, 물고기들, 대지, 숲

    이 모든 생명이 이미 사람에게 약탈된 물건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길러냅니다

    모든 것을 시장 가치로 값을 매기고

    길들이고, 도살하고, 걸러내고, 증류합니다.

    동물원에는 마지막 야생 동물을

    마지막 종(種)으로 전시해놓습니다.

     

         - 아르님 유레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 시편 8」

     

     


    시인 아르님 유레(1925~생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 시편 8 Die Ungeborenen schlagen Alarm, Psalm 8: 1925년 베를린에서 출생한 시인 아르님 유레Arnim Juhre. 그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 함부르크에서 발간되는 문예지 ‘도이췌 알게마인 존탁스블라트’의 문학주간으로서 문인들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시, 희곡, 소설, 에세이, 방송극본, 가요 가사 등 문학의 모든 장르로 창작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가 발표한 수많은 노래집 중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책은 ‘새로운 정신적 가요’다. 다년간의 방송국 활동, 문예지 주간 역할, 개신교 활동, 작사가 활동 등은 아르님 유레의 문학 속에 사회의식, 정치의식, 박애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의 시에서 발견되는 생태의식도 다양한 그의 사회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사회의 죽음』(1971),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2003) 등이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 시편 8」은 1979년 함부르크 시의 ‘루터’ 출판사에서 간행한 아르님 유레의 시집 『우리는 아슬한 지표地表 위에 서 있다』에 처음 발표되었다. 2003년 아르님 유레의 시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에 재수록되었다. 독일 시인 사라 키르쉬를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이 “불”의 “천국”에 가까이 다가가는 ‘지구’의 미래를 경고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공기” 중의 탄소가 많아지고 산소가 줄어들기 때문이며, ‘산소’라는 숨결 공급차의 운송 본부인 “나무”들이 사람의 마을에서 사라져가는 까닭이며, 그 나무들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시스템이 넓어지기 때문이며, 자연의 생명을 “시장 가치”로 바꾸어 이윤을 얻으려는 탐욕이 팽창하기 때문이다. “시장 가치”로 바꾸었을 때 이윤이 남는 생물은 상품으로 가공되고 활용된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생물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물건으로 분류되어 폐기처분을 당한다. “시장 가치”의 계산법에 따라 최소한의 이윤이라도 남길 수 있는 생물이라면 상품의 라벨을 붙이는 유용한 물건이 된다. 이윤 Zero(0)으로 판정된 생물이라면 상품의 가치가 없는 까닭에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 이 도구적 기능을 조금이라도 발휘하지 못하는 생물이라면 ‘상품’이라고 부를만한 “가치”를 얻지 못한다.

    “나무”도, “새들”도, “물고기”도, “숲”도, “대지”도 “사람”의 소유욕과 소비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사람의 필요와 편리를 만족시켜 줄 물건일 뿐이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상품의 마지막 단계를 향해 전진하는 주인공처럼 인격을 가진 사람조차도 “시장 가치”의 등급에 따라 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부터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사회구조 안에서 “자연”이 생명권生命權을 보장받지 못하는 물건으로 분류되어 그것의 효용성에 따라 처분이 결정되는 것은 사회의 관습이 되고 말았다. 인류는 기계류機械類로, 자연은 물류物類로 타락을 강요받고 있다. 생명의 가치를 “시장 가치”로부터 해방하지 않는다면 “동물원에 마지막 야생 동물을 마지막 종으로 전시하는” 마지막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른다. 식물원에 “마지막” 나무를 마지막 식물의 종으로 전시할 “마지막”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독일 시인 사라 키르쉬와 아르님 유레가 인류에게 내민 묵시록의 옐로우 카드는 인류를 생물학사生物學史의 마지막 페이지에 “마지막 종”으로 기록할 레드(RED) 코드로 변색될 수 있다. 이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동독 출신의 유명 작가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가 비판하였듯이 “좀 더 빨리, 좀더 높게, 좀 더 좋게”만을 외치는 “시장 가치”의 체계와는 다른 가치 체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 ‘다른 가치의 체계’는 시장 가치의 체계 위에 서는 ‘생명 가치의 시스템’이다.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최우선의 가치를 점유했던 “시장 가치”의 체계를 ‘생명 가치의 시스템’ 아래 두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J. Habermass의 말을 인용한다면 ‘자본’에게 “종속”된 생명의 “식민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인류가 ‘지구’라는 거대한 박물관의 “마지막 종”의 화석으로 전시될 마지막 날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가치” 패러다임의 전환으로부터 열린다. 독일 시인 아르님 유레의 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 시편 8」은 “시장 가치”의 최면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울려주는 가장 가치 있는 “알람”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과 생명들을 마지막 종으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각성의 경보음이여!

     

     


    아르님 유레의 시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알람을 울린다』표지.
    그가 지은 가요의 가사들도 시와 함께 수록되었다.

     

     

     












    시인의 귀빈이 된 “네 분”의 새터민

    - 이건청의 「고래들의 주민등록」

     

     

    2009년 11월 10일 오후 4시 울산광역시 장생포 고래생태체험관에서 바다의 빈객인 돌고래 4분들에게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헌정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내빈으로 박맹우 울산시장, 김두겸 남구청장, 시․구의원, 울산의 정일근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온 이모 시인의 얼굴도 보였고 고래문화보존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하였다.

     

    울산 시민이 되어 고래 도시 울산시의 홍보대사 역할을 할 네 분들은 식이 거행되는 동안 시종 의젓하였으며 이따금 꼬리를 치며 식장을 서서히 휘돌며 하객들에게 사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이날, 정식 울산 주민으로 모신 분들은 고아롱(10․수컷), 장꽃분(10․암컷), 고이쁜(7․암컷), 고다롱(5․수컷)인데 아롱님과 꽃분님은 부부이시고, 이쁜씨와 다롱씨는 꽃분님의 시숙분들이셨다. 이분들에게는 이들이 울산에 도착한 날짜인 091008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가 헌정되었다.

     

    양촌리 내 집 문

    열어 놓을게

    꿈길까지 열어 놓을게

    밤새도록 외등도

    밝혀 놓을게

    개들이 짖거든

    집 주인 친구라고 하게나

     

    심야 고속버스를 타시게

    좌석이 넓은 우등버스를 타시게

    꼬리를 조심하시게

    고래 전용 버스가 만들어질 때까지

    불편한 길, 조금 참고 오시게나

     

    꿈길까지 열어 놓을게

    밤새도록 외등도

    밝혀 놓을게.

     

    - 이건청의 「고래들의 주민등록」

     

     

    * 「고래들의 주민등록」: 1942년 경기 이천에서 출생한 시인 이건청. 그는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현대시’ 동인회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해왔다. 그의 시세계는 물질문명과 기술문명의 시스템 안에서 점점 더 약해지는 정신세계의 위기를 인식하고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정신적 출구를 열고자 하였다. 물질과 기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정신세계’가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파행적 지점에까지 이르렀음을 인식하면서부터 이건청의 시세계는 ‘정신’의 부활을 추구하는 ‘정신주의’를 토대로 하여 사람을 포함한 자연만물의 ‘생명’을 지켜내려는 ‘생태의식’을 표방하였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신주의’와 ‘생태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총체적 생명의식”의 길을 걸어왔던 이건청 시인은 이하석 시인과 함께 한국 ‘생태시’의 주춧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코뿔소를 찾아서』,『하이에나』,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시선집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이건청 문학선집(전4권)』등이 있다.

    「고래들의 주민등록」은 2010년 ‘동학사’에서 간행한 이건청 시인의 ‘목월문학상’ 수상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일상의 실제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생태주의’ 패러다임의 실천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울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공업도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환경오염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를 심각하게 염려해야 하는 도시였다. 그러나 산업과 생태계의 공생을 표방하는 시당국의 정책과 시민들의 노력이 발걸음을 함께 하면서 울산의 환경지수는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이 울산을 “고래도시”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울산이 ‘생태사회’를 향해 점진적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아롱”, “장꽃분”, “고이쁜”, “고다롱” 등 “네 분”의 고래 손님들은 동해에서 울산으로 이사 온 이주민들이다. 네 분은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울산 시민”과 동등한 “주민”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네 분은 울산에 전입신고를 하고 나서부터 울산 시장 “박맹우”, 울산시 구의원 “김두겸”, 울산 시인 “정일근”과 이웃이 되었다. 독일 시인 발터 헬무트 프리츠는 “나무들을 친구로서 맞이하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였지만, 정일근 시인을 비롯한 울산 시민들은 네 분의 고래를 새로운 이웃으로 “맞이하는” 생태도시의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고래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고래의 눈길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비록 고래에게는 이성, 언어, 문명이 없지만 이 세 가지 요소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종의 특성일 뿐, 고래를 내려다 보는 우월의 조건은 될 수 없다. 우리들 사람에게 없는 고유한 속성과 능력을 고래는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과 고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고래의 생명권生命權을 사람의 생명권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그러므로 네 분의 고래들은 시인의 “양촌리 집”에 초대 받아 놀러오는 것이 가능해졌다. “고래 전용 버스가 만들어질 때까지” 이러한 아름다운 전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고래와 사람의 ‘생명권’이 평등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시인의 ‘생태주의’적 신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생태계를 ‘집’이라고 한다면, 고래와 울산 시민과 시인은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생태계를 녹색의 마을이라고 한다면, 시인과 울산 주민과 네 분의 이주민들은 한 마을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고아롱, 장꽃분, 고이쁜, 고다롱은 “울산에 도착한” 바로 그 날부터 이 땅의 새터민이 되었다. 시인의 양촌리 집으로 초청장을 받은 후에는 시인의 귀빈貴賓이자 친구가 되었다.

    이건청 시인의 시 「고래들의 주민등록」은 ‘생태주의’ 패러다임이 한국민들의 생활윤리로 정착되기를 기대하는 미래지향적 전망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울산시 고래들의 주민등록증. 이건청 시인의 시에 등장한 “네 분” 중 “고이쁜” 대신에 “장두리”가 보인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나무

    -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걸어다니는 나무」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언제나 조심하라고

    조마조마하게 일러주시던 그 나무. 저녁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그 나무.

    울타리를 살금살금 기어 올라와 푸른 속눈썹으로 윙크하는 그 나무.

    여유로운 시간엔 모차르트 음악에 젖어드는 그 나무.

    창문 틈새로 집안을 엿보더니 어느새 현관문에

    노오란 잎새로 짓궂게 낙서하는 그 나무. 콘서트홀의 연주에 이끌리어

    자기만의 생각에 사무치는 그 나무. 우리의 숨소리를 엿듣고는

    꽃잎들을 우리 손에 내려주는 그 나무. 녹지 않는 눈(雪) 같은 꽃잎들을 … .

     

          -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걸어다니는 나무」전문

     





    시인 크리스티네 티임트(1965~현존)

      

    *「걸어다니는 나무 The Walking Tree: 1965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Innsbruck에서 출생한 시인 크리스티네 티임트Christine Thiemt. 그는 1988년 독일의 ‘네카줄름’ 시로 이주한 후에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만 15세인 198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91년부터는 걸출한 산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서정시의 영향력은 고스란히 산문 속에 스며들어 ‘시적詩的 산문’의 경지에 도달했다. 시인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문학은 음악적 이미지와 회화적 이미지의 하모니를 창조함으로써 플룻 소리처럼 청량한 음향을 파스텔화처럼 담백하게 채색해왔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는 자연과 예술이 감성적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의 빛을 음악의 연주소리로, 자연의 음향을 회화의 색채로 변용시키는 문학적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에서 울려나오는 감각적 이미지의 변주곡은 독자들에게 ‘자연’의 생명력을 재생해주고 ‘자연’이 사람의 가장 가까운 이웃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필자는 그의 시를 “서정적 생태의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시”라고 평하고 싶다. 시인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그리움』(1996)이 있다.

    「걸어다니는 나무」 제목은 영어로, 본문은 독일어로 기록된 작품이다. 2007년 독일의 ‘피셔Fischer’ 출판사에서 간행한 『2007 시연감詩年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1979년에 첫 선을 보인 『시연감Jahrbuch der Lyrik』은 한 해 동안 가장 주목받았던 시작품만을 모은 기획 시리즈다. 독일 시인들의 문학적 수준, 다양한 경향들, 혁신적인 경향의 기수, 새로운 시인들의 처녀 작품 발표 등 독일 현장문학의 현실적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집이다.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시가 ‘2007 시연감’의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그의 문학이 독일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화자인 “우리”가 화제로 삼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그 나무”다. 나무는 어린 시절의 어깨동무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랑스러운 스토커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온다”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나무」가 떠오른다. “그 나무”는 동서양의 문화적 경계를 넘어 또 다시 독일 시인의 인생여정에 동반자가 되고 있다. 때로는 옆 집에 사는 ‘말광량이 삐삐’처럼 우리집의 “울타리”를 “기어 올라와” 턱을 괴듯 “푸른” 가지끝을 창 틀에 드리우던 나무. 때로는 “푸른 속눈썹”처럼 어여쁜 잎새의 떨림으로 다정하게 “윙크”해주던 나무. “그 나무”는 시인의 친구이며 우리의 이웃이다.

    “여유로운 시간”에 열린 창을 통해 별빛처럼 흘러나가는 “모차르트”의 소야곡을 경청하던 “그 나무”는 언제나 우리가 듣고 싶은 오페라의 초록빛 무대가 되어 주었다. “그 나무”는 우리의 가슴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숨소리”의 원천이요, “그 나무”는 우리들 감성의 노트에 “노오란 잎새로 짓궂게 낙서하는” 개구장이 동무였다. 한국의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割)이 바람”이라고 말했지만 크리스티네 티임트의 시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나무의 생명이었나보다. 티임트뿐이겠는가? 한국의 이승하 시인이 일깨워주었듯이 나무의 “주인”을 자처하며 나무를 “물건”처럼 사용해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소리를 가능케 했던 것은 나무의 생명이 아니었던가?

     

     


    인 크리스티네 티임트가 거주하는 인구 약 3만여명의 네카줄름Neckarsulm 시.
    동쪽에서 바라본 도시의 중심부 모습이다.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세계적 자동차 회사 ‘아우디
    Audi’의 소재지로 더욱 유명하다.
    자연과 산업이 공존하는 도시의 본보기다.

     

     

     

     

     

     

     

     

     

     

     

     

     

     

     

     

     

     

    의 살

    - 정호승의 「삽」

     

     

    사람들이 삽을 버리고

    포크레인으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다

    새벽부터 산꼭대기까지 기어올라와

    포크레인이 공룡처럼 으르렁거리며 산을 무너뜨린다

    피를 흘리며 진달래는 좀처럼 신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야외용 돗자리와 청주 병을 들고 산을 올라와

    상주들은 포크레인이 무덤을 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하관의 시간은 짧다

    김밥 한 줄 든 일회용 도시락 눕히듯 땅 속에 아버지를 눕히고

    서른이 넘도록 시집 안 간 막내딸이 눈물로 진달래를 꺾어 관 위에 던진다

    소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던 포크레인이 다시 몸을 뒤튼다

    둔중한 굴삭의 손을 들어 아버지의 무덤을 내리찍는다

    오, 아버지는 두 번 죽는다

    얼마나 아플까, 저 잔인무도한 굴삭의 주먹

    평생 동안 아버지는 굴욕만 당하고 살았는데

    막내딸이 포크레인 앞을 가로막고 나동그라진다

    막 피어나려던 잔털제비꽃도 나동그라진다

    나이든 상주들은 말없이 막걸리만 들이켠다

    어허 달구 노랫소리는 흐르지 않는다

    포크레인에 짓이겨진 어린 진달래여

    공동묘지 위를 나는 어린 까마귀여

    아버지의 죽음에는 삽이 필요하다

    줄담배를 피우며 비오는 날마다

    흙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저 곤고한 아버지의 삽질을 위해

    삽으로 파묻는 죽음의 따스한 손길을 위해   - 정호승의 「삽」

     

     

    *「삽」: 1950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한 시인 정호승. 그는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2년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 창작에도 입문하였지만 1979년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상재한 이후 시창작에 주력하여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82년에 발표된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에서는 ‘예수’를 억압받는 민중의 옹호자로 형상화함으로써 ‘민중적 저항시’의 경향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시인의 불심佛心은 꽃 한 송이, 풀 한 자락, 나무 한 그루를 ‘사람’처럼 귀하게 여기는 ‘자애’의 길을 열었다. 시 「벗에게 부탁함」에서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라는 “부탁”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외경畏敬을 대중에게 “부탁”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호승 시인의 생명의식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서울의 예수』(1982), 『새벽 편지』(1987),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등이 있다.

    「삽」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정호승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수록된 작품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육신을 “산”의 살 속 깊이 묻을 때에는 “삽”이 필요하다. “산”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잠든 살산”의 몸의 일부분이 되도록 도와주는 친밀한 도구여! “삽”이여! 그러나 “산”을 정복하고 소유하려는 “사람”의 탐욕은 점령군단의 전차 부대처럼 “포크레인”을 몰고 온다. 진달래’의 시신屍身도, 진달래의 “신음 소리”도 “공룡처럼 으르렁거리는” 포크레인의 “굴삭” 속에 삼켜지더니 산산이 “짓이겨진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살은 포크레인이 파놓은 사각형의 참호 속에 물건처럼 임시적으로 보관되었다. 그러나 “막 피어나려던 잔털제비꽃이 나동그러지듯이” 이제 만들어진 아버지의 임시 처소도 포크레인 군단의 대대적 공습을 견디지 못할 전망이다. 조만간 “산”과 함께 정복되어 어느 개발업자의 소유물이 되거나 어느 기업의 또 다른 자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삽질”은 “곤고한” 추억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인가?

    “삽으로 파묻는 따스한 손길”을 아버지의 “죽음”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잔인무도한 굴삭”의 폭력은 “평생 동안 굴욕만 당하고 살아온” 아버지에게 또 한 번의 굴욕을 강요하려는가? “흙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아버지의 주검이 수인囚人처럼 콘크리트 감옥 속에 유폐될 운명으로 바뀌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는가? “흙”으로 돌아가서 “산”의 살의 일부분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유산처럼 지켜드릴 수는 없는 것인가?


    나무로 만든 “삽”.
    땅과 갈등을 겪지 않는 도구다.









    사람의 퇴화

    - 예르크 부르크하르트의 「인류학」

     

     

    발전의 길은 날이 갈수록

    퇴화의 길로 변하고 있다

    나는 곧 컴퓨터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추억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전자감응 장치에 따라 규칙적으로 반응하리라

    사진 속에서 잠들고

    사진 속에서 깨어나는 우리

     

               - 예르크 부르크하르크의 「인류학」

     

     


    예르크 부르크하르트(1943~생존)

     

    *「인류학 Anthropologie」: 1943년 독일 동부 ‘드레스덴’ 시에서 출생한 시인 예르크 부르크하르트Joerg Burkhard. 1945년 가족을 따라 독일의 서부로 이주하였다. 1968년부터 1988년까지 하이델베르크 시에서 ‘화씨 451 시+정치'라는 특이한 이름의 서점을 경영하였다. ‘화씨 451’은 1953년에 발표된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베리의 소설 제목으로서 당대 미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시인 예르크 부르크하르트는 이 소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이 소설 제목을 서점 이름으로 정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했다. 서점 이름이 ‘정치’로 끝나는 것도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그의 생태의식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6년 뮌헨의 ‘비더슈타인Biederstein’ 출판사에서 간행한 엔솔로지 『전망. 독일어권 지역의 젊은 시인들』에 시 「일요일」을 발표한 이후 1970년대 다수의 문학교과서에 그의 시작품이 수록되었다. 1977년 뮌헨의 ‘체. 하. 베크 C. H. Beck’ 출판사에서 간행한 엔솔로지 『그래도 나는 살아 움직인다. 1968년 전후前後의 시』에 「여름날」외 2편을 발표하여 독일 문단에서 시인의 입지를 굳혔다. 시인 예르크 부르크하르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내가 기억하는 몇 개의 사물들』(1977)이 있다.

    「인류학」은 197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1981년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4장 ‘공업’ 편에 수록되었다. 시인은 “발전”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곧 문명의 발전과 같다는 등식等式을 부정한다. “컴퓨터”는 신속한 정보교환과 풍부한 정보의 공유를 통하여 “사람”의 업무를 좀 더 편리하게, 사람의 생활을 좀 더 윤택하게, 사람의 정신을 좀 더 지혜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도구다. 컴퓨터는 사람의 교류와 소통을 원활케 하는 매체일 뿐이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에 필요한 ‘도구적 매체’였던 컴퓨터가 이제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

    커텐을 열듯이 컴퓨터 스위치를 ‘ON’으로 올릴 때에야 비로소 아침이 시작되는 것을 느낀다. 컴퓨터의 사각형 ‘바탕 화면’이 밝아오고, 그 안에서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오를 때에야 비로소 “깨어난” 것을 느낀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안의 ‘오토매틱 메신저’가 명령하는대로 ‘정신’의 레이더를 움직인다. ‘하드웨어’라는 사령관의 용병이 되어 ‘프로그램’이라는 전자군단의 전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열심히 ‘마우스’를 조준하고 ‘커서’의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다가 ‘프로그램’ 군단의 제1단계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스위치가 ‘OFF’로 내려갈 때에야 비로소 밤이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컴퓨터의 ‘바탕 화면’이 저물고, 그 안에서 미소 짓던 “사진” 속의 얼굴이 ‘종료’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은 어제처럼 “잠드는” 것을 재현한다.

    예르크 부르크하르트의 시 『인류학』은 이성理性의 산물인 ‘과학기술’에게 오히려 이성을 저당잡힌 채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이성의 “퇴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생태위기’의 시작은 사람의 이성에 빨간 불이 켜질 때와 일치한다.

     

     


    시인 예르크 부르크하르트의 창작 활동과 서점 경영이 이루어졌던 도시 ‘하이델베르크’.
    ‘네카’ 강변의 아름다운 고성古城들과 함께 학문과 사상의 본향으로 유명하다.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비롯한 수많은 독일 시인들의 예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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