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韓獨 생태시인 100인>'나무' 없는 세상에서




  •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인 (6)
    ‘나무’ 없는 세상에서

     




    송용구
    (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강남주, 이성선, 이승하, 박태일, 김용락

    *독일 시인: 귄터 그라스, 귄터 아이히, 하랄트 크루제, 페레나 렌취, 루드비히 피 엔홀트

     

     

    ‘생태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식은 ‘생태주의’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생태시를 움직이는 정신적 원천이다. ‘생태주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사람의 이성理性으로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성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은 자연과 사람을 분리시키는 결정적 병인病因이다. 사람이 이성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을 때에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오류의 발생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므로 이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경계하고 이성에 대한 맹신의 풍조를 극복하려는 것이 ‘생태주의’의 경향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태주의가 이성의 능력이나 이성의 길을 부정하는 사유체계는 아니다. 생태주의가 비판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을 남용하는 것이요,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성의 폭력이다. 생태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지배하거나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반이성적反理性的 사고방식인 것이다. 생태주의 패러다임에 따른다면 이성의 역기능逆機能을 예방하고 이성의 순기능順機能을 살려내는 것이 이성적 행동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생태주의는 이성 중심의 철학인 ‘계몽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의 잘못된 방향성을 바로 잡고 진정한 이성의 길을 제시하려는 사상이다. 계몽주의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계몽주의의 진면목을 살려내는 것과 일치한다.

    계몽사상가들 중 프랑스의 장 자끄 루소에게서 ‘계몽주의’와 ‘생태주의’의 접점을 발견하게 된다. 제5회의 글에서 강조한 루소의 사상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자연과학의 한 분야인 ‘생태학’이 인문학적 사유와 결합하여 생태주의, 생태철학, ‘생태학적 사상’ 등으로 발전하기까지 인문학의 정신적 자원을 제공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 루소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문명’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다만, 문명의 발전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지는 것을 비판했다.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는 결과다. 그러므로 루소는 문명의 진보를 추구하면서도 문명의 발전 속도를 조절하여 점진적인 템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사람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이용하지 않으며, 자연으로부터 적절히 도움을 받고 자연을 보호하는 등 ‘자연’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소가 『에밀』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적 화두로 떠오른 ‘느림’의 생활방식을 지지하는 가장 든든한 철학적 기반은 루소의 사상일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文明史에서 대표적 계몽사상가로 손꼽히는 루소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이성’이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를 알 수 있다. 생태주의는 이성이 제시할 수 있는 진정한 이성의 길을 열어가려고 한다. 그 ‘길’은 자연에게서 혜택을 부여받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자연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써 자연의 생명력을 보호하는 길이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상호의존’의 길이다. 이 ‘길’은 기술문명의 발전 속도를 조절하고 과학기술의 힘을 남용하지 않으며 그것의 파괴력을 제어하고 예방하면서 문명의 힘을 자연 보호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길이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은 이러한 ‘현실적 상호의존’의 길이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공유해야 할 생태주의는 ‘심층 생태주의’와 같은 비현실적 생태주의가 아니다. 시대와 현실과 사회를 고려하는 사유체계가 필요하다. ‘이성’과도, ‘문명’과도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문명을 자연의 동반자로 거듭나게 하여 자연과 문명이 서로 소통하는 ‘문명적 에코토피아’ 혹은 ‘에코 문명사회’를 모색하는 것이 진정한 ‘생태주의’의 길이다. 그 ‘길’은 자연을 사람의 파트너로 맞아들여 자연의 도움을 받는 협력관계 속에서 사회의 개혁과 역사의 발전을 추구하는 길이다.

    제6회 연재의 글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파트너십이 깨지는 현실상황을 비애감 어린 목소리로 비판하는 한국과 독일 시인 10명의 생태시를 초대하였다. 각 작품에 대해서는 ‘생태주의’ 패러다임과 함께 정치학 관점, 저항시 이론, 문화학文化學 이론을 연합시킨 시론을 전개하였다. 이 기획 연재의 글은 저서로서 출간이 예정된 글이다. 인용을 제외한 표절을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

    (해설과 번역: 송용구)

     

     

     

    물길의 동맥경화

    - 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 강」

     

     

    1.

    탄생이 몸을 틀 때 그것은 천 길 만 길 흙 속의 아우성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빛을 향해 치솟을 때 그것은 출렁거리는 환희였다. 싱싱한 약동이었다. 그 박력 산간을 돌아 드넓은 아래쪽으로 향할 때 그것은 푸름 가득 실어 생명 넘치는 노래였다. 산이며 들이며 천하의 넉넉함을 다스리는 희망이었다. 정갈한 미래였다. 우주 가득히 넉넉함 가꾸고자 천지의 정령(精靈) 손짓해 불렀다. 더불어 춤추며 축제로 흘러, 흘러내리는 내일이었다. 2.

    산을 구비 돌아 들판을 가로질러 유장하리니 산하의 앞길. 뜻밖에 가로질러 앞길 자르며 만나게 된 것들 반 자연의 제방 또 제방 인공의 제방. 3.

    부자유의 협수로(峽水路)에 끌려들어 쇠붙이 톱니바퀴에 나뒹굴었다. 염색에 탈색되며 또 다른 아우성 검은 얼굴에 상처가 흘렀다. 박력은 안개 되어 풀려난다. 풀이 죽는다. 때묻은 모래 위에 떠 흐르는 기인 행렬 오만(傲慢)의 과학 그리고 기술 그 방자한 유린에 패잔병의 모습 되어 노래가 없다. 노을 빛은 어쩌자고 저렇게 무섭나 흐린 별이 하나씩 연기에 질식되어 사라지고 있다. 세상은 적막으로 빠져들 차비를 한다. 무서움에 얼굴빛이 질리고 있다. 4.

    목이 콱콱 막힌다. 긴 터널 지나며 시궁창 땟국에 얼죽음이 된다. 자유에 도달하기 전 앞서 찾아온 사지마비. 육신은 갈대에 걸리고 안간힘하며 붙들던 뿌리마저도 허연 이를 내보이며 페스트 환자의 얼굴이 된다. 흐르는 것은 불모의 노래 그마저 잃어버린 우리들 미래의 꿈의 뼈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의 흐느적거리는 흐름. 5.

    하구언 안에서 허우적이며 맴돈다. 유치장에 갇혀 폐수 마시고 죽은 물의 영혼이 차곡차곡 쌓인다. 가라앉아 원혼으로 쌓인다. 맑은 물의 입자(粒子)가 모래처럼 불행으로 엉겨붙어 몸을 비튼다. 탄생이 아니라, 죽음과 마주한 단말마의 몸짓. 들던 머리 처박을 때 전신을 빠져나가 버리는 생명의 박력 6.

    수려강산(秀麗江山) 어디로 갔나 장강의 역사 어디서 멎었나 철새는 오지 않고 어부는 낚시를 포기하고 - 맥박이 정지된 강. 피돌림이 멎으면 심장이 선다. 섭리는 흐르는 것이거늘 그것이 우주의 질서였거늘 그릇 깨듯 질서까지 깨뜨리는 망치 흐르지 못하는 강이 되어 소우주의 행로를 부수고 있다. 큰 우주로 먼저 그 인체가 멎고 있다. 지혜여, 지혜여 흐르지 못하는 강을 보며 지혜여, 지혜여 뭘 해야 하느냐. 천하의 경서는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느냐

     

    - 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 강」전문

     

     

    *「흐르지 못하는 강」: 1937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한 시인 강남주. 그는 1974년 시집 『해저의 숲』으로 『시문학』지의 추천 완료를 받고 등단하였다. 1997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흐르지 못하는 강』은 ‘생태시’가 한국 시단의 주류를 형성하였음을 증명하는 문학적 성과물이었다. 강남주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해저의 숲』, 『낯선 풍경 속으로』, 『흐르지 못하는 강』이 있다.

    시 「흐르지 못하는 강」은 1997년 도서출판 ‘전망’에서 출간된 강남주 시인의 시집 『흐르지 못하는 강』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병들어가는 생태계의 실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적절한 은유의 장치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언어는 르포와 다큐멘터리처럼 환경오염의 현실을 재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강”과 “물”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진리를 현대인들의 뇌리에 각성시킬 뿐만 아니라 “강”과 “강”의 생물들을 가사상태에 빠뜨리는 문명적 병인病因들을 고발하며 청정한 시원始原의 생태계를 되찾고자 하는 강렬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환희”가 싱싱하게 “약동”하는 강의 “유장”한 물길을 가로막는 “인공의 제방”은 시인의 사실적 비판의식과 함께 상상적 은유의 미학을 겸비하여 생태시의 문학적 성취도를 높이고 있다. 그 “인공의 제방”은 강의 푸른 혈관을 협착시키고 강의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1차적 원인이다. 이 제방의 실체는 무엇일까? “쇠붙이”, “톱니바퀴”, “염색” 물질을 비롯한 각종 화학물질을 첩첩이 쌓아놓은 “오만한” 테크놀로지의 콜레스테롤 다층탑多層塔이다. 콜레스테롤은 “자연”이라는 몸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물질적 욕망에서 생겨나 자연의 혈관인 “강”의 물길을 협착시켜 “협수로”로 만든다. 혈액과 같은 “물”이 “흐르지 못하기” 때문에 “물”에서 산소를 공급받던 모든 생물의 “얼굴”은 “페스트 환자”처럼 까맣게 변색된다. 에코eco의 본래적 의미는 ‘집’이라고 했던가? “강”이라는 집에서 살아왔던 모든 동식물 “가족”은 혈액이 멎은 것처럼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산소의 집(eco)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그들의 집이자 “육신”이었던 강의 “맥박이 정지되고 심장이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을 향한 시인의 미시적 시각은 거시적으로 전환된다. 강은 혈관에서 “육신”으로, 육신에서 집(eco)으로, 집에서 “우주”로 확대된다. “인체”가 고장나듯이 “큰 우주”인 강의 혈관이 동맥경화로 막히게 되면 강의 혈액과 숨결 없이는 살 수 없는 강의 “소우주”들, 즉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동식물이 생명의 “행로”를 멈출 수밖에 없다. 시인의 말대로 대자연의 “섭리”와 순환 “질서”가 “그릇”처럼 깨져서 재생 불능의 상태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강과 생태계를 향해 시한부 종말선고를 내리는 의사가 아니다. 그는 모든 독자에게 “육신”과 다름없는 “강”의 혈관이 협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콜레스테롤과 같은 물질적 탐욕의 찌꺼기들을 더 이상 “쌓아” 놓아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강의 “싱싱한” 혈맥을 회복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고 권면한다. 그 지혜는 탐욕을 절제하는 자기성찰의 정신적 힘이다. “우주”의 동맥경화를 막을 수 있는 처방법이다. 시인 강남주의 시 「흐르지 못하는 강」은 시대와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발, 비판, 개혁, 회복, 희망의 메시지를 통섭시킨 생태시의 전형이다.

     

     

     

    생명 ‘짜맞추기’ 프로젝트

    ― 귄터 아이히의 「쓰레기장」

     

     

    쐐기풀 위에서 시작된다.

    들으려 하는 이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들리는

    세계의 슬픔. 지나가는 바람이

    매트리스 용수철에 매달린 고무줄을 건드린다.

     

    꽃 무늬와 포도송이 무늬에 새겨진

    찻 잔의 금빛 글자는 점점 지워져가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말은, 아! 꼭 나를 보고 하는 말인 듯

    ‘사랑’, ‘소망’, ‘믿음’ 같은 것들.

     

    아! 누구의 몹쓸 장난인가?

    이렇게 조각난 유리 부스러기들을 억지로 짜맞추다니.

    가슴을 뚫고 나오듯 에나멜을 뚫고

    쐐기풀의 불꽃이 자라난다.

     

    녹슬은 헬맷 속에 고여 있는 물은

    떠도는 새들의 목욕물이 되었다.

    잃어버린 영혼아, 너마저 이곳을 떠나간다면

    누가 너를 ‘신의 은혜’ 속에 짜맞추란 말인가?

     

    - 귄터 아이히의 「쓰레기장」전문

     

     

    귄터 아이히(오른 쪽 첫 번째)

    일제 아이힝어(가운데, 아이히 부인, 오스트리아 시인)

    하인리히 뵐(왼쪽 첫 번째, ‘47 그룹’ 동인,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쓰레기장/Schuttablage: 1907년 독일 레부스에서 출생한 시인 귄터 아이히Günter Eich. 그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였다. 1927년 ‘에리히 귄터’라는 필명으로 처녀 시집을 출간한 뒤 1929년엔 자신이 직접 쓴 첫 번째 방송극본이 공중파로 방송되는 기쁨을 얻었다. 1930년엔 ‘귄터 아이히’라는 본명으로 첫 번째 시집 『詩選』을 간행하였다. 그 후 베를린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시보다는 방송극의 창작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軍의 일원으로 징병되어 원하지 않는 전쟁에 참여하고 미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온 후에는 시쓰기와 방송극 창작을 병행하였다. 1947년엔 ‘47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47 그룹’은 독일의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고 반전의식反戰意識과 휴머니즘의 기치를 높이 세운 ‘전후戰後 문학’의 기수였다. 아이히 외에도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등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들이 구성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귄터 아이히는 ‘47 그룹’을 중심으로 시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이 때부터 전후戰後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의 명성을 얻었다.

    귄터 아이히는 대중에게 방송극 작가로 알려질 만큼 독일 방송극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백과 같이 “하나의 사물을 정확하게 지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 그의 문학 인생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언어’를 찾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은 ‘현실’ 속에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자 언어관이었다. 이러한 언어철학적 고백 속에서 그의 시와 방송극은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의 사물’에게 꼭 맞는 ‘단 하나의 언어’를 찾아냄으로써 ‘사물’과 사람이 진정한 ‘현실’ 속에서 공존하게 되기를 꿈꾸었던 시인 귄터 아이히. 그가 귀의하고자 했던 ‘집(eco)’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일치한다. 1972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市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비가 전하는 소식』(1955년), 『덧붙여』(1964년) 등이 있다. 1973년 프랑크푸르트 市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그의 문학전집이 출간되었다.

    「쓰레기장」은 1973년 오스트리아 시인 일제 아이힝어Ilse Aichinger(아이히 부인)의 선별 작업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市에서 출간된 『귄터 아이히 詩選』에 수록된 작품이다. 같은 해 『귄터 아이히 문학전집』에도 수록되었다. “쓰레기장”은 생태파괴의 현장이다. 한국 시인 강남주의 시적詩的 렌즈로 바라보는 생태파괴의 현장이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확대되었듯이 독일 시인 귄터 아이히 또한 “쓰레기장”을 향한 “슬픔”의 눈길을 “세계” 전체로 확대하고 있다. 미시적 시각에서 거시적 시각으로의 전환이 강남주와 귄터 아이히 간의 정신적 접점을 형성한다. 첫 연의 “쐐기풀”과 마지막 연의 “새들”’은 쓰레기장에서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생명체다. 그들을 에워싸는 “쓰레기”들이 그들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새들은 날개가 있어 언제든지 쓰레기장을 떠날 수 있지만 “매트리스 용수철”에 몸을 찢기는 “쐐기풀”의 운명은 “누구에게나 들리는” 비가悲歌와 같다. 쐐기풀의 양식은 “유리 부스러기”요, 그의 음료는 “에나멜”이다. 변색 동물이 아님에도 “불꽃”의 찬란한 색깔을 번득이며 기형적 성장의 변주곡을 울려주는 “쐐기풀”이여!

    깨진 “찻 잔”에 새겨진 “금빛 글자”의 “사랑, 소망, 믿음”은 더 이상 “신의 은혜”를 전해주는 축복의 사자使者가 아니다. 기독교를 대변하는 이 세 가지 낱말은 쓰레기장에서 죽어가는 쐐기풀의 생명에게는 단 1%의 종교적 기능조차도 발휘하지 못한다. “조각난 유리 부스러기들을 억지로 짜맞춘” 듯이 그로테스크하게 장식된 “아틀리에”의 대표작으로 전시된 “쐐기풀의 불꽃”이여! 이처럼 기괴한 아틀리에를 “녹색 아틀리에”로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사랑, 소망, 믿음”이 아닌가? 교회의 건물을 바벨탑처럼 높이 쌓을 때에야 비로소 “쓰레기장”을 진공 청소기 같은 “지나가는 바람”의 입에 몰아넣더니 “쐐기풀”의 주검을 밟고 찬란한 “불꽃”의 신전神殿을 세우는 현대의 기독교 교회여!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가장 큰 병폐는 물신주의 풍조다. 이것을 정화해야 할 기독교 교회가 오히려 ‘자본’의 세례를 받고 물신의 노예로 변해가면서 자연과 생명에 대한 윤리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자연과 생명을 향해 “사랑, 소망, 믿음”을 실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건물을 개발하는 사업에는 “쐐기풀”과 같은 피조물을 주저없이 희생시키며 “신의 은혜”라는 프로젝트 속에 자연과 생명을 도구로써 “짜맞추는” 교회의 메커니즘이여! 본분을 잃어버린 종교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글자”들이 시의 행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쐐기풀을 위로하듯 가끔씩 찾아오는 “새들”에게 목욕탕이 되어 주는 “녹슬은 헬맷”은 귄터 아이히의 반전의식과 생태의식을 연관시키는 매개물이다. 녹슬은 헬맷은 시인이 직접 경험한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전쟁을 증언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역사에 기록된 전쟁들은 거의 대부분 “신의 은혜”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독재권력자의 정치적 욕망과 지배논리 때문에 일어났다. “신의 은혜”와 섭리를 정치적 명분으로 “짜맞추는” 전쟁의 결과물은 무엇일까? ‘지구’라는 집eco이 “쓰레기장”으로 타락하고 “쐐기풀”과 사람의 생명이 “녹슬은” 쇠붙이 속에 폐기되는 일이다.

     

     

     

    다중적多重的 역할의 ‘무거운 짐’

    ― 이성선의 「牛黃」

     

     

    병 하나는 지니고 살아야 아름답다.

     

    몸이 아파 산을 바라보며 우는 소

    철쭉꽃 하늘 닿도록 피어나는 날

    좌선하듯 앉아 번뇌를 꺼내 씹는 소여.

     

    지그시 감은 눈 파리한 목줄기

    마루 끝에 앉아 염불 외는 노스님 모습일까.

    중생이 아프기에 앓아누운 유마거사가 왔는가.

     

    무거운 짐 지우고 매질하여도

    더러운 파리떼들이 그대 눈물을 짓밟아도

    그대 순진을 팔고 뿔 뽑아 이름을 새겨도

    네 다리로 굳세게 땅을 딛고

    오직 걸어가는 자

    말하지 않는 자

     

    영혼의 빈 배가 되어

    세상의 병을 하늘로 실어나르는 이

    자신의 깊은 병으로만 남의 병을 건지는

    이 세상 마지막 성인.

     

    짐 실어나르며 걷고 걷다가 몸 부서지면

    쓸개 하나 이 땅에 비로 남겨

    중생의 아픔을 쓸어내는

    그대는 침묵의 별인가.

     

    몸이 아파 하늘을 보고 우는 소여.

     

    - 이성선의 「牛黃」전문

     

     

    *「牛黃」: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출생한 시인 이성선. 그는 1970년 『문화비평』지에 「시인의 병풍」을 발표하여 등단하였고 1972년 『시문학』지에 시를 재추천 받았다. 불교의 ‘연기론’에 바탕을 두고 문학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자연’과 사람 간의 소통을 음악적 언어로써 형상화하였다. “지치도록 산, 별, 나무, 달과 살았다. 이들로 옷 해입고 놀빛 덮고 잤다. 북두 열쇠로 우주를 열려고 했다. 그렇게 소(牛)를 찾으며 나를 찾아왔다”라는 시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우주’, ‘자연’, ‘생명’, ‘사람’ 사이의 공생과 생태적 연관성을 때로는 수채화처럼 채색하고 때로는 점묘법點描法처럼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그의 시에 등장하는 “소”의 형상은 순수한 자연의 모델인 동시에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른 “성인聖人”의 은유다. “소”는 이성선 시인의 삼중三重 세계관을 반영한다. 불교적 세계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 사상, 생태주의 패러다임 간의 상호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지병으로 인해 6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이성선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시인의 병풍』, 『하늘문을 두드리며』, 『몸은 지상에 묶여도』,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별까지 가면 된다』등이 있다.

    「牛黃」은 1991년 ‘미래사’에서 기획한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에 선정된 이성선의 시선집 『빈 산이 젖고 있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시는 소(牛)와 사람 간의 관계를 “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든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을 거울 삼아 이성선의 시를 비추어보자. 사람은 ‘주체’ 속에 갇혀 있을 때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남성들 중에는 ‘주체’ 속에 여성을 가둬놓고 가부장적 인습의 잣대로 여성의 삶을 구속하고 통제하는 남성들이 많다. 이 때 여성은 남성에게 지배의 대상이 된다.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 이론을 발표했던 머레이 북친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라고 한다. 그가 “인간에 의한 인간지배가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를 낳았다고 말할 때에 ‘인간지배’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의 구조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지배구조가 오랫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지배’의 세월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머레이 북친이 주장하듯이 ‘생태위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해체’해야만 한다. 한 남성과 다른 여성 사이의 위계질서, 한 남성과 다른 남성 사이의 위계질서를 해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길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자크 데리다의 말에 따르면 그 길은 ‘탈주체脫主體’로부터 열린다.

    ‘나’라는 사람의 주체 속에 가두었던 ‘나’ 자신을 해방함으로써 자기중심적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라는 남성의 주체 속에 가두었던 여성을 해방함으로써 가부장적 지배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 ‘나’라는 지배자의 주체 속에 가두었던 다른 남성을 해방함으로써 권력중심의 지배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 ‘나’라는 인간의 주체 속에 가두었던 자연을 해방함으로써 자연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중심’의 지배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 다른 남성, 여성, 자연을 각각 ‘타자他者’로 인정하고 각자의 고유한 독립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할 때 수직적 위계질서는 허물어지고 수평적 평등관계로 전환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위계질서도 ‘해체’되어 생명권生命權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생태사회’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성선 시인이 데리다의 ‘해체주의’ 혹은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 「牛黃」은 필자가 분석의 틀로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서양의 사상들과 통섭할 수 있는 정신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주체’의 성벽城壁을 허물고 자기중심적 관념의 감옥에 가두었던 “소”를 해방함으로써 소를 ‘나’와는 다른 독립적 존재(他者)로 존중한다면 소의 “아픔”, 소의 “병”, 소의 “번뇌”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그것’이나 ‘대상’으로 소를 바라보지 않고 소를 삶의 동반자인 ‘너’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소와 나의 ‘상호관계’가 이렇게 변해간다면 ‘나’는 소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매질하”지 않고 오히려 소가 ‘나’를 돕는다는 사실을 소에게 고백할 수 있다. 소의 귀 가까이 입술을 대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속삭일 수 있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땅 위에서 소와 함께 일하고 있는 농부들이여! 소의 “침묵” 속에 고여 있는 “울음”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소의 마음 속 “번뇌”를 ….

     

     

     

    자연을 ‘타락’시키는 인공人工의 손길

    ― 귄터 그라스의 「타락」

     

     

    199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아스피린 기운은 갓 낳은 달걀들 속에 이미 스며들었건만

    어찌하여 수탉들은 아직도 두통을 앓고 있는가

    그럼에도 보란 듯이 걸어다니긴 하는데

    새 해를 시작하는 병아리들의 발걸음은 어찌 이토록 신경질적인가!

    - 귄터 그라스의 「타락」전문

     

     

    *「타락/Dekadenz: 1927년 독일 단치히(Danzig: 지금은 폴란드 영토)에서 출생한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전후戰後 독일의 대표적 소설가다. 귄터 그라스는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과 시의 창작에도 열정을 기울였던 만능 작가였다.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시인 귄터 아이히와 마찬가지로 나치軍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미군의 포로가 되어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그래픽과 조각 수업을 받았고,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 수업의 심도를 높일 정도로 미술 분야의 전문성을 쌓았다. 그 후 조각보다는 회화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화가의 길을 걸어갔다. 자신의 문학작품집에 직접 삽화를 그려넣을 만큼 문학과 미술은 귄터 그라스의 인생길을 동행하는 쌍생아였다. 1954년 전후戰後 독일 작가 동맹인 ‘47 그룹’에 가입하여 소설가 하인리히 뵐, 시인 귄터 아이히 등과 함께 ‘문학’을 통한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 주력하였다. 1956년 처녀 시집 『두꺼비들의 재능』을 출간했던 귄터 그라스는 1959년 자신의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양철북』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오스카는 3세에 일부러 지하실 난간에서 추락하여 성장을 멈춘다. 그가 일부러 성장을 멈춘 까닭은 무엇일까? 나치가 추구하는 기형적 성장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귄터 그라스의 의지가 아닐까? 나치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독일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권력과 무력武力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은 진정한 민족주의가 될 수 없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의 민족주의는 전체주의, 군국주의, 패권주의일 뿐이었다. 주인공 오스카가 두드리는 ‘양철북’ 소리는 개인을 획일화시키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이며, 독재권력을 질타하는 저항의 북소리였다. 귄터 그라스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지지자로서 ‘新나치주의’를 비판하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주의를 극복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그의 문학은 이념, 민족, 인종을 초월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인권을 옹호하는 ‘박애주의’를 노래하였다. 그의 소설, 희곡, 시에서 드러나는 반전의식反戰意識과 생태의식은 ‘생명’을 향한 ‘박애’의 과수果樹에 맺혀있는 두 가지의 열매다. 귄터 그라스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처녀 시집 『두꺼비들의 재능』(1956)과 『귄터 그라스 시전집』(1971)이 있고, 대표적 소설로는 『양철북』(1959), 『넙치』(1979), 『게 걸음으로 가다』(2002) 등이 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에서 자작시 「밤의 경기장」을 낭송하여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도 뚜렷이 살아 있는 시인이다.

    「타락」은 1960년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1971년 다름슈타트 市에서 출간된 『귄터 그라스 시전집』에 수록되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과 시 「타락」이 공유할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진정한 ‘성장’의 길을 열어보자”는 당부가 아닐까? 독일 시인 아른프리트 아스텔Arnfried Astel은 그의 시 「환경오염」에서 ‘두통’을 가라앉혀야 할 ‘아스피린’이 오히려 ‘두통을 생산한다’고 고발한 바 있다. ‘똥이 하얗게 탈색되고 오줌에 피가 고일’ 정도로 ‘아스피린’은 독성을 가진 약품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아스텔이 ‘아스피린’의 남용에 따른 부작용을 경고하기 15년 전에 귄터 그라스는 인체뿐만 아니라 동물의 몸 속에까지 파고드는 ‘아스피린’의 파괴력을 폭로하였다. 그라스의 시적詩的 폭로는 지구의 수많은 동물이 사람의 인공적 사육법과 치료법 때문에 집단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다. 동물들은 병을 얻은 다음엔 자연사自然死의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대량학살’을 당한다. 이 대량학살을 사람은 ‘살처분’이라고 부른다. ‘처분’이란 낱말 속에는 ‘응당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이 스며 있다. 이 낱말 앞에 ‘살’ 자를 결합시키면 동물이나 가축을 죽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대응책임을 공인하게 된다. 동물의 집단 감염을 막고 인체를 보호하기 위한 대안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스피린”처럼 독성이 강한 약품을 “닭”에게 먹임으로써 닭의 몸이 쇠약해지면 ‘조류 독감’에 저항할 면역력이 떨어진다. 인공 사료를 ‘소’에게 먹임으로써 소의 뇌를 파괴하면 ‘광우병’의 위험에 직접 노출된다. 닭과 소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닭의 숫자를 늘이고 소의 몸집을 부풀리려는 사람의 물질적 탐욕이 자연과 사람에게 공공의 해악을 안겨준다.

    이성선 시인의 시 「牛黃」에 등장한 ‘소’의 형상을 추억해보자. ‘짐 실어나르며 걷고 걷다가 몸 부서지면 쓸개 하나 이 땅에 비로 남겨 중생의 아픔을 쓸어내는’ 살신성인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의 긍정적 이미지는 사람의 인공적 손길 때문에 퇴색되어 갔다. 아버지인 “수탉”의 정자 속에 스며든 “아스피린”의 독성을 그대로 물려받아 “두통”에 시달리며 “신경질적”으로 봄길을 걸어가는 “병아리”의 현실은 21세기 ‘소’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인공적 손길에 의해 ‘병’의 멍에를 쓰고 자연사自然死의 권리마저도 박탈당하는 자연의 타의적他意的 “타락”이여! 사람의 폭력에 의해 강요된 타락이여!

     

     

     

    ‘생명’의 퇴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

     

     

    種이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뿔소가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끼리가 사라지는 아픔도 없다

     

    나, 소비의 주체이니

    돈을 벌어 물건을 살 뿐

    나, 카드의 주인이니

    카드를 꺼내 사인을 할 뿐

    나, 승용차의 소유자이니

    기름을 채워 운전을 할 뿐

     

    때때로 자식을 데리고 대공원에 가면

    코뿔소는 아직 코에 뿔이 달려 있고

    코끼리는 아직도 코가 손이다

    상아 있는 코끼리가 있다

    코뿔 없는 코뿔소는 없다

    種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고

     

    나는 서서히 살아간다

    생명에서

    나는 부지런히 사라진다

    물건의 사용자로

    물건으로.

     

    -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전문

     

     

    *「생명에서 물건으로」: 196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한 시인 이승하. 그는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사람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특히 민감했던 이승하 시인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응시해왔다. 199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그의 시집 『생명에서 물건으로』의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이 시집을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죽어간, 살아 있을 동안에 죽어갈 수많은 생명체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육신은 아비규환의 지상에, 영혼은 알 수 없는 천상에 거하는 사랑하는 나의 누이 선영에게도.”라고 고백하고 있다. 근친의 죽음과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이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시인의 발언을 조금 더 깊게 투시한다면, 사람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생명체’이기에 모든 “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시인이 시집의 후기後記에서 말하였듯이 이러한 유기적 관계로 연결된 하나의 종, 하나의 ‘생명체’가 가진 ‘생명력’은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넓이’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물과 식물의 죽음은 누이의 죽음만큼이나 안타까운 것이다. 게다가 무수한 종들의 죽음을 가져온 사람의 과잉 “소유”와 과잉 “소비” 행태는 시인을 공동의 죄책감에 젖어들게 만든다. ‘죽어간, 죽어갈 수많은 생명체에게 시집을 바친다’는 고백은 그들의 죽음을 ‘대량생산’해왔던 현대인들의 물신주의를 대리적으로 회개하는 고해성사가 아니겠는가? 시대정신과 현실인식의 토대 위에 생명의식을 견고히 구축해왔던 이승하 시인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시창작과 문학평론, 양 방면에서 ‘생태’와 ‘생명’ 문제를 향한 탐구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의 ‘생명옹호’ 정신을 대변하는 대표적 시집으로는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2005)가 있다. 1990년대 한국 문단에서 전개된 ‘생태시’의 현황, 성격, 전망 등에 관한 담론을 펼친 문학평론집 『생명옹호와 영원회귀의 시학』도 주목할만하다.

    「생명에서 물건으로」는 시집 『생명에서 물건으로』의 표제작이다. 필자(송용구)는 이 시집을 “문명비판의 정신과 ‘생명 옹호’의 정신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생태시집”이라고 평하고 싶다. 2005년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의 출간 직후 어느 대중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승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산업사회의 수많은 광고 문구는 소비를 촉진시키고 있습니다. 바퀴를 잃어버린 자본의 무한 질주를 문인이 글로써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브레이크의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문명의 발전 속도를 줄이는 일에 참여하는 시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독자가 문학작품을 통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깨닫고 마음의 변화가 온다면 그것 역시 감정의 정화를 이룬 것이 아니겠습니까?”(이승하)

     

    위의 인터뷰 발언은 그의 시 「생명에서 물건으로」를 포함하여 이 작품이 담긴 생태시집의 성격을 해석하는 지름길을 열어준다. 이성理性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제는 “나는 소유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나는 소비한다 그래야만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로 패러디할 수 있는 시대상황에 이르렀다. “다 소비하기도 전에 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라고 쓴웃음을 짓던 이형기 시인의 비판적 탄식은 데카르트의 명언을 위와 같이 패러디하고도 남을만 하다. 우리의 시대가 물질만능의 소비중독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전해주지 않는가? 필자(송용구)가 1998년에 번역하여 출간한 독일어권 지역의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는 그 표제의 의미가 분명하다. 이 엔솔로지를 엮은 마이어-타쉬 교수에 의해 붙여진 ‘직선들의 폭풍우’라는 명칭은 고속으로 직선주로를 달리는 ‘자본’의 급행 질주를 풍자한다. “바퀴를 잃어버린 자본의 무한질주”라고 이 시대를 비판하는 이승하 시인의 눈길과 소통하고 있다. 이달균 시인이 “부러워라 광란의 질주”라고 반어적으로 비판했던 이 ‘자본의 무한 질주’를 문인들은 무엇으로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승하 시인의 말처럼 시인의 시와 글이 그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질주’의 가속加速을 제어하고 “문명의 발전 속도를 줄이는 브레이크” 역할만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의 ‘브레이크’ 역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깨닫게’하고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시인은 독자에게서 어떤 “마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가? 풍요로운 “소유”, 윤택한 “소비”, 편리한 “사용”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카드의 주인”이자 “소비의 주체”이자 “물건의 사용자” 외에는 다른 정체성을 갖기 어려운 존재로 퇴화退化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생명”의 주체임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역할이다. 독일 시인 루드비히 펠스Ludwig Fels가 비판한 바 있는 이 “소비 테러”의 시대에 ‘자본’이라는 테러리스트가 터뜨린 ‘쾌락’과 ‘편리’의 최면催眠 가스에 마비되었던 독자들의 이성을 깨워주는 역할이다. 자연을 “소유”의 대상이자 “소비”의 도구로 취급했던 독자들의 반이성적反理性的 삶을 반성케 하는 역할이다. “코뿔소”의 “뿔”과 “코끼리”의 “상아”는 사람이 “사용”해야 할 “물건”이 아니라 코뿔소의 소중한 몸이자 코끼리의 “생명”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이다.

    사람과 함께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종”들, 사람과 함께 나무들의 푸른 숨결을 나눠 마시는 종들, 사람과 함께 같은 흙을 밟고 살아가는 마을의 주민 같은 종들. 그들을 “소유”해야 할 “물건”으로 소외시키지 말고 “생명”을 가진 이웃으로 존중하도록 독자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는 역할이 시인에게 주어져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지만 이 어려운 역할을 감당하려는 시인들의 연대의식이 “생명”의 물화物化를 막는 정신적 항체를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사람의 마을을 떠나가는 새들

    ― 하랄트 크루제의 「도시 만들기」

     

     

    딱따구리들

    전신주電信柱

    딱딱

    쪼아댄다면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 하랄트 크루제의 「도시화」전문

     

     

    *「도시화/Verstädterung」: 1945년 독일 바스베크에서 출생한 시인 하랄트 크루제Harald Kruse. 그는 시집과 문예지뿐만 아니라 TV 방송, 라디오, 신문 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하여 시를 발표하였다.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은 시집은 1976년에 출간된 『지렁이들의 반란』이다. 시집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시인 하랄트 크루제의 생태의식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도시’라는 현대인들의 생활공간이 자연과 공생하는 문화의 터전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는 전초기지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의식을 그의 시에서 읽을 수 있다. 하랄트 크루제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가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바람직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묻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생태문화’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의 시는 도시인들에게 생태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각성제와 같다. 영국의 진보적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문화’를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이라고 규정하였다. 윌리엄즈의 견해에 비추어본다면 ‘생태문화’란 ‘생태주의적生態主義的 생활방식’임을 알 수 있다. 생태문화는 “사람과 자연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는 생활방식”인 것이다. 시인 하랄트 크루제는 ‘도시’가 문명적 문화의 본산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생태문화의 현장으로서도 사회적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시사하였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지렁이들의 반란』(1976), 『상황보고報告』(1978) 등이 있다.

    「도시화」는 1974년에 처음 발표된 후 1976년 하랄트 크루제의 시집 『지렁이들의 반란』에 수록되었다. 1981년 뮌헨의 베크C. H. Beck 출판사에서 간행한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재수록 되었다. 나무는 “딱따구리”의 고향이자 터전이다.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람과 딱따구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사람과 딱따구리의 정서적 교감이 형성된다. 그러나 나무가 사람의 마을에서 사라진다면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나무가 사람의 곁을 떠나간다면 녹색의 그늘에서 책을 읽을 수도 없다. 어머니의 품에서 아이를 떼어놓듯 대지의 품에 안겨있던 나무를 추방해버리고 새롭게 들어선 “전신주”를 보라! 생명 없는 그 물건을 나무로 착각하여 열심히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모습이 서글프다. 그러나 딱따구리가 진실을 알게 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 자신의 고향이자 집이었던 그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게 될 것이다. 전신주 속에는 나무의 초록빛 수액樹液과 향기가 전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하랄트 크루제의 시집 제목 ‘지렁이들의 반란’처럼 이제는 딱따구리를 비롯한 새들이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조류鳥類의 반란”을 예견할 수 있는 시대다. 한국 시인 이문재가 탄식했던 ‘하늘로 쏘아올린’ 욕망의 ‘화살’들과 ‘바다로 흘려보낸’ 욕망의 배설물들이 사람의 마을로 귀환하는 상황은 ‘새들’이 사람의 마을을 떠나가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 독일 시인 하랄트 크루제의 시 「도시화」는 간결한 또 하나의 묵시록이다.

     

     

     

    문명 사회의 불청객, 비둘기

    ― 박태일의 「비둘기 날다」

     

     

    구구 꾸륵꾸륵 헛배를 다독거리며

    식은 네온 간판 위나 전깃줄에 붙어앉아

    깃털을 씹다가 솎다가 부비다가

    로터리 투자신탁 상업은행 빌딩까지 기웃거리는 비둘기

    새끼 비둘기는 드물다 어느새 몸이 불어

    어른스럽다 플라스틱 좁쌀이며 껌 부스러기

    사람들이 찢어버린 가계수표 긴급대출

    빳빳한 비닐 종이 신맛으로 모이주머니를 다듬기도 하면서

    어쩔 수 없지 맑은 유리날에 밟히는 식도

    사람 가까이로 도시로 몰려들어 먹이를 빌어온

    모진 조상들 버릇 탓에 어쩔 수 없지

    목덜미에 죽지에 제법 화려한 잿빛 기름때를 뽐내며

    어느새 몸을 누비는 싱싱한 암 덩어리

    서면 육교 위를 살풋 날아올랐다

    덕용 돈표 성냥할만한 눈을 빨갛게 밝히면서

    구구 꾸르륵 제 아비가 갈겨놓은 마른 똥을

    잽싸게 쪼아먹는 새끼 비둘기.

     

    - 박태일의 「비둘기 날다」전문

     

     

    *「비둘기 날다」: 1954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한 시인 박태일. 그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열린시’ 동인으로 활동해왔다. 박태일 시인은 한국의 토박이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이다. 구수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우리말의 유장한 가락 속에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애착이 녹아 있다. 박태일의 시는 자신의 곁을 떠나간 소중한 사람들의 옛 사랑을 수소문하는 ‘그리움의 편지’가 되어 과거의 ‘하늘’을 비상한다. 가난으로 무너진 서민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위로의 손길’이 되어 그들과 아픔의 길을 동행하기도 한다. 생태주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그의 시는 사람과 함께 가족처럼 살아왔던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녹색 찬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시가 기술문명과 물질문명의 확장으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자연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과 기술을 최고의 가치로 추앙하는 세태 속에서 사람과 자연 간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리움의 옹호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박태일 시인의 시세계 안에서 자연과 사람의 결속은 이 시대의 현실에 걸맞는 새로운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그리운 주막』, 『가을 악견산』, 『약쑥 개쑥』이 있다.

    「비둘기 날다」는 199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박태일 시인의 시집 『약쑥 개쑥』에 수록된 작품이다. 집을 빼앗기고 초록빛 ‘번지’를 잃어버린 주민들. 1969년 김광섭 시인의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서 드러난 ‘비둘기’의 형상이었다. ‘채석장 포성’으로부터 귀를 막기 위해 힘없는 날갯죽지 속에 얼굴을 파묻던 비둘기들. 그들은 문명의 폭력을 피하여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하늘’로 ‘쫓기는’ 망명객이었다. 김광섭의 시에 나타난 비둘기는 피해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의 이미지만큼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박태일의 시 「비둘기 날다」에 등장하는 “비둘기”는 그의 전통적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다. 집의 문을 열고 길을 걸으면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만날 수 있는 비둘기. 그는 사람에게 어제의 친구처럼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한국 정부에 의해 이미 유해有害 동물로 지정됐을만큼 기피하는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유태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에서 “자연”을 “그것”이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를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너”로 맞이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지금 “도시”에 거주하는 비둘기는 겉모습만 자연일 뿐, 자연의 속성은 퇴화의 길을 걷고 있다. 날아가는 모습보다는 앉아 있거나 걸어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몇 끼를 굶은 걸인처럼 “네온 간판 위나 전깃줄에 붙어앉아” 자신의 “헛배”를 채워줄 사람들의 과자 조각을 기다리며 “투자신탁 상업은행 빌딩” 주변을 “기웃거릴” 뿐이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산’을 빼앗긴 비둘기는 철거민과 다름 없었다. 도시의 개발사업 때문에 ‘산’이 허물어지면서 비둘기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산’을 비둘기의 초록빛 동네라고 한다면 ‘산’을 이루는 숲과 나무는 비둘기의 집이었다. 산과 숲과 나무가 도미노 현상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비둘기는 ‘번지’와 집과 동네를 빼앗긴 철거민이 된 것이다. ‘산’이라는 초록빛 동네에서 사람의 이웃으로 살아가던 비둘기는 사람이 휘두르는 기술문명의 폭력으로 인해 ‘산’이 아닌 아스팔트 위로 내몰리고, 숲이 아닌 “빌딩”의 정글 속으로 추방당하며, 집이 아닌 “간판”과 “전깃줄” 위로 퇴출되었다. 독일 시인 하랄트 크루제의 시에서 나무가 아닌 전신주를 쪼아대던 딱따구리처럼 비둘기는 풀벌레가 아닌 “플라스틱”을, 곡식알이 아닌 “유리날”을 “쪼아먹는” 신세가 되었다. “잿빛” 도시의 감옥에 유폐되어 “날아 오르는” 본능이 점점 퇴화되어가는 비둘기의 모습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에서 “드넓은 모태母胎를 떠나 비좁은 세상으로 나갔다”라고 탄식하였듯이, 한국 시인 박태일은 ‘자연’이라는 초록빛 ‘모태’를 떠나 ‘비좁은’ 도시에 갇혀 있는 비둘기와 사람의 공동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나무’ 없는 세상에서

    ― 페레나 렌취의 「나무는 당신들의 적이란 말입니까?」

     

     

    그토록 황급히 쥐도 새도 모르게

    나무의 목숨을 앗아가다니

    도대체 나무는 당신들의 적이란 말입니까?

    새들은 낯설게 변해버린

    그들의 터전에서

    어쩔 줄 몰라 이리 저리 맴돌고 있습니다.

    새들에게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몰랐단 말입니까?

    이제 그들이 마음을 놓을만한

    안식처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용없게 된 것을 당신들은 몰랐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여왕벌의 명줄을 끊어 놓았고

    나무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지요.

    당신들의 메마른 마음이

    경솔한 생각을 키운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한 그루 나무를

    사람처럼 받들지 않는다면

    사막같은 땅에서

    우리는 돌처럼 굳어갈 것입니다.

     

     

    *「나무는 당신들의 적이란 말입니까?/ Ist denn ein Baum euer Feind?: 1913년 스위스 바젤Basel에서 출생한 시인 페레나 렌취Verena Rentsch. 시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창작에도 능했던 페레나 렌취는 리스탈Liestal 市에 거주하면서 이 도시를 빛낸 여류 시인이었다. 리스탈의 자랑거리인 ‘시인 박물관’에는 페레나 렌취의 창작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렌취는 스위스의 3개 공용어(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중 하나인 ‘독일어’로 시를 창작해왔다. 1974년에 출간된 독일어 시집 『초록의 새 싹』은 렌취의 생태의식을 선명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특히 뮌헨 대학교의 교수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가 편찬한 생태엔솔로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에 수록된 렌취의 시 「나무는 당신들의 적이란 말입니까?」는 “나무”와 “새들”과 “사람” 사이의 생태적 관계가 미래 사회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페레나 렌취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달은 점점 더 자라난다』(1967), 『초록의 새 싹』(1974), 『레비아탄』(1980) 등이 있다.

    「나무는 당신들의 적이란 말입니까?」는 1978년에 처음 발표된 후 생태엔솔롤지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재수록 되었다. 시인 페레나 렌취는 “황급히 쥐도 새도 모르게 나무의 목숨을 앗아가는” 현대인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있다. 시인이 바라보는 “나무”는 “새들”의 “터전”이자 “고향”이다. 나무는 사람의 폐부 속에 맑은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숨결의 원천이다. 나무는 사람의 주거 생활에 필요한 식탁의 몸이자 의자의 뼈(骨)이기도 하다. 나무는 책과 노트의 종이를 선사함으로써 사람의 문명과 문화를 가능케 하는 조력자助力者다. 모든 시인은 나무의 살결 위에 시를 쓰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현대인들은 나무가 안겨주는 혜택을 쉽사리 잊어버리는 까닭에 “나무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가고” 있다. 이보다 더 위험한 망각은 무엇일까? 새들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생명’의 미디어media가 ‘나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 시인 박태일의 시와 독일 시인 하랄트 크루제의 시에서 읽을 수 있었듯이 나무가 없는 세상은 새들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우리”의 미래는 “사막같은 땅에서 돌처럼 굳어가는” 일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미래 사회의 안전망을 튼실하게 만드는 길은 생태계의 중추 역할을 맡은 “나무를 사람처럼 받드는” 일이다.

     

     

     

    사람의 인권人權과 ‘강’의 생명권生命權

    - 김용락의 「대구의 페놀 수돗물」

     

     

    그날 그 도시에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수돗물을 마신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게 설사와 구토 피부병을 시작했고

    임신중인 산모들이 태아를 유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괴기 공포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그 도시에선 현실이었다

     

    나찌는 2차 대전중에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페놀 주사를 포로들의 심장에다 직접 꽂아

    보다 신속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 페놀을 재벌 기업이 상수도 수원지에 쏟아부었고

    시민들은 즉각 생수를 사먹고 차를 몰고

    물을 떠 나르기 위해 인근 산속에서 법석을 떨었다

    그건 중산층의 손쉬운 이기심이었다

     

    생후 10개월짜리 갓난 딸애를 가진

    염색공장 노동자 김이박 씨

    생수 사먹을 여유가 없는 저임금의 노동자

    물 뜨러 시외 나갈 승용차 한 대 없는 김이박 씨

    공단에서 퇴근해 월셋방에 돌아와

    우유 탈 물을 못 구해 쩔쩔매는 아내를 부여안고

    그는 울부짖었다 짐승처럼

     

    “이젠 마시는 수돗물마저 계급적이어야 하나?”

     

    - 김용락의 「대구의 페놀 수돗물」 전문

     

     

     

    *「대구의 페놀 수돗물」: 1958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한 시인 김용락. 그는 1984년 ‘창작과비평사’의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그는 ‘경북일보’, ‘대구일보’, ‘대구경북시민신문’, ‘대구사회비평’, ‘지역 동향’ 등의 대중매체에서 언론활동에 종사해왔다. 김용락 시인의 언론 활동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고 개혁을 호소하는 그의 ‘저항’ 정신을 강화시켰다. 이 ‘저항’ 정신은 그의 시를 움직이는 심장과 같았다. 한국의 ‘생태문제’도 그가 ‘저항’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문제’였다. 김용락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푸른 별』(1987),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1996) 등이 있다.

    「대구의 페놀 수돗물」은 199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김용락 시인의 시집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에 수록되었다. 생태 및 환경문제가 한국 문단의 주요 화두가 된 1990년대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표된 작품이다. 1990년대 초에 낙동강을 식수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대구의 시민사회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페놀 수돗물’ 사건을 시의 소재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생태위기’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오염된 강물의 독성으로 인하여 인간 공동체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대재앙의 서곡을 재생하고 있다. ‘르포Repo’라는 언술방식을 통하여 재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시인의 카메라 렌즈로 한 가지씩 포착해보자. 대기업의 비윤리적 산업행위, 그 반사회적 행위에 의해 강물 속으로 버려지는 공장 폐수, 폐수의 “페놀”을 머금고 죽어가는 강물, 오염된 “수돗물”을 마시며 망가져가는 사람의 몸 등이 ‘르포’라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본래 ‘르포’는 신문 기사와 방송 뉴스 등에서 사용되는 ‘보도문’이다. 르포는 기록자의 주관적 생각을 버리고 객관적 사실에 따라 사건의 진상만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는 논픽션이다. 독자들은 위의 시 「대구의 페놀 수돗물」에서 화자의 발언이 르포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 작품을 비문학적非文學的 글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은유, 상징, 리듬, 윤율, 수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르포를 사용하는 ‘생태시’는 상상에 의한 가공과 예술적 기교가 결여되어 있다. 르포는 문학의 ‘유희적 기능’이나 ‘오락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비문학非文學이다. 그러나 이렇듯 ‘비문학적’ 언술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르포가 독일과 한국 문단에서 생태시의 언술방식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르포는 생태시의 ‘저항’과 ‘사회참여’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언어적 수단으로 전용轉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래 르포의 기능은 ‘기록’과 ‘보도’에 한정될 뿐, 교육적 기능으로부터는 자유롭다. 독자의 의식을 각성시키려는 교육적 의도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르포가 ‘생태시’ 안으로 들어오면 성격의 변화를 일으킨다. 생명에 대한 경각심과 환경보호 의식을 유발하려는 교육적 언술방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물론 「대구의 페놀 수돗물」에서 읽을 수 있는 ‘르포’의 교육적 성격은 단지 독자의 환경보호 의식을 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발언에서 논픽션 형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픽션의 말을 주목해보자. “이젠 마시는 수돗물마저 계급적이어야 하나?” 가상의 인물인 “김이박 씨”의 울부짖음은 시인의 ‘사회생태주의’적 의식을 대변하고 있다.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하여 인권人權과 생존권을 실현해나가는 사회기반을 조성할 때에 비로소 ‘자연’의 생명권生命權까지도 실현함으로써 ‘생태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행에 기록된 유일한 픽션의 발언은 ‘르포’의 교육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생태시는 르포를 차용하였을 뿐, 르포와 동격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는 발언이기도 하다. 필자는 김용락의 시 「대구의 페놀 수돗물」을 “교육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르포’를 차용한 논픽션的 생태시”라고 정의해본다.

     

     

     

    그래도 사랑해야만 하는 ‘자연’

    ― 루드비히 피엔홀트의 「풍경」

     

     

    나는 사랑합니다 살충제를 흥건히 적셔놓은

    저 윤기 흐르는 푸른 초원을.

    거품 끓는 골짜기 시냇물이

    기름에 젖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몰아치는 탄산가스에

    휘청이는 보리밭을.

    나는 또 사랑합니다 바싹 말라버린

    독일 떡갈나무가

    우드득 갈라지는 소리를.

     

    - 루드비히 피엔홀트의 「풍경」전문

     

     

    「풍경/ Landschaft: 1954년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출생한 시인 루드비히 피엔홀트Ludwig Fienhold.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로서 활동해왔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이 다수의 신문과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대중문화’에 관련된 시사적 칼럼을 발표해왔다. 시인 루드비히 피엔홀트가 ‘생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여행과 여가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대중잡지에 발표한 글 중 ‘여행’과 ‘여가’에 관련된 문화적 칼럼은 전문가적 수준을 보여준다. 대중문화와 생태문화의 관점으로 여행을 바라본다면 여행에서 만나는 ‘자연’은 가장 중요한 ‘문화 컨텐츠’가 아닌가? 루드비히 피엔홀트는 ‘자연’이라는 ‘여가문화’의 문화 컨텐츠가 병들어가는 것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고발하였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문학노트』(1973)가 있다.

    「풍경」은 1973년에 간행한 루드비히 피엔홀트의 시집 『문학노트』에 처음 수록되었다. 한국 시인 위선환의 시 「자갈밭」에서 ‘새’와 東江 사이에 이어진 생명의 길을 끊어놓았던 “독”을 기억하는가? 그 “독”은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독일의 “풍경”을 파괴하고 있다. 시인 김용락이 고발했던 “거품 끓는” 물의 “풍경”이 루드비히 피엔홀트의 시에서 재현되고 있다. 시인은 화학약품의 “독”으로 오염된 “풀밭”과 “골짜기 개울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보리밭이 휘청이는” 모습과 “떡갈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까지도 “사랑한다”고 단언한다. 병들어가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한 가지는 반어적 의미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 고백이다. 시인은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자연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때, 자신을 책망하듯이 자조적 넋두리로 울려나오는 말이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자괴감에 빠져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자연은 시인에게 변함없이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시인의 현실인식은 자연의 “풍경”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려내야 한다는 자발적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시인의 “사랑” 고백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회복하려는 능동적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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