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韓獨 생태시인 100인>땅의 숨결 속에서 길어 올린 생명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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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회>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人(4)  
                       땅의 숨결 속에서 길어 올린 생명의 빛


                                            

                                                     
       송용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김현승, 하종오, 안도현, 유홍준, 김참.  

    *독일 시인: 한스 위르겐 하이제,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 브리기테 뢰트거스,

                리젤로테 촌스, 볼프강 피엔홀트.


     

     우리는 기술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부인할 수 없다. ‘근본 생태론(deep ecology)’에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문명을 ‘자연’의 적(敵)으로 규정하고 문명 이전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비현실적 발상이다. 과학기술이 생겨나기 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져 있고 과학기술의 편리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가? 수많은 현대인들이 편리하고 안락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것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인가? 

     모든 일을 컴퓨터가 알아서 척척 해준다. 기억과 암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전자사전에서 모든 지식을 꺼내오기만 하면 된다. 서울에서 일하다가 KTX에 몸을 의탁하고 찜질방에서 자듯이 2시간만 눈을 붙이면 부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돈을 넉넉히 소유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식생활을 즐길 수 있다. 이제는 사람의 몸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난치병을 고치는 치료세포로 바꿀 수 있다. 현대인들은 기술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100m 육상 선수가 결승선 테이프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듯이 지난 20세기 문명과 과학기술은 급진적 속도로 질주해왔다. 이것을 역사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생명의 젖줄인 물, 공기, 흙이 병들고 나무, 꽃, 새들이 차례로 사람의 마을을 떠나간다. 과학기술의 힘을 통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던 희망은 낭만적 환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산성비와 산성눈 때문에 세포조직이 갈라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곡식과 과일에 농약이 묻어있지 않을까 의심하며, 산에서 흐르는 물조차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는 현실이다. 사람의 삶 속엔 ‘소유’와 ‘소비’로 대체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이 많다. 나무의 형제이자 꽃의 자매가 되어 ‘자연’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감을 향유하면서 정서를 가꾸는 것, 사람들 사이의 친밀감과 정신적 교류,  자선과 봉사,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것 등은 물질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이러한 조건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기술시대의 메커니즘은 사람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의 동력과 스피드를 고조시켜 왔으나 오히려 사람의 행복을 깨뜨리는 모순들을 풍성하게 생산하고 말았다. 전진과 상승, 생산과 발전만을 추구하느라고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현대사회에서 노인들, 장애인들, 고아들이 가족의 무관심, 이웃과의 단절, 사회적 냉대로 인해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는가!

     풍요와 편리를 누릴수록 행복과 평안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소외, 우울, 근심이라는 무거운 병(病)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빙하기를 맞은 지구처럼 사람의 가슴에서 감성이 박제되어 간다. 이것이 역사의 발전이란 말인가? 기술문명의 급진적 발전이 행복보다 불행을 가중시켰다면 이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겠는가? 현대인들은 더 높은 기술과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세계의 곳곳에서 침략과 전쟁과 살육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인간성의 파괴는 ‘자연’마저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인격을 가진 존재를 상품이나 부품으로 취급하는 물신(物神)의 문화 속에서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물건으로 전락하고 있다.

      제4회 연재의 글에서는 ‘인간소외가 자연소외를 낳는다’는 테마를 중심으로 ‘생명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에코토피아를 전망하는 한국과 독일의 생태시 10편을 초대하였다. 특히 자연에 대한 근친(近親)의식 혹은 형제의식을 노래한 시들을 주목하길 바란다. ‘생명의 소외’에 저항하는 힘은 모든 생물과 사람이 하늘을 아버지로, 대지를 어머니로 섬기는 자녀의 연대의식에서 솟는 것이 아닐까?   

     이 기획 연재의 글은 저서로서 글이므로 인용을 제외한 표절을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해설과 번역: 송용구) 




    ‘가장 가까운’ 초록빛 근친(近親)

               ― 김현승의 「나무」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빨간 뺨은

    少年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 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추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 김현승의 「나무」


     

    *「나무」: 1913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한 시인 김현승. 그는 목사였던 부친을 따라 평양에 이주하여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형성된 김현승 시인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그의 시를 싹트게 한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1934년 『동아일보』에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를 발표하여 등단한 김현승 시인은 ‘고독의 시인’, ‘가을의 시인’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키에르케고오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하였고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을 비롯한 ‘고독’의 시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김현승의 시는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시적 정신의 원천을 ‘고독’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가을의 기도」, 「절대고독」, 「견고한 고독」, 「인간은 고독하다」등은 그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고독’의 시편이다. 그의 모든 작품을 놓고 볼 때 생태의식을 대변하는 작품들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를 하느님의 피조물로 인정하는 가운데 사람과 자연을 ‘피조물 공동체’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기독교적 생태의식이 나타난 시작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같은 작품들이 적절한 예다. 김현승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마지막 지상에서』 등이 있다.

     시 「나무」는 1974년 『월간문학』11월호에 발표된 후에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에 수록되었다. 김현승 시인의 생태의식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작품이다.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라는 고백은 사람과 나무가 하느님의 신성(神性)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나타낸다. 시인은 “나무”를 생명 없는 사물로 보지 않는다. 그가 인정하는 나무는 하느님께 생명을 부여 받은 독립적 존재다. 나무는 독립적 존재이지만 사람의 사회 바깥에 동떨어져 있는 이질적 대상이 아니다. 나무는 사람과 함께 생명공동체를 가꾸어가는 동반자다. 김현승 시인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나무를 형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대표시로 손꼽히는 「플라타너스」에서도 나무를 생명공동체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생태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시「플라타너스」중에서) 


     시인은 ‘자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지으신”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확신에 기초하여 “플라타너스”를 인생길의 반려자로 끌어안는다. 플라타너스를 바라보는 시인의 동료의식은 「나무」 제3연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이고”,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온다”는 고백은 고독한 인생여정의 반려자로서 나무를 맞아들이는 동료의식을 선명하게 반영한다. 시 「플라타너스」와 시 「나무」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특징이다. 그런데, 나무에 대한 시인의 동료의식은 근친의식 혹은 친족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시인은 제2연에서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큰 키와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라고 피조물로서의 동질감을 예찬하더니 제5연에서는 나무의 존재근원과 사람의 존재근원이 동일한 하느님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이웃이자 동료인 나무가 어느새 시인의 마음 속에서 사람의 가족이자 친족으로 재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앗시시의 마을을 산책하다가 만나는 모든 피조물을 거리낌 없이 ‘형제’라고 불렀듯이 김현승 시인도 나무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형제애를 형상화하였다. 독일 시인 요하네스 보브롭스키가 고향 리투아니아 지역의 자연과 생명체들을 “하느님이 지으신”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였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꽃, 새 등 ‘자연’에게도 있다는 것을 김현승 시인은 의심하지 않았다.


      

           

    중요하고 고귀한 존재

    ― 한스 위르겐 하이제의 「약속」


     

    야생초여 

    모든 사람들이

    장미만을 사랑스러워하는

    이 시대에

    나는 너를 돌보는 산지기가 되리라


     ― 한스 위르겐 하이제의 「약속」


     

    *「약속/ Versprechen」: 1930년 독일 부블리츠(Bublitz)에서 출생한 시인 한스 위르겐 하이제(Hans-Jürgen Heise). 그는 시, 에세이, 문학비평, 번역 등의 분야에서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하이제는 유년 시절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베를린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되어 고향 부블리츠로 되돌아왔으나 1945년 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1950년대 말 西베를린 시절부터 1960년대 ‘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이제는 전통적 형식과 운율로부터 시를 해방하는 데 앞장섰다. 그의 ‘자유시’는 형식뿐만 아니라 테마에 있어서도 현대성을 갖추었다. 특히 하이제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서독에서 진행된 급진적 산업발전과 개발사업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의식을 토대로 하여 ‘자연’과 ‘생명’의 터전을 지켜낼 것을 호소하는 시작품들을 그의 첫 번째 시집 『새로운 초원의 징후』속에 담아냈다. ‘생태시’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제시한 마이어-타쉬(P. C. Mayer-Tasch) 교수의 시각으로 볼 때 하이제의 이 시집은 ‘생태시’의 전형적 모델이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새로운 초원의 징후』, 『길 잃은 꿈』, 『외눈박이 理性』 등이 있다.

      1959년에 발표된 한스 위르겐 하이제의 시 「약속」 1961년 그의 시집 『새로운 초원의 징후』에 처음 수록된 후, 1981년 마이어-타쉬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제2장 ‘세 가지 원소. 물 ․ 공기 그리고 흙’ 편에 재수록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저서 『나와 너』에서 자연을 “그것”이나 “대상”으로 규정하지 말고 자연을 “너”라는 독립적 존재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부버의 사상에 따르면 나무, 꽃, 새, 물, 공기, 흙 등은 사람의 소유물이나 부속물이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너”다. 사람으로서의 “나”와 자연으로서의 “너”는 존재양식, 역할, 능력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존중할 때에 “나와 너”는 서로 도울 수 있는 “상호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너”의 능력을 통하여 도움을 받는 “나”의 상황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존재를 기울여” 너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의 사상으로부터 생태주의 담론을 가져올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물질적 자원과 정서적 평안을 공급받기 때문에 사람의 인생을 지탱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써 사람의 “존재를 기울여” 자연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과 자연, 즉 “나와 너”의 상호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에 건강한 사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너와 나”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함께 형성하고 함께 가꾸어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르틴 부버의  철학과 생태주의 사이의 접점을 통하여 하이제의 시를 바라보자.       

      시인 한스 위르겐 하이제는 들판에서 거칠게 자라난 “야생초”를 “너”라고 부른다. 마르틴 부버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하이제는 모든 생물이 동등한 생명권(生命權)을 갖고 있다는 생태주의적 사고방식을 통해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 상하관계에서 수평적 상호 관계로 돌려놓고 있다. 하이제는 야생초를 비롯한 모든 동식물이 ‘생명’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과 동등한 존재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권의 가치를 측량할 수 있는 척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이성, 언어, 문명 등이 아니다. 생물의 존재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척도는 ‘생명’ 그 자체다. 천부인권과 함께 천부생명권을 똑같이 존중하는 시인의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을 읽을 수 있다. 도시인들에 의해 미물로 소외당하였던 야생초는 녹색 마을의 한 식구가 되어 “그것”이 아닌 “너”로 존중받고 있다. 




    아내는 ‘바람’에게 사랑을 먹여준다 

          - 하종오의 「소풍 가잔다」



    자식들 도시락 싸다 남은 김밥

    몇 줄 썰던 아내가 갑자기 소풍을 가잔다


    소풍은 걸으면서 바람과 잘 논다는 것

    반드시 도시락에 김밥 싸 가지고 가서

    바람에게도 한 입 먹여줘야 하는 것


    아내가 평생 안치고 푼 쌀밥과

    씻은 밥그릇 얼마나 되는가

    아이 잘 배던 아내는 가난했던 젊은 날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아이 많이 지웠는데

    이제 몸에 통풍하는 나이 되어 맛난 것 만들어 놓고 보니

    낯선 바람 찾아서라도 한 입 잘 먹여주고 싶은가 보다  


    맑은 봄날 시골 가 들길 걷다 나란히 앉았다

    아내는 도시락 풀어서

    김밥 한 개 멀리 바람에게 고수레하고

    또 한 개 던지려다 말고 내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먹는 것이 전부이다시피 한 삼백육십오일 일생, 우리가

    저마다 먹으러 이전의 세상에서 와 만났으나

    서로 먹이지 못하면 이후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자식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소풍 끝내려는데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 하종오의 「소풍 가잔다」



    *「소풍 가잔다」: 1954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한 하종오 시인. 그는 1975년 『현대문학』지에 시 「허수아비의 꿈」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反詩』동인으로 활동해왔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하종오 시인은 전통적 테마와 정형적 율격으로부터 시를 해방하였고,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혐오하였으며, 사람을 일용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비판해왔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시인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시’, ‘생명을 위한 문학’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시창작의 초기 시절부터 그의 시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가난한 자들과 소외 계층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었다. 그렇게 소외된 자들의 범주 속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외로 인한 고통을 민중과 함께 나누면서 시의 손길을 빌어 고통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민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연대의식은 그의 시를 강화시키는 에너지가 되었다. 이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일까? 하종오 시인의 언어는 사람의 인격과 생명을 소외시키는 근본적 원인을 해부하는 길을 열어나갔다. 그 ‘길’에서 마주치는 권력의 검은 손과 자본의 철각(鐵脚)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물론 그의 손에 쥔 무기는 오직 시뿐이었다. 그의 문학적 투쟁은 인권을 옹호하고 생명권을 지켜내기 위한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종오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베드 타운』 등이 있다.  

     시 「소풍 가잔다」는 『시와시학』지 2004년 겨울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필자가 하종오 시인의 시세계를 ‘사람을 위한 시, 생명을 위한 문학’이라고 규정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외’라는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넓다는 점이다. 사회로부터 사람을 소외시키는 메커니즘은 자연마저도 소외시키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사회적 인식이었다. 1984년 그의 시집 『사월에서 오월로』에 수록된 시작품 「납(鉛)」에서 나타났듯이 생산의 실적을 높이기 위하여 사람의 인격을 기계의 부품처럼 이용해나가는 비인간적 행위가 사람의 ‘혈관’과 ‘골수’를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초목’을 ‘말리고’ ‘앞강’을 ‘시커멓게 태우는’ 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하종오의 시 「납」참조)

     시집 『사월에서 오월로』의 집필을 끝낸 1984년에 하종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생각의 미로를 지나오면서 진정 내 문학이 가 닿아야 할 곳을 찾아 헤맸다. 나름대로는 분단 상황, 여성문제, 농촌 ․ 도시 문제, 공해 문제 등 사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전체에서 부분을 도려내거나 부분을 무시한 전체를 뭉뚱그리지 않고, 부분을 바로 보면서 전체를 통찰하고자 하는, 전체와 부분이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시를 쓰고자 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전체와 부분이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상관관계”는 그의 시를 낳은 모태이자 그의 시가 살고 있는 집이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발표한 시 「소풍 가잔다」도 이 ‘총체적인 상관관계’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의 혈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아이를 많이 지울” 정도로 “먹는” 문제와 “먹이는” 일상에 갇혀서 “바람”을 잊고 살았던 시인. 그는 자신을 길러준 “바람”을 찾아 아내의 손을 잡고 “바람”을 만나러 간다. 고단한 “삼백육십오일 일생”의 한 복판에서 잊혀진 주변세계의 주역이었던 “바람”. 시인과 아내의 마음으로부터 바깥의 들녘을 향해 “길”이 열린다. “들길”을 따라 걸어가는 두 동반자를 “바람”이 맞아준다. “한 입”을 채워줄 수 없었기에 떠나보낸 “아이”들처럼 십여 년만에 부모의 “소풍”길을 마중 나온 “바람”이여! 다시 만난 “아이”들처럼 반갑고 정겹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바람”에게 “한 입 잘 먹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봄 날”의 들녘에서 한 입의 밥은 소통의 길을 열고 있다. 시인, 아내, 지워진 아이들, 바람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명의 꽃잔치가 피어난다.




    비대한 욕망, 박제된 생명

    ―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대도시의 통계학


     

    뻐꾸기 시계 속에 있는

    박제된 새들만이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

    밤이면

    귀를 파고드는

    굉음의 틈바구니 속에서

    잠시만이라도

    정적을 지키는 동물은

    우리 도시들의

    입구에 서 있는

    석조(石造) 사자뿐입니다


    도시는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듯

    오물과 욕망으로

    우리를 사육했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생존 법칙을

    독살하고 말았지요


    개처럼 길들여졌다고나 할까요

    우리의 기분 따위는

    도시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값을 매기고

    생산의 수치(數値)만을 첩첩이 쌓아가면 그만이었죠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과

    덩치 큰 침실을

    손에 넣으려는 아귀다툼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생명을 버렸답니다.

             

    -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대도시의 통계학」



    *「대도시의 통계학/ Statistik für Großstädte」: 1924년 독일 쾰른(Köln)에서 출생한 시인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Margot Scharpenberg).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거주해왔던 여류 시인이다. 1962년 뉴욕에 정착한 이후 매년마다 약 2개월 동안 조국 독일에 머물기도 했으나 1968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에는 뉴욕이 본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조국인 독일의 언어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미국 시민이 된 후에도 노년에 이르기까지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인생 노트를 가득 채운 언어는 독일어였다. 그는 현대 독일어 문학권 내에서 ‘형상시(形像詩)’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을 만큼 시의 예술성을 추구해왔다.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력이 말해주듯이 인권문제와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중에서 특히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시를 비판적 포럼(Forum)으로 변화시킨 사회문제는 대도시의 환경문제였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흔적』, 『새로운 흔적』, 『대성당과의 대화』등이 있다.

    1972년에 발표된 시 「대도시의 통계학」은 1981년 마이어-타쉬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수록되었다. 마이어 타쉬 교수는 “생태시는 저항의 언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하였다. 자연을 파괴하는 사회적 원인들을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생태시의 현실참여적 성격을 강조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능동적 ‘저항’의 성격이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작품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시인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모든 것에 값을 매기고 생산의 수치(數値)만을 첩첩이 쌓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상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뻐꾸기 시계 속의 새들”과 “도시의 입구를 지키는 석조(石造) 사자”는 자연성의 상실을 나타내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시인은 이러한 반(反)자연성을 낳은 원인으로 도시인들의 물질적 욕망을 지목하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나무들을 손에 넣으려는” 탐욕이 사람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단절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숨통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 있다. 그것은 어떤 죽음일까? 한스 카스퍼의 시 「보훔」에서 고발된 것처럼 “생산의 수치밖에 모르는 전자형(電子形) 두뇌”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닐까? ‘들길’을 따라 ‘소풍’을 떠날 줄도 모르고, 들녘에서 만난 ‘바람’과 함께 놀 줄도 모르는 ….  

     




    땅의 숨결 속에서 길어 올린 생명의 빛   

                       - 안도현의 「땅」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안도현의 「땅」


     

    *「땅」: 1961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한 시인 안도현. 그는 1981년 『대구매일신문』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암시하는 것처럼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의식과 소외 계층을 향한 사랑이 그의 초기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등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시에서 변함없이 남아 있는 특징은 “세상”의 모순과 폐단을 비판하면서도 세상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을 ‘공동체의 집’이라고 명명해보자. 이 ‘집’의 부실함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구성원은 가족의 자격이 없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집’을 비판하는 발언 속에 ‘집’을 향한 애정을 담아야만 한다. 기울어가는 ‘집’이라고 해도 그 ‘집’에 살고 있는 가족의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집’을 재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향한 비판과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희망이 안도현의 시를 세상과 동고동락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에서 울려 퍼지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자기성찰의 물음은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타적 손길의 불꽃을 살려내려는 시적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시세계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양상도 감지되었다. 198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떠나보냈기 때문일까? 사람에게 흘려보냈던 사랑의 강물은 더욱 따뜻해지고 더욱 깊어지면서 모든 생명을 품어 안게 되었다. 그가 비판했던 세상, 그가 사랑했던 세상은 사람들만의 ‘집’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가족으로서 의지하고 살아가는 생명공동체)의 ‘집’으로 재건되었다. 안도현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등이 있다.  

     시 「땅」1994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안도현 시인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수록된 작품이다. 독일 시인 마르고트 샤르펜베르크의 비판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땅”을 생명의 터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증식처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땅”을 “손에 넣으려는 아귀다툼”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들의 속물적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리는 서정적 생태시가 안도현 시인의 「땅」이다. “땅”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속물적 차원에서 벗어나고 있다. “땅”은 물질이나 물건이 아니다. 순결한 생명들이 태어나는 고향이다. “땅”은 하늘의 숨결을 받아 생명을 키워내는 신성한 모태다. 땅에서 “나팔꽃”이 피어날 때 번져가는 “보랏빛”의 물결 속에서 시인의 어린 “아들”은 천진스런 노래를 부른다. 시인은 푸른 하늘을 향해 힘겹게 “덩굴손”을 내미는 나팔꽃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험난한 세파를 헤쳐가야 하는 어린 아들의 머나먼 인생여정을 안쓰러운 눈길로 내다본다. 시인의 마음 속에서 보랏빛 나팔꽃은 어린 아들의 해맑은 얼굴과 하나가 되어 그의 소중한 분신으로서 살아 숨 쉰다. 그러므로 아들을 향한 사랑의 눈물은 아들의 볼을 적시듯이 나팔꽃잎에 젖어든다. 혈육을 향한 시인의 사랑이 자연의 생명까지도 자애롭게 품어 안는다. 그는 사람과 자연 사이에 이어져 있는 생명의 핏줄을 자신의 숨결로 만져볼 수 있는 까닭에 나팔꽃 한 송이를 아들처럼 귀한 존재로 사랑한다. 시인은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착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 이 마음씨는 “땅”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욕망의 검은 장막을 헤치고 “땅”의 숨결 속에서 길어 올린 생명의 빛이다.

                   

                  


    자연을 지배하는 기계들의 나라

    ― 브리기테 뢰트거스의 「아름다운 신세계」


     

    햇빛은 일정하게 쏟아지고

    구름은 하늘의 주형(鑄型)처럼 찍혀 있는 나라

    나무와 관목은 목록에 따라 배치되고

    풀과 꽃이 실제처럼 피어있는 나라

    이들의 향기는 

    둥그런 방향(芳香) 통에서

    하나씩 번갈아 가며 흘러 나온다

    비와 폭풍도

    사람의 소환을 받으면

    당연히 창고에 저장되는 나라


    - 브리기테 뢰트거스의 「아름다운 신세계」



    *「아름다운 신세계/ Schöne, neue Welt」: 1943년 독일 쾰른에서 출생한 시인 브리기테 뢰트거스(Brigitte Rötgers). 그는 문예지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에서도 다수의 시를 발표했던 여류 시인이다. 교육학, 사회학, 연극학을 전공하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연극 배우로서도 활약하였다. 브리기테 뢰트거스의 글쓰기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포괄하였다. 물론, 특정 장르에 제한되지 않는 창작 문화가 독일 작가들의 일반적 경향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뢰트거스의 창작은 다른 작가들보다 더 다양한 길을 걸어갔다. 그는 시를 가장 많이 썼지만 ‘연극학’의 지식과 연극배우의 경험을 살려서 연극공연을 위한 대본을 수없이 창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TV와 라디오 방송극본을 창작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방송극의 전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를 낭송하는 새로운 대중문화의 콘텐츠를 생산하였다. 다양한 문화활동에도 불구하고 뢰트거스는 『차원』, 『악첸테』, 『빙수(氷水)』등의 문예지에 지속적으로 시를 발표하여 시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유지하였다. 그의 시는 영어와 폴란드어로 번역되어 해외에 알려졌다. 특히, 기술문명이 현대인에게 주는 혜택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 혜택을 절제하지 못할 경우엔 이성(理性)의 산물인 기술문명이 자연세계를 ‘인공화’하여 사람의 생활공간을 인위적 질서의 세계로 경직시키는 비이성적 결과를 낳게 되리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주목을 끌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의 시 「아름다운 신세계」는 독일어권 지역의 대표적 생태사화집인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3장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다. 생태의식에서 우러나오는 문명비판의 정신이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상상의 독특함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76년에 발표된 시 「아름다운 신세계」는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3장의 표제작이다. 편리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려는 욕구를 비판할 수만은 없다. ‘편리’가 생활에 활력을 주고 ‘안락’이 생활의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편리와 안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만큼은 재고해야 할 일이다. 상생의 윤리를 전제하지 않는 편리와 안락은 다수의 희생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생태주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상생’의 문화란 사람과 자연이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의 생활방식이다. 상생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을 ‘사회’라고 호칭한다면 사회는 자연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소통과 연대적 교섭이 지속되는 세계다. 생태주의 관점에 의해 비판한다면 자연과의 상생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만의 편리와 사람만의 안락은 사회로부터 자연을 소외시키는 원인이 된다. 브리기테 뢰트거스의 시 「아름다운 신세계」는 이러한 위험성을 풍자적으로 경고한다. 편리와 안락을 위해 자연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모습은 그의 시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무절제한 개발 사업을 통해 생명들을 제거한 후에 그들이 숨 쉬던 자리를 생명들의 모상(模像)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아름다운 신세계”의 이주민들은 “풀”, “꽃”, “나무”의 모조품들이다. 안도현 시인이 예찬했던 ‘땅’조차도 모상들의 본거지로 변해갈 것이다. 상생의 문화를 파괴한 후에 ‘땅’을 점령할 사이비 자연의 “신세계”여! 상생의 생활공간을 향해 진군해오는 이 기괴한 신세계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밤에도 깨어 있는’ 미학적 경비병 중의 하나가 브리기테 뢰트거스의 시다.      


    *참고: ‘밤에도 깨어 있는’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대표시 「빵과 포도주」의 시어다.       

         



    기능적 부품으로 전락하는 ‘뇌수(腦髓)’의 슬픔   

                            - 유홍준의 「수박」



    수박장수가

    수박의 한쪽에 칼집을 넣고

    삼각형의 수박쪼가리를 찍어내 보인다

    수박가게 앞에서

    나도 내 시커먼 머리통에

    칼집을 넣는다 삼각형으로

    머릿속을 꺼내어 본다 얼마나 잘 익었나

    칼끝에 꽂힌 내 머릿속를 들여다본다

    두상의 껍질이 수박처럼 얇아지고

    먹음직스런 뇌수가 가득 찰 때,

    두상을 먹거리로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가 생길지도 모른다

    팔뚝에 수박넝쿨 문신을 새긴 사내에게서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사라진 두상 하나를 사들고 

    나는 각다귀 설쳐대는 여름 골목으로 사라져간다


                               - 유홍준의「수박」



    *「수박」: 1962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한 시인 유홍준. 그는 1998년 계간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는 등단 초기부터 사람의 ‘소외’ 문제를 시의 테마로 부각시켰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등장하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잠에서 깨어보니 ‘벌레’로 ‘변신’해 있었다는 알레고리는 사람이 기계의 부품처럼 기능해야만 하는 비인간적 ‘소외’ 현상을 상징하고 있다. 유홍준 시인의 시세계는 카프카의 소설을 Zip 파일로 압축시킨 느낌을 준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본다면 사람의 정신과 육신은 별개의 것이지만 통합적 시각으로 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의 정신이 파괴되면 그의 육신을 움직이는 ‘생명’의 에너지도 메마른다. 정치권력, 자본, 기술의 힘을 통하여 사람의 정신을 기능적 부품으로 이용하기만 하려는 메커니즘은 그의 육신마저도 망가뜨린다. 정신과 육신은 ‘생명’의 연관 시스템 안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파괴는 곧 생명의 파괴’라는 당연한 현상을 망각해버린 현대인들의 “뇌수(腦髓)”를 향해 날아가는 각성의 불화살이 유홍준의 시다. 현대인들의 “뇌수”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물신주의, 기술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등이 시의 불화살을 맞아야 할 과녁이다. “생태문제는 곧 사회문제”라고 말했던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주의’의 시각으로 유홍준의 시를 바라볼 수 있다. 사회 안에서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반복되고 있는 사람의 기계화, 인격의 도구화, 개성의 부품화 현상이 결국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여 자연의 생명까지도 마비시키는 ‘사회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시의 상징 속에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다. 유홍준 시인의 시집으로는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 슬하』등이 있다.

      시「수박」은 계간 『시와생명』 2001년 가을호에 발표되었다. 독일 시인 다그마르 닉(Dagmar Nick)이 과학기술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현대인들을 빗대어 “우리가 믿는 것은 로보트의 두뇌와 그 위력”이라고 풍자하였듯이, 유홍준 시인도 “머릿속”의 “뇌수”에 상품의 꼬리표가 붙여진 현대인들의 얼굴 없는 얼굴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사라진 두상”은 이미 사람의 머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고유한 천성과 개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머리를 죽은 “뇌수”와 동일시한다. 그는 “두상”과 “뇌수”가 “먹음직스런 먹거리”로 전락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적의(敵意)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대상은 사람의 “뇌수”를 효용성을 높이기 위한 기능적 부품으로 취급하는 도구화의 현실이다.

     그의 다른 시 「세탁소」에서 풍자한 것처럼 현대인들의 삶은 ‘거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명찰’과 같다. 사람의 내면세계가 아닌, ‘인피(人皮)’ 혹은 ‘거죽’에 불과한 사회적 조건, 역할, 기능이 사람의 이름으로 규정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시인은 다시금 절망할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는 현대 사회를 무수한 유형적 인간들의 집단 수용소로 묘사하였다. ‘하등인간/ 중간인간/ 목적인간/ 금전인간// (…) / 중추인간/ 주변인간.’ 부품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똑같은 템포에 맞추어 똑같은 행렬로 행진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현대인들의 사회가 기능적 부품들의 집합소로 변질되어가는 ‘사회문제’를 유홍준의 시에서 또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벽처럼 단단한 이 ‘사회문제’가 유홍준의 시를 존재케 하는 이유다. 그는 사람의 인격과 자연의 생명을 동시에 위협하는 ‘사회문제’의 벽을 부수기 위해 온 몸으로 시를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목적을 추구하되, 사람의 존엄성보다 더 높은 목적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시여! 가치를 추구하되, 인격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시여! 



           

    탐욕과 모순의 이중주(二重奏)

     ― 리젤로테 촌스의 「고발」


     

    “사람”.

    하느님을 닮은 형상이여.

    “너희 발 아래

    지구를 복종시켜라.”


    지구를 괴롭히고

    지구를 학대하고

    지구를 약탈한다.

    지구의 찬란한

    숲들을 베어낸다.


    결실을 베푸는

    지구의 江들을

    바닥까지 메마르게 한다.

    생명을 선사하는

    지구의 대양(大洋)들을 없애버린다.


    지구에게서

    숨 쉴 공기를 앗아가고

    별들을 부숴버린다.


    인간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물개들을 때려 죽이고

    고래들을 작살에 꿴다.

    표범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코끼리들을 사냥한다.

    길들인 가축을 상자에 넣어 포장하고

    노래하는 새의 숨통을 끊는다.


    곤충들을 독살하고

    잡초들의 씨를 말리며

    과일에 농약을 주입한다.

    인조비료를 뿌리고

    화학사료를 먹인다.


    몰로흐와 같은

    과학기술은

    마법을 배우는 학생을

    먹어 치운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자, “사람”.

    형제를 살해한 자, “사람”.

    학대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지구.

    그대의 모든 피조물들에 의해

    피를 송두리째 빼앗긴 지구.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악마 같은 권력자.

    그의 가장 큰 죄는

    탐욕이다.  


     - 리젤로테 촌스의 「고발」



    *「고발/ Klage」: 1931년 베를린에서 출생한 시인 리젤로테 촌스(Lieselotte Zohns). 브리기테 뢰트거스가 방송극과 시를 접목함으로써 시를 대중문화의 콘텐츠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면, 리젤로테 촌스는 주로 ‘신문’이라는 매스미디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시를 발표해왔던 시인이다. 일간지에 발표된 그의 시작품들은 대부분 1978년 뮌헨에서 출간된 그의 시집 『독립된 자들』속에 담겨 있다.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리젤로테 촌스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마르틴 부버는 자연을 “그것”이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고 독립적 존재인 “너”로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크 데리다는 자연을 “나”와 동등한 “타자(他者)”로 인정하여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자연의 고유한 독립성을 인정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차이’를 존중할 때 자연과 사람은 부버의 말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상생은 자연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독립된 자’로 인정하는 시인 리젤로테 촌스의 철학은 ‘생태주의’와 일치한다.

     시 「고발」은 1978년 뮌헨에서 출간된 촌스의 시집 『독립된 자들』에 수록되었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기 시작한 지 여섯 째 날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던 까닭에 사람은 본래 선한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겨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뒤, 사람의 후손은 “학대”, “약탈”, “살육”, “착취”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람의 이러한 “죄”는 모두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이성(理性)을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고 “탐욕”을 채우는 데만 사용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듯, 사람은 이성의 힘을 잘못 사용하여 자연을 “복종”시키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한계 없는 풍요, 윤택, 편리를 누리기 위하여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해왔다. 리젤로테 촌스는 사람의 “탐욕”이 사람의 이성을 비이성적 방향으로 이끌어 생태계를 파괴하였음을 “고발”하고 있다. 

     이성이 만들어낸 작품들 중 독보적인 것은 “과학기술”이다. 사람의 행복을 위해 창조된 “과학기술”은 행복의 의미를 무색케 할 정도로 사람의 “탐욕”을 채워주는 하인처럼 사람에게 헌신해왔다. 이것이 20세기의 역사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오히려 “과학기술”은 사람을 지배하는 주인의 자리에 올라섰다. “과학기술”을 도구로써 사용해왔던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과학기술에 의지하면서 뇌수(腦髓)의 퇴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친자식들을 “먹어 치우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몰로흐”처럼 과학기술은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사람의 ‘뇌수’를 안락과 편리에 중독된 물건으로 길들여가고 있다. 이것은 유홍준 시인의 비판을 받은 현재진행형의 ‘사회문제’가 아닌가? ‘독립된 자’로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뇌수’들이 과학기술의 “마법”에 지배를 당하여 ‘눈과 코와 입과 귀가 사라진 두상’으로 획일화되고 있다. 생명의 “결실”을 안겨준 자연에게서 보복의 칼날을 받고, 자신의 피조물인 과학기술에게 지배당하는 ‘모순 중의 모순’이 바로 사람이다. ‘모순’이라는 병든 아이를 낳은 “악마”의 모태는 곧 사람의 “탐욕”이다.     




    검은 곰팡이의 수의(壽衣)를 입은 ‘인형들’의 순례   

                              - 김참의 「인형들」



    오래간만에 밖에 나오니 사람은 없고 인형들만 돌아다녔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든 인형이 담배연기를 피워 올리며 바쁘게 걸어가는 길 가 나무의자에 검은 색안경 낀 인형이 다리를 꼬고 앉아 오래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긴 코가 달린 인형들은 공터에 버려진 낡은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낡은 침대엔 검은 곰팡이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길가의 가로수에도 녹색 대문에도 노란 꽃이 핀 꽃밭에도 검은 곰팡이들이 자라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얀 얼굴의 인형들이 커피를 마시는 찻집 테이블에도 빵집 진열장 유리에도 금방 구워 김이 올라 오는 식빵에도 검은 곰팡이가 붙어 있었다. 빵집 옆에 차를 세워두고 인형들 틈에 섞여 놀이공원에 들어가니 호숫가 파라솔 밑엔 반팔 셔츠 입은 인형들이 앉아 있었다. 파랗게 반짝이는 호수의 파문을 바라보는 인형들 옆에 앉아 나도 반짝이는 물결 위를 둥둥 떠다니는 크고 작은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해 저물고 어두워지자 호수 위를 떠다니던 인형들은 의자에 앉아 있던 인형들과 함께 공원을 빠져나갔다. 나도 일어나 집으로 가야 했지만 내 옷엔 검은 곰팡이가 가득 했고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김참의 「인형들」



    *「인형들」:1973년 경남 삼천포에서 출생한 시인 김참. 그는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재미와 긴장감이 넘치는 언어로써 독자들을 동화적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였다가 불현듯 낭만주의적 환상을 부수고 현실을 끌어들이는 ‘아이러니’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이다. 시집 『그림자들』의 自序에서 “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낯선 세계에 갑자기 던져진 존재들이며,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김참 시인은 자신을 지금 이 곳에 ‘내던져진’ 존재로 파악한다. 그렇게 ‘내던져진’ 지금 이 곳의 현실은 어떤 세계인가? 난파선처럼 부서진 세계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난파를 견뎌내는 과정으로부터 ‘실존’의 의미를 찾는다.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은 ‘시’라는 집 속에서 실존하고 있다. 그가 ‘언어’라는 벽돌로 ‘시’라는 집을 짓는 행위는 난파된 현실세계를 넘어 난파 이전의 근원적 세계로 돌아가려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그가 극복하려는 현실세계는 광기로 가득한 세계다. 사람의 개성을 “인형”처럼 획일적으로 재단하고 자연의 생명을 쇠붙이로 덮어버리는 세계다. 그러므로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광기의 현실세계를 비판하도록 이끌어간다. 난파된 현실세계를 벗어나려는 독자의 본능적 몸짓을 깨우고, 근원의 해안을 향해 떠나는 시의 배에 독자를 동승시킨다. 김참의 시를 끌어당기는 이러한 정신적 흡인력은 언어의 예술성에 힘입어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미로 여행』, 『그림자들』이 있다.

     시 「인형들」은 2004년 5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작품이다. 2006년 ‘서정시학’에서 출간된 김참 시인의 시집 『그림자들』에 수록되었다.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마다 기질과 성향이 각각 다르다. 나무, 풀, 꽃, 새, 풀벌레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향과 역할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생명체를 획일화하여 ‘동식물’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속에 가두고 ‘미물’이라는 꼬리를 붙인다. 자연의 생명체들을 획일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서글픈 일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조차도 획일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을 비교한다면 서로 다른 점이 많이 눈에 띈다. 성격, 재능, 취향, 목표, 역할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상대방을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고 “나”와 상대방의 다른 점을 인정하여 존중할 때 A와 B 간의 관계는 지배와 예속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동등한 수평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물질적 메커니즘은 사람들의 개성을 마비시키고 사람들 간의 개인적 ‘차이’를 소멸시키는 데 익숙해졌다. 똑같은 주물을 찍어내듯이 사람의 정신에게 효용의 라벨을 붙이고 사람의 인격을 상품의 가치로 환산해버리는 계산법에 익숙해졌다. 사람을 자본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효용의 눈금과 기능의 지수만을 측정한다면 이 지상에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인형들”만 콘크리트 위를 걸어다니게 될 것이다. 조직사회의 물질적 목표를 향해 소경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인형들”의 순례를 생각해보라! 소름이 끼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독일 시인 리젤로테 촌스가 고발한 것처럼 이 “인형들”은 “노란 꽃” 같은 생명체를 “길들여 상자에 넣고 상품으로 포장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상품으로 변한 생명체들도 효용의 가치를 상실하면 “옷” 대신에 폐기물 딱지 같은 “검은 곰팡이”의 수의를 입고 망각의 하치장으로 실려 갈 것이다.    




    꽃모자처럼 아름답던 ‘소풍’의 추억

    ― 볼프강 피엔홀트의  「일요일의 소풍」


     

    빈 터를 찾아보자

    한적한 곳에서

    매연 한 점 없는

    자연의 고요함을 만끽해보자

    텔레비젼과

    그 밖에 권태로운 모든 것들을 박차고

    인적 없는 풍경 속으로 달려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田園처럼 펼쳐지는 쓰레기장에 앉아

    우리의 모자에 꽃 대신

    통조림 깡통을 꽂게 되리라

      

      - 볼프강 피엔홀트의 「일요일의 소풍」

     


    *「일요일의 소풍/ Sonntagsausflug」: 1950년 다름슈타트(Darmstadt)에서 출생한 시인 볼프강 피엔홀트(Wolfgang Fienhold). 그는 문예지『고무나무 Gummibaum』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신문, 잡지, 방송 등 거의 모든 대중매체에 시를 발표하여 시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시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르포, 수필, 방송극 창작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사회학을 전공한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사는 사회, 정치, 문화, 대중, 현실이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자연”은 언제나 ‘사회’와 ‘현실’ 안에 있는 세계였다. 이것이 그의 주요 시작품들을 생태시로 규정케 하는 근거다. 그의 시집 『옛날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은 그의 생태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성과물이다. 이 시집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어도 더 이상 노래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독자에게 인식시켜 자연에 대한 낙관적 생각을 독자 스스로 부정하게 한다. 공동체의 안녕에 대한 위기의식을 각성시키려는 교육적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밖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불안 저 너머에』, 『신발이 맞지 않는 때가 많다』 등이 있다.

     1975년에 발표된 시「일요일의 소풍」은 1977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출간된 볼프강 피엔홀트의 시집 『옛날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에 처음 수록되었다. “자연의 고요함을 만끽하는 것”과 “인적 없는 풍경”을 찾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연인의 “모자”에 “꽃”을 꽂아주며 사랑을 속삭이던 꽃밭엔 “통조림 깡통”이 쌓여 있고, 수채화의 소재가 되었던 “전원”은 “쓰레기장”으로 변해간다. “소풍”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넘쳐 흐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인의 “소풍”길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웃음을 앗아가는 자연풍경 때문이다. 이 시가 담겨 있는 시집의 제목처럼 시인은 ‘옛날처럼 웃을 수’ 있는 날을 간절히 그리워 한다. 망가진 자연을 눈 앞에 두고 미소 지으며 소풍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대엔 자연과 사람 간의 조화를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다. 낭만주의적 자연관을 변함없이 고수하는 시인들도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인 볼프강 피엔홀트는 “자연”에 대한 독자들의 전통적 관념을 해체하고 그들의 눈길을 생태파괴의 현장으로 돌려놓는다. 시인 김참이 ‘인형’처럼 획일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서 벗겨내려고 했던 ‘검은 곰팡이’의 ‘수의’를 기억하는가? 볼프강 피엔홀트가 바라보는 ‘수의’는 사람들의 시대착오적 고정관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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