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韓獨 생태시인 100인>소유의 대상이 아닌, 모든 생명의 터전 ‘자연’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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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人(3)

                        소유의 대상이 아닌, 모든 생명의 터전 ‘자연’이여


                                                                       송 용 구 (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이선관, 신진, 류시화, 이준관, 이달균.  

    *독일 시인: 페터 쉬트(Peter Schütt), 로제 아우스랜더(Rose Ausländer), 루드비히 펠스(Ludwig Fels), 마르가레테 한스만(Margarete Hansmann), 롤프 하우프스(Rolf Hau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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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과 물질이 정신을 마네킹처럼 마비시키고, 기술이 자연을 쇠붙이로 변화시키며, 속도와 편리가 창조적 상상을 일회용 비품으로 전락시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하고, 사람의 존재가치를 상품의 가치로 환산하며, 사람의 능력을 자본의 획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메커니즘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와 세상에서는 ‘자연’조차도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인격과 존엄성을 가진 사람이 ‘목적’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수단이나 도구로 소외당하는 땅에서는 생명을 가진 ‘자연’조차도 생명 없는 물건으로 천대받게 마련이다.

      사람의 인권(人權)이 실현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조차도 보호받을 수 없다. 사람들의 상생(相生)이 깨지는 곳에서는 사람과 자연의 상생도 깨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존(相互依存)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과 자연 사이의 상호의존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해나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초시대적 사회문제다. 그렇다면,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 대안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 사회는 사람과 자연이 어느 한 쪽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사회가 아니다. 동등한 수평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사람은 자연에게 ‘혜택’을 부여받고 자연은 사람에게 ‘보호’를 받는 ‘상호의존’이 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술문명과 자연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는 사람의 생활방식을 통하여 기술문명의 스피드를 조절하고 기술문명의 파괴력을 제어하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우리의 미래로 다가와야만 하지 않을까? 기술문명의 능력과 에너지를 자연을 보호하는 데 선용(善用)해나가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우리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잡아야만 하지 않을까? 이 사회는 생태주의(生態主義)적 패러다임이 대중의 생활윤리로 정착될 때에 이루어질 수 있는 대안사회, 즉 ‘생태사회’를 의미한다. 

      제3회 연재의 글에서는 구체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생태사회’를 향한 비전을 시작품 속에 담아낸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을 초청하였다. 특히 ‘생명’의 근원인 ‘물’과 ‘공기’의 갱생을 호소하는 시편을 중심으로 ‘느림’의 생활방식을 생태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한국과 독일의 생태시 10편을 초대하였다. 이 기획 연재의 글은 저서로서 출간이 예정된 글이므로 인용을 제외한 표절을 삼가주시길 부탁드린다.

                                                                                                                  (해설과 번역: 송용구)




    남쪽 바다는 독(毒)의 무도회장

               - 이선관의 「독수대(毒水帶) 1」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이따이 이따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


             - 이선관의 「독수대(毒水帶) 1」  전문


      

    *「독수대(毒水帶) 1」: 1942년 마산에서 출생한 이선관 시인. 그는 뇌성마비 장애의 한계를 딛고 ‘생태․ 환경문제’의 산 증인으로서 평생을 보낸 문인이다. 경남대학교 3학년 과정에서 중퇴한 후에 시창작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75년 10월 14일 『경남매일신문』에 환경오염의 현실을 고발하는 연작시 「독수대(毒水帶)」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선관 시인은 자신이 거주하는 마산 지역의 바닷물이 오염되어가는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시켰다. 물론 그 사회문제는 사람의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위기상황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주위에선 나를 매사에 불평만 늘어놓는 불평분자라고 얘기하였다”는 시인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수대」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대중의 관심은 환경과 생태계가 아니라 경제와 산업에만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을 급진적으로 추진해왔던 정부 당국도 이선관 시인에 대해 고운 눈길을 보낼 리가 없었다. 시 「하나뿐인 지구 그리고 조선반도」에서 시인이 직접 밝힌 것처럼 “당국에서는 조국 근대화로 가는 보랏빛 길목에 경제개발을 저해하는 인물”로 그를 지목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출간된 그의 ‘환경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서 이선관 시인은 “22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은 하나뿐인 지구 그리고 조선반도”라고 고백하였다. 한반도를 포함한 ‘지구촌’의 자연과 생명체들을 ‘경제개발’의 도구로써 이용하는 모든 인간중심적 메커니즘을 극복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이유임을 밝힌 것이다. 그의 연작시 「독수대」는 1970년대 이하석 시인, 이건청 시인 등과 함께  ‘생태시’ 혹은 ‘환경시’를 한국 시단의 현대적 장르로 꽃피우는 맹아(萌芽) 역할을 하였다. 이선관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기형의 노래』,『인간선언』,『독수대(毒水帶)』등이 있다.

      시 「독수대(毒水帶) 1」은 1975년 10월 14일 『경남매일신문』에 연작시의 형태로 처음 발표된 후, 1997년 도서출판 ‘살림터’에서 출간된 自稱 ‘환경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 수록되었다. 제1연에서는 “바다”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따이 이따이”라는 비명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이따이 이따이”는 ‘아프다 아프다’라는 뜻을 가진 일본어이다. 어느 날, 일본 삼정(三井) 금속 광업소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카드뮴에 오염되어 불구자의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썩어가는 몸에서 각혈하듯 쏟아지는 말들 중 가장 많은 것은 “이따이 이따이!”였다고 한다. 그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 “이따이 이따이”는 “카드뮴”으로 인하여 인체가 망가지는 병을 일컫는 병명이 되었다. 시 「독수대」에서 이선관 시인은 사람뿐만 아니라 “바다”도 똑같은 병에 감염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감염이라니! 그렇다면 “이따이 이따이”가 천연적 질병이란 말인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공적 병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또 한 가지의 사실이 있다. 치명적 독성(毒性)을 지닌 “카드뮴”과 같은 중금속의 물질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하려는 윤리를 저버린 채, 산업의 실적만을 올리기 위하여 ‘생명’을 기계의 부품처럼 이용하는 반윤리적 사고방식이 사회 전반에 널리 ‘감염’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뿐만 아니라 “바다”까지도 병자(病者)로 전락한 것이다. 공장의 노동자들, “바다”, “과일” 등. 사람과 자연의 생명이 차례로 쓰러져가는 연쇄적 몰락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생명의 존엄성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낳은 파괴적 도미노 현상이다. 사람의 몸과 “바다”의 자궁을 중금속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타락시키는 ‘감염’의 병인(病因)은 ‘생명’의 가치를 자본의 가치로 환산하는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독일 시인 엘케 외르트겐(Elke Oertgen)이 자신의 시 「물」에서 “바닷물도 종언을 고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탄식하였듯이 이선관 시인의 고향인 남쪽 바다도 “유언”을 남기고 있다. 그 “유언”은 철없는 자식에게 사고방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와 같다.   

       


    소유의 대상이 아닌, 모든 생명의 터전 ‘바다’여!

                         - 페터 쉬트의 「소유관계」


    북해 연안의

    모래톱에 펼쳐진 바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것도 아니고

    네덜란드나 덴마크의 것도 아닙니다

    그 바다는 정유회사 ESSO의 것도

    BP의 것도 아닙니다

    그 바다는 유일하게도

    바닷가를 달리는 사람들과 모래톱의 달팽이들

    좀조개와 후추조개

    게와 새우들

    바다전갈들

    가자미와 청어들의 것입니다

    그 바다는 빙어와 큰 가시고기

    줄무늬 청어와 혀가자미

    물개와 바다표범

    검은머리 물떼새

    작은 도요새

    흑기러기와 솜털오리

    장다리 물떼새와  

    갈매기와 바다제비의 것입니다

    그 바다는 샤르회른 지방의 조류보호 감시자와

    쥘트 지방의 천진난만한

    벌거숭이 아이들의 것입니다

    나는 단호히 주장합니다

    이 소유관계를

    결코 바꾸지 말 것을 


                 - 페터 쉬트의 「소유관계」 전문


    *「소유관계/Besitzverhältnisse」: 1939년 독일 ‘바스베크(Basbeck)’에서 출생한 시인 페터 쉬트(Peter Schütt). 그는 함부르크, 괴팅엔, 본에서 독일문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도르트문트를 중심으로 결성된 작가 단체 ‘61 도르트문트 그룹’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68년엔 작가 라이너 히르쉬(Rainer Hirsch)와 함께  ‘함부르크 전업 작가 일터’라는 문학 단체를 결성하였다. 1971년부터는 그 후속 단체인 ‘노동세계의 문학’을 주도하면서 ‘독일 작가 동맹’의 회원으로 활동해왔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가톨릭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페터 쉬트는 ‘독일 공산당(DKP)’과  ‘민주 문화 연방’의 핵심 멤버로 활동할 만큼 다양한 정치활동에 몸을 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정치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경험은 ‘시대시(時代詩)’를 낳는 기반이 되었다. 페터 쉬트는 시대의 모순과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비판하는 사회참여적 ‘시대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다. 그의  ‘시대시’ 범주 안에 속하는 현대시의 경향들 중에서 ‘생태시’는 대표적 장르이다. 그는 생태문제를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였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를 깨뜨리는 원인들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고발하면서 사회개혁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시창작뿐만 아니라 르포(Repo)를 중심으로 하는 논픽션 쓰기와 수필 형태의 산문 쓰기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누구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지!』(1977), 『관계들』(1978), 『두 개의 대륙』(1979), 『시대시(時代詩)』(1980), 『꿈과 일상 사이에서』(1981) 등이 있다.

      시 「소유관계」는 1980년에 처음 발표된 후 1981년 페터 쉬트의 시집 『꿈과 일상 사이에서』에 수록되었다. 이선관 시인의 「독수대」로부터 들었던 “바다”의 신음소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바다”에 대한 “소유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페터 쉬트는 “북해 연안”의 “바다”가 수많은 생물들에게 속해 있는 공동의 터전임을 밝히고 있다. 자연은 개인의 전유물도, 회사의 자본도, 국가의 재산도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이 “주장”하는 “소유관계”는 자본주의의 경제원칙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그 “소유관계”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상, 즉 ‘생태주의’에 정신적 토대를 두고 있다. 자연이 개인과 회사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생물의 공생(共生)의 터전이라는 사실은 어떠한 존재도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굳이 “바다”의 주인을 찾는다면 “바닷가를 달리는 사람들”과 “천진난만한 벌거숭이 아이들”을 포함하여 “바다”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이 “바다”의 주인 아닐까? 

      인디언 수쿠아미쉬 족의 추장 ‘시애틀’은 부족의 땅을 팔라고 요구하는 워싱턴 시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이상하군요.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애틀의 생각처럼 자연의 존재 가치는 결코 자본의 값으로 환산될 수 없다. 상품의 등급으로 평가될 수도 없다. 자연은 사람의 지배권 아래 종속된 대상이 아니다. 효용과 기능을 만족시키는 물건도 아니다. 자연은 사람과 모든 생물이 동반자로서 가꾸어 나갈 공동의 터전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사람이 “바다”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달팽이, 조개, 게, 새우, 전갈, 가자미, 청어, 빙어, 가시고기, 물개, 바다표범, 물떼새, 도요새, 갈매기와 함께 “바다”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의 권리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다를 “소유”하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유”로부터 “도피”할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함께 가족으로 “존재”하는 삶 속에서 자족하는 “자유”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자유로부터의 도피』참고.)


    그리움에 ‘절은’ 아름다운 ‘강내(江內)’의 기억이여! 

                   - 신진의 「강 ․ 물고기회」



    물고기를 먹자고 낚시를 한다

    주먹만한 붕어 몇 건져 올린다

    비늘 떨고 아가미 떨고

    내장을 헹구며 디스토마를 잡는다

    둔각의 등뼈 마디마디 헤집어

    수은, 납을 도려낸다

    살점에 박힌 부영양 오물, 방카A 유 찌꺼기

    카드뮴을 걷어낸다

    마침내

    초고추장 병을 열고

    강내를 더듬는다

    기억에 절은 손가락을 빨았다


                 - 신진의 「강, 물고기회」 전문



    *「강 ․ 물고기회」: 1949년 부산에서 출생한 신진 시인. 그는 1974년 『시문학』지에 시 「유혹」이 추천되었고 1976년 같은 문예지에 시 「장미원」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94년 ‘시와시학사’에서 출간된 신진 시인의 시집 『강(江)』은  ‘생태〮 ․ 환경 문제’를 시의 테마로 부각시킨 본격적 생태시집으로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시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의 생태시집이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그의 시집은  ‘강’과 ‘물’이 오염되어가는 현실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성의 타락과 문명의 폭력성을 비판하였다는 사실에서 문학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최승호, 고형렬 등에 의해 ‘생태시’ 혹은 ‘환경시’라는 장르가 한국 문단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는 文學史의 흐름 속에서 신진 시인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진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멀리 뛰기』(1986), 『강』(1994), 시선집 『풍경에서 순간으로』(2010), 『미련』(2014) 등이 있다.

      시 「강 ․ 물고기회」는 1994년 ‘시와시학사’에서 출간된 신진 시인의 생태시집 『강』에 수록되었다. 제1장에 수록된 시 16편을 외관상으로 볼 때는 생명의 원천인  ‘강’이 오염되는 것을 막고  ‘물’의 생명력을 ‘보호하자’라는 평범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미시적(微視的) 렌즈로 시를 들여다보면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을 파괴하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근본적 원인을 만나게 된다. 물욕(物慾)의 노예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기술문명의 힘을 남용할 때에 ‘강’의 생식능력은 고갈되고 ‘물’의 자정능력조차도 마비된다는 것을 시인은 가차 없이 고발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물고기”의 “회”를 뜨는 현장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어류 해부학 교실로 바뀐다. 교사는 시인, 학생은 독자 자신이다. 그러면 이 해부학 교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물고기”를 타살한 살인자들이 물고기의 “등뼈” 속에 “수은”, “납”, “카드뮴” 같은 중금속을 박아넣었다는 사실과 함께 물고기의 “살점” 속에 “방카A 유” 같은 독극물을 채워넣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중금속이 물고기의 새로운 뼈가 되었고, 독극물이 물고기의 새로운 피가 되었다는 충격적 지식이 학생의 “기억” 세포 속에 스며든다.

      시인은 물고기를 타살한 살해 도구들이 제방처럼 두텁게 쌓여가는 ‘강’을 바라본다. 그는 강물 속에 더 이상 ‘손’을 담그지 못한다. 고형렬 시인이 자신의 시 「한강 下水」에서  ‘오물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라고 ‘강’을 풍자하였듯이 신진 시인 또한 ‘강’을 유독성 화학물질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회”를 뜨는 현장을 야외 해부학 교실로 바꿔놓았던 시인은 옆에 놓인 “초고추장 병” 속에만 “손가락”을 담그고 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초고추장 병”은 어린 시절의 “강내(江內)”로 변용된다. 그는 은빛 모래알들이 환히 비쳐나오는 맑은 “강내를 더듬으며” 그리움에 “절은 손가락을 빨고” 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유년의 ‘강’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학생인 독자의 기억 세포 속에 새겨넣고 있다. 다만, 이렇게 독자들의 기억 노트에 새롭게 새겨진 깨끗한 ‘강’의 기억이 그침 없는 물줄기로 흐르고 흘러 내일의 맑은 “강내”를 이루기를 염원하면서 … .



    ‘독(毒)’을 실어나르는 화학전쟁의 전범(戰犯), 공기여!

                     - 로제 아우스랜더의 「마지막 어머니」



    물과 피를 받고 태어났지만

    대도시의 원시림 속에서

    길들여진 어머니


    문명의 칼로 구획을 그어 놓은

    정글은

    또다른 정글과 경계를 이루었지요


    빛의 꼭대기를 날아다니다가

    독(毒)의 강물 속에서 비틀 비틀 헤엄치는


    마지막 어머니

    공기의 

    숨통을 끊은 이는 우리입니다


                   - 로제 아우스랜더의 「마지막 어머니」 전문    

     


    *「마지막 어머니/ letzte Mutter」: 1901년 옛 루마니아의 영토인 부코비나의 지방 수도 ‘체르노비츠’에서 출생한 시인 로제 아우스랜더(Rose Ausländer). 유태인이었던 여류 시인 로제 아우스랜더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 ’군대가 고향 체르노비츠를 침략하여 조직적으로 수만명의 유태인들을 박해하였을 때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시인은 동족인 유태인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가혹한 박해와 노동에 시달렸다. 학대와 학살을 일삼는 나치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나치에 대한 반감과 함께 전쟁을 혐오하는 반전(反戰)의식을 갖게 되었다. 로제 아우스랜더가 평생 동안 ‘생명’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사상을 시로 옮겨왔던 것도 전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의 인권(人權)과 함께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을 존중하는 정신이 시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 것도 “전쟁”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1946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가 1964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서 1965년 이후 독일의 ‘뒤셀도르프’ 시에 정착하였다. 1972년부터는 그곳의 유태인 공동체에 거주하였다. 1978년부터는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을 떠날 수 없었지만 병(病)이 시인의 생명을 위협할수록 뜨거워지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시 속에 영감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시인의 몸 속에서 ‘생명’이 숨쉬고 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시창작의 열정을 불살랐다. 죽음의 위협조차도 ‘생명’의 희열을 막을 수는 없었던 까닭에 로제 아우스랜더의 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품어안으려는 생명의식(生命意識)의 꽃으로 피어났다. 1988년 ‘뒤셀도르프’의 유태인 공동체에서 타계하기까지 로제 아우스랜더가 남긴 주요 시집으로는 『무지개』(1939), 『재만 남은 여름』(1978), 『동의』(1980) 등이 있다.

      「마지막 어머니」는 1981년 독일 뮌헨 대학교의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P. C. Mayer-Tasch)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2장 ‘세 가지 원소. 물․ 공기 그리고 흙’ 편에 수록되었다. 대도시를 진원지로 하여 확산되는 대기오염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시인은 “공기”를 “마지막 어머니”로 호명한다. “공기”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기 때문에 시인은 주저 없이 “공기”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이라는 말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공기”의 절박한 상황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문명의 칼로 구획을 그어 놓은” 빌딩숲을 대도시의 “원시림”이자 “정글”이라 부르고 있다. “공기”는 이러한 문명의 숲 속에서 “길들여졌다”. 맑은 햇빛 속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전광판에서 내뿜는 인공적인 “빛의 꼭대기”를 떠돌고 있다. 지상으로 내려온다고 해도 “독(毒)의 강물” 속을 “비틀 비틀 헤엄치며” 숨이 막혀 죽어갈 뿐이다. 바로 우리들이 문명의 “칼”로써 “어머니”와 다름없는 공기의 “숨통을 끊은” 것이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이제 “공기”는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유해한 “독”을 선사하고 있다. 사람에게서 받았던 독배(毒杯)를 고스란히 사람에게 돌려주고 있다.

      “공기”와 “물”은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근원적 원소다. 그렇다면 한국의 이선관 시인, 신진 시인이 고발하였던 “물”의 오염과 “공기”의 오염 사이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물”의 생명력이 파괴되면 물 속의 산소도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 ‘산소’는 공기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다. 이러한 물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물과 공기 사이엔 ‘산소’라는 생명선(生命線)이 연결되어 있다. 물과 공기 사이엔 생명의 혈관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매연, 배기가스, 각종 화학물질이 “공기” 속으로 침투하여 이산화탄소(CO2)를 팽창시키고 산소를 질식시킨다면 “물”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공기”는 이산화탄소의 독성을 실어나르는 화학전쟁의 전범(戰犯)이 되어 “물”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의 이선관 시인과 신진 시인의 ‘생태시’에서 고발된 것처럼 화학물질의 보관소로 변해가는 바다와 강의 “물”은 산소를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독”의 진원지로 변해버린 공기는 물 속에 더 이상 “어머니”의 맑은 숨결을 불어넣지 못한다. 오히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처럼 물의 “숨통을 끊을” 바이러스만을 퍼뜨릴 뿐이다. “마지막”에는 시인의 예견대로 “공기”조차도 “독(毒)의 강물 속에서 비틀 비틀 헤엄치다가” 생명을 잃을 것이다. 시인 로제 아우스랜더의 시 「마지막 어머니」, 신진 시인, 이선관 시인의 ‘생태시’는 공동의 메시지를 합창하듯이 들려주고 있다. 물과 공기 사이의 생명선을 지키는 것은 인류의 초시대적(超時代的) 과제임을 잊지 말라고 ….  



    나무의 수액(樹液) 속에서 뛰는 심장

                  - 류시화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



    나는 정원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내 머리카락은 쥐똥나무의 뿌리가 되고

    손톱은 어느새 딱정벌레의 등짝이 되었다

    내 눈동자는 새들이 와서 갈증을 채우는 물웅덩이

    그곳에 구름이 비치고

    코는 달팽이의 집, 그 뿔이 나를 간지럽힌다.


    흙이 축축해 나는 돌아눕는다

    거미들이 내 엄지발가락과 무릎 사이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 속에서 또 꿈을 꾸었다

    그러는 사이 나비 한 마리 내 흙 묻은 젖꼭지에 날아와 앉아

    홀로 사색에 잠기고


    내 발꿈치에는 돌 하나가 태어난다

    내 심장은 나무의 수액(樹液) 속에서 뛰고

    혈관은 지렁이들의 통로

    귀는 귀뚜라미의 동굴

    이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추위는 더 이상 없으리라 설령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해도


                 - 류시화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 전문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 1959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류시화 시인. 그는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시운동’ 동인으로 활발한 시창작 활동을 펼치다가 1983년 이후 1990년까지는 문단 활동을 중단하고 구도(求道) 생활에 전념하였다. ‘구도’의 기간 동안에 미국, 인도, 네팔, 티벳 등 해외 각지를 편력하며 명상가들과 교류하였고 인도의 ‘라즈니쉬 명상센터’, 미국의 ‘요가난다 명상센터’에서 생활하는 등, 명상에 심취하였다. 또 이 기간 동안에 ‘명상’과 관련된 해외의 서적들을 다수 번역하고 출간하여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성자가 된 청소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는 그의 대표적 역서이다. 1991년 그가 발표한 창작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무려 10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6년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도 스테디셀러로 기록될 만큼 대중의 높은 인기를 받고 있는 시인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의 실험성, 철학적 사상, 시대정신, 현실인식, 사회적 메시지 등이 보이지 않는 까닭에 평론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과 세계의 곳곳을 방랑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자연체험의 깨달음은 류시화 시인의 생태의식과 생명의식을 강화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시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고 주장했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이 생태계 안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가운데 아무리 작은 생물일지라도 사람의 ‘생명’과 유기적 연관성을 지닌 소중한 존재로 받드는 생태의식의 지평을 넓혀갔다. 류시화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 등이 있다.

     시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는 2004년 봄 『시와시학』지에 발표되었다. 류시화 시인이 말하는 “자연주의”는 서구 문예사조들 중의 하나인 ‘자연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의 전개 과정 속에서 생겨난 ‘자연주의’는 사실과 현상을 사진 찍듯이 정확하게 재현함으로써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의 경향이다. ‘다위니즘’과 ‘실증주의’ 등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낳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자연주의”는 노자의 사상과 비슷한 자연철학을 의미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에서 자연과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류시화의 시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와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다.

      “나”는 자연의 일부분이요, 자연은 “나”의 안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나”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움직임이요, 자연은 바깥으로 드러난 정신의 움직임이다. “나”는 뱀처럼 뜨락에 “길게 누워” 있다. 어느새 “나”의 몸은 만물의 집이 되었다. “내 머리카락”은 우거진 수풀처럼 “쥐똥나무의 뿌리”가 되었다. 나의 “손톱”은 오랜 세월 동안 들판에서 강인한 바람과 함께 뛰놀다 보니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 쇠토막처럼 단단해져서 “딱정벌레”의 몸을 보호해주는 “등짝”이 되었다. 나의 “눈동자” 속에는 언제나 순수한 빗물이 고여 있어서 하늘의 거울처럼 “구름이 비친다”. 나의 “코” 속에서는 언제나 깨끗한 숨결이 흘러나오기에 “달팽이들”은 나의 코를 집으로 삼아 둥그런 “뿔”로 나의 숨결을 간지럽힌다. 이 때, “땅”은 나의 등을 받아줄 요가 되고 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은 나의 몸을 덮어줄 이불이 된다. 어릴 적부터 꽃잎의 향기를 모유처럼 마시며 살다 보니 어느덧 어른이 되어 나의 “젖꼭지”에서도 꽃잎의 향기가 흘러나와 “나비”를 행복한 착각 속에 빠뜨린다. “나비”의 눈엔 나의 “젖꼭지”가 꽃잎처럼 황홀해보인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방인이 아니었듯이 “나”도 이 자연의 “정원”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나무”도, “지렁이”도, “귀뚜라미”도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낯선 대상이 아니다. 나무의 순결한 “수액(樹液)”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공기가 만물과 “나”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우리 모두의 깨끗한 숨결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 시인 로제 아우스랜더의 시로부터 죽음의 비가(悲歌)를 헌정받았던 ‘공기’는 류시화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시」로부터 잃어버린 갱생의 “꿈”을 되찾았다.



    허상(虛像)의 자연, 허탈한 만족 

            - 루드비히 펠스의 「설비」



    당신은 숲이 그려진 벽지를 벽에다 바르고

    나는 발정난 숫사슴의 소리를 흉내냅니다.

    당신은 분무기로 전나무 향기를 뿌려대고

    나는 이끼 덮인 보료에 바람을 불어넣지요.

    당신은 녹음기로 새소리를 불러내고

    나는 플라스틱 꽃에 물을 줍니다.


    그래도 아직 우리가 머뭇거리는 것은

    새끼노루를 박제하는 일입니다.


                  - 루드비히 펠스의  「설비」 전문

                


    *「설비/Einrichtung」: 1946년 독일 ‘트로이히트링엔(Treuchtlingen)’에서 출생한 시인 루드비히 펠스(Ludwig Fels). 그는 시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창작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자연과 사람 사이의 분리된 관계를 조화로운 관계로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의 시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1975년 ‘에어랑엔’ 시의 ‘클라우스 G. 레너’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집 『각성』은 루드비히 펠스의 생태의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집이다. 도시의 생활공간으로부터 ‘자연’을 점점 더 배타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주체는 도시인들이다. 개발사업을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 하고, 전자동(Auto) 시스템을 통하여 제한 없이 편리를 누리려고 하는 도시인들의 욕망이 자연을 도시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들 자신이 자연을 왜소하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면서 멀어진 자연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젖어들기도 한다. 모순이 아닐까? 루드비히 펠스의  대표적 시집인 『각성』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서글픈 모순을 스스로 극복해나갈 것을 ‘각성’ 시키는 사회적 각성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각성』외에도 『과거의 시작』(1984)이 있다.

      시 「설비」는 1973년에 발표된 후에 1975년 루드비히 펠스의 시집 『각성』에 수록되었다. 도시의 공간 속에 갇혀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져만 가는 도시인들의 모습이 시인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의 비애감을 더욱 붉게 물들이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 손길로 끊임없이 가공하여 도시의 영역을 점점 더 넓혀가는 현상이다. 인공적 개발 행위의 속도를 높일수록 자연과 사람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져간다. 시인 루드비히 펠스의 눈에 비친 도시인들은 ‘자연’이 사람의 인생에 꼭 필요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실리(實利)와 편리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어제보다 더 큰 오늘의 실리를 얻으려는 도시인들의 욕망, 오늘보다 더 큰 내일의 편리를 예약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자연에 대한 인공적 개발 행위를 부추긴다. 그러나 도시의 삭막함이 느껴질 때마다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자연의 소중함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 때마다 도시인들은 자연을 그리워하는 이중적 양면성을 노출시킨다. 그들의 서글픈 모순이 위의 시 「설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자연을 향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자연의 모상(模像)을 창조해낸다. 그들은 “숲” 속으로 들어가서 푸른 “전나무”의 향기를 마시지 못하는 대신 “숲이 그려진”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전나무 향기”를 닮은 스프레이로 몸을 적신다. 그들은 산바람이 불어오는 풀밭에 앉아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대신 “이끼” 모양으로 장식한 “보료”에 누워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새소리”를 흉내낸다. 자연의 실체로부터 단절된 채, 자연의 가상(假像)만으로 정서적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도시인들의 노력이 허탈한 웃음을 자아낸다. 류시화 시인이 예찬하였던 ‘자연주의자’의 삶은 도시인들의 거주지 안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그 가능성을 도시인들의 삶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순을 스스로 ‘각성’하고 경제적 실리와 생활의 편리보다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도시 안에서 기술문명과 자연의 공생을 이루는 것이 눈 앞의 이익과 순간의 편리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각성’해야만 한다. 도시인들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다면 로제 아우스랜더, 이선관, 신진 시인이 염원하는 ‘공기’와 ‘물’의 갱생은 어려워질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나무의 손길

        - 이준관의 「가을 떡갈나무 숲」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婚禮),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 한데,

    텃새만 남아

    산(山) 아래 콩밭에 뿌려 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 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 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 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山)짐승이 혀로 핥아 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산(山)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거야, 잎을 떨군다.


                   - 이준관의 「가을 떡갈나무숲」 전문



    *「가을 떡갈나무숲」: 1949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이준관 시인. 그는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세대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시를 써왔던 시인이다. 그런 까닭에 동시 분야에서도 문학적 성과를 쌓아온 아동문학가로 알려져 있다. 1971년 동시 「초록색 크레용 하나」로  ‘서울신문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당선되었고  1974년 시전문지 『심상』에 시 「풀벌레 울음송」외 2편을 추천 받아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생활공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 동물, 식물 등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시의 뜨락으로 초청하여 시를 ‘생명’의 네트워크로 구성하였다. 영국의 진보적 문화학자(文化學者) 레이먼드 윌리엄즈는 ‘문화’를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그 지역 주민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이라고 규정하였고, 프랑스의 문화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문화’를 “강한 의미를 만들어가는 생산방식”이라고 정의하였다. 필자는 윌리엄즈와 르페브르의 견해를 근거로 삼아 이준관 시인의 시를 “녹색 문화의 현장”이라고 명명한다. 그가 ‘자연’의 수많은 생물과 함께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생활방식’을 시의 언어로 형상화하여 ‘강한 의미’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명칭은 이준관 시인의 시에 한정된 것은 아니고 생태의식을 갖춘 모든 시작품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준관 시인의 시는 이 “녹색 문화의 현장”이라는 이름을 나타내는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가을 떡갈나무숲』,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등이 있다.

      시 「가을 떡갈나무숲」은 1991년 ‘나남’에서 출간된 이준관 시인의 시집 『가을 떡갈나무숲』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시인은 맘몬(物神)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떡갈나무숲”에 와서 위로를 얻는다. 그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저항하여 ‘정신’과 ‘생명’의 가치를 옹호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보다 정신을 우위에 두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움보다 더 큰 상처가 어디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과학기술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자본의 바벨탑을 향하여 100M 경주 선수처럼 질주하고 있다. 시인은 그 질주의 대열로부터 이탈을 선언한다. 시인은 눈 먼 대중을 향해 “사람의 정신을 돌아보고 자연의 생명을 돌아보자!”고 당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 메두사를 바라보는 순간 돌이 되듯이 현대인들의 정신은 물신(物神)의 황금빛에 사로잡혀 상품과 ‘물건’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상을 이승하 시인은 자신의 시집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에서 비판하지 않았는가? 대중과의 내면적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시인은 외로움을 안고 “떡갈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나무의 메마른 가지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잎”은 나무의 “마지막 손”이 되어 시인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준다. 시인은 한 그루 “떡갈나무”의 손길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는다.

      생태주의 관점으로 시인과 나무를 바라보자. 나무와 시인은 각각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이다. 시인은 나무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나무는 시인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양자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다.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나무를 지배하지 않고 나무도 시인에게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시인과 나무가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와 시인은 “숲”이라는 생명공동체 안에서 함께 호흡을 주고 받으며 가족이 되고 있다. 나무는 시인에게 “마지막”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시인은 나무를 자기의 분신처럼 아끼는 사랑의 손길로 화답한다. 양자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핏줄로 이어져 동등한 파트너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숲”은 자연과 사람의 상생이 이루어지는 에코토피아(Ecotopia)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시인 루드비히 펠스가 안타까워 했던 도시와 자연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자연과 사람 및 문명과 자연 의 상생이 이루어지는 현대적 에코토피아를 구현하는 것이 모든 시인들의 꿈이자 인류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어머니의 품 속처럼 포근하게 도시를 안아주는 “숲” 속에서 사람들과 나무들이 형제와 남매처럼 도우며 살아가는 … .      



    나무의 피살(被殺)

              -마르가레테 한스만의 「도로공사」



    살점을 파고드는 도로에

    소리 없이 으스러지는

    나무들 


    숨통을 끊는 것이 이토록 간단할 줄이야!


                       - 마르가레테 한스만의  「도로공사」 전문



    *「도로공사/Straßenbau」: 1921년 독일 ‘하이덴하임(Heidenheim)’에서 출생한 시인 마르가레테 한스만(Margarette D. Hannsmann). 시, 소설, 방송극,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한 여류 작가였다. 마르가레테 한스만은 오랜 세월 동안 평화운동, 환경보호운동, 반핵(反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세 가지 사회운동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사람의 인권(人權)과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세 가지 사회운동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는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살상무기의 증강과 핵개발을 금지시켜야 하지 않는가? 지상에서 핵무기와 전쟁이 사라져야만 사람의 생명, 인권,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연의 생명까지도 보호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마르가레테 한스만의 이상(理想)인 ‘평화’는 국가들의 세력 균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평화’는 생태계 안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생명공동체’의 안정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사회운동의 체험으로부터 얻은 정신적 가치들 중에서 마르가레테 한스만의 시 속에 가장 많이 반영된 것은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이었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너도밤나무숲』(1978), 『지도』(1980), 『풍경』(1980) 등이 있다. 

      시 「도로공사」는 1981년 독일 뮌헨 대학교의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P. C. Mayer-Tasch)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수록되었다. 마이어-타쉬 교수에 의해 생태사화집에 수록된 마르가레테 한스만의 ‘생태시’는 무려 8편이다. 다른 시인들보다 더 많은 작품이 채택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환경보호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이 말해주듯이 자연과 사람 사이의 상호의존을 추구하는 생태의식이 한스만의 시세계를 움직이는 정신적 근원임을 알게 된다. 한국 시인 이준관이  ‘떡갈나무’를 정서적 동반자로 받아들인 것처럼 독일 시인 마르가레테 한스만도 “나무”를 자신의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웃과 같은 “나무”는 시인의 눈 앞에서 살해당하고 있다. 사람이 칼에 찔리거나 둔기로 얻어맞을 때 비명을 지르듯이 전기톱으로 가지가 끊어지는 “나무”는 팔이 잘린 사람처럼 비명을 토해낼 것이다. 사람의 귀에 “나무”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살점을 파고드는” 아스팔트의 폭력에 뿌리가 잘린 채 “도로”에 내버려진 나무의 몸은 물건이 아니라 주검이다. 고성능의 전기톱으로 나무의 뿌리를 신속히 잘라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생명을 빼앗기는 자의 고통은 사람의 시계로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의 길이를 갖는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단 1초를 3600마디로 분할하고도 남는 시간의 파장(波長)을 늘인다. “나무들”은 사람의 욕망과 폭력에 의해 소중한 생명을 유린당한 피해자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들의 “숨통을 끊은” 자는 누구인가?    

     


    광속(光速)과 느림의 불화

                     ― 이달균의 「질주」



    내 곁으로 사람들이 광속으로 달려가고

    나는 비껴서 있다. 느린 내 장례 행렬

    나는 왜

    불화 하는가

    부러워라 광란의 질주


                               - 이달균의 「질주」 전문



    *「질주」: 1957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이달균 시인. 그는 1987년 『지평』에 시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에 ‘불휘’ 출판사에서 시집 『남해행(南海行)』을 출간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5년엔 시조 전문지 『시조시학』의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조 창작을 병행하게 되었다. 이달균 시인은 현대시와 시조, 양쪽 장르를 부단히 왕래하는 가운데 전통적 서정성에만 안주하고 있는 한국 시조의 현대성을 강화하였다. 전위적 실험에만 집착하는 현대시의 서정성을 회복하는 일에도 힘썼다.  “한국 시조의 현대성을 강화하였다”라는 필자의 평(評)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이달균 시인이 현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시조의 소재 영역으로 수용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조 「질주」, 「뫼르소의 도시」등 다수의 작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이 자본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인간소외’의 현상을 그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인간소외’의 현상이 자연을 사회의 바깥으로 소외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해왔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소외’와 ‘자연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사회의 영역 안으로 돌아오는 ‘자연’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의 역할임을 이달균 시인의 시조가 대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학적 의의는 시조와 현대시 사이의 지속적인 통섭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달균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남해행』(1987), 6인 시조집『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1999), 『북행열차를 타고』(2001), 『장롱의 말』(2005) 등이 있다.

      시조 「질주」는 『시조세계』 2001년 봄호에 발표된 후, 2005년 ‘고요아침’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달균 시인의 시집 『장롱의 말』에 수록되었다.「질주」는 시조의 전통적 율격을 준수하면서도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소재로 삼고 있다. 문명과의  갈등 및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불화”가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문명의 급진적 템포에 대하여 “불화”를 선언한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물질의 소유만을 지향하는 시대풍조에 대한 “불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독일 시인 다그마르 닉(Dagmar Nick)이 “죽어가는 지구의 마지막 밤을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한다”라고 현대인들을 비꼬았듯이 이달균 시인도 물신(物神)의 노예가 되어 “광속으로 질주”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광란의 질주”를 “부럽다”라는 반어적 어법으로 조소하면서 “광속으로 달려가는 자들”에 대해 “불화”를 선언하고 있다. “불화”의 선언은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집단의 대열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다.

      시인의 “비껴서는” 행위는 기술의 편리와 물질의 쾌락에 중독된 자들의 눈에는 낙오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이 질주자들의 뒤에서 “느린” 걸음을 선택하는 것은 경쟁에서의 도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장례”를 치르는 행위이며 물신(物神)의 황금빛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의 몸짓이다. 더욱이 그의 “느린” 걸음은 소외된 주변의 생명들을 끌어안는 적극적 친화의 “행렬”을 열어준다. “광속”의 쇠바퀴에 짓밟혀 신음하는 자연의 생명들을 어루만지는 인생이 시인의 “느린” 걸음에서 시작된다. 이달균의 시 「질주」에 나타난 “느림”의 생활방식은 자연과 문명 사이의 화해를 가능케 하는 탈출구다. 



    멸망을 앞당기는 속도

                  ― 롤프 하우프스의  「진보」



    사람의 등은 굽어간다

    날이 갈수록 앞으로 점점 구부러져

    어느 날 사람의 입술은

    땅바닥에 닿으리라

    흙의 곁에 누우리라


                         ― 롤프 하우프스의  「진보」 전문



    *「진보/Fortschritt」:  1935년 독일의 ‘뒤셀도르프’ 시에서 출생한 시인 롤프 하우프스(Rolf Haufs). 그는 시를 비롯해 수필, 방송극, 동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창작 활동을 전개해왔다. 롤프 하우프스의 시세계는 그의 거주지 베를린의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기술문명의 급진적 발전과정이 자연과 생태계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롤프 하우프스의 시는 ‘생태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단 하루만의 속도』(1976), 『호수에서 춤추는 시간』(2010) 등이 있다. 

      시 「진보」는 1976년 함부르크 근교 ‘라인베크’ 시의 ‘로볼트(Rohwohlt)’ 출판사에서 출간된 롤프 하우프스의 시집 『단 하루만의 속도』에 수록되었다. 이 시집의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시 「진보」는 급진적 발전의 ‘속도’로 인하여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달균 시인의 생태시에서 제시되었던 ‘느림’의 생활방식을 새로운 문화의 대안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광속’의 ‘질주’에 여념이 없는 현대인들. 그들의 미래가 시인의 옐로우 카드를 받고 있다. 

      시인 롤프 하우프스는 생태계의 파괴로 인하여 인류가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한 사람의 늙음, 죽음, 부패의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시인이 염려하는 멸망의 원인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집착하여 발전의 ‘속도’를 높이기만 했던 인류의 성장제일주의 풍조다. 물론, 시인이 문명사회의 “진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보”의 속도를 조절하자는 것이다. ‘느림’의 생활방식을 통하여 자연의 생명력을 보호하는 여유를 찾을 때에 사람은 자연을 사회의 동반자로 끌어안고 ‘생태적 문명사회’를 향해 천천히 “진보”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진보”의 템포다. 기계적 ‘질주’가 아닌 사람의 걸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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