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송용구의 韓獨 생태시인 100인> 나무에게도 제 삶의 몫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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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인(2)
         
                      나무에게도 제 삶의 몫이 있다
     



                                                           송 용 구  (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김광규, 이하석, 최승호, 고형렬, 최영철.
    *독일 시인: 한스 카스퍼(Hans Kasper), 엘케 외르트겐, 귄터 쿠네르트(Günter Kunert),
    두르스 그륀바인(Durs Grünbein),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




    자연과 사람 사이의 상생(相生)이 흔들리는 것을 지구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결과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인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지만 후덥지근한 회색빛 바람이 그의 눈 앞을 막아설 때마다 그의 슬픔은 더욱 붉어진다. 자연의 맑은 숨결을 되찾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일찍이 문명의 급진적 발전이 가져올 위험성을 예견했던 장 자끄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우리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루소가 세상을 떠난 지 230여년이 흐른 오늘의 문명사회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파괴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의 모태를 닮은 자연의 넉넉한 품 속에서 평화로운 자유를 만끽하길 원한다면 오늘의 시인들에겐 지속적 노력과 적극적 저항이 필요하다. 그 ‘저항’은 어떤 행위일까? 자연과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사회적 병인(病因)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예리하게 비판하며, 능동적으로 극복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시인들이 갖고 있는 저항의 무기는 ‘언어’이다. 아직도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핵실험과 핵개발, 대규모 군사훈련과 신무기 개발, 전쟁, 그것의 원인인 서구의 패권주의, 정치권과 재벌기업의 유착 관계, 인권 탄압, 노동력 착취, 독점자본주의, 성장제일주의, 물질만능주의, 기술만능주의, 이성만능주의(理性萬能主義),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 등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파괴적 원인들에 맞서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을 보호하고 사람의 인권을 지켜내려는 ‘언어적 항거’가 오늘의 시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생태철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생태문제는 곧 사회문제”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흔들리는 생명공동체(生命共同體)의 현실상황을 인류 전체의 ‘사회문제’로 호소하기 위해 ‘예술적 선언문’을 발표해왔던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들은 ‘노아의 대홍수’ 같은 대재앙과 지구의 난파를 막아내기 위해 모든 독자들에게 ‘미학적 옐로우 카드’를 높이 치켜든 선지자들이다. 그들의 ‘예술적 선언문’과 ‘미학적 옐로우 카드’를 굳이 문학의 전문용어로 옮긴다면 ‘생태시’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에게도 제 몫의 삶이 있다
    - 김광규의 「청단풍 나무 한 그루」
     
     
    물 한 번 주지 않았다
    타이어 고무줄로 뿌리를 칭칭
    동여맨 채 바싹 말라버린
    어린 나무 한 그루
    신축 건물 외벽과 시멘트 블록 담 사이
    마른 땅에 되는대로 꽂아놓고
    준공 검사 끝나자마자
    시공업자는 서둘러 철수했다
    그리고 긴 가뭄
    비 한 번 오지 않았다
    봄이 되어도 꽃 필 줄 몰라
    죽은 줄 알았다
    목숨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4월이 가고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쌀알처럼 작은 꽃과 연녹색 잎
    한꺼번에 돋아났다
    강인하구나
    좁은 땅에 한갓 나무로 태어났어도
    광야의 꿈 키우며
    제 몫의 삶을 지켜가는
    청단풍 한 그루
     
    - 김광규의 「청단풍 한 그루」전문
     
    *「청단풍나무 한 그루」: 1941년 서울에서 출생한 김광규 시인. 그는 1975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하였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는 불의(不義)에 대한 비판의식과 항거의 정신을 보여주었던 ‘4.19’ 세대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소시민적 속물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실상을 서글픈 목소리로 노래한 서정적 비가(悲歌)이다. 김광규의 시는 특정한 하나의 경향에 귀속될 수 없을만큼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을 비롯하여 1970년대 후반 그가 발표한 시작품들 중에는 자연과 사람 사이의 생명선(生命線)을 단절시키는 문명의 폭력에 맞서 비판의식의 칼날을 번득이는 작품들이 많다. 또한, 자연과 사람 사이의 분리된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열망을 노래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김광규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아니다 그렇지 않다』, 『아니리』, 『크낙산의 마음』,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등이 있다.
    2004년 『문학과사회』여름호에 발표된 시 「청 단풍 한 그루」.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은 공사장이다. 눈에 띄는 사물들은 “타이어 고무줄”, “외벽”, “시멘트 블록” 등 생명 없는 물건들뿐이다. 공사장은 숨결 없는 물질들의 집합소이다. 이렇게 삭막한 “광야” 한 복판에서도 “꿈을 키우는” 외톨이가 있다. “청 단풍 한 그루”를 눈 여겨 보자. “쌀알처럼 작은 꽃”을 피우기 때문에 하찮은 사물로 취급당하기 쉽다. 사람들의 눈에도 좀처럼 띄지 않는 “어린 나무”이다. 그러나 김광규 시인은 죽음의 땅을 뚫고 “한꺼번에 돋아” 나오는 강인한 생명의 용솟음을 정신의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고 사소한 사물이었던 “청 단풍 한 그루”가 우리들의 내면세계 안에서 아주 크고 중요한 존재로 탈바꿈한다. 우리들의 내면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린 나무”에게 갱생의 힘을 실어 준다. 마침내 “나무”는 사람들과 동등한 수평관계를 이루면서 “제 몫의 삶”을 살아내는 당당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문명의 폭력을 견뎌내며 자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물’의 일생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던 김광규 시인의 「물」 연작시편이 연상된다. 그의 생태의식은 여전히 ‘물’처럼 그의 시 안에 흐르고 있다.
     

    근원의 푸른 빛이 죽음의 검은 빛으로
    - 한스 카스퍼의 「보훔」
     
    보훔. 우리가 쌓아올린
    부(富)의 연기가
    공기를
    오염시킨다.
    해마다 사람의 가슴 속엔
    3톤(ton)의
    매연이 쌓인다.
    그러나 생산의 수치(數値)밖에 모르는
    전자형(電子形) 두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증명해 내리라.
    죽은 자들은
    숨을 잘못 쉬었으며
    더욱 잘못된 것은
    지나치게
    숨을 몰아 쉬었기 때문이라고.
     
    - 한스 카스퍼(Hans Kasper)의 「보훔」전문
     

    * 「보훔/ Bochum」: 191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출생한 시인 한스 카스퍼. 그는 시, 에세이, 경구(警句), 방송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5년 한스 카스퍼는 시의 첫 행에 검정색 대문자로써 대도시 이름을 표기한 연작 시편을 발표하였다. 「뉴스/Nachricht」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그의 연작 시편은 ‘프랑크푸르트’, ‘보훔’ 등 독일의 대도시를 비롯하여 미국의 ‘디트로이트’ 같은 공업도시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문명사회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1950년대 그의 시는 동시대의 여류 시인 다그마르 닉(Dagmar Nick)과 함께 자연시의 전통적 경향을 극복하고 ‘자연’과 관련된 문제들을 사회문제로 고발하여 ‘생태시’의 서막을 열었다. 「뉴스」라는 연작 시편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한스 카스퍼는 대도시를 환경오염의 진원지로 고발하였다. 기자의 현장 취재와 보도를 연상시키는 르포( Repo)의 언술방식을 통해 생태위기의 실상을 실증함으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재생해주었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뉴스와 기사』(1957), 『호흡이 멎은 시간』(1961), 『내면여행』(1965), 『인간에 대한 보고』(1978) 등이 있다.
    1955년에 발표된 시 「보훔」은 대도시의 환경오염을 고발하는 한스 카스퍼의 연작시 「뉴스」중의 한 편이다. 그의 시집 『뉴스와 기사』(1957)에 처음 수록되었고, 1981년 독일 뮌헨 대학교의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P. C. Mayer-Tasch)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2장 ‘세 가지 원소. 물 ․ 공기 그리고 흙’ 편에 재수록 되었다. 공기는 모든 생물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생산의 수치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은 근원의 푸른 빛을 죽음의 검은 빛으로 변색시킨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성장제일주의’ 풍조는 인간을 기계로 둔갑시킨다. 인격을 가진 개인을 “부(富)”를 쌓기 위한 부픔으로 전락시키고 황금의 소돔성(城)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을 강요한다.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 사상을 제시한 미국의 철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말처럼 인간을 자본의 도구로 이용하는 현실 속에서는 자연조차도 “부(富)”를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김광규 시인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시켰던 “청 단풍” 나무조차도 “생산의 수치”를 높이기 위한 재료에 불과할 뿐이다. “전자형(電子形) 두뇌”만을 요구하는 조직사회 속에서 인간이 주변 세계를 돌아볼 여유를 갖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로 매도당하기 쉽고, 냉혹한 경쟁의 대열에서 스스로를 낙오시키는 구실을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 상호 간의 신뢰는 물론이요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조차도 물질적 목표를 위해 우선순위를 양보해야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산의 수치(數値)”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구로써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도시인들의 뇌리에 뿌리박힌 물신주의가 “공기”를 오염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기오염에 따른 인체의 손상과 생명의 위기현상을 모두의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의 사적(私的) 문제로 축소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반윤리적 횡포가 시인과 시민들의 호흡기관을 더욱 숨가쁘게 억누르고 있다. ‘윤리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대상인 ‘생태윤리’의 관점에서도 마땅히 비판해야 할 슬픈 현상이다.
     
     
     
    망가진 길, 돌아오지 못하는 길
    ― 이하석의 「투명한 속」, 「순례 1」
     
    *「투명한 속」, 「순례 1」: 1947년(주민등록상의 생년은 1948) 경상북도 고령에서 출생한 시인 이하석. 1971년 전봉건 시인의 추천을 받고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이하석 시인은 이동순 시인과 함께 2인 시집 『百子圖』를 출간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76년 『자유시』 동인 활동을 통하여 창작의 열정을 뜨겁게 달구어가던 그는 1978년 『영남일보』의 기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기자로서 한국 사회의 곳곳을 관찰하던 중에 구조적 문제점에서 비롯된 사회적 병리현상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언론 활동은 시의 현실인식과 사회비판을 강화시키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이하석 시인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의 심각한 불화 현상을 낳은 정치적 부조리와 사회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현실인식의 토대 위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닥쳐온 생존의 위기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투명한 속」, 「풀씨 하나 떠돌다가」, 「부서진 활주로」, 연작시 「순례」, 연작시 「못」, 연작시 「병」등을 발표하여 한국 문단에서 생태의식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하는 선두 주자의 위치를 자리매김하였다. 이하석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녹』, 『것들』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하석 시인의 첫 시집 『투명한 속』을 ‘녹슮과 끌어당김’이라는 제목으로 해설하였다. “광물질의 부패는 녹슮으로 표상된다. 그 녹슮이 땅을 향할 때, 그것은 마치 사정하는 성기처럼 녹물을 질질 흘린다.” 김현의 말에서 직감할 수 있듯이 녹슨 쇠붙이들의 녹물은 침략군의 성기에서 흐르는 폭력의 정액처럼 대지에 침투하여 흙을 파괴한다. 그러나 대지의 모태 속에서 잉태되어 자라고 있는 풀뿌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적 몸부림으로 저항한다. 풀뿌리는 녹물에 젖어드는 흙 알갱이들을 끌어당긴다. 병들어가는 모태 속에서도 어머니의 다스운 피를 몸 속으로 흡수하는 태아를 닮은 풀뿌리. 그리고 낙태를 시도하는 의사의 녹슨 메스를 닮은 쇠붙이들의 뾰족한 끝. 생명을 지키려는 자연의 안간힘과 생명을 파괴하는 기술문명의 폭력이 긴장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녹슮과 끌어당김’의 이 충격적 대치상황을 이하석 시인은 리얼리즘의 언어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여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 이하석의 「투명한 속」전문
     

    시 「투명한 속」은 198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투명한 속』에 수록된 후에 1997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선집 『고추잠자리』에 재수록되었다. 이하석 시인의 생태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시작품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군사정권 치하에서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산업발전의 속도를 급진적으로 추진해왔던 까닭에 한국의 생태계와 자연환경은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구 강대국들의 산업 폐기물을 수입하여 한국의 흙과 물 속에 매장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이 안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는 언론을 철저히 억압하고 통제하는 독재권력의 검은 장막에 은폐되어 국민에게 알려질 수 없었다. 그러나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이하석 시인은 언론인으로서 지켜내야 할 역사적 진실과 시대적 양심을 자신의 시 속으로 옮겨 갔다. 정치권력은 ‘개발’ 정책을 통하여 국민의 발길을 ‘발전’의 직선주로와 ‘성장’의 고지(高地)로만 인도할 뿐이었다. 진정한 ‘성장’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독일 시인 한스 카스퍼(Hans Kasper)가 반어적으로 비판한 것처럼 국민들의 머리 속에 ‘생산의 수치(數値)밖에 모르는 전자형(電子形) 두뇌’만을 주입할 뿐이었다. 부조리한 정치상황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어져있는 생명의 ‘길’을 어떻게 단절시키는지, 또한 자본의 논리만을 앞세우는 ‘개발’ 독재의 메커니즘이 인간과 자연의 공생 시스템을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지를 이하석 시인은 시「순례 1」에서 보여주고 있다. ‘쇠 껴안은 붉은 뿌리’라는 서글픈 대치상황의 예술적 재생을 응시해 보자.
     
    어디에서든 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세상에는 온통 부러지고 망가진
    길들뿐. 기름과 석탄 사이를 걸어서
    졸면서 또는 기도하는 몸짓으로
    어두운 어깨만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먼지를 덮어쓴
    풀들은 깡통들의 투명한 표정을 감추고 있고,
    바람이 나무 둥치를 흔들 때, 나무들
    쇠 껴안은 붉은 뿌리에서부터 쓸쓸해지고.
    머리에 구름과 모래를 인 사람들이
    나무 뿌리들이 감춘 물 속으로 그림자 던지며
    지나갔다. 그들은 깡통과 비닐을 비껴 흐르는
    길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기름들을 쏟고
    깡통들을 풀밭에 던졌다. 그들은 스스로 흩어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
     
    - 시 「순례 1」 전문


    시 「순례 1」은 198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투명한 속』에 수록된 후에 1997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선집 『고추잠자리』에 재수록되었다. 기형적 개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생명의 “길”은 “온통 부러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존중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과 더불어 공동의 행복을 나눠 갖고자 하는, 진정한 사람의 “길”은 사라져 버렸다. 도무지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비뚤어지고 망가진 길” 위에 서서 이하석의 시는 녹슬어가고, 부서져가고, 썩어가는 생명체들의 안타까운 몸짓을 정밀하게 진단하는 청진기 역할을 맡았다. 그의 시는 한국의 생태계가 얼마나 병들었는가를 객관적으로 진단한 후에 생명공동체의 치유를 위한 희망을 노래하였다. “유리 부스러기”, “녹물”, “쇳조각들”이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어” 흙의 자식들인 “나무”와 “풀”을 병들게 할지라도 그들의 생명을 지켜내려는 희망만은 버릴 수 없다. 그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흙” 속에서 자라난 “나무”와 “제비꽃”이 “뿌리”를 “쇠”의 무게에 짓눌리고 “녹물”의 “붉은” 빛에 슬프게 물들지라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뿌리”를 “흙”의 모태 속에 “더욱 깊숙이” 내리려는 본능적 생명력이여! 생태계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처방은 모든 생물의 질기디 질긴 생명력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이하석의 시로부터 깨닫게 된다. 그 생명력을 사랑할 때에 희망은 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겠는가?
     
     
    돌려주어야 할 대지(大地)의 권리
    - 엘케 외르트겐의 「대지」
     
    한 평생 동안 우리는
    대지의 손님입니다.
    대지는 우리를 길러주고 품어주다가
    죽음의 품 속에 우리를 거두어갑니다.
    대지로 돌아가서 먼지가 되는
    위대한 변화.
    사랑스레 대지를 받들어야할 까닭이
    주인의 권리를 존중해야할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이 대지는
    단 하나 뿐이니까요.
     
    우리는 대지의 살점을 도려내고,
    대지의 피부로부터 털을 깍듯
    숲을 베어냅니다.
    더구나 구멍 숭숭한 상처 속에
    아스팔트를 메꾸어 숨통을 틀어막지요.
     
    어느새 우리는 대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인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강도가 되어
    밤낮 구별 없이
    대지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을 잃어버린 도굴꾼이었습니다.
    물고기와 물새들이
    기름에 덮여
    목숨을 잃듯이,
    오염된 물과 흙
    독(毒)이 밴 바람을 마시며
    대지 역시 절명할 수 있습니다.
    대지의 말을 알아들었던
    聖 프란체스코는
    대지 위의 피조물들을 형제라 불렀답니다.
     
    이제 대지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우리가 그와 그의 피조물들에게
    저지른 만행(蠻行)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대홍수뿐입니다.

                 -엘케 외르트겐 (Elke Oertgen)의
      「대지」 전문
     
     
    *「대지/ Erde」: 1936년 독일 코블렌츠(Koblenz)에서 출생한 엘케 외르트겐. 그는 시뿐만 아니라 에세이 형식의 산문에도 능통했던 여류 시인이다. 자연의 기본적 원소이자 만물의 근원인 ‘물’, ‘공기’, ‘흙’과 관련된 생태적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1970년대 후반 이후 독일 ‘생태시’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은 시인이다. 『성경』을 비롯한 종교적 경전과 고대 그리스 현자(賢者)들의 잠언 등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활용하여 다양한 비유와 예화를 ‘생태시’의 영역 속으로 도입하였다. 물론, 시인 엘케 외르트겐이 사용한 예화와 비유는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미학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직설적 표현방식에 치중한 탓에 예술성이 부족했던 독일어권 ‘생태시’의 예술성을 강화시킨 것만큼은 그가 남긴 문학사적 의의라고 평할 수 있다. 르포(Repo)와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벗어나서 다양한 미학적 기법을 통해 생태계의 현실을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새의 시간』(1975), 『흙의 촉감』(1985), 『돌은 기억하고 있다』(1988) 등이 있다.
    1980년에 발표된 시 「대지」는 1985년 엘케 외르트겐의 시집 『흙의 촉감』에 재수록된 작품이다. 시인은 생태계의 파괴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그의 눈길 속엔 비판의 칼날이 번득인다. 그가 인식하는 역사는 ‘대지’에 대한 중단 없는 착취와 “약탈”의 기록이다. 사람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는 어머니의 모태와 같았던 “대지”가 사람의 욕망과 폭력 때문에 “절명”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을 시인은 고발하고 있다. “대지”를 타락시킨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이성(理性)의 힘을 앞세워 “대지”를 도구로 취급하고 수단으로 이용하기만 했던 ‘인간중심주의’가 그 첫 번째 원인이요, 소유의 욕망과 소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대지”의 “피조물들”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남용했던 ‘물질만능주의’가 그 두 번째 원인이다. 시인은 근대(近代) 이후의 역사에 대해 냉혹한 독설을 쏟아붓고 있다. “스스로 흩어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고 말했던 한국 시인 이하석의 경고를 엘케 외르트겐의 시에서 또 다시 읽게 된다. 인류가 “대지”에 대한 “약탈”을 절제하고 “대지”의 생명을 사람의 몸처럼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 “남은” 보상은 노아의 “대홍수”와 같은 대재앙뿐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높이 치켜든 비판적 옐로우 카드는 현대인들의 ‘물질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생명중심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변화시키려는 희망의 역설이 아니겠는가?
     
     
    끊어진 생명의 탯줄
    ― 최승호의 「공장지대」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을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 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 최승호의 「공장지대」 전문

    *「공장지대」
    :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한 시인 최승호. 그는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시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나 일반적 통념과 관습적 관념을 파괴하는 그의 언어능력은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해체주의’ 철학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나 이승훈 시인 같은 선배 시인들로부터 ‘무의미 시’ 이론을 계승한 것도 아니다. 서구의 예술이론을 자신의 시창작에 적용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대, 사회, 현실을 몸으로 겪는 과정 속에서 저열한 가치관들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본능적 저항 행위였다. 특히, 사람의 자유를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가치체계에 가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이 최승호 시인에겐 폭력과 다르지 않았다. 이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이 그의 일생이었다. 물론 싸움의 무기는 오직 ‘시’였다. 독재권력, 물질만능주의, 과학기술만능주의 … .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고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모든 세력에 대하여 그는 시의 칼날을 다듬었다. 그 칼날에서 비쳐나오는 언어의 빛은 모든 억압의 틀로부터 사람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방시키려는 정신의 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최승호 시인의 저항의식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하려는 생명의식으로 폭넓게 발전하였다. 시 「물소가죽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인권(人權)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명권(生命權)까지도 지켜내야만 하는 ‘생태윤리’적 메시지를 전해주었고, 시 「공장지대」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자연 사이에 이어져있는 생명의 연결고리를 지켜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저항임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의 저항의식은 ‘생명중심적 생태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대설주의보』,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모래인간』등이 있다.
    시 「공장지대」는 1991년 ‘세계사’에서 출간된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수록된 작품이다. 만물의 근원인 ‘물’의 오염으로 인하여 사람의 몸이 파괴되는 충격적 사건을 시의 소재로 채택하였다. “산모”의 유방에서 모유 대신 “허연 폐수”가 흘러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장지대”의 폐수 때문에 오염된 강물을 마시고 산모의 몸이 병들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산모의 “젖을 짜면” 모유가 흘러나올 뿐, 폐수가 흘러나올 리는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왜 “폐수가 흘러내린다”고 표현했을까? 산모의 모유 속에는 아이를 키워낼 수 있는 생명력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금속으로 오염된 강물처럼 죽어버린 모유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안겨주고 의식을 각성시키려는 교육적 견지에서 산모의 모유를 “허연 폐수”로 변용(變容)하였다. 사람과 자연의 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현실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정관념을 깨는 ‘낯설게 하기’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모의 몸과 “아이”의 생명을 이어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탯줄은 생명의 고리로서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엄연한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줌으로써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아이 배꼽에 매달린” 탯줄을 “비닐끈”으로 변용한 것이다. 독일 시인 엘케 외르트겐이 자신의 시 「대지」에서 예견하였던 대재앙의 전주곡을 듣는 느낌이다. “산모”가 겪는 참담한 재앙은 인류가 겪을지도 모르는 대재앙의 축소 모형이 아닐까?

     
     
    죽은 인류를 싣고 태양 주변을 도는 폐선(廢船)
    ― 귄터 쿠네르트의 「라이카」
     
     
    우리가 소유한
    가장 좋은 금속으로 만든
    공 안에서
    죽은 개 한 마리
    날마다 우리의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
    우리가 소유한 가장 좋은 위성
    지구가
    어느 날 저렇게
    죽은 인류를 싣고
    해마다 태양 주변을
    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면서.
     
    - 귄터 쿠네르트(Günter Kunert)의 「라이카」전문
     
     
    *「라이카/Laika」: 1929년 독일 베를린에서 출생한 시인 귄터 쿠네르트. 그는 독일의 분단 이후 동독에 거주하였다. 서독의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와 함께 분단 체제하에서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저항시인 혹은 참여문학의 기수로서 손꼽힌다. 자신의 조국인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를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강렬한 저항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동독의 사회주의는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귄터 쿠네르트는 ‘사회주의’의 내용적 본질을 전혀 실현하지 못하는 동독의 정치행위에 대하여 시종일관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동독의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낀 그는 1979년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90년 독일의 통일 이후에도 시와 소설을 통하여 변함없이 현실비판과 사회개혁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서구의 자본주의와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는 귄터 쿠네르트의 시 속에서 똑같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양쪽 모두 ‘유토피아’를 지향하면서 사회발전을 추구하였으나 발전의 속도는 빨라져도 그것을 진정한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상생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과 자연 간의 상생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 비친 서구와 동구의 정치체제는 ‘생명’의 가치를 물질의 가치에 종속시키는 잘못된 발전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그 ‘길’은 사람들을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몰락의 이정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쿠네르트의 현실인식이며 미래에 대한 예견이었다. 그는 정치가들과 국민들의 사고방식이 물질보다는 ‘생명’을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으로 바뀌는 것만이 인류의 몰락을 방지하는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의 시집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에서』는 이러한 폭넓은 현실인식과 저항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귄터 쿠네르트의 주요 시집으로는 『일상』(1960), 『혹성에 대한 기억』(1963),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에서』(1978)가 있다.
    1963년에 발표된 시 「라이카」는 시집『혹성에 대한 기억』에 처음 수록된 후, 1981년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7장 ‘묵시록’ 편에 재수록되었다. 1957년 11월 3일 소련(蘇聯)에서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를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에 태워 역사상 최초로 우주 공간에 생명체를 띄워 보냈던 사건이 시의 소재가 되었다. 귄터 쿠네르트의 탁월한 상상력에 의해 이 역사적 사건은 “인류”의 멸망과 모든 생물의 멸종을 나타내는 은유로 전환되었다. 최승호 시인의 「공장지대」에서 ‘허연 폐수’와 ‘비닐끈’이 생명선(生命線)의 단절을 나타내는 은유의 역할을 한 것처럼 귄터 쿠네르트의 시 「라이카」에서도 실제적 사물들이 시인의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을 대변하는 은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미시적 시각으로 분석한다면 “죽은 개”는 “죽은 인류”의 은유, “공(인공위성)”은 “지구”의 은유, 지구는 ‘태양’의 은유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거시적 시각으로 확대해서 바라보자. “죽은 개”를 싣고 “지구 주변을 도는” 인공위성은 “죽은 인류”를 싣고 “태양 주변을 돌게 될 지도 모르는” 지구의 은유로서 시의 구조를 튼튼히 지탱하고 있다. 시인은 “죽은 개”를 통해 “죽은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예시(豫示)의 의도는 무엇일까? 개와 인류의 공동 터전이었던 “지구”의 죽음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위성”이었던 “지구” 안에서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물이 멸종할 수 있음을 “경고”하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지구가 “가장 좋은 위성”의 빛을 잃어버리고 “태양”의 주변을 쓸쓸히 표류하는 폐선(廢船)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귄터 쿠네르트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러한 대재앙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서유럽과 동유럽 모두 ‘유토피아’를 향해 급진적으로 달려오기만 했던 ‘성장제일주의’적 풍조가 아닐까? 기술의 발전과 물질의 팽창을 위해 ‘생명’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인류”의 반생명적, 반생태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지구”를 난파선의 신세로 파멸시킬 수 있는 … .
     
     

    거대한 공동묘지, 지구
    ― 고형렬의 「지구 묘(墓)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이 일어날 때의 시간인데도
    산의 그늘만이 길게 뻗쳐 있다
    햇빛이 해골의 눈 속을 통과하며
    바람이 불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구는 혼자 외로이 겨울을
    빠져나가면서 공중에 떠 있을 뿐
    인류는 모두 어디에 갔는가
    빈 지구만이 태양을 돌면서 또
    태양은 지구를 데리고 멀고도 먼
    움직이는 우주를 따라가는 은하
    그 은하계를 따라 사라져 간다
    지구는 모든 조상의 묘를 싣고
    밤과 낮을 끊임없이 통과하리라
     
    - 고형렬의 「지구 묘(墓)」 전문
     
    *「지구 묘(墓)」: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출생한 시인 고형렬. 그는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의 저열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중의 생존권을 실현하려는 사회변혁의 희망을 노래하였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고형렬 시인의 시세계는 수많은 민중적 저항시인들의 작품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70~ 1980년대의 저항시인들과는 뚜렷이 다른 차별성이 고형렬의 시에서 발견된다. 그의 생태의식이다. 1990년 반전(反戰) 및 반핵(反核) 사상을 담아낸 시집 『리틑보이』를 상재한 이후 고형렬 시인은 한국의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병들어가는 현실을 지속적으로 고발하고 비판하였다. 민중에게 생태계의 현실을 알림으로써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원인들을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총체적 사회구조의 모순을 개혁하는 것만이 한국의 생태계를 민중의 생활터전으로 회복할 수 있는 해결책임을 시를 통해 호소해왔다. ‘삼진기획’에서 출간한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는 고형렬 시인의 생태의식과 환경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생태시집이다. 이 시집은 1991년 최승호 시인의 『세속도시의 즐거움』과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와 함께 출간되어 한국 문단에 ‘생태시’의 창작과 담론을 활성화시켰다. 그의 주요 시집으로는 『서울은 안녕한가』를 비롯하여 『리틀보이』, 『수박밭』, 『해청』등이 있다.
    시 「지구 묘(墓)」는 1991년 고형렬 시인의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에 수록된 작품이다. ‘환경시’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시집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서 진행되는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고형렬 시인은 이 시집의 後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서울의 물 ․ 공기 ․ 먼지 ․ 교통 ․ 쓰레기들이 이 시집의 작은 얼굴이다 (…) 우리는 공해 속에서 살아간다. 공해는 벌써부터 우리와 아주 친해져 있다. 이것은 낡은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매일을 공해 속에서 살아왔듯이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다름 없이 공해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 서울은 안녕한가. 이 말은 안녕하지 않다고 전제하고 서울은 안녕한가 하고 부정적으로 묻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의심과 걱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시인의 고백에서 묻어나오는 ‘의심과 걱정’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1990년대 이전까지 군부정권의 독재로 인하여 은폐되었던 대한민국의 환경문제가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조금씩 두터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환경문제는 더 이상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한국의 문인들에게도 자리잡으면서 1990년대 이후 한국 문단에는 ‘생태시’ 혹은 ‘환경시’의 창작과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하석, 이건청을 비롯한 소수의 시인들이 한국 ‘생태시’의 창작을 본격적으로 주도하였다면, 1990년대 이후 ‘생태시’의 활성화에 기여한 시인들 중 고형렬 시인을 제외할 수 없을 것이다. ‘생태시’의 미학적 측면에서도 그의 ‘생태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에서 직설적 표현들이 적잖이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양한 은유와 묵시록을 동원하여 시의 예술성을 살려낸 작품들도 다수이다. 그 대표적 작품이 「지구 묘(墓)」이다.
    ‘지구’는 거대한 공동묘지 혹은 ‘해골’들의 ‘관(棺)’에 비유되고 있다. 독일어권 지역의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기술문명의 메커니즘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을 지향하는 ‘곡선’ 형태의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유토피아’를 향해 ‘직선적’으로 질주하는 급진적 발전만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 ‘자연’은 기술문명의 ‘직선적’ 발전을 가속화시켜 줄 도구로 전락하였다. 자연의 생명체들은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희생물일 뿐이었다. 한계를 모르는 성장과 발전을 위해 저당 잡힌 마지막 담보물은 인류의 멸망과 지구의 난파였다. 귄터 쿠네르트의 「라이카」에서 묘사되었던 ‘죽은 인류’의 공동묘지인 ‘지구’를 고형렬의 시에서 또 다시 만나게 된다. “지구”는 “인류”의 “해골”과 생물들의 주검을 싣고 “태양” 주변을 도는 거대한 “묘(墓)”로 전락하리라는 예언이 한국 시인의 목소리로 재현된 것이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시인들의 비관적인 목소리는 인류의 미래에 어두운 비가(悲歌)를 헌정한다. 그 비가는 지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弔詞)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비관적 언어로써 인류의 종말을 예언하는 것은 인류를 향해 ‘경고’의 옐로우 카드를 뽑아들어 종말을 막아내자고 당부하는 역설적 호소일 것이다.
     
     
    놀라운 풍경, 무심한 눈길
    - 두르스 그륀바인의 「썩은 물고기」
     
    놀라지는 말아, 네가 빵 부스러기와
    감자 껍질을 휙 내던져버리는
    쓰레기통 밑바닥엔
     
    대 여섯 마리쯤 썩은
    고등어들 꼬리가
    딱딱히 굳어 있고, 눈의 동공은
     
    멎은 채, 하복부가 찢겨져 있을 거야, 아냐 아냐
    그래도 놀랄 필요는 없어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그냥 지나쳐버려 ….
    - 두르스 그륀바인(Durs Grünbein)의 「썩은 물고기」전문
     
    *「썩은 물고기/Verdorbene Fische」:1962년 동독(東獨) 드레스덴(Dresden)에서 출생한 시인 두르스 그륀바인. 1986년 이후엔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시창작, 외국문학 번역, 에세이 쓰기에 몰두해왔다. 1989년 독일의 분단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통일의 감격을 맛본 후에 두르스 그륀바인은 유럽 대륙, 동남아시아, 미국에 이르는 세계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다. 짧은 기간 동안 미국 ‘뉴욕 대학교’ 독어독문학과의 객원 교수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명문인 ‘뉴욕 대학교’에서 그를 초빙한 것은 현대 독일문학을 이끄는 선두 주자로 그를 인정했음을 입증한다. 두르스 그륀바인은 대도시의 과녁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의 몸으로 겪은 대도시는 기술문명의 총제척 집결지이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진원지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보금자리를 거대한 뱀처럼 휘감는 매연과 스모그. 하늘과 땅을 차단시키는 회색빛 지붕. 사람의 귓속에 자동적으로 녹음되는 기계들의 굉음과 자동차들의 경적 등. 시인의 눈에 비친 대도시는 생태계 파괴의 현장이었다. 대도시는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도시인들의 격리구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그들의 감성과 감각은 시멘트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새롭게 변신하는 오토매틱 시스템의 속도와 일회용 편리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인들에게서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아득한 ‘자연’만큼이나 머나먼 일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 두르스 그륀바인은 대도시의 메커니즘과 도시인들의 ‘생명’ 불감증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생명’을 향한 연민, 존중, 사랑을 그들에게서 살려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이름 ‘녹색 다리(그륀바인 Grünbein)’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도시인들의 ‘회색 지대’가 ‘녹색 지대’로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다양한 예술적 기법으로 표현해왔다. 그의 언어를 “희망의 시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1988년 프랑크푸르트의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에서 간행한 『아침녘 회색 지대』가 있다. 그의 생태의식을 대변하는 시집이다.
    시 「썩은 물고기」는 두르스 그륀바인의 처녀 시집이자 대표적 시집인 『아침녘 회색 지대』에 수록된 작품이다. 온갖 폐기물이 쌓이는 쓰레기통 속에 “고등어” 몇 마리가 또 하나의 폐기물로 버려져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진부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 흔한 풍경에 대해 비판적 거리감을 조성한다. 시인은 “고등어”의 주검을 세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대중의 고정관념 속에 자리잡은 당연한 풍경을 낯설은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최승호 시인과 고형렬 시인의 생태시를 움직였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두르스 그륀바인의 시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고등어”의 주검은 하찮은 폐기물일 뿐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고등어”의 생명도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할 권리, 즉 생명권(生命權)은 사람에게만 있는 독점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생물이 제각기 갖고 있는 고유한 권리임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권’의 평등을 시사하였다는 측면에서 볼 때 두르스 그륀바인의 시는 ‘생태주의’ 사상에 정신적 토대를 두고 있다.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이 독자들의 사고방식이 된다면 그들은 “썩은 고등어”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진부한 풍경을 낯설은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고등어”의 주검 앞에서 놀라워할 수 있고 “고등어”의 죽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고등어의 주검 옆에 발길을 멈춰 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다. “놀라지는 말아”,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그냥 지나쳐버려 …” 등의 표현은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을 함축하고 있는 반어적 메시지이다.
     
    손님과의 소통
    - 최영철의 「오후 두 시」
     
     
    한 상 차려 놓은 늦은 밥상에 날아든 파리 한 마리
    생선 나물 밥 차례대로 찍어 맛보다가
    제 식성에 맞지 않는지 푸르르 날아가버린다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 마다하고 간 밥상
    한동안의 적요가 만든 일직선을 따라
    허공을 가르며 햇살 고속도로가 뚫렸다
    그걸 타고 제일 먼저 도착한 먼지 알갱이들
     
    잘 왔다
    이리 와 앉아 수저를 들어라
    - 최영철의 「오후 두 시」전문
     
     
    *「오후 두 시」: 1956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출생한 시인 최영철. 그는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최영철 시인은 한국시의 전통적 서정성을 계승하면서도 도시의 일상적 사건들과 사물들을 소재로 삼아 현대인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모더니티를 겸비해 왔다. 전통과 현대가 그의 시 속에서 만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다루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특정한 시대에 갇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의 폭이 넓고 표현방식이 구체적임을 의미한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뚜렷하다고 해도 상상과 표현의 변주(變奏)가 뛰어나지 못하다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의식의 각성을 불러 일으키기도 어렵다. 최영철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을 전통적 언어의 가락으로 풀어내어 독자에게 감동을 주다가도 어느새 ‘낯설게 하기’의 어법을 통해 낭만적 환상을 깨버리고 현실을 환기시켜 독자의 의식에 새로운 깨달음의 돌을 던져 준다. 특히 200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호루라기』속에는 소외계층의 사람들을 향한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녹아 있다. 그런데, 최영철 시인이 생각하는 소외계층이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의 사회를 지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도 사람에게서 소외당하는 자연의 생명체들. 그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을 가슴 뭉클하게 노래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생명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실어나르는 수많은 생명선(生命線)과 생명길의 네트워크를 다수의 시편에서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최영철 시인의 주요 시집으로는 『홀로 가는 맹인악사』,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 『일광욕하는 가구』,『그림자 호수』, 『호루라기』, 『찔러본다』등이 있다.
    시 「오후 두 시」는 200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최영철 시인의 시집 『호루라기』속에 수록되었다.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자연과 사람 사이의 생태적 혈연관계가 시 속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현대인들이 하찮은 미물로 취급해왔던 생물조차도 시인은 영혼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사람과 대동소이한 몸집의 생명체로 확대시킨다. “파리 목숨” 혹은 “파리만도 못한 목숨”이라는 말과 함께 미물로 천대받던 “파리”조차도 시인의 “밥상”에 앉으면 시인의 “손님”이 된다. 파리가 “허공을 가르며” 뚫어놓은 “햇살 고속도로”. 이 “도로”는 모든 생물 사이에 열려 있는 생명의 길이다. 나무의 잎새와 잎새 사이에 “햇살”의 길이 열리듯이 “파리”와 “먼지”와 시인 사이에 생태적 연결고리가 튼실하게 이어져 있다. 시인의 “밥상”은 풍성하다. 왜일까? 육안으로 볼 때는 시인의 “밥상” 위에 “생선”과 “나물” 두 가지 반찬밖에는 없다. 그러나 육체의 눈에 정신의 콘텍트 렌즈를 끼고 바라본다면 “햇살 고속도로”를 따라 모든 생물이 다녀갈 수 있는 생명의 잔칫상이 차려져 있다.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초청할 수 있는 시인의 “밥상”은 사람에 대한 평등의식을 자연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열리는 “햇살 고속도로”는 평등의 길이요, “고속도로”의 휴게소인 시인의 “밥상”은 평등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물질, 권력, 명예, 지위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형제와 자매로 맞이하는 나라이다. 하늘과 대지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이름으로 모든 생물을 가족처럼 품어 안는 나라이다. 시인의 “밥상”은 모든 생태주의자들이 주장해왔던 ‘생명권의 평등’이 실현되는 낙원이다. 독일 시인 두르스 그륀바인이 반어적으로 말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해왔던 자연의 ‘생명권’을 사람의 ‘생명권’과 동등한 권리로 인정할 때에 진정한 낙원의 서막이 열릴 것이다. 최영철 시인이 갈망해왔던 ‘생태사회’의 초록빛 서광(瑞光)이 … .
     
     
    반전(反戰)의 외침
    ― 에리히 프리트의 「나무에 관한 대화」
     
     
    정원사가 나뭇가지를 잘라준 뒤부터
    나의 사과들은 더욱 굵어졌어
    그러나 배나무 잎사귀들은
    병이 들었지. 그것들은 돌돌 말려들어 가고 있어
     
    베트남에서는 나무들마다 잎사귀가 져버렸다
     
    나의 아이들은 모두 건강해
    하지만 내 막내 아들 때문에 걱정이야
    그 녀석은 새로 옮긴 학교에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거든
     
    베트남에서는 아이들이 죽어버렸다
     
    내 집의 지붕은 잘 수리되었어
    이제 창틀만 불에 그슬리고
    칠하면 되지. 화재보험료가
    집값의 상승으로 올라버렸어
     
    베트남에서는 집들이 폐허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따분한 녀석이군
    어떤 말을 꺼내든
    베트남 이야기만 하니 말이야!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좀 편하게 해주어야지
     
    베트남에선 벌써 많은 사람이 편히 쉬고 있다
    바로 너희들이 그들을 쉬게 한 것이다
     
    -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의 「나무에 관한 대화」 전문
     
     
    * 「나무에 관한 대화/ Gespräch über Bäume」: 1921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출생한 시인 에리히 프리트. 그는 1960년대 이후 독일어권 지역의 대표적 정치시인으로서 활동해왔다. 베트남 전쟁을 유발한 서구세계와 이에 동조하는 서독 정부를 비판하고 제3세계에 대한 서구세계의 지배 행위를 고발하며 반전(反戰)과 반핵(反核)의 메시지를 호소하였다. 그의 정치시(政治詩)에 나타난 비판의식은 독일어권 지역의 사회현실에 제한되지 않고 범세계적인 범주로 확대되었다. 프리트는 자연파괴와 사회현실 간의 연관성에 관한 주제를 정치시의 영역으로 수용하여 독일어권 지역의 문단에 ‘생태시’의 입지를 확고히 정착시킨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에리히 프리트 대표시 50選』이 있다.
    시 「나무에 관한 대화」는 1967년 베를린의 ‘클라우스 바겐바흐(Klaus Wagenbach)’ 출판사에서 출간된 『에리히 프리트 대표시 50選』에 수록된 작품이다. 생태의식과 반전의식(反戰意識)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이 선명하다. 위의 시에서는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화자는 자신의 가정과 관련된 관심사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두 번째 화자는 시인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1960년대 말에 전쟁터가 되어버린 베트남의 참상만을 이야기한다. 시인과 두 번째 화자는 한 목소리로 “베트남에서는 나무들마다 잎사귀가 저버렸다”라고 말한다. 자연과 사람의 상생을 파괴하는 주요 원인으로 ‘전쟁’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시 「나무에 관한 대화」는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던 에리히 프리트의 반전시(反戰詩)들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심각한 원인으로 ‘전쟁’을 고발할 때마다 프리트는 전쟁의 근본적 원인까지도 해부하였다.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배후에는 언제나 서구 열강들의 패권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그는 다수의 ‘생태시’를 통해 고발하였다. 그의 시 「나무에 관한 대화」에서 첫 번째 화자가 보여주는 극단적 이기주의는 서구 열강의 패권주의를 축소시킨 상징인 것이다. “베트남에선 벌써 많은 사람이 편히 쉬고 있다. 바로 너희들이 그들을 쉬게 한 것이다.”라는 두 번째 화자의 마지막 발언은 베트남 주민들의 생명을 멈추게 한 책임이 서구세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 시인 최영철의 시에서 자연을 소중한 손님으로 초청하여 ‘밥상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록빛 동네의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의 생태사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적(敵)은 ‘전쟁’이다.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이 흉측한 주적(主敵)은 1950년 6월 한국에서, 1960년대 베트남에서, 20세기말과 21세기초에 걸쳐 이라크에서, 지금도 지구마을의 곳곳에서 “죽음”의 역사를 순환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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