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獨 생태시인 100인_송용구
  • ▶ <송용구의 韓獨 생태시인 100인>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아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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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한국과 독일의 시인들 10인(1)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아담의 시

                                       

                                                                                                 송  용  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한국 시인: 박두진, 김광섭, 신경림, 이형기, 정현종

    *독일 시인: 발터 휄레러(Walter Höllerer),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위르겐 베커(Jürgen Becker), 다그마르 닉(Dagmar Nick),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아담의 시

    - 박두진의 「인간밀림」

     

    암표범이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암표범이여!

     

    숫사자와 능구리와

    두꺼비와 독나비

    모두가 모두 내 새끼 같은

    내 새끼 같은 사랑이어!

     

    암표범을 쓰다듬어

    자장갈 불러 잠재우고

    숫사자들을 나란히 거느리고

    산책을 한다.

     

    능구리와는 햇볕에 누워

    창세기를 읽고

    독나비 나래를

    이마로 먹고

    폭포 앞에 가

    씻는다.

     

    - 박두진의 「인간밀림」중에서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시인 박두진은 1939년 『문장)』지에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1946년부터 박목월 · 조지훈 등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친화적 생명의식을 노래하여 한국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인이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인간밀림』, 『거미의 성좌』, 『수석연가』, 공저 『청록집』, 『박두진 문학전집』이 있다.

    위의 시 「인간밀림」은 1963년 시집 『인간밀림』의 표제작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피조물의 낙원을 회복하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낙원은 태초의 에덴 동산과 같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구릿빛 적나”의 몸뚱이를 빛내며 “암표범”, “숫사자”, “두꺼비”, “능구리”와 함께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간다. 하느님으로부터 명명(命名)의 권한을 부여받은 아담은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는 행위를 통하여 사람과 자연 사이의 거리감을 허물고 한 가족을 이룬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뒤 그들을 향해 “모두가 모두 내 새끼 같은/ 내 새끼 같은 사랑이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피조물들의 주인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들을 “내 새끼”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우월의식과 지배의식을 포기함을 뜻한다. ‘이름 지어주기’ 혹은 ‘이름 부르기’는 에덴 동산의 모든 동식물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포용하려는 사랑의 행위이다. “능구리와는 햇볕에 누워 창세기를 읽는다.”라는 아담의 발언은 시적詩的 감동의 물줄기를 끌어 올린다. “암표범”, “숫사자”, “두꺼비”, “능구리”를 하느님의 자녀이자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생명의식이 단 한 줄의 시적(詩的) 문장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 박두진이 그리워하는 에덴 동산은 생명권(生命權)의 평등이 실현되는 에코토피아(Ecotopia)의 모델이다. 에코토피아를 향한 귀향의식이 투명하게 보이는 독일 시인 발터 휄레러의 시 「시조새의 꿈」을 만나보자.

     

     

    잃어버린 낙원을 꿈꾸며

    ― 발터 휄레러의 「시조새의 꿈」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너와 함께 등을 맞대고 누워있던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얼굴을 스치는

    도마뱀과 익룡의 살갗까지도.

    대홍수 시절 나는

    석회암 속에 너와 함께 묻혀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살갗을 맞댄 채 나란히 누워있었다. 우리는

    화석이 된 것이 아니었다.

    함께 물에 젖어 있었을 뿐, 늪처럼 이끼처럼, 아직도

    젖어있는 기억이여.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예감하는 나. 1)

     

    날개 달린 도마뱀이 물 밖으로

    날아오르려 하다가 그만

    물웅덩이 속으로 첨벙 곤두박질치고

    비상(飛翔)하던 너 또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흙탕물 속으로 넘어졌을 때

    나의 살갗은 서늘한 쾌감에 젖었다.

    너는 내 곁에 눕고, 이따금 나는 네 등위에 누워

    우리는 시름 한 점 없이 웃었노라!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모든 것이 아스팔트로 반듯하게 덮였구나.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너를 알고 있단다.

    수천 년 동안

    늪처럼 이끼처럼

    웃음을 머금고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예감하는 나.

     

    - 발터 휄레러의 「시조새의 꿈 Archäopteryx-Traum」

     

    1922년 독일의 로젠베르크(Rosenberg)에서 출생한 시인 발터 휄레러(Walter Höllerer). 그는 시인이자 문예학자로서 1959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공과대학의 문예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4년부터 전후(戰後) 독일 작가들의 대표적 단체인 ‘47그룹’의 회합에 비평가로서 참여하였다. 1954년에 문예지『악첸테/Akzente』와 1961년에 문예지『기술시대의 언어』를 창간하여 편집책임을 맡는 등, 문학 담론을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또다른 손님』(1952), 『시는 어떻게 생겨나는가?』(1964), 『시집. 1942-1982』(1982) 등이 있다.

    발터 휄레러의 대표시로 알려져 있는 「시조새의 꿈」은 1979년 문예지 『악첸테』 제4권에 처음 발표되었다. 시의 화자는 자연과 사람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생태학적 낙원, ‘에코토피아’를 동경한다. 한국 시인 박두진의 시 「인간밀림」에서 아담을 연상시키는 태초의 사람이 “능구리, 암표범, 숫사자” 등 모든 동물과 가족처럼 어울려 지내던 아름다운 풍경이 발터 휄레러의 시에서 재현되고 있다. 화자는 “시조새”와 함께 “시름 한 점 없이” 형제처럼 “웃음”을 주고 받던 상생의 낙원을 예찬한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이 ‘생명나무’2)의 빛과 향기를 그리워하듯이,, 문명세계 속으로 내던져진 화자는 회색빛 “아스팔트” 위에 서서 잃어버린 낙원의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다. 자연과 함께 나눠 가졌던 “서늘한 쾌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 … . 그는 자연과 사람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 합일상태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 설정된 시공(時空)의 배경이 고생대의 원시적 공간이고, “시조새”가 살았던 시대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독자들도 알고 있다. 비록 생태학적 패러다임을 뚜렷이 전하고 있음에도 실제적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발터 휄레러의 시는 생태사회를 향한 동경의식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시조새”로 대표되는 자연의 생명을 사람의 생명과 동등하게 존중하는 평등의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과 사람의 수평적 “상호관계”를 추구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이 선명히 비쳐 나온다.3) 발터 휄레러의 시에서 드러나듯이 ‘생태시’는 고발, 비판, 선동에만 국한된 장르가 아니다. 생태시의 정신적 뿌리는 ‘생태주의’적 생명의식임을 알 수 있다.4)

     

     

    집을 잃어버린 새들

    -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전문

     

    1906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한 시인 김광섭. 그는 일제 치하의 절망적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감과 외로움을 노래하다가 철학적 관념의 세계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던 중반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는 정치적 이상과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 등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급진적 산업발전과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연의 생명이 위협받는 현실을 고발함으로써 한국 ‘생태시’의 맹아(萌芽)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마음』(1949), 『성북동 비둘기』(1969) 등이 있다.

    위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산”은 초록빛 “번지”를 갖고 있는 새들의 집이다. 그러나 새들은 집을 빼앗기고 초록빛 “번지”를 잃어버렸다. 새들과 함께 같은 마을의 식구로서 “사랑과 평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들의 집을 철거해버렸다. 조금 더 풍요롭고, 조금 더 윤택하고, 조금 더 편리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새들의 보금자리를 ‘메두사’의 집으로 바꿔버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메두사의 눈빛을 보는 순간 모든 생명체들은 “돌”로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 ‘메두사’라는 이름의 새로운 “번지”를 가진 “채석장”이 새들의 마당을 점령해버렸다.

    새들은 “채석장 포성”으로부터 귀를 막기 위해 힘없는 날갯죽지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휘두르는 문명의 폭력을 피하여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하늘”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어제까지 “성북동 주민”과 함께 나누었던 온정을 그리워하며 사람들에게 마지막 “축복의 메시지”를 노래하는 새들이여! 그대들은 죄없는 망명객이다. 그대들이 비교적 안전한 망명지라고 믿고 있는 “새파란 하늘”의 “광장”조차도 내일이면 “돌”과 쇠붙이로 무장한 침략자들에게 점령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

     

     

    사과처럼 아름다웠던 별이여

    ―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사과에 대한 조사(弔詞)」

     

    이곳엔 사과가 놓여 있었지

    이곳엔 식탁이 서 있었어

    저것은 집이었고

    저것은 도시였어

    이곳의 땅은 쉬고 있다구

     

    저기 있는 이 사과가

    지구란다

    참 아름다운 별

    그곳엔 사과가 있었고

    사과를 먹는 사람들이 살았었지

     

    -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사과에 대한 조사(弔詞) nänie auf den apfel」 전문.

     

    1929년 독일의 카우프보이렌(Kaufbeuren)에서 출생한 시인 한스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그는 통독 이전의 서독 문단에서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에리히 프리트(Erich Fried)와 함께 독일어권 지역의 문단에서 생태의식을 정치시(政治詩)의 영역 속으로 도입하여 독일 참여문학의 수준을 발전시킨 시인이다. 시를 비롯해 에세이, 다큐멘타리, 번역, 평론 등 그의 글쓰기 행위는 문학의 전 분야로 확대되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양떼에 대한 늑대들의 변명』(1957), 『나, 대통령과 비버』(1964), 『타이타닉 호의 침몰』(1978) 등이 있다.

    위의 시 「사과에 대한 조사」는 1964년 프랑크푸르트의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에서 출간된 엔첸스베르거의 시집 『나, 대통령과 비버』에 수록된 작품이다. 일상적인 언어를 은유와 상징으로 전환시켜 시의 미학적 효과를 살려낸 작품이다. 간결한 언어 속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시의 화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과일 그 자체이고, 또 하나는 지구를 상징한다. “사과”라는 독립적 생명체를 바라보던 화자는 거대한 “사과”인 지구를 향해 서서히 시선을 옮겨간다. 이 시가 1연과 2연으로 나뉘어져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연에서 화자는 거대한 “사과”의 내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과거에 존재했었던 사물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자연을 상징하는 “사과”, 가족공동체를 상징하는 “식탁”, 기계문명의 터전을 상징하는 “도시”가 사라진 것이다. 마침내 화자는 인류와 모든 종(種)의 멸망을 확인한 뒤에 죽어버린 거대한 “사과”의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제2연에서 그는 “지구”의 바깥에 서서 절망에 젖은 체념의 눈길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사과”처럼 아름다웠던 “별”은 단 한 개의 “사과”도 맛볼 수 없고,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단 하나의 생명체도 만질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하였다. “지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화자의 “조사(弔詞)”는 인류의 파멸과 모든 종(種)의 멸종을 경고하는 시적(詩的) 묵시록이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행위를 자제하지 않는다면 생명공동체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는 당부와 호소를 옐로우 카드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다. “지구”호(號)의 난파를 예방하는 데 필요한 생태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묵시록의 언술방식을 차용하는 것은 1970년대 이후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인들의 ‘생태시’에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진보적 문학의 경향이다. 뚜렷한 예가 될 수 있는 한국 시인 신경림의 시 「이제 이 땅은 썩어가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를 만나보자.

     

     

    복수의 여신으로 변해버린 가이아(Gaia)

    -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아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한낮인데도 사방은 저녁 어스름처럼 어둡고

    길목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없다.

    바람에서도 화약 냄새가 난다.

    종소리에서도 가스 냄새가 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꽃과 노래와 춤으로 덮었던 내 땅

    햇빛과 이슬로 찬란하던 내 나라가

    언제부터 죽음의 고장으로 바뀌었는가.

     

    번쩍이며 흐르던 강물이 시커멓게 썩어

    스스로 부끄러워 몸을 비틀고

    입술을 대면 꿈틀대며 일어서던 흙이

    몸 가득 안은 죽음과 병을 숨기느라

    웅크리고 도사리고 쩔쩔매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죽음의 안개가 이 나라의

    산과 들을 덮게 되었는가.

    쓰레기와 오물로 이 땅이 가득 차게 되었는가.

     

    우리는 너무 허둥대지 않았는가.

    잘살아보겠다고 너무 서두르지 않았는가.

    이웃과 형제를 속이고 짓밟고라도

    잘 살아보겠다고 너무 발버둥치지 않았는가.

    그래서 먼 나라 남이 버린 것까지 들여다가

    목숨을 빼앗는 것이라 해서 이미 버릴 데가 없어

    쩔쩔매던 것까지 몰래 들여다가

    이웃의 돈을 울궈내려 하지는 않았는가.

    나라는 장사꾼과 한통속이 되어

    이 나라를 쓰레기 장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 나라를 온갖 찌꺼지

    모으는 곳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酸)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이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뿌옇게 지구를 감고 있는

    연기와 먼지는 드디어

    온통 이 세상을 겨울도 봄도 여름도 없는

    삶도 죽음도 아닌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연옥도 지옥도 아닌 버려진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돈에 눈이 멀어 허둥댄 것이 우리만이 아니란 것을.

     

    그러나 그것도 이미 좋았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 지구는 언제 폭발해 저 자신을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으로 가득 차 있다.

    핵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우리들의 발 밑에서, 우리들의 등뒤에서,

    죽음의 입김을 서서히 내뿜으면서

    그 음험한 눈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다.

    보라, 삼천리 그 가운데서도 남쪽 반

    이 좁은 땅덩이리 속에서만도 많은 핵 발전소가

    돈이 덜 든다는 구실아래

    곳곳에 도사려 우리를 집어삼킬

    채비를 서두르고 있지 않은가.

    또 저 북녘 굶주린 땅에서도

    전쟁을 막는다는 핑계로 쌓인 핵들이

    단숨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죽음의 재로 덮을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은가.

    어리석은 불장난에 쓰여지고 있지 않는가.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있다.

     

    -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

     

    1936년 충주에서 출생한 시인 신경림. 그는 1956년 『문학예술』 지에 시 「갈대」가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농무(農舞)」 외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여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철저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에 정신적 토대를 두고 한민족(韓民族)의 한(恨)과 의지를 섬세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시골의 흙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농민들과 서민들의 애환을 가슴 뭉클하게 노래하여 ‘민중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농무』, 『남한강』, 『새재』,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시전집』 등이 있다.

    위의 시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 후 1991년 ‘다산글방’에서 출간된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고진하 ․ 이경호 엮음)에 재수록되었다. ‘생태의식’이란 “온 세계”의 “땅”을 돌아보며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임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독일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생태시에서 읽었던 ‘지구’에 대한 ‘조사(弔詞)’가 가공의 상황이 아니라 실제적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개연성을 신경림 시인의 생태시에서 읽게 된다. 시인이 바라보는 한반도의 “땅’”과 “지구”의 대지는 생명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사태는 갈수록 심각해진다.5) 예전엔 사람에게 어머니처럼 아낌 없이 은혜를 베풀던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가 이제는 사람에게 가차 없이 앙갚음을 가하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썩은 실개천”에서 건져낸 “등 굽은 물고기”를 먹고 “화약냄새가 나는 바람”을 마시는 기괴한 풍경이여! “목뼈가 없는 아이가 줄이어 태어나고”, “눈(雪)” 속에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酸)이 섞여” 있으며, “강” 속에서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은 자연의 보복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지구” 사람들의 현실이다. “돈에 눈이 멀어 허둥댄 것이 우리만이 아니다”라는 시인의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돈”을 얻기 위해 “이웃”을 도구처럼 이용하고 소중한 “땅”을 자본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면 “내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까지도 “단숨에” 멸망의 “벼랑” 끝에 서게 될 날이 앞당겨 질 것이다. 더욱이 “전쟁을 막는다는 핑계로” 자연을 “핵(核)”의 공장으로 이용하고 “핵”의 창고로 타락시킨다면 어느 날 “이 지구”는 인류의 “어리석은 불장난”으로 인하여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있다”라는 화자의 자조적(自嘲的) 탄식과 “이곳의 땅은 쉬고 있다”라는 엔첸스베르거의 선험적 예측은 지역과 문화권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구”의 종말을 경고하는 묵시록의 연대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꿈’으로 변해가는 아름다운 자연

    - 위르겐 베커의 「말해주세요, 잘 지내고 있는 지」

     

    자주 피곤에 젖는답니다. 언제나 살아 있긴 하지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참으로 힘겨워지는군요. 그것을 증명하려 할수록

    평안의 지평은 아득히 더 멀어져갑니다. 해가 저물어도

    현상들과 사건들은 좀처럼 침묵할 줄 모릅니다.

    멀지 않아 창문을 열 수 있는 것도

    특권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차라리 감정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눈동자는 점점 더

    굳어질테니까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귀를 기울여보세요.

    가끔씩 강물 가까이에서 물향기를 맡거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이제 낱말 속에서나 가능할 뿐

    사물로 존재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6)

     

    - 위르겐 베커의 「말해주세요, 잘 지내고 있는 지 Sag mir, wie es dir geht」전문

     

    1932년 독일 쾰른(Köln)에서 출생한 시인 위르겐 베커(Jürgen Becker). 그는 ‘누보 로망’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만큼 시 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창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967년 ‘47그룹 문학상’, 1995년 ‘하인리히 뵐 문학상’ 등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눈(雪)』(1971), 『풍경화의 끝』(1974), 『전쟁 얘기는 꺼내지도 마오』(1977), 『시집 1965~1980』(1981) 등이 있다. 현대 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에 바탕을 두고 ‘생태의식’을 표현하는 위르겐 베커의 언어는 시와 소설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양쪽 세계를 융합시키는 현대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람과 자연 간의 관계가 심각하게 분열되고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목격자처럼 증언하기도 하고, 때로는 묵시록의 언어로써 경고하기도 했다. 1995년 5월 17일 독일의 본(Bonn) 대학교에서 열린 ‘한국과 독일 작가 회의’에 독일측 대표 작가로 참여하여 한국측 작가들과 대담을 가졌다. 위르겐 베커는 ‘작가 회의’ 현장에서 “지금의 시대는 단순하고 소박한 서정시의 시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기술문명의 폭력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사람과 자연 간의 관계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 현대의 시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시 「말해주세요, 잘 지내고 있는 지」는 위르겐 베커의 『시집 1965~1980』에 수록된 대표적 작품이다. 그의 생태의식을 뚜렷하게 반영하는 작품이다. 시의 화자가 경험했던 과거의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의 현실적 “경험”세계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있다. 화자는 “강물”의 맑은 “물향기”를 맡고 싶고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낱말 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변하였다. “강물”과 “하늘”은 “이제” 화자의 몸 속에 청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줄 “사물”들이 아니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의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눈동자를 굳어지게” 만들고 “감정”을 석화(石化)시키듯이 자연은 죽음의 현장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한스 카스퍼가 자신의 시 「보훔」에서 잿빛으로 변해버린 하늘을 바라보며 “해마다 사람의 폐 속에/ 3톤의/ 매연이 쌓인다”7)고 탄식하였듯이, 위르겐 베커도 사람의 폐부 속에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하늘”을 “망가진”8)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참으로 힘겨워지는” 현실상황을 알게 될수록 “멀지 않아 창문을 열 수 있는 것도 특권이 될 때가 올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기 마련이다. 화자의 위기의식은 “온 세계가 마침내 벼랑에까지 와 서있다.”라는 신경림 시인의 탄식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참으로 힘겨워지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현대의 시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것은 썩어가는 자연의 살갗을 가려주는 낭만주의적 관념의 옷을 벗겨내는 일이다. 자연의 병든 몸을 미학적 가공 없이 드러내고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의 위기상황을 알려주는 일이다. 생태위기의 현실상황을 각성시키는 시적 경보음을 한국 시인 이형기의 시 「전천후 산성비」에서 들어보자.

     

     

    우리 시대의 비

    - 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

     

    우리 시대의 비는 계절과 무관하다.

    시도 때도 없이

    푸른 것은 모조리 갉아먹어 버리는

    전천후 산성비.

     

    그렇다 전천후로

    비는 죽은 구근을 흔들어 깨워서

    자꾸만 생산을 재촉하고 있다.

    그래서 생산이 넘치고 넘치는

    그래서 미처 다 소비하기도 전에

    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린다고는

    누군가 참 잘도 말했다.

     

    한때는 선지자의 예언처럼 고독했던

    그러한 절망이 도처에서 천방지축으로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고 있는 시대.

     

    죽은 자의 욕망까지 흔들어 깨우면서

    그 위에 내리는

    시도 때도 없는 산성비.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일회용 비닐우산이 되어버린

    절망을 쓰고 있다.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시대의 비.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 오늘도 내린다.

     

    - 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전문

     

    193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한 시인 이형기. 그는 1949년 『문예』지에 시 「비오는 날」이 추천되고 1950년 「코스모스」, 「강가에서」가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이것은 한국문학사상 최연소 등단 기록이 되었다. 그는 대학교 졸업 이후 『연합신문』, 『동양통신』, 『서울신문』, 『국제신문』, 『대한일보』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언론 활동은 시창작에 있어서 주제의식의 폭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평론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형기 시인은 1962년 『현대문학』지에 평론 「상식적 문학론」을 연재하면서 문학평론과 시창작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품은 시 「낙화(落花)」였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구는 고별사로 자주 인용될 만큼 「낙화」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작품은 꽃잎이 지는 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인생과 사랑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걸작이다. 이 작품의 정취에서 느낄 수 있듯이 전통적 서정성에 기반을 두었던 그의 시세계는 1980년대 이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는 주제의식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기술과 산업의 발전에 따른 물질만능의 비인간화 현상이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파괴해가고 있는지를 포착하여 폭로하였다. 시 「전천후 산성비」는 이형기 시인의 비평적 생태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1971), 『심야의 일기예보』(1990), 『절벽』(1998) 등이 있다.

    위의 시 「전천후 산성비」는 1990년 ‘문학아카데미’에서 출간된 이형기 시인의 시집 『심야의 일기예보』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 후 1991년 ‘다산글방’에서 출간된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고진하 ․ 이경호 엮음)에 재수록되었다. 이형기 시인이 「낙화」를 쓰던 시절의 “비”와 이 시의 “비”는 다르다. 「낙화」시절의 “비”는 이별하는 꽃잎의 눈시울을 적시는 눈물처럼 맑은 “물”이었다. 꽃잎이 진 자리에 스며드는 “비”는 열매를 자라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되었다. “비”는 “계절”에 맞춰 꽃잎을 부르는 초청장이 되기도 하고 “계절”을 배웅하면서 꽃잎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긴요한 역할을 맡았던 그 “비”가 지금은 시인의 말처럼 “계절과 무관한” 물이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생명체의 “푸른” 기운을 “갉아먹는” 물이 되었다. 독일의 여류 시인 엘케 외르트겐(Elke Oertgen)은 자신의 시 「물」에서 “오늘밤 머리맡에 떨어지는 비는 과연 얼마나 무해(無害)로운가?”9)라고 “비”의 산성화(酸性化)를 염려했었다. 그러나 이 독일 시인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한국 시인 이형기의 시를 통해 알게 된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로 인해 박테리아처럼 증식된 CO2 군단이 하늘을 점령하였다. 대기(大氣)는 그들의 식민(植民) 백성이 되었다. CO2 군단은 대기의 자녀인 “비”를 “산성(酸性)”으로 무장시키고 지상을 공격하는 징용(徵用) 부대로 삼았다. 이 “산성비”라는 젊은 부대가 “푸른 것”을 “갉아 먹은” 자리마다 “생산을 재촉하는” 회색의 공장지대가 들어선다. “소비”를 “재촉하는” 광고 모델의 빨간 입술이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고” 있다. 비어있는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쓰레기통” 속을 들여다 보라! 5월이면 “대량” 감사(感謝)의 표시로 “대량 생산”된 “장미”들이 “산성”에 젖은 시한부 일생을 마감하며 “쓰레기통” 속에 “가득” 버려져 있다. “산성비”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낸 “일회용 비닐우산”과 함께 일상의 규칙에 따라 폐기장으로 실려 갈 일회용 “장미”들이여!

    “산성비”의 폭력은 사람의 “욕망”이 빚은 비극임을 시인은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대기와 “물”을 병들게 만든 대가로 인간에게 돌아오는 보복의 부메랑인 것이다. “비도 눈도 그냥 맞을 수 없는”10) 현실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이제 낱말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라는 위르겐 베커의 비판적 탄식이 공감의 울림소리로 다가온다. 베커의 시 「말해주세요, 잘 지내고 있는 지」와 이형기의 시 「전천후 산성비」는 문화권의 차이를 초월하여 묵시록적 비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과연 “비”의 몸에서 “산성”을 무장해제 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은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다. “죽은” 뒤에도 손에서 놓기 어려운 “욕망”을 살아 생전에 내려놓기 위해 “욕망”을 대적하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기 위해 “자꾸만 생산을 재촉하는” 욕망을 …. “미처 다 소비하기도 전에” 한 가지라도 더 소유하려는 “욕망”을 ….

     

     

    마지막 밤을 우리의 손아귀에

    - 다그마르 닉의 「우리는」

     

    우리에겐 두려움이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은

    로봇의 두뇌와 그 위력.

    죽어가는 지구의

    마지막 밤을 향해 우리는 맹목적으로 전진한다.

     

    모든 생명은 우리 손 안에 있다.

    우리에겐 말이 필요 없다.

    오차 없는 공식에 따르면 되는 것. 우리의 이성은

    실험관 속에서 죽음을 배양한다.

     

    우리는 원자(原子) 알갱이들을 굴리며 논다.

    암(癌)도, 페스트와 결핵도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우리가 사는 곳엔 지옥의 그림자 비치지 않는다.

    한때 우리의 심장을 멎게 했던 저 지옥도

    아주 가끔씩 우리를 귀찮게 할 뿐이다.

     

    - 다그마르 닉의 「우리는 Wir」전문

     

    1926년 독일의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출생한 시인 다그마르 닉(Dagmar Nick). 여류 시인으로서 시창작뿐만 아니라 에세이, 방송극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가 1954년에 발표했던 「묵시록」, 「우리는」 등의 묵시록적 시편은 독일 문단에서 ‘생태시’의 맹아(萌芽)를 형성하였다. “기술문명의 발전이 곧 역사의 발전”이라고 확신하였던 서구인들의 낙관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물질만능주의와 과학기술만능주의를 환경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물질적 욕망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과학기술을 남용하게 될 경우에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생태계 파괴는 물론이요, 인류의 멸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그의 문학적 옐로우 카드가 전후(戰後)의 국가 재건을 위해 산업발전에 여념이 없던 1950년대 서부 독일의 사회를 겨냥하였다는 점에서 다그마르 닉은 독일 ‘생태시’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표적 시집으로는 『순교자』(1955), 『증명과 증거』(1969), 『소실선』(1978) 등이 있다. 위의 시 「우리는」에서 다그마르 닉은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을 비판하기 위해 화자의 입을 빌어 현대인들의 낙관론을 예찬하는 반어적 언술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시의 화자인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현대인들이다. “로봇”과 “실험관”은 각각 “로봇” 그 자체이고 “실험관” 그 자체이지만 현대 과학기술 전체를 상징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통하여 풍요와 윤택과 편리를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로봇의 두뇌와 그 위력”이 “우리 손 안”에 “모든 생명”을 쥐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과 인간의 “모든” 유전자를 “실험관 속에서” 조작하여 자본의 이익으로 치환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선포한다. 과학기술과 물질이 신(神)처럼 “우리”에게 번영과 행복을 보장해 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히브리 민족은 모세의 지팡이를 따라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갔지만 “우리”는 과학기술의 지팡이가 지시하는 “오차 없는 공식에 따르면” 그만이다. “우리”의 유일한 마지막 목적지는 물질만능의 ‘소돔’성(城)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독일 시인 다그마르 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자인 “우리”를 비판하고 있다. 시인은 과학기술과 물질을 향한 “우리”의 “맹목적 전진”을 책망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의 마지막 밤”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자연의 “모든 생명”을 “손”에 쥐고 이용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보답은 “지구의 마지막 밤”과 인류의 종말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을 증식하기 위하여 “실험관” 속에서 “모든 생명”을 복제하고 조작한다면, “우리”가 믿었던 바로 그 “실험관” 속에서 “죽음”을 “배양”하는 아이러니를 낳을 것임을 시인은 경고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은 “우리”의 죄값으로 지불해야 할 “죽음”이여! 그 “죽음”은 곧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의 멸종을 부르는 신호탄이 될 것인가? 한국 시인 이형기의 「전천후 산성비」에서 비판했던 ‘죽은 자의 욕망까지 흔들어 깨우는’ 현대인들의 “욕망”이여! 시인 이형기가 염려한 것처럼 지구의 ‘도처에서 장미처럼 요란하게 꽃피는’ 절망을 “배양”할 것인가?

     

     

    파멸로 향하는 발전

    - 정현종의 「푸른 하늘」

     

    바람아 그렇지 않으냐

    하늘은 한 큰 숨 아니냐

    새들아 나무들아

    하늘 없이 우리가 어떻게

    날고 자라고 기를 펴고 그러겠느냐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요새는 숨쉬기가 어렵고

    인제 몸도 정신도

    나는 건 고사하고

    자라지도 않는다

    우리는 모두 발육 정지됐는데

    몸도 마음도 더는 자라지 않는데

    오호로 우습고나

    성장이다 발전이다 가갸거겨

    앵무새 앵무새 앵무새 놀음이다

     

    너희도 다 알다시피

    문명인의 머리 위에

    인제 푸른 하늘이 없다

     

    푸른 하늘이 없으니

    하늘이 없다

    푸른 하늘이 없어서

    하늘이 없으면

    어디에 가지를 뻗고

    잎과 꽃은 또 어디에

    피어나고 웃고 바람 불겠느냐

     

    새들아 그리고 나무들아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가 모두

    하늘인데,

    왜 하늘이냐 하면 우리가 모두

    숨을 쉬니까 하늘인데,

    우리는 하늘 속에

    하늘은 우리 속에 있는데,

    인제 푸른 하늘이 없으니

    하늘이 없고

    하늘이 없으니

    우리가 없다, 내 사랑하는

    숨결들아

     

    새들아, 산 하늘들아

    나무야, 하늘의 숨결아

    너희의 깃을 나는 사랑하고

    너희의 가지들을 나는 한없이

    사랑하거니와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 깃 속에 깃들여

    나는 언제나 너희 가지에 깃들여

    너희의 성장과 飛翔에 합류

    너희의 그 아무도 몰라 이쁘고 이쁜 꿈에 합류하거니와.....

     

    - 정현종의 「푸른 하늘」전문

     

    1939년 서울에서 출생한 시인 정현종. 그는 1965년 『현대문학』지에 박두진 시인의 3회 추천을 받고 등단하였다. 그는 사람과 만물 사이의 생명적 연관성을 미시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거시적 묘사방식도 그의 생태의식과 생명의식을 형상화하는 통로가 되었다. 모든 생물이 ‘하늘’이라는 열린 지붕 아래서 같은 생명의 숨결을 주고 받는 가족임을 거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범우주적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물의 ‘상호의존’ 시스템을 다이나믹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사물의 꿈』(1972),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 『세상의 나무들』(1995), 『정현종 시전집』(1999) 등이 있다.

    위의 시 「푸른 하늘」에서 시인은 현대문명의 “발전”에 관한 논리를 비꼬듯이 비판하고 있다. 기술문명의 급진적 콘베이어 벨트를 타고 황금만능의 ‘소돔’ 성(城)을 향해 전력질주한 결과는 무엇인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한 큰 숨”인 “하늘”의 생명력이 왜소해지고 쇠약해졌다. 그런 까닭에 하늘의 “큰 숨”으로부터 “숨결”을 받아 마시며 자라났던 “새들”과 “나무들”이 “숨쉬기 어려워” 졌다.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발육 정지”의 위험에 처하였다.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자연을 수단으로 삼으면서 달려왔던 “성장”과 “발전”의 종착역은 죽음뿐이다. 독일 시인 다그마르 닉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상생을 망각해버린 모든 현대인들을 향하여 “맹목적으로 전진한다”라고 비판하였듯이 한국 시인 정현종도 경제적 성장과 기술적 발전의 급류에 휩쓸려 조화로운 성장의 숨결에 “합류”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자조적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나무들의 “가지에 깃들여” 그들과 함께 “하늘”의 숨결을 호흡하는 공존의 성장을 “꿈”꾸며 … . 새들의 “깃 속에 깃들여” 그들과 함께 하늘의 “숨결”을 나눠 마시는 공생의 “비상(飛翔)”을 꿈꾸며 … .

     

     

    소중한 화제(話題)를 잊어버린 우리들

    -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나무」

     

    도시 안에서 또다시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플라타나스 나무들을 베어 버렸어.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우리는 그들 곁에 있을 때마다

    친구로서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었으니까.

    그 시절엔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조차도

    범죄나 다름없는 일이었지.

    나무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평화,

    나무들에게 깃들이는 새들과 바람,

    그들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를 그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았었지.

     

    -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나무 Bäume」전문

     

    1929년 독일의 칼스루에(Karlsruhe)에서 출생한 시인 발터 헬무트 프리츠(Walter Helmut Fritz).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문예학을 전공한 프리츠는 1964년부터 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크푸르트 피셔(Fischer) 출판사의 편집고문으로서 원고 심사에 관여할 정도로 독일 문단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다수의 장편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등, 산문 분야에서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창작활동의 중심은 시 분야였다. 절제된 표현을 통해 일상생활과 자연과 문명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였다. 특히, ‘문명과 자연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시창작의 중심적 테마가 되었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자연’과도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보자고 호소하는 사람이 곧 ‘시인’임을 뚜렷이 보여준 장본인이 발터 헬무트 프리츠이다. 그의 시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는 어느 곳인가? 그 곳은 자연과 문명이 화해를 이루고 양자의 상호의존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생태사회’이다. 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달라진 세월』(1963), 『시집』(1964), 『어려운 도하(渡河)』(1976), 『그리움』(1978), 『자유의 수단』(1983), 『가장행렬』(2003) 등이 있다.

    위의 시 「나무」는 1976년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시집 『어려운 도하(渡河)』에 처음 수록된 작품이다. 그 후 1981년 독일 뮌헨 대학교의 마이어-타쉬(P. C. Mayer-Tasch) 교수가 엮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제3장 ‘아름다운 신세계’ 편에 재수록되었다. 시의 화자는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조차도 범죄나 다름없는 일”로 여겨지던 시절을 회고한다. 나무의 “뿌리”, 나무를 집으로 삼는 “새들”, 나무를 어루만져주는 “바람”, 나무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평화” 등. 나무에 관련된 사물과 사건들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조차도 마치 “죄를 짓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무를 친구로서 맞아들여” 대화의 중요한 화제로 삼는 것이 일상의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이 첨단의 길을 걷는 20세기 후반에 들어 사람의 마을에서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문화’의 양상이 달라졌다. 이처럼 급격한 사회변화의 양상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존재가 곧 ‘시인’이다. 나무를 친구로서 맞아주었던 아름다운 시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의 ‘인간중심주의’적 패러다임이 ‘생태주의’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지성인이 곧 시인이다. 이런 까닭에 발터 헬무트 프리츠는 자신의 시 속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되돌려놓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생명권(生命權)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는 척도는 사람의 ‘이성’, ‘언어’, ‘문명’이 아니다. 그 유일한 척도는 무엇인가? 한국 시인 정현종이 고백하였듯이 ‘우리 모두’의 ‘한 큰 숨’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숨결’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천부인권뿐만 아니라 천부생명권(天賦生命權)까지도 존중하는 ‘생태주의’적 사고방식이 발터 헬무트 프리츠의 시를 움직이는 생명의 힘이다.

    -
    주)  
    1) Walter Höllerer, Archäopteryx-Traum, in: Im Gewitter der Geraden. Deutsche Ökolyrik 1950-1980, hrsg. v. Peter Cornelius Mayer-Tasch, München 1981, S. 27~28.
    2) 「창세기」2장 9절, 󰡔성경󰡕(개역개정판) 중에서, 생명의말씀사, 2007, 2쪽.

    3) 송용구, 「독일 ‘생태시’에 나타난 주제의식과 언술방식의 상관성」, 『카프카연구』제26집, 한국카프카학회, 2011, 325쪽 참조.
    4) 송용구, 󰡔현대시와 생태주의󰡕, 새미, 서울, 2002, 80~81쪽 참조.
    5) Vgl. Elke Oertgen, Erde, in: Erdberührung, Duisburg 1985, S. 14-15 .
    독일 시인 엘케 외르트겐 Elke Oertgen은 자신의 시 「지구 Erde」에서 “노아의 대홍수 Sintflut” 같은 대재앙을 통해 “지구”가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경고’하였다.
    6) Jürgen Becker, Sag mir, wie es dir geht, in: Gedichte 1965~1980, Frankfurt am Main 1981, S. 18.
    7) Hans Kasper, Bochum, in: Im Gewitter der Geraden. Deutsche Ökolyrik 1950―1980, hrsg. v. P. C. Mayer―Tasch, München 1981, S. 35.
    8) Jürgen Becker, Natur-Gedicht, in: Moderne Deutsche Naturlyrik, hrsg. von Edgar Marsch, Stuttgart 1980, S. 239.
    9) Elke Oertgen, Wasser, in: Erdberührung, Duisburg 1985, S. 11.
    10) 노유섭, 『아름다운 비명을 위한 칸타타』, 시와시학사, 199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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