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동화 아기뱀 꼬물이_조명숙
  • ▶ 멍청한 생각
  • 아기뱀 꼬물이

     





                                                             
                                                         <일러스트 이지산>



    8. 멍청한 생각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율모기는 먹치굴로 갔습니다.

    먹치 옆에 몸을 사리고 율모기는 머리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 있었어?”

    “전 멍청한가 봐요.”

    의기소침해진 율모기가 말했습니다. 먹치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멍청하다면 어떻게 특별해질 수 있겠니?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다니, 너야말로 정말 특별하구나. 진짜 멍청한 뱀은 자기가 멍청한 줄도 모른단다.”

    “정말 그럴까요?”

    약간 용기를 얻은 듯 율모기가 머리를 살짝 들었습니다.

    “그래요. 전 멍청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알이 율모기 할머니에게 먹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요.”

    “암, 그래야지.”

    “사람 때문에 사냥터를 찾아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지도 않겠어요.”

    율모기의 눈이 빛나더니 머리가 꼿꼿하게 들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율모기가 얼마나 훌륭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보여주겠어요.”

    “나도 도와줄게.”

    “고맙습니다, 먹치 아줌마.”

    율모기는 매일매일 먹치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던 율모기는 점점 용감하고 씩씩해졌습니다.

     

    일요일이 몇 번 더 지나가자 외딴집의 기우뚱하고 삐꺽거리던 마루는 똑바로 앉게 되었습니다. 허물어진 벽이 고쳐지고 마당 가장자리에는 작은 연못도 생겼습니다.

    집을 다 고친 꽁지머리는 집 주위와 마당에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 구절초와 같은 꽃씨를 뿌렸습니다.

    부용화, 하늘말나리, 다알리아, 꽃무릇, 국화 같은 꽃들은 뿌리를 심었고, 사상자꽃, 쑥방망이, 미역취, 기린초, 마타리 같은 꽃들은 저수지에서 옮겨왔습니다.

    무리지어 피는 노란 애기똥풀꽃과 괭이밥, 솔패랭이, 메꽃, 달개비, 엉겅퀴 같은 꽃들은 풀이 뽑힌 자리에서 스스로 자랐습니다.

    꽁지머리는 혼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척척 해냈습니다. 일을 하다가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쪽마루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대숲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외딴집 오른쪽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할아버지처럼 서서 꽁지머리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9. 하얀 사람, 작은 사람

     

    저수지 둑 여기저기서 물레나물이 쑥쑥 자라는 오월의 어느 날.

    은사시나무 아래 굴에서 율모기가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사방에서 꽃냄새 풀냄새가 풍겨왔습니다.

    물땡땡이가 맴을 돌고 있는 저수지는 넓고 파란 도화지 같았습니다.

    ‘저기 들어가서 실컷 헤엄을 치면 얼마나 신날까!’

    그렇지만 물 속에 들어갔다가는 극성스런 무자치들에게 내쫓길 게 분명했습니다.

    드넓은 저수지를 바라보면서 상쾌하고 시원한 물 냄새를 실컷 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율모기는 혀를 내밀어 바람의 방향을 살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저수지 물을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번졌습니다.

    ‘뭐지?’

    율모기는 몸을 절반쯤 쑥 내밀고 내다봤습니다. 그리고 곧 머리를 땅에 댔습니다. 턱 밑에 달린 감각기관에 자박자박 발소리가 잡혔습니다.

    율모기는 소리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습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딱 셋뿐인 아이들 중에서 제일 작은 사람이 거기 서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아기 염소를 몰고 저수지에 오는 아이였습니다.

    아기 염소를 저수지 둑에 매 놓고 작은 사람은 꼭 돌멩이 하나를 저수지에 던져넣었습니다.

    풍덩!

    ‘별 거 아니군. 아침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율모기는 굴에서 나와 부지런히 외딴집으로 향했습니다.

    외딴집에 도착한 율모기는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대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때 바로 곁에 뭔가 툭 떨어졌습니다.

    ‘이크! 뭐야?’

    깜짝 놀라 돌아보니, 또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아기 염소를 매 놓고 마을로 돌아간 줄 알았던 작은 사람이 거기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이었습니다. 일요일이면 작은 사람은 외딴집에 놀러왔습니다.

    작은 사람은 일요일 내내 그 집에서 놀았습니다. 점심때가 되면 꽁지머리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일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쬐끄만 녀석이 겁도 없이…… 콱 깨물어버릴까 보다.’

    율모기는 휙 머리를 돌려 작은 사람을 노려보고는 대문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작은 사람은 꽁지머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트럭이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귀찮게 됐군.’

    율모기는 대숲 언저리로 가서 몸을 숨겼습니다.

    트럭은 곧 대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꽁지머리가 내리자 작은 사람이 깡총깡총 뛰어가 안겼습니다. 두 사람은 기쁜 듯이 뺨을 비볐습니다.

    ‘저렇게 뺨을 맞대면 어떤 기분일까?’

    율모기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습니다. 알을 품으면 사람이 서로 볼을 부빌 때의 느낌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한 번 해 볼까?’

    율모기는 바로 앞에 놓인 돌에 머리를 갖다 댔습니다. 슬슬 문질러 보았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건 돌이라서 그럴 거야. 내 알을 쓰다듬으면 다른 느낌이겠지.’

    그때 으앙! 소리가 들렸습니다. 율모기는 머리를 쳐들었습니다.

    꽁지머리 곁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몸도 하얗고 옷도 하얀 사람은 환히 웃고 있었지만 작은 사람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다니, 이상하네…….’

    율모기가 갸웃갸웃 고개를 젓고 있을 때, 작은 사람이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에 혼쭐이 난 듯 허둥지둥 달려가는 작은 사람의 뒷모습이 너무나 우스웠습니다.

    ‘고거 쌤통이다.’

    율모기는 작은 사람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쏙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사람이 무서워서 달아난 하얀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얼굴이 구름처럼 하얀데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서 있는 건지 공중에 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가벼워서 사람이 아니라 귀신처럼 보였습니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마르고 약해 빠졌담.’

    율모기는 혀를 끌끌 차주고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습니다.

     

    하얀 사람은 그렇게 외딴집에 왔습니다.

    일요일에만 나타나던 꽁지머리는 매일 아침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왔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마당을 풀을 뽑거나 돌을 골랐습니다.

    꽃들에게 물을 주거나 맨손체조를 하기도 했고요, 집 주위를 왔다갔다하면서 살피기도 했습니다.

    외딴집에 꽁지머리와 하얀 사람이 살게 되자 율모기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율모기는 꽁지머리와 달리 하얀 사람은 그다지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꽁지머리가 집을 떠나고 나면 하얀 사람은 방문을 열어 놓고 마당을 내다보거나, 좁은 마루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수지까지 산책을 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기도 하면 하얀 사람은 빙긋 웃었습니다. 하얀 사람은 율모기가 싫지도, 무섭지도 않은 듯했습니다.

    하얀 사람은 개구리와 벌레들이 마당과 꽃밭을 왔다갔다하는 것도 내버려두었습니다.

    나비나 새들이 오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습니다.

    율모기는 마음 놓고 쥐와 개구리를 사냥했습니다. 그러다 꽁지머리가 돌아오거나, 작은 사람이 놀러 와서 마당을 뛰어다니면 재빨리 숨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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