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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웹진도요가 선정한 소설>사라지는 것들_ 정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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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것들

                                                

                                                                 정 찬


    1.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나는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5시 30분 장터목 대피소를 나와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종주 마지막 날이었다.
    3월 하순 모 문학관에서 전화가 왔다. 4월 18일 작고 문인 추모 행사에 소설가 박영도를 선정했다면서, 그와의 추억을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문학선배이기도 한 그와는 여섯 살 차이이지만 안산 예술인아파트에서 이웃으로 6년 가까이 살면서 추억이 많았다. 
    문학관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박 선배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8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가 그의 마지막 나이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동안 그를 잊고 있었다는 자책과 함께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로 다가왔다. 추모 행사 나흘을 앞두고 행한 지리산 종주는 나의 늙음을 스스로 위무하는 의식이었다. 7시 경 천왕봉에서 산하를 내려다보며 지나간 삶의 시간들을 되돌아다보았다. 한없이 길게 구부러지며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그림자 속에 더러 아름다운 색들이 섞여 있음을 애써 믿고 싶었다.
    세월호 침몰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천왕봉을 내려와 치밭목 대피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10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어떤 등산객이 알려주었다. 제주도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그 여객선에 타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핸드폰을 꺼내 단원고를 검색했다. 예술인아파트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단원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화가 김홍도의 호인데, 안산과 연고가 있는 그를 기려 안산시는 단원미술관을 만들었고, 단원미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안산으로 이사한 것은 1986년 초봄이었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추진하여 건설한 예술인아파트에는 작가 배우 가수 화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예술인들이 살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입주한 박 선배는 나를 무척 반겼다. 그는 술꾼이었다. 그에게 술이 가장 맛있을 때가 소설을 흡족히 쓴 날이었다.
    “글을 쓰면서 문득문득 세계의 핵심으로 뛰어든 나를 깨닫게 돼. 고요했던 세계가, 너무나 고요해 죽은 듯이 보였던 세계가 싱싱한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여. 그 세계를 향해 그물을 던지면, 그물은 작살처럼 빠르게 날아가 펄떡이는 물고기를 정확하게 포획해. 그 순간순간들의 황홀에 취해 비틀거리며 작업실을 나오면 조금 전까지 새롭게 조립된 사물과 언어의 생명들이 너무나 힘차고 싱싱해서 금방이라도 머릿속을 박차고 나와 하늘로 치닫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해져. 아, 그뿐 아니야! 그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으로 심장이 달근거려 아무 데나 쓰러지고 싶은 지경이 돼. 그러면 소금에 푸성귀 잠재우듯 그것들을 한숨 푹 절여 놓아야 하지.”
    그가 술집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런 황홀이 없는 날이면 자신은 죽은 인간이거나 뒤쫓기는 도망자가 된다고 했다. 그런 날에도 술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도망갈 데라곤 거기밖에 없으니까.
    우리가 안산을 떠나 서울 속으로 흩어진 것은 90년대 초였다. 그가 먼저 안산을 떠났다. 서울의 시간은 안개와 들판과 협궤열차와 포구와 갯벌을 품고 있는 안산의 시간과는 너무 달랐다. 서울에서는 안산에서처럼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서울은 넓고 할 일이 많았다. 우리는 드문드문 만났다.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는데, 안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서걱거림과 미묘한 낯설음에 당황하곤 했다. 문학이든 세상이든 90년대의 그 수상쩍고 불길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마음이 갈라지면서 소리 없이 나이를 먹어갔다. 세월은 왜 그에게 유달리 가혹했을까.
    박 선배가 위암 수술을 받은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수술 결과가 좋았다고 들었다. 의사는 그에게 술과 담배를 끊고 섭생을 잘하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술을 끊지 못했다. 술을 못 끊는 이유가 뭐냐는 질책어린 나의 물음에 그놈을 견디려면 술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놈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놈이라고 나직이 말했다.
    박 선배가 세상을 떠난 것은 59세 되던 2006년 8월이었다. 자신의 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던 그가 숨을 거두기 나흘 전 부인을 통해 몇몇 사람들을 불렀다. 당시 원주에 머물고 있던 나는 그가 입원해 있는 일산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종마처럼 튼튼했던 그의 몸이 참혹하게 말라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커다란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그의 손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영원히 떠날 그에 대한 애틋함의 표현이 그런 서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조금 후 그는 아프다고 힘겹게 말했다. 놀란 나는 얼른 손을 뗐다. 어린 아이 살결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쓰다듬었음에도 그는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육신이 통증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병실을 찾은 기자에게 “소설이 암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2.
    지리산에서 내려와 서울행 버스를 탄 것은 오후 네 시 넘어서였다. 혼곤한 잠결 속에서 지리산의 영상이 실루엣으로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실루엣과 실루엣 사이로 박 선배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슬픈 얼굴이었다. 슬픔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렸다.
    “기차를 타지 않으면 타라스콩에 갈 수 없듯이 죽지 않으면 저 별에 갈 수 없다네.”
    슬픈 얼굴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타라스콩……별……나는 아주 오래된 듯한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이상했다. 그 말을 한 이는 박 선배가 아니었다. 형조였다. 슬픈 얼굴을 다시 보았다. 형조가 맞았다. 형조를 박 선배로 착각했는지, 그 사이 박 선배가 사라지고 형조가 나타났는지, 박 선배가 형조로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형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듯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설렜다. 안산 사리포구 가게의 노천 탁자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눈앞은 잿빛 갯벌이었다. 형조가 고흐의 그 말을 했을 때 고적한 벌판을 느리게 지나가는 협궤열차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타라스콩이 어디지?”
    나는 타라스콩으로 향하는 협궤열차를 상상하며 물었다.
    “화가가 걸어가는 곳.”
    “화가가 걸어가는 곳이라니?”
    내가 멀뚱히 형조를 바라보자 그는 빙긋 웃으며 탁자에 둔 책을 펼치더니 도판 하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밀짚모자를 쓴 남루한 남자가 화구를 짊어지고 시골길을 걸어가는 그림이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질질 끌고 있는 듯한 남자의 모습이 쓸쓸했다. 
    “이거……고흐의 그림 같은데.”
    나의 말에 형조는 미소를 지었다. 
    “맞아. 제목도 맞춰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 위의 화가.”
    형조는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그러니까 타라스콩은 저쪽에 있지. 갯벌 저 너머…….”
    형조는 몽롱한 눈빛으로 갯벌을 보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때가 86년 가을이었으니 내가 살아온 생의 반 가까이 흘러간 것이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사리포구의 사라짐이었다.
    사리포구가 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수가 사라진 것은 본 적이 있다. 예술인아파트 뒤쪽 들판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일몰의 시간에 그곳을 자주 찾은 것은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있는 물의 풍경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낯섦이었다. 어떤 일로 보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는데 돌아와 보니 호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벌건 흙들이 쌓여 들판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아파트가 세워진다고 했다.
    사리포구가 사라진 것은 시화방조제 완공과 함께 고잔 신도시가 형성되면서였다. 포구는 아파트가 덮어버렸다. 시화방조제는 1994년에 완공되었고, 고잔 신도시는 1998년에 생겨났다. 서울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동안 사리포구가 사라진 것이었다. 사라진 것은 사리포구만이 아니었다. 협궤열차도, 철로변 너머 펼쳐지던 들판도, 드넓은 갯벌도 다 사라졌다.
    침몰된 세월호의 모습을 TV를 통해 처음 본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였다. 저녁 6시쯤이었다. 보도되는 내용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치밭목 대피소에서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침몰 지점이 진도 팽목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구조되리라 생각했다. 하산하는 동안 누군가로부터 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 침몰한 배안에 300명이 넘는 승객이 타고 있다고 했다. 단원고 학생만 250명이 넘는다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까맣고 모르고 있었다. 그 학생들 가운데 형조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3.
    형조를 처음 만난 것은 86년 5월이었다. 집을 나와 사리포구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봄의 적막 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타 선율이 감미로웠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언덕 위 오래된 건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천주교 공소였다가 버려진, 두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성당이었다. 기타를 연주한 이는 그곳에 화실을 차린 형조였다.
    성당 문은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물감 냄새가 훅 끼쳤다. 형조는 창과 떨어진 어둑한 곳에서 낯선 사람이 들어온 줄 모른 채 기타 연주에 빠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가 몹시 길었다. 살짝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락도 없이 들어온 이유를 어눌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선생은…….”
    그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입장권을 사지 않고 들어온 관객이네요.”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그의 말에 어색한 감정이 스르르 사라졌다.
    “매표소가 없어서…….”
    나의 말에 그의 눈이 반짝였다.
    “흠,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입장권을 지금 팔면 안 될까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파세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장권은 소주 다섯 병입니다.”
    “소주는 안 갖고 왔는데…….”
    그는 빙긋 웃었다.
    “가게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두 병을 보태 소주 일곱 병을 들고 성당에 들어왔을 때 그는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멸치 육수에 양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끓인 감자국이었다. 소주는 달았고 감자국은 맛있었다. 취기가 오르자 우리는 나이가 비슷한 것을 이유로 말을 놓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어느덧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소주를 보고 있으면…….”
    형조는 잔에 가득 찬 소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술을 하고 싶어져.”
    “무슨 마술?”
    “압생트로 변화시키는 마술.”
    “고흐가 되고 싶어?”
    “고흐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했어. 일상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던 거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보이는 것을 뚫어야 하겠지. 보려고 하는 것을 막고 있으니까. 사물과 풍경, 인간과 역사를 뚫는다는 것이 나에겐 아득해.”
    그의 눈빛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고흐가 자살한 것은 필연이었을까?”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막대기와 이젤과 캔버스와 그 밖의 다른 그림 도구들을 잔뜩 짊어진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이 자신이라고 했어. 그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의 사내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곤 했어. 목적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걸음을 멈추어야겠지. 하지만 사내는 멈출 수 없었어. 머물 곳이 없었으니…….”
    형조가 사리포구 언덕의 작은 성당을 발견한 것은 85년 10월이었다. 당시 그는 안양의 낡은 연립주택 지하에 화실을 꾸리고 살았는데, 주인으로부터 나가 달라는 독촉을 받고 있었다. 월세가 자주 밀리는데다 방을 화실로 사용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형조는 어두컴컴한 지하방을 나와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갈 데가 없었다. 3년 동안 광부 생활로 모은 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정류소를 지나다 버스 창에 사리포구라는 글자를 우연히 본 그는 훌쩍 올라탔다. 안양을 벗어난 버스는 흙길을 굽이굽이 돌더니 갯내음이 물씬 나는 작은 어촌에 멈추었다. 포구는 지붕이 낮고 남루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 끝에 있었다. 가게에서 소주와 마른 새우를 한 움큼 사서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올랐다. 처음에는 성당을 보지 못했다. 소주 두병을 마시고 몽롱한 취기 속에서 언덕을 거닐다 성당을 보았다. 건물 안을 살피다가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떠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양 지하의 화실이 포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화실로 마술처럼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주 다섯 병을 비웠을 때 바깥이 캄캄해져 있었다. 두 병은 남겨 놓았다. 그동안 형조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만난 이와 그토록 많이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휘청휘청 화실을 나왔다. 하늘에는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무처럼 서서 별자리를 찾던 형조는 다시 화실로 들어가더니 기타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사리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풀밭에 앉았다. 포구에서 드문드문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별빛처럼 아련했다. 형조의 기타 소리는 희미한 불빛과 뒤섞이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의 풍경이 청명한 꿈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리포구과 함께 형조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4.
    세월호에 형조의 딸이 탄 사실을 안 것은 박 선배를 추모하는 행사장에서였다. 그의 문학 이력 소개와 작품 세계에 대한 문학평론가의 강연에 이어 어느덧 청년이 된 박 선배 아들과 함께 그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아들은 조심스러우면서 슬프게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을 더듬었다. 나도 그랬다. 행사가 끝난 후 오랜만에 만난 박 선배의 부인과 담소하고 있는데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하면서 옛날 형조의 성당 작업실에서 나와 박 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어색하게 웃자 그녀는 친구인 차명아를 따라 거기에 갔었다고 했다.
    차명아는 형조의 연인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형조를 만난 지 한 달이 조금 못되어서였다. 하늘이 유난히 높아 보이는 6월이었다. 사리포구 언덕을 오르다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 여자가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해맑았고, 수수한 옷차림인데도 자태가 빛났다. 형조를 만나러 왔는지, 산보객인지 알 수 없었다. 성당 문은 닫혀 있었다. 물어볼까 생각하면서도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혹시 형조 씨 친구분이세요?”
    그녀의 말에 반색하며 내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환히 웃었다.
    “형조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전 차명아예요. 지금 형조 씨가 없네요.”
    형조의 작업실에는 전화가 없어 그를 만나려면 무턱대고 와야 했다. 우리는 10여분쯤 언덕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형조를 기다리다 사리포구로 내려갔다. 그가 언제 올지 모르는데 처음 본 여자와 막연히 기다린다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내가 사리 포구를 구경시켜 드리겠다고 하자 그녀는 즐겁게 받아들였다. 마침 김장용 젓새우 철이라 포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새우를 파는 사람, 새우젓용 소금을 파는 사람, 새우를 담을 용기를 가져오지 않은 이들을 상대로 비닐 비료부대를 파는 사람……구멍가게 아주머니, 튀김 파는 아저씨,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내리는 뱃사람……그런 풍경들을 그녀는 생기 어린 표정으로 보았다. 한 시간 후 언덕으로 올라갔는데 성당 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가 함께 들어서자 형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차명아의 친구라는 여자를 유심히 보았다. 이름이 김윤희라고 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그때 박 선생님은 형조 씨 그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광부를 그린 그림말이에요.”
    “아, 그 그림!”
    형조의 광부 그림이 떠오르면서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형조의 그 그림을 본 것은 박 선배 때문이었다. 9월이었다. 날씨가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박 선배와 함께 사리 포구에서 대낮부터 소주를 마셨다.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난 목수 재질이 아닌 것 같아.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야.”
    박 선배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얼굴을 꺼멓게 덮고 있었다. 그는 소설 쓰는 일을 집짓는 일로 비유하곤 했다.
    “온몸이 썩어 들어가면 무얼 할꼬…….”
    소주잔을 탁 놓으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내 몸 안에 뭐가 들어있는 줄 알아? 시체 냄새를 풍기는 어머니, 객사한 큰형과 산송장으로 버려진 작은형의 시커먼 몸뚱이가 들어 있어. 그것들을 떼어내려고 온갖 지랄발광을 했지. 그 지랄발광의 결과가 뭐였게? 문학이었어. 소설은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야. 살기 위해서 했어. 아무 쓰레기통에다 기꺼이 버릴 수 있었던 목숨이었으니까. 문학만은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학대받고 잠들지 못하는 내 영혼을 쓰다듬어 잠재워 줄 것이라 믿었어. 그런데, 오 마이 갓! 언젠가부터 그들의 몸뚱이들을 팔아먹고 있더라고. 그들과 악연으로 뒤엉켜 지옥의 향연을 펼쳤던 내 삶을, 그 상처를 문학이란 이름으로 팔아먹고 있었어. 어떻게 그런 짓을……. 난 작가로서 직무유기죄로 마땅히 처형당해야 했어. 첩첩산골에서 땅을 갈고 짐승을 키우며 살았어야 했는데…….”
    나는 듣고만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한들 그를 위로할 수 없음을, 그런 자학의 말 자체가 그에게 위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 선배가 형조의 작업실을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에곤 쉴레를 이야기하면서였다. 화가를 꿈꾸었던 그는 가난 때문에 꿈을 접고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문학 속으로 떠밀려갔다. 박 선배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에곤 쉴레였다. 그의 자화상에는 우주가 들어 있다고 했다. 간혹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곤 했는데, 드로잉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그가 형조의 작업실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형조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박 선배와의 술자리에 형조를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수줍어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해져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형조는 낯선 사람 앞에서 얼굴을 몹시 가렸다. 나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보여준 유쾌한 모습은 지극히 예외였다. 당시 나는 그가 연주하는 기타 선율의 매혹에 끌려 그의 작업실로 들어온 것이었으니 그런 예외가 발생했을 것이다.
    박 선배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언덕으로 올라가 성당 문을 두드렸지만 걱정한대로 형조의 태도가 어색했다. 하지만 박 선배가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뭉크의 그림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에곤 쉴레와 고흐로 이어지면서 딱딱했던 형조의 얼굴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박 선배의 가슴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열정적인 목소리와 진지한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림 이야기가 멈춘 것은 형조가 손님을 마중하러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였다.
    “누가 와?”
    “명아. 친구와 함께.”
    “우린 가야겠네.”
    “글쎄…….”
    형조는 말끝을 흐리며 나의 표정을 살폈다.  
    “제가 품고 있는 소망 가운데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박 선배가 형조를 보며 물었다.  
    “글쎄요…….”
    “화가의 연인과 댄스를 추는 겁니다.”
    박 선배는 간혹 예상을 뛰어넘는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던 형조가 빙그레 웃었다.
    “춤을 추시게 되면 제가 춤곡을 연주해드리죠.”
    형조의 말에 박 선배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인사했다. 형조는 장도 보아야 하니 조금 늦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나갔다. 박 선배는 저 친구 괜찮네, 하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실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부른 것은 소파에서 화집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형조의 작업실 안쪽에 그림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박 선배가 그 안에서 캔버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그림……. 뭔가 있어. 아주 강렬해.”
    그는 광부를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광부의 얼굴은 석탄 가루의 검은 빛에 거의 묻혀 있었는데, 검은 빛 사이로 뻥 뚫린 구멍처럼 보이는 두 눈이 허공에 떠 있는 한 마리 새를 보고 있었다.
    “저 새는 카나리아겠군.”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윤곽이 너무 희미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인데 무슨 까닭으로 카나리아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갱도에 환기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카나리아는 공기 측정기 역할을 했어. 메탄이나 일산화탄소에 가장 민감한 새가 카나리아거든.”
    “아, 그렇군요. 하지만 저 새는…….”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새를 응시했다.
    “날개를 펼치고는 있으나 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를 둘러싸고 있는 푸르스름한 빛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져. 그래서인지 박제처럼 보이기도 해. 생명이 다 빠져나간.”
    “비관적인 그림이네요.”
    “비관의 밀도가 굉장해. 표현의 밀도가 굉장하다는 거지. 새가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져. 광부의 눈에 서린 절망의 표현도 기가 막혀. 에너지가 대단해. 당신이 저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그런데 우리 지금 작품을 훔쳐보는 게 아니에요?”
    “훔쳐보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형조가 싫어할 거예요. 그는 작품을 잘 안 보여주어요. 이 방의 문은 항상 닫혀 있었어요.”
    “그러니 훔쳐서라도 봐야지.”
    “선배가 문 열었죠?”
    “응.”
    “그만 나가요. 지금이라도 불쑥 들어오면 어떡해요.”
    “알았어, 이 샌님아. 그런데 왜 광부를 그렸을까?”
    “형조는 삼년 동안 광부 생활을 했어요.”
    “리얼리스트네.”
    “서른 살 이후로는 어떤 밥벌이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기 위해 스물일곱 살 때 탄광촌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흠, 그래…… 탄광촌에는 한때 동네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까지 생겨났으니. 그런데 말이야…….”
    그는 뭐라고 말할 듯하다가 침묵하면서 시선을 그림에 고정시켰다. 그림 속으로 들어갈 듯한 표정이었다. 형조가 차명아 김윤희와 함께 들어온 것은 우리가 캔버스에 천을 다시 씌우고 작은 방에서 나온 지 10여분 후였다. 두 여자가 차린 저녁식탁은 푸짐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즐겼다. 박 선배가 차명아를 미스 스윙으로 부른 것은 술을 꽤 마신 후였다.
    “제가 왜 미스 스윙이에요?”
    차명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씩 웃었다.  
    “제가 그대와 함께 스윙 댄스를 추어야 하니까요.”
    “스윙 댄스라면…….”
    “스윙 재즈에 맞춰 추는 유쾌한 춤이지요.”
    “그 춤을 왜 함께 추어야 하죠?”
    “형조 씨가 스윙 재즈를 연주해주기로 했으니까요.”
    “정말이에요?”
    차명아의 물음에 형조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추어야겠네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스윙 댄스를 할 줄 모르거든요. 음, 스윙 댄스를 배워야겠네. 기다리세요. 제 몸 안으로 스윙 댄스가 자연스레 스며들어오면 연락드릴게요.”
    “그때가 언제쯤일까요?”
    “모르죠. 열심히 배워 볼게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미스 스윙…….”
     박 선배는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전 미스 스윙을 앞으로 더 좋아할 것 같아요. 형조 씨 그림에 반했거든요.”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소설이든 그림이든 좋은 작품을 보면 전 질투심을 느껴요. 그런데 오늘 형조 씨 그림 앞에서 맹렬한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형조 씨가 없을 때 훔쳐봤어요. 이 친구가 형조 씨를 하도 좋아하길래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어요. 난 얼굴만으로는 그 사람 모르겠대요. 거죽을 보고 안다는 것도 웃기죠. 작품은 다르죠. 거죽이 아니니까. 그런데 형조 씨가 작품을 잘 안 보여준다고 하니 훔쳐서라도 봐야죠.”
    형조는 침묵했다.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광부의 얼굴이 캔버스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리얼한데도 어느 순간 유령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인물의 얼굴이 삶과 죽음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우리의 삶이 그렇지요. 산다는 것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행위이니까요. 지금 우리 문학이 리얼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형조 씨 그림을 보면서 이게 진정한 리얼리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삶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삶을 꿰뚫고 삶의 저쪽까지 보아야 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 소설의 기형적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치열하게 격투하여 끝까지 가야 하는데…… 생명이 깎인다는 느낌만 들고…… 내 몸이 교활한 건지…… 하긴 상처까지  팔아먹었으니…….”
    그날 밤 박 선배는 취기 속에서 홀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춤과 노래는 슬프고 애잔했다. 형조는 우리를 배웅하면서 박 선배를 다정히 껴안았다.

     

     

    5.
    김윤희가 세월호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차명아의 안부를 물었을 때였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다. 거의 잊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차명아의 딸이 단원고 2학년이며 지금 세월호에 타고 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형조라는 말에는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형조의 딸이 있는 줄조차 몰랐다. 형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차명아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형조의 이른 죽음은 그의 광부 그림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그림이 민중화가들의 공동 작품전에 전시된 것은 86년 10월이었다. 형조는 민중화가들과 관계를 맺거나 함께 활동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공동작품전에 참여한 것은 형조의 광부 그림을 본 어떤 미술평론가가 적극적으로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형조가 그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이의 권유를 뿌리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형조가 정보기관에 연행된 것은 전시회가 끝난 지 열흘이 채 못 된 11월 중순이었다. 사흘 후 풀려났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차명아도 몰랐다. 그녀가 형조 작업실을 찾은 것은 형조가 풀려난 지 이틀 후였다.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형조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는데, 안색이 깜짝 놀랄 정도로 창백했다. 어디가 아프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몸이 쇠붙이에 의해 함부로 파헤쳐진 듯한 느낌이라고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의 목소리와 너무 달라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왜 몸이 그렇게 아프냐고 물었더니 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거기에는 문이 없었다고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난감해하는 차명아를 멍하니 바라보다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스웨터와 셔츠에 이어 내의를 벗는 순간 그녀는 목안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상반신 전체가 피멍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 형조를 포함해 다섯 명이 연행되었는데, 형조가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정보기관의 대령이 형조의 그림을 손가락질 하며 “이 새끼, 사북 빨갱이 광부를 그렸네” 하고 씹어뱉듯이 말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날 이후 형조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고통을 술로 잊으려는 듯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과 연관된 것은 손조차 대지 않았다. 낭인처럼 떠돌았다. 형조가 말하기를, 정처 없이 떠돌다 머물고 싶은 곳이 있으면 걸음을 멈춘다고 했다. 거기가 산골의 폐가이기도 했고, 변두리 항구이기도 했고, 염전이기도 했고, 수도원의 외딴 방이기도 했다.  
    그런 형조를 향한 차명아의 사랑은 놀라웠다. 근무학교를 서울에서 안산으로 옮긴 후 사리포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형조가 없어도 성당 작업실청소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떠돌다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면 형조를 따뜻이 맞았다. 내 눈에는 객지를 떠돌다 집에 들른 아들을 맞는 어머니처럼 비쳤다. 형조가 낭인의 모습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데에는 차명아의 역할이 컸다. 그들이 결혼한 것은 박 선배가 서울로 이사하기 한 달 전인 91년 10월이었다. 박 선배는 피로연에 들어온 차명아에게 “스윙 댄스는 언제 출 거요?” 하고 물었는데, 그녀는 “지금  아주 잘 출 것 같은데 신랑이 스윙 재즈를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화사하게 웃었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차명아의 집이었지만 형조의 작업실은 여전히 사리포구 언덕 성당이었다. 이듬해 봄 나는 서울로 이사했다.
    1992년 10월, 형조의 첫 개인 전시회가 서울 인사동 갤러리에서 열렸다. 형조의 광부 그림을 높이 평가한 미술평론가가 주선한 전시회였다. 당시 형조는 유망한 신진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축하객들 앞에서 형조는 무척 수줍어했다. 그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전시 작품 가운데 광부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풍경화가 의외로 많았는데, 어둡고 아련했다. 선창가와 포구, 염전과 수도원 풍경 등은 그가 낭인처럼 떠돌 때 머물던 곳이 아닌가, 했다. 그래서인지 검은 진흙 속에 잠겨 있는 듯한 풍경의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사람의 그림자가 형조의 흔적처럼 보였다. 풍경과 유리되어 풍경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그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박 선배는 형조의 그림에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이 서려 있다고 하면서, 가슴에 죽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박 선배가 어떤 느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앞날을 예시한 말이 되어버렸다.
    형조가 간경화증으로 입원한 것은 전시회를 마친 지 한 달이 채 안되어서였다. 검사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의사는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 술을 끊은 형조는 차명아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서 병원 치료를 성실히 받았다. 93년 봄 박 선배와 함께 형조를 보러 안산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형조는 매일 출근하듯이 사리포구 언덕 작업실로 간다고 했다. 집에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견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차린 술상이긴 했으나 형조는 술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박 선배는 “그 친구, 의지가 대단해!” 하며 감탄하더니 “술을 안 먹으면 그림을 어떻게 그리누……”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조가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성당 건물이 철거되면서였다. 1994년 시화방조제가 완공되자 수자원개발공사는 사리포구를 포함하여 고잔 들판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리포구 언덕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그 폐허가 어떤 심리의 회로를 거쳐 8년 전 고문기술자에 의해 파헤쳐진 자신의 육신과 동일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차명아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형조의 살을 파헤치는 쇠붙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형조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95년 12월이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고, 눈이 흩날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새였다. 새는 하늘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다처럼 보이기도 한 푸른 공간을 날고 있었는데,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를 품은 날개가 눈부셨다.

     

     

    6.
    김윤희의 말에 따르면 차명아가 딸의 마지막 문자를 받은 것은 4월 16일 오전 10시 7분이었다. 그 내용이 “엄마 걱정하지 마^^ 난 아빠의 그림 속 새가 되어서라도 엄마한테 갈 거니까!”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마리 새가 떠올랐다. 형조의 광부 그림 속의 새와 마지막 그림 속의 새였다. 아이가 아빠의 그림을 좋아하는 모양이라고 내가 말하자 김윤희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자신의 방에 아빠의 마지막 그림을 걸어 놓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말했다.
    형조가 새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숨을 거두기 35일 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 파괴적으로 술을 마셨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차명아가 못 마시게 하면 나가서 마셨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차명아의 말로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돌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술도 멀리 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닌가 하는. 당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윤희의 말을 듣다 보니 형조의 변화가 차명아의 임신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월을 헤아려 보니 딸이 태어난 해와 맞아떨어졌다. 그런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밝혔더니 김윤희는 맞다고 하면서, 차명아가 그 이야기를 한 것은 딸을 낳고나서였다고 말했다. 사리포구 언덕에서 차명아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그녀가 잘 견디고 있느냐고 물었다.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서 김윤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득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깊이의 허공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명아가 앞으로 겪어야 할 고통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김윤희는 내일 차명아를 만나러 진도로 간다고 했다. 그녀 곁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사 후 저녁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함께 가자고 했더니 김윤희는 내일 진도에 가려면 준비할 것들이 많다고 했다. 헤어지기 전 그녀의 전화번호를 내 핸드폰에 입력했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문학관 관계자들과 박 선배의 소설세계를 강연했던 문학평론가, 박 선배의 부인과 아들이 참석했다. 반주로 소주와 맥주가 식탁에 올라왔다. 행사의 분위기과 함께 박 선배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두런두런 오고갔다. 문학평론가는 박 선배의 마지막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전의 소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고 하면서, 작가의 변화가 느껴져 앞으로의 소설이 기대되었는데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박 선배의 마지막 소설이 발표된 것은 2002년 9월이었다. 암 수술 받기 7개월 전이었으니 자신의 몸에 죽음의 세포가 자라고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삶 혹은 운명과 화해하려는구나, 생각했다. 시체 냄새 풍기는 어머니, 객사한 큰형과 산송장으로 버려진 작은형의 시커먼 몸뚱이를 자신에게서 끌어내어 소설의 인물들 속으로 밀어넣은 것은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임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이 죽음과 싸우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별실에서 나왔을 때 식당 홀 벽에 걸린 TV 화면에 ‘여객선 침몰 특보, 세월호 선체 완전 침수’라는 자막이 보였다.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일행을 따라 식당을 나왔다. 박 선배 부인은 아들 차로 귀가한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어두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형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내 눈이 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리포구 언덕에서 형조와 함께 보았던 별들이 아른거리면서 형조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나무처럼 서서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날개를 활짝 펼쳐 별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한 마리 새를 찾고 싶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은 낯설지 않았다. 박 선배였다. 그는 씩 웃으며 타라고 했다. 그의 옆에는 그가 몰고 다녔던 낡은 지프가 있었다.
    “지금 당장 미스 스윙을 보러 가야지!”
    목소리가 쾌활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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