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보이는 詩_최영철
  • ▶ <세상이 보이는 시>억새꽃_이기철





  • 억새꽃


                                
                                              이 기 철




    이제 곧 주황의 저녁이 오리라
    경사의 산기슭
    주황색 저녁 거실에 억새꽃이 펄럭이리라
    나는 억새꽃밭에 윗도리를 벗어
    그 위에 너를 반듯하게 눕히리라
    오해 마라, 나는 너를 안지 않으리라
    너의 도화지 같은 흰 블라우스 자락에 나는
    펄럭이는 억새꽃을 그려 넣으리라
    노을이 억새를 주황으로 물들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회색의 억새꽃만을 그리리라
    네 블라우스 화지에 내가 그린 속마음이
    내가 너에게 줄 백 가지 마음의 그림이 되리니
    그때 별들이 내려와서 아기처럼
    종알종알 우리 사랑의 언어로 속삭이면
    좋겠지
    억새꽃 사랑으로 네가 내 말을 듣고 있을 때
    시월의 더 큰 가슴이 우리를 덮을 때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서정시학)


    이기철: 경남 거창 생.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청산행』『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외.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 

      어느새 가을이 깊다. 스산한 물결로 흔들리는 가을 산의 억새는 푸른 하늘에 무엇인가를 그려두려는 애타는 갈구처럼 보인다. 보고 싶다고 썼다 지우고 사랑한다고 썼다 지운다. 모두 잠든 가을 밤 홀로 깨어 서걱서걱 못다 쓴 편지를 적는다. 그렇게  ‘내가 너에게 줄 백 가지 마음의 그림’이 저 ‘펄럭이는 억새꽃’ 속에 있다. 출렁이는 은빛 파도 같기도 하고 ‘별들이 내려와서 아기처럼 종알종알’ 속삭이는 사랑의 군무 같기도 하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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