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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요문학무크> 대담: 우리가 꿈꾸는 멋진 신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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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꿈꾸는 멋진 신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강동수 (소설가, 경성대 교수 | 이윤택 (시인, 연극연출가)

     

     

     

     

     

     

     

    2017516

    부산 일광 가마골소극장

     

     

    "최근 우리 사회는 세월호 사고와 촛불집회, 현직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숨가쁜 시련과 변화의 과정을 경험했다. 그것이 남긴 사회사적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를 진단해 본다. "

     

     

     

    강동수 오늘 시인이자 연극연출가인 이윤택 선생님과 대화의 자리를 갖게 된 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 어떻게 이 시대를 인식하고 대응해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함입니다. 지난해 가을 이른바 촛불집회로 시작된 시민들의 저항과 변혁을 위한 참여의 결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그리고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선출로 요약됩니다. 그 같은 정치적 흐름 속에서 지금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적 현상, 그리고 그 현상이 드러내는 본질적인 측면을 같이 이야기를 해보고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를 예측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이 같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해 문화예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생각을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이 선생님도 잘 아시겠지만 지난해 10월 이래 지금 한국사회는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이 거대한 저항의 물결을 일으켜 부패한 정권과 수구적인 지배세력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의 질서를 다시 고쳐 세우는 놀라운 광경의 연속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같은 시민 궐기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이러한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광장에서 다양한 새로운 문화적 움직임을 태동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광장은 새로운 시대의 문화 형식을 태동하는 장이 시작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습니다.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지난 가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신 선생님의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한국사회의 새로운 흐름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한다고 할 때, 어떠한 틀로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화두를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촛불 그 이후, 시민 명예혁명 시대의 도래

     

    이윤택 촛불 그 이후 지금 여기가 어떠한 사회사적 지점인가. 이것을 먼저 규명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촛불 그 이후 지금 이 시대는 시민의 명예혁명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과연 우리 한국 사회에 시민혁명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텐데 저는 분명히 있었다고 봅니다. 19604.19가 시민혁명이었고, 지금은 그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시민혁명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4.19 시민혁명과 지금 시민혁명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이 점을 먼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19604.19 시민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었습니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해체가 이루어진 것이고요, 학생과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특히 학생혁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4.19 혁명은 총탄과 폭력과 저항의 피를 부르는 폭력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식인들의 입장은 최인훈 선생의 소설 광장에 아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최인훈 선생의 광장은 강동수 선생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지식인의 회색지대, 이곳도 저곳도 선택하지 않는 어떤 제 3의 지대를 선택해야 하는, 지식인의 고민과 회의 같은 게 드러납니다. 왜 지식인이 광장에서 설 땅이 없었는가? 왜 제 3지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저는 성숙한 시민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식인이 설 땅이 없었다고 봅니다. 그 때문에 지식인의 의식이 일상으로 스며들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관념적 지식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이지요, 실제 그 뒤에 이어진 문학으로 봐도 백낙청의 시민문학론 같은 경우에는 관념적인 한계가 드러납니다. 저는 외람되지만 백낙청의 시민문학론에는 대중이 없다, 일상이 없다는 비판적 입장이었습니다. 자기반성적인 지식인의 관념적인 문학론이었다는 거지요.

    4.19 혁명의 특징은 지식인과 학생의 관념적인, 그러면서 폭력 혁명 성격을 띤 의거였습니다. 독재 부패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그 정부가 시민사회의 정신적 물적 기반, 혹은 도덕적 기반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곧 반동의 역사를 맞이하지 않습니까? 19615.16 군사혁명이란 이름으로 다시 반동의 군부독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반동적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그 이후 시민사회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시민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민중민족주의, 혹은 민주화 운동권이라 일컫는 진영논리가 저항의 대세를 이끌어 갑니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군부문화와 운동권문화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의 시대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 사이 시민들은 무얼 했는가? 시민들은 소시민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파편화된 시민, 의식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시민, 현실추수적인 시민성의 지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시민계층이 자체 독자적인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군부 문화와 운동권 문화라는 진영권 논리 사이에서 파편화된 개인의 모습으로 존재해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근 50년 이상 이어진 한국사회의 성격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3세계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우리뿐 아니고,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의식,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반식민주의적 저항. 이러한 제3세계적인 상황을 우리는 지나쳐왔다는 것입니다. 이 제3세계적인 상황이라는 의미 속에는 열강의 제국주의적인 개입과 종속이라는 국제 정세적인 상황이 맞물려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에 남북 분단문제까지 놓여 있습니다. 주위 미· · · 일 열강의 서로 다른 입장과 맞물려 우리는 극심한 이분법적 내부 갈등을 겪어온 것이지요.

     

    강동수 그러고 보면, ‘광장이란 의미도 다의적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이승만 독재의 퇴장과 함께 최인훈의 광장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지 않았습니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이 세계 체재를 재편하면서 한반도에까지 몰아온 냉전의 음습한 위협이 한반도에 짙은 안개처럼 깔린 때가 50년대였지요. 분단과 전쟁이 몰고 온, 이데올로기적 억압이 밀실에서 자행된 것도 그때였고요. 최인훈의 광장4.19라는 새로운 정치 지형의 변화를 타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자는 외침이었지만 결국은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꺾이지 않았습니까. 한반도의 분단이란 것이 강대국의 세계 분할의 하부구조였다, 그래서 분단 구조의 극복을 위해선 결국은 미·소의 강대한 세력권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민족 내부의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철저한 인식에 미치지 못한, 나이브한 세계관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겠습니다만. 어쨌든, 선생님 말씀대로 이른바 개발독재 논리가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뿌리내려온 것이 그간의 사정일 테지요. 그런데, 이번에 촛불집회가 보여준 광장21세기의 진정한 태동을 보여준 사건이랄까, 시민이 주체가 된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의 전주곡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번 촛불집회에서 광장의 의미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윤택 이번에 일어난 촛불집회를 두고 실제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이나 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경이로운 기적이라고 합니다. 지금 21세기 지구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시민의 엄청난 물결로 광장이 뒤덮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 21세기는 더욱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어떤 공동적인 시선, 공동적인 행동을 기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히 미국이나 일본은 더욱 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곳에서 시민들의 광장 물결이 자발적 동기로 모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지식인이나 학생계층이 아니고 바로 소시민이라 불렸던,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던 소시민들이 스스로 자를 떼어내고 광장으로 나왔다는 겁니다. 또 이 자발적 시민성이 비폭력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폭력과 투쟁과 저항의 광장이 아니고 자발적인 참여와 비폭력적 저항, 그러한 평화적인 의식의 혁명이 천칠백만 명이라고 하는, 지금 지구상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참여로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이죠.

    그래서 이 기적적인 시민성의 부활을 명예로운 혁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명예로운 시민혁명의 특징은 제1차 시민혁명 4.19와 비교해 본다면 폭력이 비폭력으로, 관념적 지식인들의 중심이 일반 일상의 시민들 중심으로, 그 방법이 전투적인 운동성이라기보다 새로운 도시 축제 성격이었다는 것입니다. 혁명이 축제가 되고 정치가 일상으로 스며든 것이지요. 정치와 일상이 만나고 혁명과 축제가 만났다. 이건 정말 중요한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정치와 일상이 겉돌았습니다. 시민들의 생각과 정치적 행위가 따로 놀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따로 놀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정치가 시민들의 일상과 맞물려 있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박근혜정부의 탄핵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장의 혁명이란 게 살벌한 폭력성을 동반했다면, 이제는 혁명이 평화적인 축제로 진화하였다는 것인데, 이야말로 전 세계에서도 기대하기 힘든 기적이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변화의 시대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 최인훈의 광장회색인이 아닌, 새로운 광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광장을 어떤 작품으로 표현할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소설가 강동수 선생이 풀어나가야 할 숙제 아니겠습니까. 저도 시나 연극으로 풀어야 하고요. 과연 정치가 일상과 만나고 혁명이 축제와 만나는 이 정의로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문화의 힘으로 수용할 것인가, 이게 오늘 우리 대담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혁명이 축제가 되고 정치가 일상으로 스며든다

     

    강동수 선생님께서 지금 최근 한국사회에서 급변하는 시대적 의미를 4.19와 대비하여 설명하시면서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화두, 방향도 함께 제시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4.19는 민주혁명이기는 했으나 그 주체의 한계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주체들이 시민이기보다 학생이나 지식인 중심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거의 60년 만에 새롭게 일어난 최근의 정치적 움직임을 명예혁명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왜 명예혁명이라 표현하셨는지 알겠습니다. 일상, 주체적인 시민의 등장, 축제성과 평화주의, 이런 몇 가지 논점을 가지고 4.19와 대비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양적, 질적으로 축적된 한국사회의 역량이 이번에 표출된 것으로 본다는 말씀이군요. 최근의 정치적 흐름을 시민혁명, 명예혁명이란 틀로써 좀 더 분석해 보지요. 그럼 시민이란 계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화두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시민을 이데올로기적인 계급적 틀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좀 더 포괄적으로 다층적 사회적 집단으로 규정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자면 시민에 대한 좀 더 정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4.19 이후, 60~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변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그 속에서 시민 계급이 어떤 방식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짚어 보도록 하지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60년대의 4.19혁명에서 시민계급이 결락됐다고 하는 것은 당시엔 한국사회에 시민계급이 존재할 만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시민계급이 성장할 물적 토대 없이 외세로부터 주어진 해방, 그리고 외세가 만들어낸 분단의 망령이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짓눌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5.16을 군사 혁명이라고 하는 쪽도 있고, 쿠데타라고 하는 쪽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5.16 이후 유신과 5공화국 시대를 거치면서 개발독재 논리가 우리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 짓눌러 왔지요. 반면에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이른바 민중민족주의 논리였는데요, 두 개의 세계관이 부딪쳐 때로는 폭력적인 상황을 겪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억압하고 눌러가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국 지배세력이든, 그 반작용으로 대두한 민중민족주의 세력이든 간에 진영화된 상부 계층의 이데올로기 싸움이었다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운동 세력들이 시민적 기반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시민을 대상화시키거나 소외시키지나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놀라운 건 그 동안 계급적 토대를 쌓아온 시민들이 이번의 일련의 사태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각성을 통한 변화의 움직임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대목입니다. 경이로운 혁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과장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전제 위에서 시민의 탄생이랄까, 시민계급의 부상을 지난 시대의 역사의 흐름과 연결하여 규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회색도 색이다

     

    이윤택 1987년에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지요.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말기에 시민들의 자발적 동참이 다시 한 번 민주화의 흐름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1987년 당시 민주화를 이끈 주체는 민중 민족 운동권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흐름에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시민이란 시집을 낸 회색분자였고, <시민 K>란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를 상당히 외롭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제 의동생이었던 최영철 시인이 형님,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형님을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라 그럽니다.” 그랬어요. 그때 가투에 참가하러 극장에서 뛰쳐나간 연극배우들을 저는 찾으러 다녔습니다. 연극 연습해야 한다고. 그때, 술집에서 임수생 시인께서 제게 그랬어요. “너는 지금 왜 배우들을 데리고 가냐, 돌을 던져야 하는데 지금 연극을 할 때냐?!” 하셔서 제가 나는 연극으로 참여하겠다고 소리 질렀어요. 그러면서 배우들을 데리고 나오는데 등 뒤가 서늘하더라구요. 그때 뒤따라 나온 최영철 시인이 안타까워서 기회주의자, 회색분자 소릴 한 거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회색도 색이다.”

    저는 지금도 시민의식을 색깔로 치면 회색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흰색과 검은색으로우리 한국 사회가 나눠져 있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저는 막 신문사를 관두고 나온 기자 출신이었습니다. 신문기자의 시각이라는 게 뭡니까? 근본적으로 기자의 시각은 일상적이고 중립적입니다. 신문기자의 시각이라는 것은 진영논리에 절대 갇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항상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중립적 시각에서 바라본 80년대는 회색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흘러 다녔습니다. 사실상 군부와 운동권이란 이분법적 진영논리는 그 비중이 오히려 적었고, 세상 자체가 시민사회의 회색지대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시민들이 머리에 전부 자를 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저는 시민문학론이란 제법 묵직한 문학 에세이를 썼습니다. 제 시민문학론은 이 소시민들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는 계속 이런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를 떼내야 한다인데, 80년대 화두였던 소시민성의 극복이 이번에 촛불 집회로 저절로 와버린 겁니다. 물론 그것이 저절로 오진 않았겠죠. 저절로 오지 않은 그 이유, 촛불혁명을 이끈 사회적 변화의 근거를 먼저 밝혀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저는 첫째로 언론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몇 개의 메이저 신문과 방송에 정보와 소통이 독점되어 있었어요. 군부 쪽의 홍보, 진영논리 쪽의 홍보, 그 사이에서 실제 소시민들은 발언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시민사회가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자기 발언권을 갖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통신망이 보급되고 유통되었을 때, 처음에는 조잡한 수준의 정보에 불과했지만, 갈수록 인터넷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수준 높은 지식들을 시민들이 공유하기 시작한 거죠. 시민이라는 계급이 무엇입니까? 시민이란 계급은 동양적 개념이 아니잖아요. 서구의 산업혁명의 산물이란 말이죠. 서구 산업혁명의 산물인 동시에 민주화의 산물이에요. 봉건제도로부터 독립한, 소위 서양에서 말하는 비르그, 새로운 도시 자영업자들이 중심이지요. 도시 자영업자들이 시민사회의 중심이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도시 자본가들이란 말이에요. 도시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게 르네상스고 이것이 도시고 시민인데, 동양은 그 부분에서 한동안 제 3세계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회색지대로 버려져 있었던 거지요. 봉건주의의 체제에 있었다가 조선이 무너지고 바로 식민시대가 와버렸고, 곧이어 미국에 종속이 되고 이러면서 우리는 비르그, 시민사회의 주체적 힘을 키울 수가 없었지요. 그것이 지금 21세기적 상황으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런 변화의 흐름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저는 우리에게 20세기적 상황이 제 3세계적이었다면, 이제 21세기적 상황, 소위 말하는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 개인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 순간을 진정한 시민사회의 도래로 보는 것이지요. 이제는 더 이상 봉건적인 권위와 힘으로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게 박근혜 정부의 몰락입니다. 자발적으로 인터넷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서로 소식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한 자생적 시민조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는 안 떠오르고 우리만 떠오르느냐. 중국은 여전히 봉건적 조직이고, 일본 미국 유럽은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사회구성체 성격을 띱니다. 스스로가 개인의 삶을 우선하기 때문에 극도로 분화된 개인을 시민사회 구성체로 조직화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 버렸죠. 그게 바로 늙은 유럽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는 원래 솟대의 문화아니냐 이거죠. 누군가가 솟대를 세우면 일단 모여드는 게 한반도 민족의 문화적 공동체성입니다. 한국인은 원래 개인주의자가 아니잖아요? ’불이야소리치면, 일단 집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우리 민족이라고. 우리는 원래 광장으로 집결하는 공동체성이 있는 민족이란 거죠. 질서 정연하고 이성적인 민족은 아니지만, 무질서 속의 질서를 이루면서 모인다는 거지요. 서양에서는 모여라하면 왜 모여야 되는데?” “누가 모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질문을 던지잖아요? 우리는 모여라하면 일단 모이는 거예요. 이게 무질서의 질서를 지키는 기마문화의 특징이에요. 서양의 기마대는 줄을 서지만 몽고 기마대는 줄을 안 서잖아요? 그냥 목표만 정해 놓고 제각기 알아서 쳐들어가서 싸우다가 다시 모인다는 겁니다. 이 무조건적이고 무의식적인 공동의 연대감이 촛불 혁명을 이끌어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20세기적 한국 사회는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의 시대였기 때문에 시민들이 힘을 얻을 수가 없었다면, 지금 시대는 소위 소시민들이 각자 개인 마이크를 가지게 됐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광장성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장성이 방에 있지 않고 우리 나갑시다하면 일단 다 튀어나오는 나와서 스스로 공동체가 되는 굉장히 유쾌한 시민성을 획득했다 그렇게 봅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 다음 논의가 되어야 할 문제는 지금의 시민성은 두 갈래의 의미를 띤다는 것입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드러난 문재인과 안철수의 논리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 때 가장 중요한 관점이 문재인과 안철수의 대결이었어요. 안철수 후보가 뭐라고 했습니까? 박근혜 뿐만 아니고 문재인도 과거다. 맞는 말이거든요. 적폐라면 문재인도 적폐세력이다. 내가 미래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에서 한때 안희정 후보가 엄청 올라왔지 않습니까? 안희정 후보가 문재인으로 단일화되자 안철수가 확 올라왔잖아요? 만약에 1:1 대결로 붙었으면 안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상까지 나왔고, 안철수 후보가 자신의 미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생각을 일관되게 보여주었다면 당선되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 안철수 후보의 비전이 미래사회를 여는 정답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어차피 우리 사회는 그렇게 갈 것이니까요. 그게 바로 성숙된 시민사회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새로운 시민성이라는 슬로건은 오히려 안희정이나 안철수의 입장이 더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문재인 후보는 사실 이분법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왔던 민주화의 마지막 세대입니다. 과연 지금 이곳의 시민들이 민주화의 마지막 세대를 선택할 것이냐 새로운 시민사회를 선택할 것이냐가 이번 선거 최대의 변수였다고 봅니다. 여기서 시민들은 안철수 후보가 제시하는 미래,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고도 물질사회의 비전보다 문재인 후보가 내세운 과거의 청산, 진정한 민주화를 통한 정의의 구현을 선택했습니다. 문재인의 도덕성과 인품이 안철수의 물질성과 냉철한 이성을 압도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분석되겠지만, 쉽게 말하면 시민들이 아직은 아니라고 말한 것 같아요. 아직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사회를 안철수는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정의란 이름으로 민주화를 이룬 적이 있었느냐에 대해 성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이룬 시민사회의 성취를 한번이라도 느껴 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 시대는 또 다른 엄청난 혼돈 속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시민들이 판단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게 우리 대담의 또 다른 핵심이 돼야 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군부와 저항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적폐뿐 아니라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더 이상 늙은이를 대접해 주지 않습니다. 어른이 없어지는 세상이에요. 어른이 없으니까 자연히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도 무너지잖아요? 인문학이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이성과 상식이 무너지는 거죠. 지금 우리는 극단적인 악의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어느 신문에서 추도사를 써 달라고 해서 제가 그랬어요. 세익스피어의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더 이상 악의가 선의를 지배하는 세상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이렇게 썼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악의에 의해서 무너진 거예요. 근래 우리가 치른 대통령 선거전을 보세요. 얼마나 악의적으로 상대방을 씹었습니까. 그러니깐 선의가 승리하지 못하고 악의가 설치는 이런 세상에서 만일 안철수가 말하는 제 4차 산업혁명이 왔다 칩시다. 4차 산업혁명에서 로봇이 인간과 같이 놀게 되고 물질이 극대화되는 시대가 되는데, 그런 시대에 지금까지 무너져버린 인간에 대한 선의와 정의가 통할까, 어른이 없어지고 젊은이가 버림받는 시대에 제4차 산업혁명이 온다면 지금보다 더 구제불능인 인간 말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물질이 해결되기 전에 추락한 도덕성과 인간적 품위를 먼저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시민들은 분명 그런 우려를 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도덕적 성찰과 인간적 품위를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일단, 문재인이란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이어왔던 과거를 등지지 않고, 살아왔던 과거의 도덕적 기반을 이어받으면서 지금 이곳을 미래를 열어가는 청산의 시대로 판단하지 않았느냐 저는 그렇게 봅니다.

     

    강동수 . 선생님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의 쟁점과 시민 선택의 문제와 관련해서 문재인과 안철수 후보의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부분은 제가 대담 후반부에 여쭤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말씀을 들었군요.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라 할까,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는 다시 논의해보기로 하겠습니다. 80년대에 민중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다분히 좌파적인 이념을 가진 세력이 진영화됐을 때 이른바 회색분자로서의 선생님의 고충을 말씀하셨는데, 그때 나이브하다는 얘기는 혹시 들지 않으셨나요?(웃음)

     

    이윤택 네 뭐 기회주의자. 회색주의자. 정치적 허무주의자. 제가 정치적 허무주의자라는 말을 집중적으로 들었어요.

     

    강동수 어쨌든 민중민족주의 운동의 진영논리에도 시대적인 필연성은 있었을 텐데요, ‘광주로 상징되는 민주화 운동의 좌절을 겪으면서 대열을 정비한다는 차원에서 이데올로기 중심의 진영논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80학번입니다만,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의 대학생들은 민중민족주의의 관점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해방시킬 과학적인 사고체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대였던 것이죠. 물론 한계도 있겠지만 어떻든 군부독재와 싸우며 일정한 운동공간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요, 이른바 ‘87체제라는 정치적 민주화의 틀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는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데올로기적 좌우 진영 논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가 도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동구권의 붕괴가 이른바 민중민족주의 진영에 큰 충격을 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면서 90년대는 이념이 일시적으로 진공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요.

     

    이윤택 . 야합의 시대!

     

    강동수 그래서 문학을 포함해서 예술의 영역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하면서 촌스럽게 무슨 80년대식 거대담론이냐 이런 비아냥도 있었고요, 다시 개인의 삶으로, 내면세계로 돌아가자 그런 흐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식인이나 운동권의 혼란과는 별개로 시민계급의 성장은 꾸준히 진행돼 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식인들이야 미처 발견을 못했겠지만요. 아까 선생님께서 이번 시민혁명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정보의 민주화와 소통, 이런 개념을 드셨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우리 국민이 먹고 살만해진 것도 시민 계급의 성장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말처럼, 과거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야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교양이라든지, 민주자유주의적 측면에서의 기본권이나 인권에 관심을 가질 여지가 없었지 않았겠습니까. 먹고 살만한 시절로 조금씩 접어들면서 민주공화정의 가치에 대한 시민 일반의 관심도 생기게 되었고, 80년대 군부독재를 지켜보면서 정치적 각성도 쌓여가면서 시민계급이 성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식인들이 자기들의 진영논리라든지, 자신들의 리그에만 갇혀 시민들이 무섭게 성장해 왔다 하는 것을 제대로 못보고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적합한 정치적 인식의 틀을 제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명예혁명을 보며 지식인들이 반성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도 해봅니다. 시민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어가 보면 좋겠는데요,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적 대립을 시민 스스로가 뛰어 넘어온 것에는 시민계급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과 성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시민계급이 양성된 데는 교육의 효과도 있었겠고 미래의 기술의 성장, 정보 소통의 민주화, 공유화도 한몫했겠지요.

     

    이윤택 제일 중요한 게 발언권입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지만 지금은 제가 발언하는 게 먹힌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술집에서 세상에 대해 한탄하고 우국론을 펼쳤어요. 그런데 인터넷이 생기면서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인터넷의 바다에 올려 버리니까 이게 엄청난 변화라는 거예요. 이처럼 열린사회에서는 이분법적 진영논리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자연적이라고 봐요.

     

    강동수 그런 관점에서 아까 선생님께서 솟대 문화라든지, 우리 민족이 기본적으로 광장의 민족이고 함께 모여서 신명을 가지고 서로 공동체를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듯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광장에서의 혁명도 그런 특성과 연결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보의 민주화, 광장으로의 지향, 소통의 문제는 오늘 우리 대담의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보기로 하겠습니다.

     

    포괄적 정의의 승리

     

    이윤택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무척 경이로운 시대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에게 부끄러운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정치가들이 부끄러워해야 하고요. 지식인과 정치가들의 부끄러운 행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근래 끝난 대통령 선거 공개 토론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섯 후보가 나왔는데, 다섯 사람 다 나름대로 분명한 자기 입장과 태도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홍준표 후보는 우리의 보수 후보가 얼마만큼 일방적으로 막말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잖아요. 그게 바로 군부 정권의 수준이 되어 버리면서 상대적으로 문재인 후보를 당선시키는 역할을 했어요. 본인의 막말이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투표권을 지닌 시민의 의식 수준을 무시하는 거예요. 자신의 발언이 시민을 무시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거예요. 그게 우리 보수 정객의 수준이었다는 거지요. 흙수저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신 분이 그 정도 야만적인 지성을 갖추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의도적인 전략이라고들 말하지만, 자신의 인간적인 체면과 염치까지 무시한 전략은 전략이 되지 못합니다.

    이번에 문재인 후보가 주로 보여준 건 뭡니까? 별로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공격을 하면 자주 웃고 고개를 흔들다가 참다 못 하면 이보세요~” 그러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분이 제 주장을 펴지 않고 왜 그렇게 상대방을 씹습니까. 아니라고 하는데도 계속 그렇게 헐뜯는 겁니까. 그러면서 초지일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었잖아요. 문재인 후보가 2012년에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 나서 결국 나는 진영논리에 갇혔다라고 반성을 했단 말이에요. 진영논리를 해체하고 정의로운 민주화의 개념으로 열어 나간 거예요. 2012년 대선에서 결정적으로 박근혜 후보 당선을 도운 장본인은 당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이정희 후보의 발언입니다. 그 순간 회색지대에 마물러 있던 시민계층이 우르르 박근혜 후보 쪽으로 쏠린 겁니다. 이정희 후보 또한 자신의 발언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덕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고, 그만큼 시민의 존재를 우습게 본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의 대통령 후보들께서는 한 마디로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맹아들이기 일쑤였습니다. 안철수 후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주창하면서도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신에 대한 이미지 관리는 엉망이었어요. 일단 상대방 후보의 말을 듣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쏘아붙이는 후보에게서 시민들은 얼마나 불안한 인상을 받았겠습니까. “4차 산업혁명은 물질로만 오는가그게 안철수 후보에 대한 의문이었어요. 도덕적 철학성, 도덕적 정당성 없는 4차 산업혁명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보여준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서로 상종할 수 없는 두 세력을 하나로 끌어당기려고 했다는 게 문제에요. 전라도 지역 시민들이 일제히 등을 돌린 것은 바로 안철수와 국민의 당이 보여준 이중적 잣대 때문입니다. 정치가는 일단 일관된 신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안철수의 패배를 보고 확인해야 할 것은 그 어떤 물질혁명이 오더라도 도덕적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그 어떤 물질주의도 패배한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유승민 후보의 경제논리 또한 통치철학이나 거대담론이 없는 쪼잔한 미시경제 수준이었습니다. 참모라든지 방송해설자 정도의 지식과 입담으로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시대를 종합적으로 관찰하고 총체적으로 관통하는 도덕적 철학이 없는, 그저 수치로 계산하고 쪼잔한 이성적 인식으로만 접근해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승민 후보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는 것이고요. 그리고 심상정 후보는 아무래도 진영논리가 제일 분명하지 않았습니까? 노동자 중심의 진영논리를 내세웠단 말이에요. 그러면 당연히 노동자 아닌 입장에선 싸늘해지지요. 심지어 노동자 계급도 자신을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않는 중산층 의식의 나라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지요.

    아무튼 다섯 후보들은 모두 특징을 보여줬어요. 홍준표 씨도 솔직하게 선택했고 유승민 후보는 굉장히 디테일한 경제논리와 성장경제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철수 후보는미래를 이야기 했고 심상정 후보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야기 했지만 결국 문재인 후보가 말한 것은 포괄적 정의였습니다. 이것이 먹혔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후보가 내세운 것은, 다 좋은데 일단 우리가 정의를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정치적 도덕성을 내세운 거지요. 포괄적 정의가 승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정의는 문화의 르네상스로 완성된다

     

    이 포괄적 정의가 앞으로 다양한 문화와 사회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과연 시민들이 만들어준 이 기회를 변화의 힘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요. 여기서 정치가들은 자칫 잘못하면 가혹한 제2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내년에는 또 총선이 있잖아요?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경제라든지 외교라든지 이런 모든 부분에서 심판을 받겠죠? 저는 무엇보다 우리 문화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포괄적 정의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세종 시대를 봅시다. 세종 정권을 완성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글창제였어요. 그리고 음악이었지요. 문화의 힘으로 정권이 완성된 것이란 말입니다.

    ·정조 시대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집대성된 시대란 말이죠. 판소리라든지 탈춤이라든지 그 모든 것이 영·정조 시대에 완성이 되었어요. ·정조시대가 조선의 절정의 시대였던 이유는 바로 문화의 르네상스가 같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영·정조 시대를 전 지구적으로 가로질러 보면 바로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우리가 르네상스 라인이라고 하는 전 지구적 문화의 연대를 했다는 것이지요. ·정조 시대 그때가 바로 독일 질풍노도의 시대, 자유시민 뷔르거의 탄생, 우리로 보면 정약용과 실학의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그때 서민문화라 일컫는 지금의 시민문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 가면극을 보면, 영감이 도시로 간다는 거죠. 할미를 떠나서. 도시에서 새로운 각시를 얻어요. 또 할미는 각시를 찾아간단 말이죠. 그래서 할미하고 각시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벌써 그때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대와의 갈등을 문화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대변화를 쭉 계산해 봤을 때 지금 우리 이 시대 일단 도덕적 정당성이 확보되려면 문화가 꽃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이상주의적 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어떤 문화를 꽃피울 것인가가 중요하고, 그래서 저는 이윤택을 포함해서 기존의 문화인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고 봐요. 이윤택을 포함한 기존의 문화인들이 누굽니까? 문화귀족들이잖아요? 문화 권력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문화적 재능과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 아니면 학벌이 있는, 그래서 대학교수고 기자고 갖가지 문화적 권위에 기대어서 문화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고급문화, 이 고급문화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기득권 문화가 반성해야 해요. ? 더 이상 새로운 시민사회에 안 먹히는. 시민들이 더 이상 읽지 않는 문학, 보지 않는 미술, 듣지 않는 현대음악, 망하는 한국 뮤지컬 시장.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결여된 천박한 대중 중심의 문화는 이제 다 밀려납니다, 이제. 시민들은 더 이상 천박한 대중주의에 속지 않습니다. 아울러 귀족주의적인 오만한 고급문화에도 속지 않습니다.

    지금 시민들은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시민들이 정말 우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보기에 적합하구나 라고 할 수 있는 시민문화를 제공해야 한다는 거죠. 그걸 우리가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의 문화인들은 사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는 거지요. 천박한 자본의 논리에 맞추는 대중주의도 반성해야 되고, 저 혼자 잘난 척하고 평론가들만 언급하는 고급문화도 반성해야 된다는 거지요. 새로운 문화유형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새로운 문화유형이 무엇이냐? 그걸 이름하여 시민문화라고 하겠죠. 시민예술, 시민극, 시민문학 이런 새로운 시민 문화 예술이 등장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게 바로 저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엘리자베스 시대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강동수 지금 오늘 이야기해야 할 여러 화두를 한꺼번에 말씀하셨는데 소통의 문제, 또 이 시대에서 대중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거기에 연관된 새로운 인문주의의 형성, 그리고 그 인문주의를 통해서 21세기에 맞는 시민문화의 수립 이런 중요한 논제를 한꺼번에 연결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우선 저도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이번 대통령 선거 TV 토론이라든지, 대선에서 보여준 각 정당의 문제점 등에 대부분 공감을 하는 편입니다. 부연해서 제 이야기를 좀 하자면 이번 대선이 여러 가지 특색이 있었을 건데, 이념이라고 해도 좋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각 정당의 색채가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이전보다는 좀 더 다양하게 분화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홍준표 후보가 나온 자유한국당은 어떻게 보면 극우보수 세력을 대변한다 할 수 있겠고, 앞으로 싹이 틀지 어떨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는 본인 표현대로 하자면 따뜻한 보수, 혹은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미래 사회를 지향하는 새 정치를 내세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계적인 분석 같습니다만 문재인 후보는 일반적으로 보면 리버럴 좌파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심상정 후보의 정의당은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각 정파의 스펙트럼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체성의 분화가 국민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요. 극우에서 이른바 좌파에 이르기까지 한 시장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는 상품으로 제시되고 또 각각 최소한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 그래서 국민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은 장기적인 정치 발전에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홍준표 후보조차도 그렇게 막말하고 떠들었던 게 그의 정치노선을 구매(?)할 세력이 있었으니까 그랬던 게 아니겠습니까.

     

    이윤택 그리고 깨끗하게 승복했잖아요. 그게 전략이었다는 거지. 역설적이지만 나는 홍준표 후보가 솔직했다고 봐요. 실컷 자기 말 떠들고 승복해버렸잖아요. 문제는 그 천박한 수준이 치명적이었다는 겁니다.

     

    강동수 선생님 말씀과 동어반복의 느낌은 있습니다마는, 안철수 후보가 미래냐, 현재냐 하는 이런 패러다임을 들고 나온 것 자체는 일정한 정합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의 심각한 결함은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급속히 변화하는 미래가 온다는 얘기를 되풀이 하면서도 그 미래라는 게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것이겠지요. 미래의 변화를 수행할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그 미래의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부분이 결락됐다는 것입니다. 과연 안철수 후보가 미래의 4차 산업혁명을 수행할 주체세력으로 시민계급을 상정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자칫 또 다른 기업집단들이 발 빠르게 그 미래를 독점하고 국민들은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만, 그런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지는 바람에 국민들로 하여금, 안철수가 말하는 미래가 바로 국민 자신의 미래로 동의하도록 하는데 실패한 게 아니냐는 거죠.

     

    이윤택 또 하나 치명적이었던 게 안철수 후보의 싸늘한 개인주의였죠. 말하는 태도부터가 다른 사람의 말을 안 듣는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말하면 숨 멈추고 가만히 있다가 자기 말만 딱 하잖아요. 벌써 거기서부터 소통이 안 된다는 거예요.

     

    강동수 그렇게 보면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는 시민들이 밀어 올린, 일종의 집단지성의 결과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이윤택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재인의 승리는 문재인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바로 시민들의 건강한 상식의 승리예요. 그냥 누가 좋아서가 아니고 성숙한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이성과 상식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떤 진영을 편들어 준 게 아니고 그래도 좀 품위가 있고 상대방 말을 들어주고 그래도 조금 정의롭지 않겠나 하는 이런 상대주의로 뽑은 것이지 문재인이야말로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다 하고 뽑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저는 그렇게 봐요

     

    강동수 박근혜 시대를 겪어오면서 시민들이 공화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각성이 돼 있는 상태였지 않습니가.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 민주가 됐든, 공화가 됐든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합의한 우리 사회의 정치 체제, 사회 구조조차 깨지는 것을 보면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볼 수 있겠는데, 그래서 이번에 나온 여러 후보 중에서 그래도 문재인 후보가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가치, 상식적 가치를 복원시켜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국민의 승인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윤택 어떻게 보면 전통적 가치…….

     

    강동수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안철수 후보는 본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운 가치의 틀은 주목할 만 했다…….

     

    이윤택 충분히 있었다. 가장 비전이 분명했어요.

     

    강동수 하지만 그 내부에서 내용적 결함이 있었다?

     

    이윤택 도덕적 결함이 있었어요. 내가 볼 때는 비전으로 치면 안철수 후보가 가장 분명했는데, 저는 그래서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을 찍으면 과거입니다. 나를 찍으세요. 미래를이렇게 했을 때 젊은이들이 상당히 협조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어떤 비전도, 그 어떤 산업혁명도 그 어떤 물질도 도덕적, 인간적 품위와 정당성 없이는 안 된다, 그게 중요한 거였어요.

     

    강동수 그래서 아까 이야기와 다시 연결해 보자면, 이번 시민 혁명에서 특기할 점은 시민 자신이 촛불을 들고 나와서 가치 복원의 토대를 만든 것이고, 그 운동의 기반에는 정보의 소통이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연결될 것인데요. 그렇게 보면 특히 SNS가 매우 놀라운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집단지성을 일구어 나간 것도 SNS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등장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특히 미디어의 발전과 연관해서, 시민들이 자발적인 집단지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SNS가 앞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지식인들이 자신의 역할과 관련해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유력 미디어들이 정보의 독점 공급, 정치적·사회적 의제 설정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정보 공권력을 설정해서 시민들의 자율적 가치 판단을 막고 우리가 공급하는 정보, 우리가 내려주는 가치 판단에 따라 오너라 라고 했지만 SNS가 등장하면서 시민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시민 자신이 자율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보니까 그 동안 대표적인 진보 매체로 알려져 온 한겨레신문이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거든요. 기자 중의 한 사람이 페이스북에다 문빠들 덤벼라했다고 해서 또 집중공격을 당하고……. 진보, 보수 매체를 막론하고 시민들이 가장 기분 나빠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언론, 소수의 지식인이 잘난 척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뭔데 우리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들고 일방적으로 끌고 가려 하느냐는 거지요. 거기에 불만이 굉장히 많은 것 같고 반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그들이 또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광장에 나가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는 자부심이 있단 말씀이지요. 이런 시대에 지식인들은 시민과의 관계 설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윤택 저의 생각은 이제는 정치가를 포함해서 지식인들이 스스로 자기 의자를 박차고 내려와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위에서, 자기만의 방에서 떠드는 식은 안 된다는 거예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려와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새로운 실천운동이 뒤따라야 된다고 생각해요. 실천운동이란 것은 행동하는 시대가 와야 된다는 거지요. 예를 들자면, 문재인 대통령이 상당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권위를 풀잖아요? 넥타이 풀고 대화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과 직접 만나겠다는 거죠.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 자기만의 방에서 문서로 받는 시대가 아니고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잖아요? 스스로 낮은 데로 내려와서 사람들과 섞이는 것, 이게 새로운 시대의 방식이라고 봐요. 스스로가 지식인이다, 스스로가 실력자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내려와라. 내려와서 광장의 일원이 되라는 것이죠. 이제는 역시 광장이 중심이 되는 것이죠.

    광장의 일원이 되라는 것이 저의 이야기이구요. 경제도 이제는 대기업들의 독점적인 형태가 아니라 같이 나누자는 것, 중소 자본과 같이 만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교육도 그렇잖아요? 교육도 스승의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같이 참여하는 교육이 되어야 하지요. 문화도 이제는 그냥 소설가가 책만 낸다고 안 본다는 거죠. 그러면 시인들이 그리스 시대의 소피스트들처럼 거리로 내려오라는 것 이지요. 거리의 철학자가 필요하고, 거리의 문화 거리의 예술이 필요해요. 이제는 글도 눈으로 읽는 시대가 아닙니다. 눈으로 읽으려면 인터넷으로 다 읽잖아요. 이제는 독자 앞에서 직접 말하고 몸으로 움직이고 무언가를 같이 실행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 문화도 행동이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봐요. 문화도 이제는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는 실천으로서 시도 광장에 나와서 읽고 광장에 나와서 소설을 가지고 대담을 하는, 이런 적극적인 행위, 행동하는 문화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사유와 행동의 변증법,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행동만 하다보면 생각이 없어지고, 쾌락만 좇다 보면 내용 없는 축제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사유와 행위가 변증법적으로 서로 자극을 주면서 진화를 이루는 어떤 상상력, 그것이 새로운 시민문화의 기본적인 방향이 아닐까요. 그 점에서 앞으로의 문화는 크게 말하면 사유와 행위의 변증법적의 확대 재생산 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하고요. 따라서 고급문화, 순수문화 이런 구분이 필요 없어지고, 다른 편에서는 무슨 문화콘텐츠, 문화브랜드 이런 유치한 슬로건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화융합이라든지 문화브랜드 이런 걸 내세워서 성공한 브랜드는 없어요. 문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브랜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브랜드화 되는 것이죠. 국가가 브랜드화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기획으로서 문화콘텐츠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새로운 문화는 어떻게 싹을 틔우는가. 일단 기본적으로 기초 예술기반을 확고히 해야죠. 차라리 기본에 대한 지원만 하고 그냥 내버려 둬라. 국가가 문화를 기획하고 관리하려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그냥 내버려 두고 기초예술에 대한 지원 그리고 문화예술가에게 기본적인 의료라든지 교육이라든지 생계라든지 이런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라는 거지요. 국가가 어떤 특정한 기획을 하는 게 아니고, 기초예술에 대한 지원만 하고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 준다면, 문화는 오히려 개성과 다양성을 꽃피울 수 있을 거라는 말이지요.

     

    강동수 기본적으로 문화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는 만들어 주되 국가에서 브랜드를 만들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실패한 정책이 아니냐는 말씀일 텐데요.

     

    이윤택 그래서 블랙리스트가 나온 거예요. 국가에서 기획하고 관리하려 들고, 문화예술인들이 안 따라 주니까…….

     

    강동수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게 얼마나 무지한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지요. 선생님 말씀을 제 식으로 요약을 한다면 시민계급이 대두하고, 시민의 정치 각성이 활발한 시대를 맞아 지식인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자기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광장에 섞여서 대중과 함께 호흡을 해라, 대중과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가라. 그래서 현장이 없는 엘리티즘을 극복하라, 하지만 내용 없는 대중추수주의 역시 경계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지식인의 새로운 시대의 역할이 스스로 발견되지 않을 것인가 라는 것이겠지요.

     

    이윤택 저는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소집단 문화운동을 제안합니다. 쉽게 말하면 동인시스템의 다양한 소집단문화운동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작지만 서로 다양한 개성이 꽃피는 소집단문화운동. 그러니깐 문학으로 치면, 다시 동인지나 무크지가 등장해야 한다고 봐요. 개인 시집도 안 보고 잡지도 안 본다면 다시 유격적인 소집단성의 출판이 적절할 수도 있어요. 연극도 마찬가지에요. 연극도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극장이 아니라, 민간 소극장에서의 다양한 전개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강동수 지금 문화예술인들이 새롭게 고민을 해 봐야 되는 대응방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이 지점에서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선생님께선 시민시회의 무한한 가능성, 시민들의 집단지성에 깊은 신뢰를 갖고 계신 것 같은데요. 어떤 의미에서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을 과연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신뢰할 수 있겠느냐, 자칫하면 우중화의 위험성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주장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올린 것도 시민이고 끌어내린 사람도 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다음이 이명박 정권이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굉장히 물질적, 물신주의적 정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약속했달까, 일종의 부자 만들기같은 환상을 유포해서 정권을 잡았지 않습니까? 결국 공수표로 끝났지만 서울 뉴타운 공약이라든가, 747 공약 그런 걸 내세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아주 큰 표 차로 뽑아 놓은 것도 유권자이고 시민인데, 그래서 4대강 개발이라든가, 자원외교 파탄 등등 국민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례로 보면, 집단으로서의 시민이 항상 정치적, 사회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가 사실은 없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선생님께선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윤택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데요. 일차적으로는 시민이라는 말을 했을 때 시민의 순기능, 역기능이 항상 있는 겁니다. 그건 대중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시민이라 했을 경우에 시민의 기본 특징은 집단을 이루는 게 아니거든요. 시민계층이 집단지성을 갖춘 조직으로 자리 잡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민중민족주의와 구별되는데, 민중민족 지성은 집단성과 진영논리를 지녔는데, 시민의 장점이자 단점은 진영이 없다는 것이지요. 진영이 없이 그냥 물처럼 공기처럼 항상 유동적으로 바뀌는 게 시민이에요. 나는 그게 시민의 특성이라 보고, 그것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시민의 존재가 순기능과 역기능을 왔다 갔다 하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민사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넘나들면서 균형감각을 잡는 것이 바로 여론이라는 것이지요. 여론이야말로 시민사회의 에너지이며 무기입니다. 촛불혁명이야 말로 광범위한 여론의 힘 아니었습니까. 여론을 형성하는 그 어떤 힘은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이것을 시민운동의 힘이라고 보는데요, 권력형 엘리트도 재야 엘리트도 아닌, 자생적 시민 엘리트가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시민의 여론을 형성하고 실천으로 이끄는 시민 엘리트, 저는 바로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일반 권력 엘리트가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 시민사회를 주도하는 자생적 실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시민의 자생적인 등장에 주목해야 합니다. 민중도 아니고 인민도 아니고 국민도 아니고 민족도 아니고 정말 시민이란 무엇인가? 시민에 대한 존재론, 시민은 어떠한 주체인가. 아울러 시민은 어떠한 객체로서 공동체를 이루는가, 시민의 주체성과 객체성에 대한 사회 철학적인 진단, 뒤따르는 운동성, 이런 것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거지요.

    새로운 시민운동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은 다양한 연대의 시민조합으로 확산되고 진화되어야 합니다. 투쟁적인 노동조합이 아니라, 길드와 같은 수평적 연대 말입니다. 저는 최근 유럽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생태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국가를 믿을 수가 없고, 민족도 개인이 부담하기엔 지나치게 큰 거대 담론입니다. 개인은 갈수록 외롭고 군중 속의 소외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게 소집단 생태주의 공동체 운동입니다. 예를 들자면,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혼자 잘 살려고 멀리 전원주택을 짓잖아요? 그러나 전원주택은 지어 놓고 보면 너무 외롭고 불편하거든요. 요즘 어떻게 합니까? 열 채 스무 채 같이 짓습니다. 같이 어울려서 전원주택을 지어 놓고 공동취사, 공동육아를 한단 말이죠. 이게 바로 새로운 생태주의 공동체에요. 내 생각은 바로 이게 시민사회의 새로운 모델링입니다. 그러니깐 시민들도 필요한 것이 바로 이웃이란 존재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래 전부터 두레라는 이웃 공동체가 있었잖아요 21세기 사회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 두레공동체에요. 그거는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웃이라 하면 서로 친한 사람끼리이기도 하지만, 서로 전문성이 같은 사람들, 취향이 같은 사람끼리 어울려서 삶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죠. 노동조합 같은 그런 큰 조직이 아닌, 문학조합이건 미술조합이건 마을조합이건, 이런 식의 다양한 이웃의식이 시민사회의 또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동수 제 또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아직까지도 일정 부분은 좌파적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게 사실은 당시 사회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이었다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 같은데 간혹 생각을 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질 때가 없지는 않습니다. 부르주아가 존재해서 프롤레타리아가 그들과 대립해서 싸우고 그리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모순을 전면에 떠안은 노동계급을 조직적으로 결합, 강화시켜서 운동의 전위대로 삼아야 한다, 이게 민중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일 텐데 이 시대에는 맞지 않지요.

     

    이윤택 그렇습니다.

     

    강동수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면서 사회 구성체도 아주 다양해졌고 서로간의 이해관계도 굉장히 달라졌는데 그래서 사회적 계급을 도식화해서 진영 싸움으로 세상을 뒤엎는 그런 담론화는 이제 낡은 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로벌화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일국적 혁명 모델도 한계에 부닥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신 두레공동체, 다시 말해 소규모 공동체의 의미가 좀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신세계

     

    이윤택 마르크시즘이 개념적으로는 좋은데, 그게 왜 고인 사상이 되어 버렸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는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한 마디로 삶의 조직화입니다. 조직화라는 것이 현상학적으로는 분명한 사회 진보의 힘이 됩니다. 조직화 되지 않은 세상은 계획이 없고 그만큼 희망이 보이지 않는 거지요. 삶을 조직화하기 때문에 그 조직화라는 것이 미래를 나아가게 하고 실행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냐 하면 개인의 지율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니체의 위대한 개인주의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가장 중요한 삶의 에너지로 내세운 게 생기입니다. 니체의 생기라는 개념은 우리의 신명이랑 비교됩니다. 신명은 개인의 생기가 집단으로 모여 작용하는 무의식이지요. 개인은 생기가 있어야 되고 신명으로 모입니다. 개인의 생기와 신명이 억압받는 것이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문제였어요. 생기와 신명이 억압받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 이데올로기와 거대한 조직 때문이에요. 그러려면 개인의 생기와 신명을 억누르지 않는 조직화가 필요한 거죠.

    지금 사회는 기존의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자체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효 상실의 단계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회사상, 사회통합적인 삶의 규칙 같은 것이 세워져야 하는 거지요. 여기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이상이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 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을 정치가 내놓아야 하고, 경제가 실행해야 하고, 교육이 뒤따라야 하고, 문화 예술이 표현해야 한다는 거지요.

    우리가 꿈꾸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신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생기와 집단 신명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도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의 조직화가 필요한 거지요. 저는 이 새로운 삶의 조직은 기존의 공산주의나 자유 민주주의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꿈꾸는 신세계는 영웅이 설치는 거대한 제국이 아니라는 거지요. 작지만 개성적인 것들이 다양성을 이루는 사회. 이게 제가 꿈꾸는 신세계의 모델이에요. 단적으로 말하면, 국가주의가 아닌 지역 분권주의. 민족주의 같은 거대담론이라기 보다 평화적인 무정부주의 같은 사상이 자유롭게 꽃 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상은 다양할수록 좋지요. 개인의 신명과 생기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 구성체를 우리는 이제 꿈꾸어 보아야 하지 않겠어요?

     

    강동수 선생님 말씀이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적 모델이란 생각이 드는데 제가 너무 비관주의자여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국가단위, 지역단위를 넘어서 가정과 개인으로까지 촘촘히 얽혀 있고, 그 얽힘의 강도가 날로 거세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 체제입니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을 비롯한 거대 자본이 일상인의 일상적 삶에 침투해서 계속 삼투압을 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삶이 자본이 리드하는대로 따라가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요. 그게 우리 사회에선 또 분단논리에 연결되고 안보논리에 연결되고 있거든요. 이를테면, 지난 대선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됐던 사드 배치같은 것만 놓고 봐도 그것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의 패권주의 경쟁의 산물이고 그 사이에 우리가 새우 신세가 돼 있지 않습니까. , 그 문제가 2차적으로 한국사회 내부의 진영 싸움의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사회가 아직도 분단의 질곡에서 놓여난 것이 전혀 아니란 말씀이지요. 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직도 강고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냉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소공동체 모델들이 과연 손상받지 않고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나는 단지 제시할 뿐

     

    이윤택 우리는 소위 말하는 예술가와 지식인이잖아요?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현실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결과에 대해서 제가 왜 낙관적일 수밖에 없냐하면, 저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질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역할은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제시합니다. 삶의 모델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거예요. 그 꿈을 선택하고 따르느냐 안 따르느냐 하는 것은 정치가와 시민들, 그리고 독자들 몫이 아니겠어요? 제 생각은 지금 우리는 결과론적인 측면에 얽매여 주저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꿈과 비전을 던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입니다. 물론, 이런 예술적 제안이 먹히는 시대가 있고 안 먹히는 시대가 있는데, 먹히는 시대는 번창할 것이고 안 먹히는 시대는 암흑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요.

    저는 남북관계도 이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고려연방제 체제를 적극 지지합니다. 어떻게 지금 남과 북이 한 국가가 되겠습니까? 서로가 엄청나게 다른 세계를 살아 왔는데 이걸 갑자기 합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저는 통독을 봤어요. 지금도 독일 사회가 엄청난 내부 갈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방분권주의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면 연방국가 건설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남한과 북한, 이렇게 둘로 쪼개지 말고, 더 자잘하게 나누는 겁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다르듯이 북한도 평안도와 함경도가 다르기에 남북한 통틀어 지방분권으로 가버리면 서로의 독립성과 연대가 가능해집니다. 이걸 두 개로 나눠버리니까 적대적인 것입니다. 자율적인 지방분권제도가 스며들어가서 한반도를 개성과 다양성으로 한 연방국가를 탄생시키는 것이지요. 저는 그 가능성을 중국 연길시에서 봤어요. 길림성 가 보세요. 거기 사는 조선족 사람들은 중국국민이지만, 전혀 중국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이라 생각하지요. 북쪽 조선인인가 남쪽 조선인인가 그런 구분도 별로 없습니다. 조선족 3인 중의 1인이 남쪽 대한민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쪽과 북쪽에 대한 구분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지방분권형 제도가 확대되면 남북관계도 평화적인 민족 통합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강동수 사실 중국이나 미국 일본이 없으면 연방제적 통일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는데 참…….

     

    이윤택 그러니까요, 그게 문제죠. 그게 없어야 쉽죠.

     

    강동수 오늘 제가 분단문제를 포함해서 국제정세를 여쭤보고 싶었는데 이 정도 논의라면 어느 정도 짚어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하나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권위주의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권 초기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 어쨌든 문재인 식 탈권위주의는 지금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것이 당분간은 국정 수행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겠습니다. 문재인에 대한 일종의 팬덤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데요, 좋게 보면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자리로 내려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하면 지나친 정치의 대중화에 따른 부작용도 생기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대통령을 포함해서 유력 정치인들을 대중문화 스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이 장기적인 정책 수행의 측면에서 꼭 바람직하기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씀이지요. 자주 이야기되는 이른바 포퓰리즘도 걱정되기도 하고요.

     

    이윤택 썰전 같은 것을 보면, 그 세 사람 다 생각이 분명하고 입담 좋은 지성들인데, 자꾸 말하다 보면 천박해진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어요, 말이 씨가 되어 자꾸 말을 낳으면 말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상실하고 결국 공허한 동어반복으로 맴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양심과 지성을 지닌 분들을 방송에 불러내면, 일단 방송에 나왔으니까 말을 하게 되잖아요. 말을 하다 보면 말에 날개가 달려서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말을 위한 말장난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는 거지요. 그들은 지성인이지 연예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정치가나 지식인들이 방송에 나와서 대중 연예인처럼 말하는 것은 천박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가는 정치적 품격을 지키고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태도를 유지해야지, 유행병적인 엔터테인먼트 방송시대에 따른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지성의 추락현상이라고 봅니다.

     

    강동수 저는 탈권위주의적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긴 하지만 정치가 지나치게 팬덤화되고 엔터테인먼트화되는 현상이 어째 좀 걱정스럽습니다.

     

    이윤택 말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내용이 사라져 버립니다. 지금 정치평론가들 말하는 거 보세요. 남에 대한 비판은 잘하는데, 정작 자기 말들이 없어요. 방송사를 바꿔 가면서 출연을 하는데, 어떨 때는 일당 받고 일하는 비정규직 같은 생각이 들어서 안쓰럽기도 합니다.

     

    강동수 그들의 언어 속에는 책임 있는 평가가 없고, 시류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오늘 이 선생님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시민계급이 어떻게 대두하고 성장했는가, 이번 그리고 이번 명예혁명에서 시민들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하는 화두에서 출발했습니다. 거기에서 다시 명예혁명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여건을 찾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테면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 정보의 소통, 새로운 대중주의의 대두이런 요인들이 추출된 것 같습니다. 나아가 지식인들은 엘리티즘에서 벗어나 거리의 인문주의, 대중과 호흡하는 존재 방식을 찾아 나서야 된다는 데도 이야기가 모아졌습니다. 더불어, 대립적인 진영논리, 알맹이 없는 거대담론의 허황한 틀을 깨어 가면서 시민 스스로가 이웃이 되어 서로를 도와가는 개성적이고 다양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의 민주화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전체적으로 짚을 이야기는 얼추 짚어진 것 같습니다.

     

    이윤택 다시 가마골소극장을 세우는데, 동해선 일광역 앞의 가마골소극장이 앞으로 우리가 논의한 것들이 구체화되는 작은 아지트가 될 것입니다.

     

    그냥 맡겨 두라

     

    강동수 마지막으로 문화예술인으로서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바를 간락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선생님이 지금 한국 문화계를 대표하는 예술인으로서 문 대통령에게 문화예술 정책을 조언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선생님에겐 개인적으로는 친구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웃음)

     

    이윤택 문화에 개입하지 마라. 문광부부터 정치권력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 문광부는 그냥 문광부에요. 문광부 자체가 하나의 작은 국가라 생각해야 되요. 정부는 문광부를 지배하려 들지 마라. 문광부 또한 지나치게 문화를 관리하려 들지 마라. 국공립단체를 너무 많이 만들지 말고, 예술을 문광부에서 기획하고 조직화하지 마라. 국가가 문화를 조직화하면 예술가 개인의 생기와 신명이 줄어든다. 너무 지나치게 국공립에서 뭐를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보단 보편적 복지를 해 달라. 문화인이라면 의료보험, 자녀교육, 일이 없는 예술가에겐 실업수당, 일을 못 찾는 젊은 청년예술가에게 작업을 하게 해 주어라. 그런 보편적 복지를 펴라.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큰 건물을 짓지 말라. 문화 어쩌고 하면서 관련 건물을 지어도 거기에 들어갈 내용이 없어요. 건물 짓는 돈을 보편적 복지로 써라. 그리고 국공립 단체 그게 너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말고, 그냥 민간인들에게 맡겨 둬라.

    그게 제일 중요한 거고 두 번째는, 문화에 관심만 기울이지 말고 참여해라. 책 읽고 연극 보고 음악회에 가라. 쉽게 말하면 도와주려 하지 말고 참여해라. 관객이나 독자로 참여하는 게 제일 좋은 거에요. 직접 참여하면서 경험해 봐라. 경험해 보면 후원자가 돼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와서 인사만 하고 그냥 가버려요. 안 보고 안 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문화 현장에 와서 참여하라는 것이고, 관람하고 읽으라는 것입니다.

     

    강동수 정부가 섣부른 문화기획자가 되려 하지 말고 문화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어라, 이런 말씀이시죠? , 최근 이 선생님이 동아일보와 하신 인터뷰를 읽어 보니까 문 대통령한테 인간과 사회를 좀 철학적으로 통찰해 달라.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철학적 사유를 해 달라 당부를 하셨는데 저는 그런 요구랄까, 조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나 대통령에게 복지정책 어떻게 해라, 안보 대책 세워라, 교육 정책 어떻게 해라 그런 요구만 할 뿐 대통령에게 인류사와 한국사회를 통찰하는 지적인 연마에 힘쓰라는 요구를 하지 않죠. 사실은 대통령의 인문적 소양이랄까 식견, 통찰력이 궁극적으로 한 나라의 총체적인 미래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씀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시지요.

     

    이윤택 요즘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 걱정하고 수첩에 적고 그러는데 못마땅해요. 대통령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종합적 사유에요. 그게 인문학적 사유잖아요. 역사적 안목과 철학적 안목을 갖고 일하는 것이 공인이에요. 진정한 공인은 인문학적 사유를 가지고 있는, 그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일자리 논의만 말하지 말고 수첩에 무언가 끄적거리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통째로 사유하라.

     

    강동수 저도 새 정부가 공공성에 바탕하고,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기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장시간 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 역시 새로운 개안의 시간이 된 것 같아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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