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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요문학무크>세속화에 저항하는 시인들의 생명의식_송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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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화의 질주에 저항하는 시인들의 생명의식

     

     

                                                  송 용 구 (문학평론가고려대 연구교수)

     

    우리는 기술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부인할 수 없다. 문명을 자연의 적으로 규정하고 문명 이전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비현실적 발상이다. 과학기술이 생겨나기 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져 있고 과학기술의 편리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안겨주는가? 우리는 편리하고 안락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것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인가? 인간의 일을 컴퓨터가 알아서 척척 해준다. 기억과 암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스마트폰의 전자사전에서 모든 지식을 꺼내오기만 하면 된다. 서울에서 출장 업무를 마치고 KTX에 몸을 의탁하여 찜질방에서 자듯이 2시간만 눈을 붙이면 부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기계 인간 알파고를 바둑의 스승으로 삼을 날이 멀지 않았다. ‘3D 프린터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이중섭의 를 복사하여 진품으로 감상하는 허위의식이 대중문화의 마당에 침투하고 있다. 시인 원무현이 그의 시 기계치의 첨단기기 공포증 탈출기에서 우리의 웃는 표정일그러진 표정까지도 원본과 똑같이 복사해주는 회전문의 시대를 개탄한 것처럼 우리는 창조에 더 이상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가?(도요문학무크 9참조)

    기술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면서도 테크노신의 전자령電子靈에게 이성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감성을 마비당한 디지털 종파宗派의 광신도!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육상 단거리 100m 경주 선수가 결승선 테이프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듯이 지난 20세기 문명과 과학기술은 급진적 속도로 질주해왔다. 이것을 역사의 발전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물의 어머니이자 근원인 물, 공기, 흙이 병들어가고 나무, , 새들이 인간의 마을을 떠나간다. 슬픈 도미노 현상이다.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던 희망은 낭만적 환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산성비와 산성눈 때문에 살갗이 문드러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아침 식탁에서 디저트로 먹는 과육果肉 속에 비타민이 아닌 농약 파라티온이 앉아 있지 않을까 의심하며 뒷산의 약수터에서 플라스틱 표주박으로 떠먹는 물조차도 환경호르몬의 유입을 염려해야 하는 현실이다.

    인간의 삶 속엔 소유소비로 대체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들이 많다. 나무의 형제이자 꽃의 자매가 되어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새들의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녹색의 음표들을 상상의 연필로 마음의 악보에 필사筆寫하기. 성적性的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독거獨居 노인, 인권 사각지대의 사람들과 대화하며 소통하기 등. 기술과 자본의 척도로는 평가할 수 없는 삶의 양상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이러한 인간적인 만남의 마당과 차단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무수하다. 기술시대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의 동력과 스피드를 고조시켜 왔으나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깨뜨리는 모순들을 풍성하게 생산하고 말았다. 전진과 상승, 생산과 발전에 집착하여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현대사회에서 무관심, 고립, 차별, 냉대로 인해 가슴의 꽃밭이 상처의 가시덤불로 변해간다. 풍요와 편리를 누릴수록 행복과 평안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근심과 우울이라는 무거운 병의 공격을 받고 있다. 새로운 빙하기를 맞은 지구처럼 인간의 가슴에서 감성이 박제되어 간다. 이것이 역사의 발전이란 말인가?

    더 높은 기술과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세계의 곳곳에서 침략과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다. 자본이 정신을 마네킹처럼 마비시키고 기술이 자연을 쇠붙이로 변화시킨다. 속도와 효용이 창조적 상상을 일회용 비품으로 전락시키는 세속화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단순히 이런 저런 의지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고 이성을 가진 존재는 () 모든 행위에서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생각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칸트Immanuel Kant의 도덕철학이 무색해지는 세상이다. 인간을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하고, 인간의 존재가치를 상품의 가치로 환산하며, 인간의 능력을 자본의 획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메커니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시인 성선경이 그의 시 에서 냉소적으로 비판한 것처럼 밥과 잠자리를 얻기위해서는 꼬리를 잘 흔들기만 하면 된다는 속물적俗物的 처세술이 인간의 만남을 인격적 상호관계가 아닌 일회용 접촉의 단계로 타락시킨다(도요문학무크 9참조). 데카당스라는 말이 안성맞춤인 세속화의 소용돌이 속에 저마다 속속 합류하고 있다. 자본의 소돔과 기술의 바벨탑만을 응시하며 직선적으로 질주하는 광란의 쾌속 열차에 탑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물신주의자들과 기술만능주의자들!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세속화시대에는 자연조차도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받는다. 인격과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목적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수단이나 도구로 소외당하는 땅에서는 생명을 가진 자연조차도 생명 없는 물건으로 천대받게 마련이다. 인간의 인권人權이 실현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조차도 보호받을 수 없다. 인간의 상생相生이 깨지는 곳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상생도 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상호의존相互依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을 원활하게 유지해나가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초시대적 사회문제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페스트처럼 번져가는 생명의 소외에 저항하는 힘은 모든 생물과 인간이 하늘을 아버지로, 대지를 어머니로 섬기는 자녀의 연대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닐?

    맘몬物神이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고 테크노신이 인간을 기계의 부품으로 고정시키는 세속화열차의 쾌속 질주에 누가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가? 언제나 간이역의 역장처럼 아웃사이더를 자청해온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그들의 문명비판이 날선 칼처럼 번득이고 그들의 생명의식이 따뜻한 혈액처럼 흐르는 작품들을 통하여 세속화에 대응하는 진정한 인간의 정신을 공유해보자.

     

    우리에겐 두려움이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은

    로봇의 두뇌와 그 위력.

    죽어가는 지구의

    마지막 밤을 향해 우리는 맹목적으로 전진한다.

     

    모든 생명은 우리 손 안에 있다.

    우리에겐 말이 필요 없다.

    오차 없는 공식에 따르면 되는 것. 우리의 이성은

    실험관 속에서 죽음을 배양한다.

     

    우리는 원자原子 알갱이들을 굴리며 논다.

    , 페스트와 결핵도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우리가 사는 곳엔 지옥의 그림자 비치지 않는다.

    한 때 우리의 심장을 멎게 했던 저 지옥도

    아주 가끔씩 우리를 귀찮게 할 뿐이다.

     

         - 다그마르 닉의 우리는 Wir전문,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독일의 여류 시인 다그마르 닉Dagmar Nick기술문명의 발전이 곧 역사의 발전이라고 확신하는 서구인들의 낙관적 역사관을 비판한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와 과학기술만능주의를 환경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이 과도하게 팽창하여 과학기술을 남용하게 될 경우에 자연의 생명력을 착취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다그마르 닉은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을 비판하기 위해 화자의 입을 빌려 현대인들의 낙관론을 예찬하는 반어적 언술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세속화 양상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은 반어反語를 통해 극대화된다. ‘반어속에서 진행되는 시인과 화자의 논쟁에 귀를 기울여보자.

    화자는 우리. ‘세속화의 첨단을 보여주는 속물근성의 총아寵兒들이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맹목적으로신뢰한다. “로봇실험관은 각각 로봇그 자체이고 실험관그 자체이지만 현대 과학기술 전체를 상징하는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힘을 통하여 풍요와 윤택과 편리를 무제한으로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로봇의 두뇌와 그 위력우리 손 안모든 생명을 쥐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과 사람의 모든 유전자를 실험관 속에서조작하여 자본의 이익으로 치환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선포한다. 과학기술과 물질이 신처럼 우리에게 번영과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리 없다. 히브리 민족은 모세의 지팡이를 따라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나아갔지만 우리는 과학기술의 지팡이가 지시하는 오차 없는 공식에 따르면그만이다. “우리의 유일한 마지막 목적지는 물질만능의 소돔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시인 다그마르 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자인 우리를 비판한다. 세속화의 길을 질주하는 현대인들이 시인의 비판에 직면한다. 시인은 과학기술과 물질을 향한 우리맹목적 전진을 책망한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의 마지막 밤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세속화의 임계점을 경고한다. “우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자연의 모든 생명을 에 쥐고 이용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보답은 지구의 마지막 밤과 인류의 종말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을 증식하기 위하여 실험관속에서 모든 생명을 복제하고 조작한다면, “우리가 믿었던 바로 그 실험관 속에서 죽음배양하는 아이러니를 낳을 것임을 시인은 경고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은 우리의 죄값으로 지불해야 할 죽음은 세속화의 종착역이 될 것인가? 죽음은 곧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의 멸종을 부르는 신호탄이 될 것인가?

     

    이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뿔소가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끼리가 사라지는 아픔도 없다

     

    , 소비의 주체이니

    돈을 벌어 물건을 살 뿐

    , 카드의 주인이니

    카드를 꺼내 사인을 할 뿐

    , 승용차의 소유자이니

    기름을 채워 운전을 할 뿐

     

    때때로 자식을 데리고 대공원에 가면

    코뿔소는 아직 코에 뿔이 달려 있고

    코끼리는 아직도 코가 손이다

    상아 있는 코끼리가 있다

    코뿔 없는 코뿔소는 없다

    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고

     

    나는 서서히 살아간다

    생명에서

    나는 부지런히 사라진다

    물건의 사용자로

    물건으로.

         - 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전문, 시집 생명에서 물건으로

     

    시인 이승하는 무수한 들의 죽음을 가져온 사람의 과잉 소유와 과잉 소비행태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승하는 이러한 물질만능주의적 세속화의 양상에 대하여 다그마르 닉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죄책감에 젖어 있다. 다그마르 닉의 시에서 화자였던 우리로 바뀌었을 뿐이다. 위의 시가 수록된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죽어간, 죽어갈 수많은 생명체에게 시집을 바친다는 이승하의 고백은 들의 죽음을 대량생산해왔던 현대인들의 물신주의를 대리적으로 회개하는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이성理性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데카르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이제는 나는 소유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혹은 나는 소비한다 그래야만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로 패러디할 수 있는 시대상황에 이르렀다. 전천후 산성비에서 다 소비하기도 전에 쓰레기통만 가득 채우는 시대라고 쓴웃음을 짓던 시인 이형기의 탄식은 데카르트의 명언을 위와 같이 패러디하고도 남을만한 근거다. 우리의 시대가 물질만능의 소비중독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전해주지 않는가?

    풍요로운 소유, 윤택한 소비, 편리한 사용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카드의 주인이자 소비의 주체이자 물건의 사용자외에는 다른 정체성을 갖기 어려운 존재로 퇴화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여! 그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이 세속화아니겠는가? 이성적理性的 본성을 가진 인간이 욕망의 본성만 남은 물건으로 퇴화하는 과정은 세속화의 끔찍한 첨단 양상이 아니겠는가? 이승하의 시는 독일 시인 루드비히 펠스Ludwig Fels가 비판한 바 있는 소비 테러의 시대를 상기시킨다. ‘자본이라는 테러리스트가 터뜨린 쾌락과 편리의 최면 가스에 마비된 인간의 이성理性이여! 자연을 소유의 대상이자 소비의 도구로 취급해왔던 반이성적反理性的 길을 돌이킬 날은 올 것인가? “코뿔소코끼리상아는 인간이 사용해야 할 물건이 아니라 코뿔소의 소중한 몸이자 코끼리의 생명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을 날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인간과 함께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 인간과 함께 나무들의 푸른 숨결을 나눠 마시는 종, 인간과 함께 같은 흙을 밟고 살아가는 마을의 주민 같은 종. 소유해야 할 물건으로 그들을 소외시키지 말고 생명을 가진 이웃으로 존중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는 역할이 시인들에게 주어져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지만 이 어려운 역할을 감당하려는 시인들의 연대의식이 생명의 물화物化를 휘몰아오는 세속화의 급행 질주에 저항할 수 있는 정신적 항체가 될 수 있다.

     

    시민계급 훈계의 채찍질

    시민계급 권력의 업적들

    시민계급 욕망의 예배들

    곧 온갖 힘들을 가지려는 의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온통 황금으로 뒤덮인

    소름끼치도록 무거운 마차가

    부패한 폐기물로 가득한

    강물 속에 빠져버리듯이.

     

       -귄터 헤어부르거의 낮의 미인 Belle de Jour

     

    독일 시인 귄터 헤어부르거Guenter Herburger의 시 낮의 미인은 본문은 독일어로, 시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쓰여진 작품이다. 이 시의 프랑스어 제목인 벨 드 주르Belle de Jour는 루이 브뉴엘 감독의 1967년 영화 세브린느의 원제이기도 하다. 의사 부인이지만 남편이 퇴근하기 5시간 전까지 에만 고급 창녀의 이중생활을 하는 미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 프랑스의 대표적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주연을 맡아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런데, 벨 드 주르라는 이름은 전직前職 고급 창녀이자 의학 박사인 브룩 메그넌티라는 영국 여류 작가의 필명이기도 하다. 메그넌티는 의과대학 박사과정 재학 중에 학비를 벌기 위해 콜걸로서 일했던 체험담을 자신의 블로그에 연재하다가 이것을 소설로 엮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영화 세브린느의 내용, 영국 작가 브룩 메그넌티의 일화, 그리고 독일 시인 귄터 헤어부르거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belle de Jour’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물질만능의 풍조가 아닐까?

    시인 귄터 헤어부르거는 생태파괴의 원인으로 물신주의를 지목하고 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금(자본)”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현대의 대도시. 이곳은 생태계 안에 존재하고 있으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생태위기의 진원지가 되기 쉽다. ‘도시 계획속에 자연과의 공생 정책을 포함시키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큰 곳이다.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계급훈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정보의 내용은 시인의 비판을 비켜가지 못한다. 시민들이 주고 받는 정보의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황금(자본)을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많이 쌓아 올리느냐 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쉴 새 없이 채찍을 맞고 길들여지듯이 시민들은 정보의 네트워크 안에서 황금(자본)을 증식하기 위한 훈계들에 익숙해진다. 그러한 정보를 가르치고 전수받는 무수한 채찍을 맞으며 자본형 인간으로, ‘주식형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배금교拜金敎의 신도로서 의식이 마비되어 간다. 맘몬의 제단 위에 욕망이라는 제물을 바침으로써 황금의 축복을 얻어내려는 시민계급의 기형적 예배를 어찌해야 하는가? 계산된 욕망의 제물에 비례하여 거둬 들이려는 소유의 창고는 맘모스처럼 비대해진다. 시인 조풍호가 그의 시 서부시대에서 황금이 묻혀 있다는 곳엔 어김 없이 () 맨 먼저 교회가 올려진다고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해부한 것처럼 지금은 기독교의 교회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의 정신을 어김 없이배반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다. 이 시각에도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맨 먼저하느님의 집을 맘몬의 황금제단으로 리모델링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헌신이 아닌가?(도요문학무크 9참조). 종교를 비롯하여 인간이 정신을 집중하는 수많은 영역이 귄터 헤어부르거의 비평처럼 변질된 욕망의 예배에 종속되어 있다. 세속화의 세력권은 이토록 광활하다는 말인가?

    시민들의 소유 창고에 황금(자본)을 더 이상 쌓을 공간이 모자랄 때 시민들은 황금을 소비의 마차에 싣고 시장市場이라는 강물속으로 몰아넣는다. 루드비히 펠스의 시제목처럼 자연은 시민들에 의해 소비 테러를 당한다. 황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소름끼치도록 무거운 마차는 단 한 번 사용된 뒤에 버려진 부패한 폐기물로 가득한 강물속에 빠져 들어간다. 귄터 헤어부르거의 시는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도시인들의 과잉 소유와 과잉 소비가 자연의 부패를 부추긴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과잉 소유과잉 소비라는 현대인들의 세속화된 일상문화日常文化생태위기의 근본적 병인病因임을 해부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의 또 다른 일상문화인 휴식과 휴양은 물질만능의 세속화 양상과 어떤 연관성을 갖는 걸까? 시인 최영철의 4호 찜질방으로 가보자.

     

    죄수복 같은 걸 껴입고 줄지어 들어갔다 어떤 이는 빨간색을 달라고 했다 어떤 이는 내 인생을 숨길 좀 더 큰 사이즈를 달라고 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러느냐고 화를 냈다 입고 왔던 걸 다 벗어주었지만 담을 그릇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육체를 팽개치고 몇은 불가마속으로 자청해 들어갔다 잠시 살 타는 냄새가 났다 몇은 용케 때를 벗었으나 그 중 몇은 붙잡을 새도 없이 한결 더 뜨거운 화장막 속으로 들어갔다 써낼 죄목이 여의치 않은 몇은 줄기차게 쏟아진 죄를 뒤집어쓰고 죄를 땀처럼 흘리며 걸어나왔다 차를 갈아 타며 이런 델 왜 왔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돈을 걸고 사주를 빼보았지만 여기도 별 수 없군 별 수 없어 벗어둔 죄수복 같은 걸 껴입고 더 뜨거운 불가마 속으로 들어갔다

       - 최영철의4호 찜질방전문, 계간 시와환상2012년 봄호.

     

    현대인들은 여가가 주어지면 참된 휴식을 취하러 여행을 떠나거나 휴양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피처를 찾아 피신하는 것이 아닐까? 일상의 습관처럼 반복되는 찜질방입소도 그런 도피의 행각일 수 있다. 찜질방에서 껴입은찜질복이 시인에게는 죄수복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물질과 지위와 명예와 권력을 한 뼘 남짓한 작은 손에 움켜쥐기 위해 100m 주자처럼 날카로운 직선의 경주로를 질주해 왔던 현대의 도시인들. 그들의 질주 과정은 의 철마鐵馬가 달려온 레일이기도 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가까스로 내미는 친구와 이웃과 지인을 어제는 이방인처럼 외면하였고 오늘은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며 내일은 이익의 단물을 빨아먹기 위해 빌붙어야 할 손익계산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김언의 시 낯짝에 등장하는 처럼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돈 오십 만원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단 십분十分만의 위선적인 낯짝을 보여줄 뿐이다(도요문학무크 9참조). “의 도미노가 바로 그들의 인생이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그의 시 풀베기Mowing에서 진실은 노동만이 아는 가장 달콤한 꿈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는 자의 휴식은 달콤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호부조의 미덕을 내팽개친 자들의 노동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선을 다하는 노동이었다고 해도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은 노동의 휴식은 달콤한 휴식이 아니라 인간성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도피하는 것과 같다. 무의식의 노트에 새겨진 비인간성의 이름을 잊으려는 도피일 뿐이다.

    세속적 욕망의 레일을 숨가쁘게 질주하는 자들이 모처럼 선택한 휴식은 이성적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여유가 아니다. 그 질주의 대열로부터 이탈하여 상호부조의 인생길로 전향을 모색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들의 휴식은 물신物神의 노예이자 기계의 부품으로 굳어져가는 자신들의 실체를 회피하려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몸과 살에 깊이 새겨져 있는 물신의 자녀라는 호적戶籍은 이태리 타올로 아무리 벗기려 애를 써도 벗겨지지 않는 이며 벗을 수 없는 죄수복이다. 맘몬이 지배하는 메트로폴리탄에 전입한지 이미 오래된 인간성의 몸이여! “더 뜨거운 화장막속으로 도피해보아도 죄를 뒤집어쓰고 죄를 땀처럼 흘리며 걸어나올뿐이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육체를 팽개치고 불가마 속으로도피하여 자신들의 세속화된 몸의 실체를 잠시나마 가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몸에 대한 성찰과 자기비평이 실종된 그들의 인생은 더 뜨거운 불가마처럼 시뻘건 쇠바퀴를 번득이는 질주의 레일 위로 더 뜨거워진욕망의 불덩이를 안고 복귀할 뿐이다. ‘찜질방을 소재로 다룬 시 가난한 평등에서 시인 이재무가 비판하였듯이 그들은 부글부글 끓는 욕망의 소음들을 안고 반성 없는 일상의 일터로 돌아올 뿐이다(도요문학무크 9참조).

    최영철의 시 4호 찜질방은 물욕物慾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있는 자기 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기비평의 이성적 능력을 상실해버린 현대인들의 세속화된 일상 문화를 희화적戱畵的으로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몸이 물신物神의 노예이자 물욕物慾의 포로가 되는 세속화의 현실상황에 대하여 객관적 거리距離를 조성하고 자기성찰과 자아비평의 내면적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정신적 투쟁의 열기를 더 뜨겁게고조시키려는 노력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시인에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한 정신적 투쟁이 절실한 까닭은 무엇인가? 존엄성과 인격을 가진 인간을 자본의 도구로 취급하고 생명을 가진 자연을 상품과 물건으로 남용하는 세속화의 양상은 시인의 실존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단순히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서 언제나 목적으로도 생각되어야 한다라고 철학자 칸트는 말했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도덕적 신념이었다. 시인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으리라. 시인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과 인격을 숭고한 목적으로 예찬하기 위해 서정의 꽃을 피워 왔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권력과 메커니즘에 대하여 항거하는 언어의 창검을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존재도 시인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시가 자본과 물질의 소유를 위해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상에 대해 시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정록의 시를 만나보자.

     

    모 시인의 승용차가

    폐차 직전이란 걸 눈치 챈 자동차외판원은

    시인의 대표작과 신작시를 달달 외웠다.

    시인이 오래된 만년필로 연거푸 사인했다.

    하나는 신작 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매계약서였다.

    자신의 시에 처음으로 제값을 치른 쾌거였으므로 승차감 또한 흐뭇하였다.

    나 또한 시의 노복, 내 단골집 아씨는 별명이 줄똥말똥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전통을 내세워 안주 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옥편 값이 더 비싸데요!

    한자 어석거리는 나의 시 풋사과의 주름살을 줄줄 외웠다.

    무릎을 꿇은 채, 메뉴판의 구부 능선을 제 유방으로 덮고는

    가장 비싼 메뉴에 초고추장 같은 손가락을 찍었다. 왼손으로는

    브래지어 끈을 살짝 올렸다가 눈사람 목주름만큼만 끌어 내렸다.

    딱 여기까지라는 듯 가슴 둔덕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안주를 살피려면, 그녀의 젖가슴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이 뒤따름으로

    나는 물레방앗간 옆 산뽕나무처럼 오디 눈동자만 깜작였다.

    오빠 그거! 한번 매상을 올린 그녀는 번번이 과일안주를 대동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교양미 넘치는 시낭송가였다.

    자동차외판원의 애인이란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며 시를 외우는 애인들아.

    아직도 나는, 주춧돌 메고 나가 기둥서방이라도 되고 싶다.

    끝내 시의 용도폐기까지는 따져 묻지 못했지만

    시 한 편이 최소한 과일안주 값은 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메뉴판이 되리라! 나에게도

    뻥뻥 축포가 터지던 시의 역사가 있었다.

     

    - 이정록의 시의 쓸모전문, 계간 시산맥2011년 봄호.

     

    존엄성의 수호자이며 생명의 지킴이 역할을 해왔던 가 효용의 저울대 위로 올려져서 쓸모의 눈금으로 측정되고 상품의 값으로 매겨지는 물신주의 시대의 세속화 현상을 시인은 씁쓸한 눈길로 비판하고 있다. “자동차 외판원의 세일즈와 단골술집 종업원의 매상 올리기를 위한 수단으로써 기능을 충족할 뿐, 대중에게 외면 당하는 것이 다반사인 오늘의 !

    손익계산의 도구로써만 이용되고 효용의 지수를 측정당하는 현장이 어디 외판과 술집뿐이겠는가? “를 전파하는 대표적 미디어인 출판사조차도 를 자본의 값으로 환산하여 맘몬의 도구로 유통시키다가 효용의 지수가 폭락하면 용도폐기를 서슴지 않는다. 시인 유병근이 그의 시 상자는에서 씁쓸한 눈길로 바라보았던 상자속 물건들의 꼬리표가 처연하다. 수요의 그래프에 비례하는 기능의 시한부를 명시한 꼬리표를 이제는 의 몸에 부착해야만 하는가?(도요문학무크 9참조)

    시인의 이면서도 시인의 몸과 동체同體인 시가 자본의 수치數値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오용誤用당하는 오욕汚辱과 수치羞恥를 절실히 체감하고 인내하는 일에서부터 세속화의 질주에 저항하는 시의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세속화의 황무지로 내던져진오늘의 시인은 시가 자본과 상품과 물건의 단계로 물화物化되는 정신의 세속화현상에 맞서 마땅히 시의 본령本領을 지켜낼 수 있다는 가능성속으로 시인의 전부를 내던지는길을 걸어가야만 하리라.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존재의 집이며 실존의 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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