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배우의 얼굴과 덧씌워진 가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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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의 얼굴과 덧씌워진 가면들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한 여인이 일으킨 풍지평파


    ‘선희(정유미 분)’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다. 그녀는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 학교를 방문했고, 오랜만에 방문한 학교에서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첫 번째 남자는 ‘최교수(동현, 김상중 분)’로 그는 선희를 좋아했지만, 선희가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다소 냉정하게 선희를 대하는 남자이다. 최교수는 추천서라는 객관적 글을 통해 선희의 잘잘못을 날카롭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평가는 선희를 불편하게 만든다. 선희는 최교수에게 다시 찾아가 이것에 대해 항변하고, 술자리를 함께 마련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추천서를 받아낸다(억지로 만들어낸다고 해야 한다). 그 추천서에는 미사여구로 가득차 있었다.

    최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린 치킨집에서 그녀는 우연히 ‘초보감독’ ‘문수(이선균 분)’를 만난다. 문수는 헤어진 선희를 잊지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선희를 만났음에도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버린다. 문수는 선희와의 재결합을 원하고, 이러한 희망에 대해 선배 감독인 ‘재학(정재영 분)’을 찾아가 상의한다. 재학은 문수를 이미 싫어하고 있었는데, 문수로부터 선희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더욱 싫어하게 된다.

    선희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재학의 자취집이다. 그녀는 재학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재학은 선희를 보자 반가워하며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한다. 재학과 문수가 만났던 술집에서, 선희와 재학이 만나 술을 다시 마신다(홍상수 영화에서 상황의 반복은 흔한 일이다). 재학은 은근히 문수를 화제로 꺼내 선희의 마음을 떠보고, 선희는 문수와의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도리어 재학과의 친밀감을 강조한다. 그날 밤 선희는 재학과 동침할 듯 하다가, 술이 취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모면한다.



    2. 관객들에게 선희란


    이러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관객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관객들은 선희의 동선을 파악한 상태로, 네 사람이 만들어내는 만남을 구석구석 관찰하게 된다. 선희가 최교수의 추천서에 실망하는 장면을 보고, 우연히 만난 문수에게 근거 없는 희망을 남기는 광경도 목격한다. 당연히 문수가 재학을 만나러 간 이유가 문수만의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거꾸로 선희가 재학을 만나러가서, 재학에게 일말의 희망을 남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추천서를 고치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좋게 만들기 위해, 선희가 최교수를 살짝 유혹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부인하기 힘들다.

    이 작품의 남자들(최교수, 문수, 재학)은 자신들만의 착각으로―홍상수는 그 착각을 공통된 인물 평가로 그린 것 같지만―선희를 대하지만, 실제 선희 역시 남자들의 착각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가령 관심이 없다면 길가는 문수를 불러 세울 필요도 없었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면 유부남인 재학에게 몸을 허락할 듯이 굴 이유도 없었다. 최교수와는 그 이상의 육체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암시까지 남기고 있다(두 사람은 비틀거리면 술집에 나와 어딘가로 가야 했다).

    왜 선희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추천서를 잘 받기 위한 가식적인 행동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문수와 재학을 대하는 태도는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럽다. 문수를 반기는 듯 하면서도 냉랭하게 대하고, 재학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듯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나 버린다. 넓게 생각하면 최교수를 대하는 태도도 양면적 태도로 가득하다. 이러한 양면성은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 ‘위선’으로 치부되었지만, 〈우리 선희〉에서 보이는 ‘선희’의 태도는 한결 가벼워졌다는 변화도 내장하고 있다.



    3. 〈우리 선희〉에서 ‘우리 선희’ 캐릭터란


    그렇다면 홍상수의 영화를 캐릭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우선 이 영화에서 ‘선희 캐릭터’는 어떻게 연기되어야 했을까. 선희의 마음 속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욕구로 가득하다. ‘좋은 추천서를 받아야 하지만, 최교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최교수와 가까워지는 것이 유리한 추천서를 받는 데에는 이롭지만, 그 이후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수는 헤어진 상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할 정도로 먼 사이는 아니다.’ 더구나 자신은 문수의 출세(감독 데뷔)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만날 필요가 있다. ‘재학과는 친밀한 사이이지만, 유부남인 남자와 더 이상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재학은 다가가고 싶지만 자제해야 하는 대표적인 남자에 해당한다.

    간추리자면 선희는 무언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그것이 추천서이든, 타박이든, 옛정이든 간에―남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다가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가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캐릭터여야 한다. 육체적이고 개인적으로 관계로 접근하고 싶은 상대도 있지만,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입장에서는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양면성을 이해하고 있는 캐릭터야 한.

    이러한 상반된 욕구와 사회적 제약 사이에서, 선희에 대한 평가가 작용한다. 최교수의 첫 번째 추천서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과 하는 작업에 익숙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극히 떨어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선희는 이번 기회에 이러한 인식마저 불식시키고자 한다. 자신이 개인적인 역량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역량도 뛰어나다는 점을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녀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동기마저 포함한 그녀의 ‘문어발 교제’는 결국에 꼬리를 잡히지만, 영화는 이 과정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즐겨 선희의 표정을 포착한다.



    4. 선희의 정체, 혹은 그 안의 내재된 이중성


    상반된 연기와 내면 욕구를 소화하기 위해서, 선희는 영악한 여자이면서 동시에 순진한 여자일 수 있어야 했다. 남자들에게 호감을 사면서도 남자들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여자. 자신의 방문이나 호출은 연애가 아니었다고 우기고 싶겠지만, 실제로 그녀가 던져 놓은 불씨는 적지 않은 오해의 산불로 번져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여자이기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는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자신의 본모습을 모르는 여자여야 한다. 자신은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그녀의 원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캐릭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순진한 용모’와 ‘영악한 계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허술하게 만들어버리는 결정적 허점’이었다. 배우 정유미는 이러한 허점을 자연발생적으로 체화한 배우였다고 할 수 있다. 순진무구한 그녀의 외모는 아름다운 찬사(작품 속 인물들에 의한 평가대로) 내에 일종의 백치미를 끌어들일 수 있다. 반면, 매몰차게 돌아서는 모습―가령 문수를 놓아두고 치킨집을 나설 때나 재학의 집 앞에서 몸을 돌려 어두운 거리를 걸어갈 때―에서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중시하는 자만심을 한껏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자만심도 추천서 앞에서는 결국 허물어지고, 저자세로 최교수를 대해야 하는 상황 논리도 감수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녀의 모순은 실제로 그녀가 사회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를 떠날 수 없다는 점에 있으며(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폭넓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는 영화관련 일을 희망한다), 이기적인 면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함에도 순진한 태도로 끝내 호감있는 여자로 남을 수 있다는 허영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는 적지 않은 오해를 남기는 여인이며, 한 명의 남자에게는 ‘로망’이 될 수 있는 여인이지만 다수의 남자에게는 ‘악몽’이 될 수도 있는 여인이다. ‘선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평가 사이에서, 혹은 자신의 실제와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캐릭터여야 했다.



    5. 배우의 얼굴과 덧씌워진 가면들


    〈우리 선희〉에서 배우 정유미는 선희라는 하나의 얼굴 밑에 또다른 얼굴을 예비하는 연기를 수행해야 했다. 선희의 얼굴은 일종의 사회적 가면으로 누적되어 있어, 그 가면 밑에 존재하는 ‘불안’과 ‘영악함’ 그리고 ‘잘못된 믿음에 의한 좌절’을 몇 겹으로 적층시킨 캐릭터였다. 그리고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그 가면이 한 겹씩 벗겨지고, 그때마다 그 다음에 도사리고 있던 가면이 또다른 본모습인 것처럼 연기해야 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러한 가면이 벗겨지는 현상은 흔한 현상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벗겨짐이 곧 다른 가면으로 대체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홍상수 영화 속 인물은 변검의 소유자처럼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진 존재들이다.

    배우 정유미의 순진한 얼굴은 이러한 중첩된 가면을 불안정한 영혼의 이미지로 체화하는 데에 장점을 드러낸 경우이다. 배역의 진짜 얼굴은 우리가 화면에서 쳐다보는 얼굴이 아니라, 영화 내의 주변 정보들이 어우러져 종합적으로 생성되는, 다소 정신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다소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가면의 적층성은 그 아래 도사린 영혼의 형상을 감지하기 어렵다는 말과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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