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바람, 꿈,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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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꿈, 그리고 삶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남진우의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의 마지막 연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어른들을 위한 동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 발표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전 세계 사람들이 그의 은퇴를 애석하게 여길 듯하다. 오랫동안 그는 삶의 비의를 감춘 우화를 통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마음속에도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전한 거장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고, 전쟁과 문명의 위험함을 상기시켰으며,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 각박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인간들이 영욕과 이기심으로 세상이 멸망할지라도, 그곳에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문명과 세상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해 버릴 수 없었던 불안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면, 어른들도 아이들이 되는 것처럼 즐겁기만 했다. 어떤 애니메이션은 다소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과연 이 작품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그의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짙은 호소력을 남기는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
    아이들조차―적어도 내가 관찰한 아이들은―그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대하는 그들의 눈은 진지하고, 그들의 손은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력을 가급적 동원해서라도, 작품 속에 숨겨진 함의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드러내곤 한다. 웬만한 것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거친 나이의 아이들’도, 미야자키 하야오 앞에서는 숨 죽인 어린 양이 되어, 그가 펼쳐 놓은 세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 혹은 ‘소년소녀의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The Wind Rises, 風立ちぬ)〉는 그렇지 않았다. 이 작품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솔직했고, ‘소년소녀의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어른들의 세상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일례로 영화관에 들어온 ‘어린 관객’의 사례를 보자.
    나는 이 작품을 극장에서 관람할 때, 몇 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그동안의 관람 경험을 통해 미루어 보건대, 그들은 절대 낯설지 않은 관객이었다. 그들 역시 이전의 어린 관객들처럼, 그들이 보아왔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애니메이션이 시작되고 한 동안 아이들은 이 작품에 집중하는 듯 했다. 젊은 날의 ‘호리코시 지로’의 동글동글한 모습과 지로 여동생의 귀여운 앙탈을 숨죽이며 지켜보았고, 지로가 ‘달라붙은 꿈’을 통해 비행기 설계사의 길을 가게 되는 벌판까지도 거뜬히 동행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3등 칸 기차를 타고, 바람에 날아간 지로의 모자를 어린 소녀 ‘사토미 나호코’로부터 되돌려받는 장면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리코시 지로가 어른이 되고, 담배를 피우고, 일에 매달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외국(독일과 서유럽)을 방문하고, 한 동네에 살아가는 가난한 아이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그들과 함께 노는 것이 아니라), 착실하게 출세하며 새로운 일을 수행하는 과정 전부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 작품에서 눈을 떼기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는 지로의 시선이 어른의 시선에 가까워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이 영화를 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처음에 그들은 집중하지 못했다. 떠들고, 의자를 삐걱거리고, 안절부절하다가, 결국에는 이유 없이 화장실도 다녀왔다. 어느새 그들은 나갈 시간만을 기다리는 ‘불량한 관객’이 되어 버렸다.
    기존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제히 탄성을 지르고, 숨죽여 다음을 기다리며, 울거나 만족해서 극장 문을 나서는 모습은 사라졌다. 왜일까?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이들의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던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절반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용어와 장면들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지로가 보여주던 어린 날의 꿈은 ‘날고 싶어 하는 어린 관객들의 꿈’과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 꿈을 가로질러 지로가 걸어가는 세상은 어린 관객들이 생각했던 혹은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곳에 어른들의 세상을 옮겨 놓았다. 어른들을 위한 세상에는 막연한 전쟁이나 추상화 된 문명이 놓여있지 않고(가령 〈미래소년 코난〉의 멸망한 세상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고대 유적), 전쟁을 준비하는 가난하고 열등한 일본의 참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는 빵 한 조각의 의미를 따져야 하고, 무엇이 되겠다는 열망만큼 경쟁과 자본의 논리가 심각하게 침투해 있음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흘러간 사랑만큼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들도 한 몫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는 아이들은 당연히 이탈하고 싶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들도 이탈하고 싶은 광경이기 때문이다.


    2. 달라붙은 꿈

    〈바람이 분다〉의 앞부분은 지로의 꿈에서 시작한다. 그는 가내용 날틀을 타고 하늘을 날지만(이 작품에서 지로가 처음 타는 비행기는 마치 ‘자전거’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비행기는 어마어마한 비행선의 공격(비행함대)의 공격을 받고 추락한다. 추락하는 지로의 시선은 의문으로 가득하다. 왜, 그들이 자신을 공격한 것일까?
    대답은 쉽게 찾아지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모른 척하고 지로의 꿈을 펼쳐나갔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충실하게 그려나갔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의 결말까지 그 대답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질문에 관심을 가진 관객들은 일본의 역사와 전쟁의 비유를 결합하여 작품 바깥에서 추론해야 했다.
    그 대답을 잊을 것 같아 미리 하자면, 비행의 꿈은 아름답지만 비행의 끝은 참혹하기 때문이다. 지로가 만들게 되는 비행기는 비상을 향한 인류의 꿈을 간직한 아름다움이었지만, 동시에 그 아름다움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다른 이들을 파괴하는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로의 꿈이 무서운 것은 지로가 처음부터 자신의 꿈의 종말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비상의 끝을 예감한 지로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오프닝에 나타난 지로의 꿈은 문제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래서 지로의 꿈을 다른 이의 꿈과 결합시켰다. 유럽에서 비행기 설계사로 활약하고 있는 백작의 꿈과, 비행기에 몰입해가는 소년의 꿈은 이렇게 만난도록 만들어 그들의 꿈을 달라붙게 만들었다. 그들은 벌판에서 만나 백작이 꾸고 있는 꿈(이 꿈 역시 비행을 향한 인간의 도전과 열망을 보여준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장면은 위태하고 또 자극적이다. 남의 꿈에 들어가 나의 꿈을 점검한다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꿈의 접합을 통해, 아이의 꿈이 어른의 꿈과 다르지 않고, 동양인의 꿈이 서양인의 꿈과 다르지 않으며, 앞선 이의 꿈과 뒤따르는 이의 꿈이 역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백작에게, 사람들에게, 관객들에게, 그리고 소년과 자신에게 동시에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거대한 비행기를 만들고, 그 안에 많은 이들을 태우겠다는 장담은 늘 일정한 실패를 거듭한다. 비행기는 문제를 일으키고 비행은 늘 불안한 마음을 북돋운다.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비행기가 무엇을 위해 쓰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 꿈을 불온한 꿈으로, 나아가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작품 〈바람이 분다〉를 불온한 사상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오랫동안 간직했던 어린이를 위한 꿈을 포기하고, 잔혹한 살상과 폭력으로 얼룩진 비행기 디자이너의 꿈을 미화한 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꿈이 정도를 벗어난 꿈, 즉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닌 세상의 파괴를 옹호한 망상이라고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지로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학을 가고, 제도실에서 연습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연수를 떠나 외국에 가는 과정을 보자. 다른 것을 차치하고라도, 그는 독일에서 비행의 꿈을 산업과 구국의 힘으로 바꾸는 현장을 목격해야 했다. 그들에게 비행의 꿈은 생존의 전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꿈을 훔칠까봐 경계하고 있었다. 꿈이 유출되면 그들은 생존 전략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경계했고, 일본인들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썼다.
    그들의 꿈은 애초부터 함께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유 불가의 꿈을 대한 일본인들(‘지로’ 포함)은 자신들이 언젠가는 그 꿈에서 앞서가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20년을 앞서간 거북이를 언젠가는 따라잡겠다는 인간의 바람처럼, 그들의 꿈은 일견 아름다워 보이지만, 다른 이의 꿈을 추월하겠다는 그 의지 뒤에 도사린 강력한 욕망은 위험해 보인다. 그 위험이 그들을 격추시킬 지도 모른다. 영화는 늘 그 점 역시 경계하고 있다. 세계 제패를 향한 일본인의 꿈이 비행기의 꿈에 탑승하는 순간, 세상은 비행의 재앙에 사로잡힐 것이기 때문이다.

    진주만 공습과 제로센 비행기는 역사적으로 불온한 위협을 의미한다. 세계를 향한 일본의 야욕을 아는 이라면, 일본의 비행기 개발이 불러 올 피해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역사의 불온함을 역사적 단죄로 몰아가지 않고 일상적인 차원의 불안으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 내에는 관객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다수 등장한다.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가 지진과 화재이다. 관동대지진은 낮게 엎드려 진전하는 괴물처럼 슬그머니 땅을 밀며 인간들의 삶을 엄습했다. 가볍게 땅의 거죽이 요동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차는 멈추었고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다. 거리의 집들은 주저앉았고, 집과 집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며 한쪽으로 몰려갔지만, 정작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동경 시내 한편을 태우면서 다가오는 불길은, 흔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전제하는 세상의 종말 풍경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지로와 한 여인 그리고 소녀가 만났다. 지로는 다친 여인을 업었고, 소녀는 지로의 짐을 들었고, 세 사람은 간신히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갔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했지만, 세상으로부터의 불안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고, 미래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알아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간신히 안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전해지자, 그들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에(실제로 지로의 자와 옷은 지로에게 돌아온다), 온 힘을 기울여 상대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들은 헤어졌다. 스쳐가는 바람처럼 상대를 품었지만, 안타깝게도 머물 수는 없었다.
    바람이 불었고, 그들은 살았지만, 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 하나를 놓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이유를 놓쳤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이 다시 만날 때까지.


    3.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로가 다시 만날 상대로 어린 소녀 사토미 나호코를 지목했다. 지로의 날아간 모자를 잡아준 소녀. 지로가 여인을 업을 때 묵묵히 지로의 짐을 들고 따르던 소녀. 어린 여자가 들기에 지나치게 큰 짐을 소녀는 성심성의껏 들고 있었다. 신분은 무척 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업힌 여인으로부터 ‘아가씨’라는 호칭을 듣던 깨끗한 이미지의 소녀. 비록 나중에 알려지지만, 그 이름은 사토미 나호코였다.
    하지만 지로를 한눈에 알아본 사토미 나호코는, 지로가 구해 준 여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녀의 몸종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녀였을 것으로 보이는 여인. 이름도 모르는 이 여인은 결혼하기 이틀 전에서야, 지로의 거처를 알았다고 했다. 실제로 지로의 하숙집에 자와 옷을 가져 온 이는 사토미 나호코가 아니라, 이 여인(업힌 여인)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이틀 앞 둔 여인. 이 여인은 누구보다 지로를 좋아했겠지만, 어쩌면 자신의 약혼을 후회하고 있을 정도로 지로에게 호감을 느꼈겠지만, 그녀는 조용히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다.
    바람처럼 스쳐가며 만났던 인연만으로 자신의 전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때까지의 삶(결혼)을 변경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불었고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 가득 다른 열망과 다른 선택이 꿈틀거렸겠지만, 그 열망과 설렘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믿었을 지도 모른다.
    이 여인의 선택은 오래 기억이 남을 것 같다. 어떠한 마음으로 그녀는 지로의 곁을 떠났을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마음을 직접 옮겨오지 않았다.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고,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쉽게 찾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더더욱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될 수 없었다. 그 상황을 겪어보고,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핑계 삼아 삶을 선택하지만, 그 삶은 반드시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폴 발레리 말처럼 ‘바람이 분다’ 그래서 ‘살아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남진우 말대로 하면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4.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눈치가 빠른 관객들은 지로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지의 여인(기차에서의 만남)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세상의 아슬아슬한 만남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장면을 기다렸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만남이 바람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에서 ‘바람’을 물리적인 소재로 무엇보다 먼저 인식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여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고, 언덕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청년을 지나 장년의 초입에 들어선 지로가 지나간다.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역시 눈치 빠른 관객들은, 그 순간 여인의 눈에 서리는 작은 물기나 숨길 수 없는 흥분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파라솔이 날아갔고, 지로는 외면하지 못하고 파라솔을 잡아야 했다. 바람이 방해를 해서 파라솔은 쉽게 접히지 않았기에, 그는 한동안 낑낑대며 불어온 바람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어떠한 기억과 비슷하다. 바람이 불었고, 모자가 날아갔고, 작은 인연으로 그는 낑낑대며 누군가를 업고 어디론가 향해야 했다. 그때도 그의 가까운 곳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로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찾던 여인을, 바람의 도움으로 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인이 되었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은빛 비행기처럼 서로의 마음을 넘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도 그들의 인생에서는 불안 요소였다. 이 불안을 표현하는 방식은 미야자키 하야오다웠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저녁 식사를 약속한 자리. 지로는 서양인으로부터 일본 패망의 예언을 듣고 우울해진다. 우울한 소식은 잇따라 들린다. 약속을 주도했던 여인이 갑자기 아프다며, 저녁식사를 연기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는 여인의 아버지는 우울한 안색이었다.
    그러자 저녁의 호텔 풍경도 음산하게 변한다. 단란했던 한때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 어디선가 나타난 간호사는 창백한 인상이고,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로 가득찼다. 음산, 창백, 고요, 그리고 우울. 누군가의 부고가 들려올 듯한 적막 속에 세상은 가라앉았다. 이러한 적막은 한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인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은 남자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다음 날은 정반대로 바뀐 분위기로 출발한다. 화창한 날씨, 내려쬐는 햇빛, 그러나 여인의 창은 닫혀있고, 그녀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무료함을 참던 지로는 종이를 접어 비행기를 만든다. 자신이 미래에 개발하게 될 제로센의 초기 모형에 해당하는 비행기는 허공을 나는 듯 했지만, 곧 지붕에 내려앉고 만다. 멀리 갔더라면 잊을 수 있었던 비행기였지만, 가까운 곳에 내려앉는 바람에, 다시 찾기로 한다. 어디선가 익숙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멀리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늘 동경과 아쉬움을 지니고 있지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동경과 아쉬움을 버리고 소유와 집착으로 돌아선다. 지로는 비행기를 되찾기 위해서 발코니로 올라간다. 언뜻 보아도 위태로운 장면인데, 그때 위층 문이 열리면서 사토미의 얼굴이 나타난다. 무너지는 발코니, 허공에 매달리는 지로, 종이비행기를 손에 넣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자, 비행기는 사토미와 지로 사이를 경계 없이 오가게 된다. 그들은 비행기를 날리며 상대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다. 비행기를 움켜지며 상대에 대한 소유와 집착 역시 옮겨진다. 마음으로 그들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인생이 늘 그러한 것처럼. 소녀가 비행기를 잡으려고 애쓸수록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더 많이 내밀어야 하고, 그 만큼 더 떨어질 가능성이 늘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만남은 그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불안과 마주설 수 있을 때에만, 그 무엇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지로가 비행기를 지붕에서 되찾고, 사토미를 향해 날리고, 사토미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반 이상 내밀어 비행기를 손에 넣는 장면은 일상의 불안이 잠재된 장면이다. 이미 흥미를 잃은 아이들일지라도 이 장면에서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이며, 세상을 좀 더 산 이들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천려일실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할 것이다. 이 날의 작은 기쁨이 미래의 더 큰 기쁨을 없애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하지만 이러한 불안은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것이기보다는 어른들의 것이다. 작은 실수로 큰 것을 잃어본 적이 있는 자의 불안.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러한 불안을 옮겨오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도 이러한 불안은 잠재해있다.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히지만, 그 바람은 우리네 삶의 공간에서 꽃병을 넘어뜨리고 종이를 날리고 중요한 무언가를 떨어뜨릴 수 있다. 바람은 불안이고, 그 불안은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지로에게 사토미 역시 그러한 존재였다. 사토미는 아팠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로의 평온한 일상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였다. 사토미로 인해 지로는 선택해야 했다. 비행기를 포기할 것인가, 그녀를 포기할 것인가.


    5. 삶의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들

    이 작품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은 지로와 사토미의 선택이다. 많은 영화들은 자신의 일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사랑하는 이의 옆에 남는 연인들을 보여주었다. 여인의 고통은 남자 주인공의 그 어떤 사명감보다 앞서 절대적인 임무로 여겨졌으며, 남자는 자신만의 세계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여인과의 마지막(혹은 부할)에 동참했다. 이것은 할리우드의 비난할 수 없는 미덕이고, 인간 존엄성의 거부할 수 없는 명제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지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비행을 위한 인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예전 같은 ‘일벌레’로 돌아가 회사에 복귀한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같은 의지를 천명한다. 비행선 제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로 하기도 하고,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의 누이동생이 그러한 오빠―병든 아내를 방치하는 행동―를 나무랄 때, 지로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지로는 사토미를 선택했고, 그들은 부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부부가 되는 이유를 앞세워, 자신들 앞에 존재하는 모든 일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사토미의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가 두 사람의 일상을 보존하는 명분이 되었지만, 실제로 치료를 포기한 이후에도 그들은 각자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로는 아내가 병을 앓으며 누워 있는 방을 나가 회사에 정시에 출근했고, 여느 직장인처럼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돌아왔으며, 돌아와서도 밀린 일을 위해 책상을 앞에 앉기 일쑤였다. 다만 그는 아내 옆에서 일을 했고, 아내는 그러한 남편을 보면서 잠들었다. 어찌 보면 지로가 아내를 위해 해 준 일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손으로 아내의 손을 잡아준 점과, 아내 곁으로 책상을 더 가깝게 가져온 점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아내가 원하는 대로 그의 옆에서 담배를 피운 점이다.
    환자의 건강을 생각하고, 환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지로는 휴가를 내서라도 아내와 함께 지내야 했지 않을까. 담배는커녕 몸에 좋다는 약을 잔뜩 구하러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인생을 선택한다. 지로는 출근을 했고, 사토미는 지로를 기다렸다. 지로는 일을 했고, 사토미는 병을 견뎠다. 그들은 밤을 함께 지새운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로에게 특별하게 해주는 일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시간을 견디며, 어찌보면 그들에게 찾아올 종말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설정 앞에서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들은 요란하게 자신의 선택과 삶을 치장하지 않았다. 환자를 방치하고 있다는 여동생의 말에 지로는 조용히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을 소중하게 보내고 있다고. 그들은 함께 있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을 아끼고 있다고. 한 자 쯤 더 가깝게 다가가서, 조용히 사토미의 손을 잡아주는 지로의 행동처럼, 그들은 견딜 수 없는 불안에 견디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들은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보내주는 법도 알고 있었다. 사토미는 편지 세 통을 남기고 지로의 곁을 떠났다. 지로는 사토미의 결별을 운명적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지로도 사토미도 그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처럼 그들은 서로를 통과했고, 또 멀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로가 만든 비행기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 지로로부터 멀어지는 또 하나의 꿈을 보여주었다. 사토미는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만 남겨두고자 했고, 지로는 사토미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사토미를 찾아가는 지로를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로의 마음은 이미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비행기가 굉음을 일으키며 그를 지날 때 엄습하는 일말의 불안으로, 다른 하나는 더듬거리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전보를 따라 사토미의 집으로 향할 때 흘렸던 눈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동경의 사토미 집으로 향하는 지로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과하지는 않았다. 지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자를 들고 수치를 계산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각혈을 했다는 소식에 불안을 금하지 못하고 한 걸음에 동경으로 향했지만, 아무 것도 더 할 수 없는 이동 시간에는 낮에 하던 일을 마저 하고 했다. 묵묵히.
    다만 한 가지가 달랐다. 계산된 수식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들. 그 물방울은 처음에는 땀이 아닐까 싶었다. 달리고 달려서 덥혀진 몸에서 나오는 물방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물방울은 ‘눈물’이었다. 불행을 예감하고 그 끝을 미리 인식한 자의 그것. 하지만 지로는 담담하게 울고 있었다. 그는 울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뛰어난 연출가는 배우들이 함부로 울지 못하게 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울 수 있도록 만든다. 울음을 절제할 수 있는 배우만이 관객에게 울음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로는 이 장면에서 울음을 아끼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눈물은 값싼 울음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은 사토미의 꿈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꿈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꿈들이었다. 반대로 한 쪽이 무너진다고 해서, 다른 한쪽마저 포기할 수 없는 꿈들이기도 했다.
    사토미와 지로의 꿈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 결정은 지로의 눈물로 이미 공표될 수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갈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열기 위해서 애쓸 것이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될 지라도 언젠가는 바람 부는 언덕에서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꿈들은 실제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의 논리처럼 그들은 어떤 하나로 다른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6. 눈물을 아끼는 배우만이 관객을 울릴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바람이 분다〉는 냉정한 영화이다. 아내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울지 않는 남편, 가족의 문책에도 자신의 논리로 삶을 정리하는 오빠,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만들던 비행기를 계속 만드는 남자. 지로는 속세의 말로 하면 ‘워크 홀릭’이고 ‘비행기 광신자’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일본의 침략 야욕을 도울 것이고, 그로 인해 전 세계를 불안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비행을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내의 요양을 돕기보다는 비행장을 지키는 일을 선택했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선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덧붙이고 싶어 했다. 지로는 기관총을 실을 수 없도록 비행기를 설계하고자 했고, 몇 번에 걸쳐 위태로운 시국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고 있다. 그는 비행이라는 행위 그 자체를 중시했고, 한 마디로 말하면 날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배제해 버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지로를 클로징 씬(closeing scene)에서 한 장소로 초대한다. 자신의 꿈과 처음 접합되었던(달라붙었던) 서양 비행설계사의 꿈 속. 하지만 그곳은 이미 특정 누구의 꿈이 아닌 여러 사람의 꿈의 집합장이 되어 있었다. 서양인이 만든 비행기도 있었지만, 지로가 만든 비행기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아내가 머무는 곳이기도 했고, 그토록 많이 출격했음에도 한 대도 돌아올 수 없었던 전투기의 잔해가 안치된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지로와 그의 아내 사토미, 일본인 조종사들, 서양인 비행 설계사가 공유하는 공간이 되어 있었고, 모든 죽어가는 이들의 꿈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도 지로는 담담했다. 그 흔한 변명도 하지 않았고, 자그마한 후회도 없었다. 전범을 도와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는 자책감도 흘리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세상 사람들, 특히 일본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하고 있고,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예전처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의 작품 내에 뚜렷한 반전 메시지를 담아주기를 바랐지만, 이 바람과 종말의 언덕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의외로 조용했다.
    은퇴작이어서일까. 과감한 생략으로 별도의 설명이나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살아야 한다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했고, 무엇 때문에, 더 살아야 할까. 이 점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대답이 이미 존재한다고 여긴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처럼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 자극을 받고 어느 날 인생을 선회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로에게 불어왔던 느닷없는 바람은 아내와의 만남이었고 결별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에도 불구하고 지로에게는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었다. 그 길 때문에 그는 아내와 다시 못 만날 뻔 했고, 종국에는 홀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도 예기치 못한 바람을 만나곤 했다. 전쟁이라는 바람은 그가 만든 비행의 꿈을 더럽혔다. 가미카제(kamikaze, 神風)라는 특공대가 그 바람을 통곡과 전율의 바람으로 만들었고, 그는 후대인들에게 거북스러운 존재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이렇게 비행을 향한 그의 꿈은 찬사가 아닌 비난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바람도 원래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막지 못했다. 그는 잠시 바람을 맞았지만, 바람이 그치면 가던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비행의 꿈도 어찌 보면 가야할 길을 가야하는 작은 명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지로는 세상에 나온 이후로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아끼고 그 길을 포기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충족 시켰다. 병든 아내를 만나러 가는 시간도, 마음에 둔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인간으로서 해야 한다는 도리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시간도, 결혼을 준비하고 모두의 인준을 받는데 사용해야 했을 시간도, 그는 모두 줄이고 축소했다.
    그는 그 시간에 자신이 세운 길을 가는 데에 전념했다. 책을 보았고, 수식을 계산했고, 마음을 가다듬었고, 아쉬움을 접었다. 그 모든 시간을 아껴 그는 하나의 꿈에 이르는 길을 개척했다. 어찌 보면, 비행의 꿈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다. 꼭 그 꿈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어떠한 꿈이라도 그 길을 가는 그가 탄생했을지 모른다. 그에게는 멈추지 않고 그 길을 뚜벅뚜벅 갈 수만 있다면, 어떠한 길이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바람이 분다〉에서 걷는 장면이 그토록 많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느릿하게 걷고 있다. 느린 소가 그토록 빠른 비행기를 끌어야 하듯, 지로는 느릿한 걸음으로 자신의 꿈을 끌고 가고 있다. 날고, 혹은 날지 못하고, 파괴하고 혹은 파괴하지 않고, 순수한 어떤 것으로 남고 설령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이었고 가는 것이었다. 이 꿈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삶’이라고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그 길을 걸어 온 인물이기에, 이러한 ‘삶’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왔던 길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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