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사랑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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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유적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0. 과거를 대면하다.


    인간이 만든 영화 중에는 ‘아름다운 만남’과 ‘안타까운 이별’을 ‘동시에’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이 의외로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비포 선라이즈(Before Surise)〉는 1990년대 산출된 영화 가운데 유달리 기억에 남는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햇살처럼 반짝이고 기차처럼 저돌적인 남녀가 아름다운 도시에서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새벽이 오기 전에 헤어지는 이야기는, 숱한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 중에서도 남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특히 젊은 날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신비함과 아련함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한 인상은 후속 편 〈비포 선셋(Before Sunset)〉이 나올 때까지 더욱 강렬해지는 경향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청춘남녀의 만남은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고 또 그 만큼 아련하게 포장되곤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포 선셋〉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시간이 갈수록, 〈비포 선라이즈〉는 아름다움 만남의 대명사 격 영화가 되었고, 나중에는 제목만 기억하면서도(내용은 상당 부분 잊어버렸음에도) 주저 없이 추억의 명화로 지명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비포 선셋〉을 보고 난 이후에는, 이러한 기억과 인상이 흩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비포 선셋〉은 의외로 차분하고 예상 밖으로 냉정한 영화였다. 과거의 기억과, 기억 속 인상이 바뀌면서, 어쩌면 과거에 보았단 영화가, 혹은 현재 기억하고 있는 영화가 〈비포 선라이즈〉 그 자체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야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비포 선셋〉을 보는 순간, 〈비포 선라이즈〉가 아름답운 영화만이 아닐 수 있음(혹은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뒤져, 과거와 그 기억을 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2004) 그때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고, 아련함도 있을 것이며, 신비함도 덧붙여질 수 있을 것이고, 응당 안타까움이 공존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1995)의 아름다움과 아련함과 신비함과 안타까움을 따질 게재가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기억 속의 두 영화는 점차 뒤섞여갔다. 〈비포 선라이즈〉의 청순함이 이 영화의 본질인지, 〈비포 선셋〉의 노련함이 이 영화의 본질인지 잊었다. 아니, 굳이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9년의 시간이 흘러, 〈비포 선셋〉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돌아볼 만큼의 시간이 지났고, 기억 속 영화들이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이 되어 현실로 돌아왔다. 〈비포(Before)〉 시리즈의 제목대로 한다면, ‘일출’에서 ‘일몰’로 그리고 ‘자정’으로, 영화 속 시간은 줄기차게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 간격만큼 세상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고, 내 안의 시간도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작품을 돌아볼 여가가 없을 정도로 일상의 시간은 빠듯했고, 쫓기듯 해치우듯 그렇게 〈비포 미드나잇〉을 보아야 했다. 이 시리즈의 미덕은 상당했다.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비포 미드나잇〉은 지나간 기억도 함께 불러냈기 때문이다. ‘비엔나’를 헤매는 두 사람과 ‘파리’를 탐방하는 두 사람에 대한 기억도 살아났고, 그들이 나누었던 대사도 어렴풋하게 되살아났다. 그들의 인생만큼 달라진 나의 삶도 영화에 대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새벽만큼 젊지도 않고 저녁만큼 기대되지도 않지만 아직은 자정의 여유로움을 아는 내 삶의 시간이 이러한 방식으로도 측정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과거에는 일부로 기피했던 몇 가지 사실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앞의 두 작품은 젊고 발랄하고 또 영리하지만, 두려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의 영화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의 실체를 어렴풋하게 파악하게 되었고, 그 두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안도 약간은 터득한 상태이다. 그래서 다시 두 영화를 살펴보기로 작정한다. 젊은 날의 나약함과 치기가 새어나와, 나의 젊은 날이 상당 부분 부정될지라도 한 번쯤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기억’ 때문일 것이다.



    1. 아들을 배웅하다


    남자는 허름한 공항에 아들과 함께 서 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아들은 건성으로 듣는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들을 향한 ‘아부’처럼 들리고, 아들은 이러한 아부에 은근히 익숙한 듯 거만한 태도이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아버지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미안함을 양해하려는 듯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 쪽은 말하고, 한 쪽은 듣는 대화를 일방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온전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도착한다. 그 장면에는 ‘소년의 엄마’와 ‘소년의 거절’이 도사리고 있다. 아버지가 연주회에 오겠다는 제안을, 소년은 보류해달라고 부탁한다. 소년 자신은 연주회가 아닌, 보통 주말에 아버지가 다녀갔으면 하는 의견을 피력한다. 일반적인 아들이라면 자신의 연주회에 아버지가 참여하기를 희망할 법도 한데, 이 소년은 색다른 부탁으로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든다.


    소년의 부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이혼한 부인―가 서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출발한다. 둘(아버지와 어머니)은 사이가 좋지 않고, 둘의 광경(다투는 광경)을 보는 것은 소년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소년의 부탁 아닌 부탁―연주회에 오지 말아달라는―은 남자를 마음의 자책으로 몰아넣었다. 소년에게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가책이 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가책이 다른 누군가에게 번져나가면서, 예기치 못한 사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부부라면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교묘한 복수’를 할 수 있다. 이 복수는 상대방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제 3자는 곁에 붙어있다고 해도 좀처럼 눈치 챌 수 없다. 〈비포 미드나잇〉의 관객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이 된 ‘우리’는 차 안에서 이어지는 남자(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떠나보낸)와 남자의 부인(남자가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한) 사이의 대화를 심상하게 넘길 수밖에 없다.


    남자는 공항 바깥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며, 떠난 아들이 남기고 간 ‘마음의 부채’를 아내에게 전달한다. 자신이 소년(아들)을 돌봐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곧 아내의 심기를 건드린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제 3자로서의 관객에게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민감한 이야기인지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의 당연한 반응―아버지로서 아들을 떠나보내고 느끼는 섭섭함―에 지나치게 여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해버린다. 이러한 생각 역시 이어지는 우스운 해프팅 앞에서 잊혀 진다. 잠자던 그들의 쌍둥이가 깨어나고―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쌍둥이 딸이 있다―그녀들은 곧 ‘부모의 혼’을 뺏어간다.


    혼을 빼앗기기 이전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요약해보자. 남자는 운전을 하고 여자는 옆에서 말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여자의 말로 차안이 가득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어이없는 이유로 무산된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힘 있는 자리로 이직해서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투정하고 있다. 오랫동안 설득하여 건설할 예정이었던 풍력 발전 시설이,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심정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상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주저하던 스카우트 이직 건을 공공연하게 공표한다.


    이 대화는 은근히 공격적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자신의 입장을 통해, 전처의 아들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갈 수 없음을(다시 말해 자신이 희생될 수 없음을) 공표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내의 대화에서, 남편의 역할은 의외로 간단하다. 왜냐하면 들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의 말에 이성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뜻이다. 이럴 때 남편은 혼란스러워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상대가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판단을 내리려 하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개의 아내는 실제로 그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포 미드나잇〉의 자동차 안 대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는 내일이 되면 풍력 발전 사업을 이끌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바쁠 것이고, 힘은 얻겠지만 성격이 고약한 상사 밑으로 이직하겠다는 생각을 철회할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들어주던 남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아내의 생각이 잘못일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계속 불어넣고, 결국 이러한 그의 의견 표출은 아내의 고집스러운 관철―자신이 즉흥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며 오랫동안 고민했던 이직이라는 증거―을 강화하는 구실만 만들 따름이다.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면 일단 남편은 아내와의 대화에서 큰 규칙을 어긴 셈이 된다. 들어주는 사람으로 남았어야 했는데, 그 경계선을 넘어서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 잘못한 것은 아들 이야기를 통해 아내의 부담을 가중시킨 점이다. 아내는 전처의 아들에게 이미 정성을 쏟고 있음에도, 아들 곁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아들의 성장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말은 아내의 심적인 반발을 사고 만다.


    남편과 아내의 소리 없는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포 미드나잇〉은 공항을 나온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줄리 델피 분)의 시끄럽지만 일상적인 드라이브가 실제로는 부부싸움의 발단임을 정확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 본 제 3자도 사소한 대화가 부부싸움의 큰 불씨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터였다. 놀라운 일이지만, 당사자도 가끔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셀린의 말처럼, 그들의 사연이 언제 비극으로 발전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여럿이서 둘러앉다


    제시와 셀린이 돌아온 숙소 역시 잠재적 불씨를 떠안고 있는 장소이다. 축구를 하는 사람들, 환담을 나누는 소설가들, 부엌에서의 농담들, 젊은 연인들, 뛰노는 아이들, 파란색 바다와 시원한 바람, 그리고 넉넉한 저녁 식사가 함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씨는 더욱 보이지 않는다.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 석조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저녁 테이블. 그곳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 함께 저녁을 먹는다. 저녁보다 더 좋은 점은 그곳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다. 그들의 대화는 복잡하지 않게 이루어진다.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는다. 젊은 사람들은 로맨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중년들은 지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이 든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요약하여 들려주려 한다. 모두 현실의 있는 것들 그대로이다.


    영화는 테이블에서의 대화를 오랫동안 주시한다. 특별히 편집 기술을 추가하지 않고 특수한 상황을 삽입하지 않았으면서도, 관객들의 시선을 오랫동안 잡아 끌 무언가를 축적할 줄도 알았다. 일반적으로 대화 장면이라고 하면, 5분을 넘기 힘든데, 이 영화는 그 몇 배의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대화 상황 전체가 어색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대화 내에 유머도 있고, 경험도 있고,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자유분방하다. 서로에 대한 찬사와 상대에 대한 기쁨을 늘어놓은 형식적인 대화도 있고, 젊은 남녀의 연애 스토리를 캐묻는 구체적인 질문도 있다. 넌지시 성적인 농담과 궁금함을 풀어놓기도 하고, 치기어린 환상이거나 지나친 기대일지도 모른다는 폭로도 곁들이고 있다. 다른 커플을 향한 자랑도 있고, 자신의 파트너를 향한 험담도 있다. 모든 것이 현실과 상당히 닮아 있다. 그래서 신기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대화를 저렇게 나누지만, 영화에서도 저러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좀처럼 확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더 정확하게 말하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비포〉 시리즈가 들려주었던 과거의 대화들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 역시 주로 대화에 의존했던 작품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두 영화에서 자극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서로의 마음을 넘어 육체까지 탐하는 두 남녀가 만났다는 것과 그 만남은 뒷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회적인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였다. 그 밖의 것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전부라고 할 만하다.


    〈비포 미드나잇〉이 앞선 두 영화와 다른 점이 대화 구성 방식이다. 앞선 두 영화가 두 연인만의 대화로 점철되는 특징이 있었다면, 〈비포 미드나잇〉에는 다양한 연인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인 다중적 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영화는 두 사람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두 사람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카메라는 정말 특별한 것이 없는 방식으로 두 사람(제시와 셀린)을 포착하고 있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8명 중 두 명이며, 네 쌍의 커플 중 한 커플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는 두 사람씩을 함께 포착하는 ‘투 쇼트(two shot)' 방식으로 한 커플씩을 포착하고자 했다. 셀린과 제시 역시 시종일관 투 쇼트로 함께 묶인 상태로 포착되며 서로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근접거리로 촬영된다. 맞닿은 어깨와 사선으로 포착되는 시선으로, 상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근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근거리(至近距離)는 두 사람의 물리적 영역을 생성시킨다. 낯선 군중들 틈에서―아무리 6주 동안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생활하다 보니 상대를 보호하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영토권이 저절로 생성되기 마련인데, 그 영토권을 카메라는 테이블 위해서 설정한 셈이다.


    따라서 제시와 셀린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웃 부부들)과의 소통 행위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결속과 안전지대를 확인하려는 결속 행위이기도 하다. 부부의 행동은 두 사람을 ‘한 팀’으로 묶어주며, 설령 상대의 험담을 늘어놓는 상태라 해도 한 팀으로 전체에 포함되려는 의도를 지니게 된다.


    동물들은 자신의 영토권을 획정 짓기를 즐긴다. 개는 헛간의 문턱을 넘은 이방인의 자취에 엎드려 있던 고개를 세우고 경계 모드로 진입한다. 개에게 헛간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최소 방어선인 셈이다. 기러기는 낯선 동물이 일정 거리 내로 진입하는 순간 이륙하고(이륙거리), 얼룩말은 사자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도망가야 하는 거리를 따로 설정하고 있다(도주거리). 이러한 거리들은 포유류뿐만 아니라 동물 전체 혹은 식물들도 가지고 있다.


    다시 식탁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식탁에서의 대화는 도주나 이륙을 느껴야 할 정도의 위험이 도사린 상황은 아니다. 그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고, 근본적으로 서로 경쟁하거나 시기하는 무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보호 본능은 자신과 타인을 나누고, 자신의 무리와 타인의 무리를 나누기 마련이다.


    제시와 셀린은 낯선 그리스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부부임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자리 배치와 카메라 쇼트로 확인된다. 식탁에서의 대화 역시 대부분 부부 별로 이루어지고 있어, 실제로는 8명이 아니라 4팀이 둘러앉은 셈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 점을 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제시와 셀린은 하나의 단위로 포착되며, 반대로 말하면 다른 부부들 역시 하나의 단위로 상정되고 있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에서 나타나는 비엔나나 파리의 군중도, 제시와 셀린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외부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영화는 외부의 힘을 카메라 안으로 옮겨오는 것에 무관심했다. 당연히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외부의 힘과 맞서는 장면 역시 창출하지 않았다. 두 작품에서 제시와 셀린은 고립된 섬처럼 영화 내부에 떠돌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인력(끌림)과 척력(헤어짐) 사이에서만 고민했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두 사람의 힘만으로 자신들의 삶을 추동할 수 없음을 아는 상태이다. 일찌감치 카메라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전처의 아들인 ‘행크’를 그들의 대화에서 도저히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고―행크의 존재는 제시와 셀린 사이의 균열점으로 작용한다―그들이 낳은 쌍둥이 역시 그들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행크는 계속 두 사람의 대화 내용 내에 떠돌고 있으며, 쌍둥이들은 좁은 차 안에서 그들의 시선에 포착되고 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주고받아야 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영화라면 주인공 두 사람만의 대화나 상호작용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은 다소 특수한 영화이기도 하고, 매우 집중도가 높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과거의 설정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성숙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제시와 셀린의 삶이 변했고, 그로 인해 두 사람만의 세계를 갖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호젓한 시골길을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를 돌아보자. 누구를 탓할 것도, 야단칠 것도 없다는 말을. 그 말은 신화의 땅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자정까지 시간을 보낼 때까지, 한동안 그들은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뒤집어 말한다면, 한동안 그들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고, 그 부재하는 시간이 〈비포 미드나잇〉을 탄생시켰다고도 할 수 있겠다.



    3. 둘이 걷다


    숙소에서 맞이한 저녁식사 풍경이 〈비포〉 시리즈의 변화된 구성에 해당한다면, 호텔로 가는 여정은 〈비포〉 시리즈의 전형적 구성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시와 셀린은 18년 전 비엔나를 걸었던 것처럼, 그리스 남부의 작은 마을로 난 길을 함께 걷는다. 그 길 끝에는 그리스 여정의 최고 낭만이 될 둘만의 호텔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길을 따라 걷는 과정을 따른다. 처음에 길이 보였고, 그 길 틈으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위의 풍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대화에 열중해 있다. 18년 전의 비엔나나 9년 전의 파리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크게 달라진 점도 적지 않다.


    처음에는 외모가 가장 달라졌다고 여겨졌다. 청순했던 소녀 ‘줄리 델피(셀린 역)’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살짝 나온 배, 커진 얼굴, 처진 눈밑. 과거의 맑고 빛나던 20대의 처녀는 사라지고, 자신이 머리가 빠졌다고 천연덕스럽게 떠들 수 있는 40대의 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동행한 남자 ‘에단 호크(제시 역)’ 역시 비슷했다. 처녀들의 방심을 사로잡던 준수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기 힘들었다. 보기 좋게 양보해서 얼굴 윤곽 정도만 달라졌다고 인정해도,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아우라만큼은 상당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도록 변화되어 있었다. 남자는 그 옛날의 청년처럼, 한 여자만 집중해서 바라보는 눈길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외양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더 이상 로맨틱하지 않았다. 18년 전 비엔나에서의 만남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던 열정과 사랑에 대한 맹목성을 보여주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열정에 사로잡혔던 그들은 절박했고, 서로를 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18년 지난 후 두 사람은 예전처럼 절박하지 않았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농담과 섞어 말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그들이 걷는 길을 유적 사이로 난 길로 설정했다. 예전같으면 ‘사랑의 미로’처럼 화려했을 그 길이, 이제는 폐허 위에 난 황량한 길로 변해 있었다. 어느새 관객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달라진 세월, 달라진 자아, 달라진 화두에 적응해야 했고, 보너스처럼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그리스 유적의 황폐한 모습에도 적응해야 했다. 두 사람은 이제 삶의 연륜을 얻어 바깥의 풍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비포썬라이즈〉에서 비엔나의 도시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그 광경은 관람자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그러한 풍경을 간과했다기보다는, 관람자들이 맑고 청순하게 빛나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두 사람 바깥의 풍경은 거리의 풍경처럼 스쳐 지나가도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비엔나에 내린 두 사람이 겪은 하나의 삽화가 문득 생각난다. 두 사람은 길가의 남자에게 길을 물었고, 두 남자는 갈 곳 몰라 하는 두 남녀를 자신들의 공연장으로 초청했다. 공연은 흥미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두 남녀는 그 공연장을 찾아갈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비포썬라이즈〉에서 두 사람은 대관람차를 타고 거리에서 점(占)을 보고 술집에 들어가 잔을 훔치는 일로 공연 관람을 대신했다. 셀린이 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음에도 그들은 극장에 가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 왜 그러했을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을 본다는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들의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위미한 시간 낭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삽화는, 현재의 제시와 셀린이 호텔로 가는 여정과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역시 대화에 열중하고 있지만, 그들이 대화는 온전히 상대에게 향하는 것이기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세상으로 광대하게 산포된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변했고, 그러한 변화는 대화의 내용을 통해 관람자에게 공개된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재구해 보자. 셀린은 18년 전처럼, 현재 (‘아줌마’가 된) 자신을 기차에서 만나면, 예전처럼 함께 내리자고 할 거냐고 제시에게 묻는다. 18년 전의 청순한 처녀가 아니어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시는 즉각 대답한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즉각적인 대답은 셀린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다. 과연 40대의 제시가 기차 안에서 만난 40대의 셀린을 선택할까. 셀린은 다시, 동일한 질문을 제시에게 던진다. 진중하게.


    제시는 셀린의 말을 농담처럼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다. 셀린이 원하는 대답은 아마 ‘로멘틱한 답변’일 것이다. 예전처럼, 변함없이, 충분히 아름다운 너에게 함께 내리자고 할 거라는 식의 답변일 것이다.


    18년 전 기차에서 만나는 장면을 되짚어 보면, 제시가 셀린과 함께 내리기 위해서 교묘한 언변을 말 그대로 쏟아붓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셀린의 미래의 남편 후보 중 하나일 수 있는데, 이대로 헤어지면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셀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18년 후의 제시는 아내가 원하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회피하고 교묘하게 말을 돌릴 줄 아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셀린의 질문이 “너도 나이를 먹었으니 과거처럼 예쁜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말라는 말이냐고” 눙쳐버린다. 제시는 아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아내가 속내를 추궁하려는 자세를 취한 셈이다. 이러한 추궁 역시, 처음 들을 때는 제시의 공연한 농담을 여겨지지만, 이 농담 비슷한 언질은 곧 비수가 되어 상대를 향하게 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과거의 대화와는 그 양상이 달라져 있었다. 18년 후의 대화는 상대의 마음 언저리를 겉돌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에도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 그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걸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가는 길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길의 의미는 작중 현재에서도 유지되는 듯 했다. 그들은 로멘틱한 밤을 보내기 위해서 호텔을 찾고 있고, 그 호텔에서 과거 9년 동안(길게는 18년) 잃어버린 서로에 대한 감정을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길을 원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동시에 그들은 서로에게 멀어질 수 있는 길도 예비하고 있었고, 그럴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서 그들은 많은 풍물을 만난다. 황량한 길에 서 있는 ‘다 쓰러져가는 담벼락’을 보기도 하고, 저질 농담 속의 동물인 ‘염소’를 만나기도 한다. 작은 마을에 들어서면 ‘길 가는 사람을 보고 짓는 개’를 만나게 되고, 작지만 오래된 ‘예배당’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들은 그 예배당에 들어간다. 18년 전처럼. 과거의 그들은 웅장한 예배당에서 서로에 대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18년 후의 그들은 교회에서 농담과 불순한 행위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위압감을 벗어던진 후였다. 그래서 18년 후의 예배당은 클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장면들을 모아보면, 작가가 새로운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스를 선택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제시와 셀린이 걷는 길은 ‘후락한 길’이고, ‘작은 길’이다. 비엔나나 프랑스처럼 ‘웅장한 도시’가 아니고 ‘세련된 길가’일 필요가 없다. 그들의 발에 걸리는 거리는 좁고 누추한 그들의 삶과 유사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의 배경은 그야말로 폐허가 된 삶의 유적이어야 했다. 18년 전의 비엔나처럼 아름다울 필요도 없고, 9년 전의 파리처럼 고풍스러울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리스는 수 천 년 된 신화와 비극이 잠재된 공간이며, 도시 곳곳에 과거와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제시와 셀린의 사랑을 이러한 공간 배치와 도시 이미지에 비유한다면, 오래되고 낡은 이미지로 유적처럼 서 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18년 전에 만나 뜨겁게 사랑했고, 9년 전에 재회하여 결혼에 돌입했지만, 그들 앞에는 무수히 많은 ‘삶의 복병’들이 숨어 있었다(이 영화는 그러한 암시를 숱하게 남기고 있다). 아침에 떠나보낸 전처의 아들이 그러한 존재이고, 사랑스럽지만 거추장스럽기도 한 쌍둥이 딸 또한 그러한 존재이다. 심지어 자신이 늙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인생을 방해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제시에게는 셀린, 셀린에게는 제시―가 그러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들은 분명 상대와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과연 찬란했던 햇살처럼 자신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 사랑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 사랑이 지금은 무너진 폐허가 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지도 모른다.



    4. 한 방향을 바라보다


    호텔에 도달한 그들이 첫 번째 할 일은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다. 한가한 노천 카페에 앉아 그들은 맞은 편 산등성이 너머로 지는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에서 셀린은 넘어갈 듯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해를 바라보며, ‘아직 있다(still there)……, 아직 있다……(still there), 갔다(gone)’ 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한가한 풍경이다. 두 남녀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가장 옥죄는 자식들로부터 해방되어, 호텔 카페의 의자에 앉아 아무 할 일 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도 방해할 일도 없는 오롯한 두 사람만의 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에 어린 슬픔을 느낀 것은 착각일까. 두 사람이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 중에 한 가지가 이 장면의 슬픔을 부채질한다. 제시는 호텔로 떠나기 이전에 숙소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제시에게 전하는데, 제시는 이 이야기를 호텔로 오는 길에 셀린에게 해준다. 그러면서 56년 동안 더 살아야 자신들이 할머니 내외만큼 살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상대에게 묻는다. 우리가 앞으로 56년을 더, 함께 살 수 있을까.


    산등성이로 지는 해는 어떤 이의 죽음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죽은 이에 대한 추모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단순하게 석양이 지니는 한가함으로 볼 수도 있고, 〈비포 선라이즈〉의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출의 반대 의미나, 〈비포 선셋〉의 절박했던 상황을 연상시키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8년의 세월에 밀려 아름다움을 잃은 셀린의 마음 속 회한이라고 의미 부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해석도 가능한데, 그 어떤 해석도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이 반환점을 돌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보인다.


    일출이 새로운 출발 혹은 미래에 대한 기약이었다면, 일몰은 하루의 절반을 통과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그들은 40이라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았고, 연애 18년 차 결혼 9년 차의 환란의 시기를 넘어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생애의 절반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함께 했고, 남은 절반의 생애에서도 함께 하려고 마음 먹고 있다. 무언가의 절반이 지났거나 무언가의 절반만 남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시점이 일몰 무렵인데, 그 일몰의 시간이 그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상기시키고 있는 셈이다.


    ‘Still there’은 아직은 그러한 시간 속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아직은 자신들이 자신들이 바라볼 수 있는 모습 속에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가버리면(gone), 그들은 자신들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노천 카페에서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예전처럼 말을 빨리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호텔로 오면서 보여주었던 수다스러움도 잠시 수그러진 상태였다. 이것은 〈비포〉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도, 특이한 구도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비엔나를 누비면서 숱한 말들을 했다. 어떤 말들은 촌철살인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8년 전의 그 장면을 다시 보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한 말을 복잡하게 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로맨틱한 말들을 이제는 수용할 수 없다고 자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응이 어떠한 어떠한 반응이든, 그 시절의 말들이 활기차고 아름다워 보인지언정, 석양 무렵의 노천 카페의 ‘침묵’처럼 무게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삶의 비의와는 거리가 있는 말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카페에서의 침묵은 세월의 무게와 달라진 모습을 상징한다. 어쩌면 성장이고, 성숙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노쇠이고 정체일 수도 있겠지만.



    5. 마주보고 싸우다


    석양 무렵의 카페에서도 그러했고, 저녁 무렵 식탁에서도 그러했고, 심지어는 가벼운 언쟁을 벌였던 차 안 풍경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때까지 제시와 셀린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풍경을 볼 때도 그들은 나란히 앉아있었고, 여러 부부들과 시시한 농담을 하면서 탐색전을 벌일 때도 그들은 나란히 앉아있었다. 아이들을 뒤에 재우고 운전을 할 때도 그들은 나란히 앉아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거의 제시와 셀린은 한 방향을 주시하기보다는 서로를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한 곳에 앉아 다른 한 쪽을 바라보는 ‘동지’가 되었고, 의외로 서로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줄어들었다. 호텔은 한 방향을 주시하던 이들에게 서로를 주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호텔에 들어간 셀린은 깨끗하고 편안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방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이 방은 셀린의 시선을 따라 이중으로 된 구조를 공개한다. 한 쪽에는 침실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거실이 있다. 두 공간은 그 기능과 작은 경계선으로 나누어진다. 침실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라면―부부 간의 섹스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라면―거실은 소파로 인해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다. 거실은 간단한 주방과 연결되고 그 주방의 끝에 출입문이 있다. 침실에는 작은 욕실(화장실)이 있고, 그 욕실은 반 폐쇄 구조로 되어 있다.


    두 사람이 호텔 방에 들어와 첫 번째 한 일은 방을 확인한 일이고, 그 다음 한 일은 섹스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침실 바깥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셀린에게 다가간 제시는 자연스럽게 셀린의 상의를 벗기고 애무를 시작한다. 셀린 역시 남편의 오래된 손길을 느끼듯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들 말대로, 호텔 방에는 그들이 잠자는 침대 위로 뛰어들 아이들이 없었고, 이곳에서 그들을 방해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은 이러한 아무런 방해꾼도 없는 상황에 대해 익숙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오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열정적인 섹스로 돌입하지 못하고 무언가 미적거리는 인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섹스에 열중하기보다는, 부부사이의 섹스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이때 한 통의 전화. 이 전화는 미국으로 출발한 아들이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런던에 도착했다는 확인 전화였다. 이 전화로 인해 셀린은 남편과 함께 있던 침실에서 벗어나 거실로 향하게 된다. 거실에 놓아두었던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명분은 함께 있던 남녀(제시와 셀린)의 동선(blocking)을 합법적으로 분리시킨다. 이제 카메라는 침실만이 아니라, 침실의 제시와 거실의 셀린을 나누어 포착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투 쇼트(two shot)가 아니라 각각의 원 쇼트(one shot)로 포착되며, 그들은 화면 상에서 서로 분리되기에 이른다.


    분리된 시점부터 두 사람의 보이지 않았던 전쟁은 수면 위로 올라온다. 발단은 아들의 통화를 제시에게 바꾸어주지 않으면서 촉발된다. 비행기가 출발할 때 아들이 걸었던 전화를 역시 넘겨받지 못했던 제시는 가벼운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이 불만 토로가 셀린에게는 단순하게 느껴지고, 셀린은 공항에서 돌아오면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만다. 제시의 입장에서는 다시 꺼내는 것이겠지만, 셀린의 입장에서는 못 다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셀린은 제시의 아들 때문에 자신이 시카고에 돌아가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제시 역시 느닷없는 셀린의 공격에 자식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입장으로 돌아가 맞받아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아마 경험하지 않은 이들도 알 것이다.


    카메라는 서로에게 점차 독설을 날리면서 부부싸움에서 승리하는 두 사람을 점점 더 멀어지는 원 쇼트로 포착한다. 침실과 거실에서는 거침없는 전쟁이 시작되고, 침실의 공간은 두 개로 점령된 채 각자의 점령군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다. 이것은 흥미로운 스테이징(staging)이다. 부부싸움에서 의외로 중요한 것은 공간과 거리이다. 두 사람은 두 개의 공간에서 최대한 거리를 벌린 채 상대의 양보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견디다 못 한 제시가 침실을 포기하고 거실의 소파로 이동하면서 화해를 신청한다. 제시의 이동 장면은 두 개로 나누어져 있던 카메라 쇼트를 한 화면으로 모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제시는 셀린 옆에 앉지 못하고, 셀린과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의 끝에 앉는다. 그로 인해 투 쇼트로 포착된 화면 내에서 왼쪽의 제시와, 오른쪽의 셀린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 거리가 ‘부부싸움의 거리’이고, 오전부터 오고가던 ‘설전의 차가운 분위기’를 화면 내에 형성시킨다.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부부생활 내내 유지되는 거리이다.


    제시의 화해 전략에도 불구하고 셀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주방 식탁으로 물러난다. 그녀는 차를 타 마시는 척하면서(결국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 제시의 옆을 피해 거실의 다른 쪽 끝으로 이동했다가, 결국에는 방을 나가기까지 했다. 흥미 있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쳐다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의 이동과 거리 조절만 살펴보아도,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은 각 가정에서 드물지 않게 펼쳐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 역시 크게 기억할 필요가 없다. 제시와 셀린이 싸우는 것은 표면적으로 ‘아들의 양육’과 ‘이직의 곤란’ 때문이지만, 반드시 그것이 부부싸움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삶은 다양한 의견 차이를 불러오고, 그 차이는 부부싸움의 무한한 원천 재료가 되기 마련이다.


    제시와 셀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로 다투었고, 자신의 자존심까지 드러내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툭하면 꺼내는 이유 중 한나가 배우자의 ‘외도’이다. 셀린은 자신의 처지(아이를 돌보는 과정)를 과장하면서 남편의 외도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고(평소라면 묻지 못했을 사연), 이에 자극을 받은 제시는 셀린의 부정을 어떻게든 인정하게 하려는 치사한 질문마저 감행한다.


    이 부부싸움이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 내용이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연들이니, 새롭다거나 특이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사소하고 치사하고 편협한 부부의 일상을 그처럼 로맨틱하다는 〈비포〉 시리즈의 최종 결과물(지금으로서는)에 과감하게 끼워 넣은 시도이자 모험적 발상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끼워 넣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오전의 공항 배웅이나, 저녁 테이블 위에서의 가벼운 힐난, 호텔로 오는 길에 나누었던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대화가 모두 ‘이 끼워 넣을 부부싸움’을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제시와 셀린은 부부싸움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일상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직장에서의 실망(추진했던 사업이 무산된), 전처의 아들에 대한 이중적 감정(사랑스럽지만 거추장스럽기도 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아버지로서 무책임하다는 자책), 가사 노동에 대한 불만(힘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평하다고 할 수 없는), 배우자에 대한 실망(외도의 흔적에 대한 강한 의혹)이 한꺼번에 녹아서 서로를 향하는 감정의 찌꺼기로 남게 되고, 이 찌꺼기는 부부싸움을 통해 감정의 응고물로 굳어지고 만다.


    〈비포〉 시리즈의 백미는 아름다운 그리스의 풍경도, 감미로운 밀어도, 안락한 한 때의 정서도 아니다. 석양 무렵에 놓인 두 연인의 오래되고 설명되지 않는 이중 감정. 분명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지만 가끔은 아니 상당히 자주 밑바닥까지 드러내며 싸울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직시하는 것, 그것이 〈비포 미드나잇〉의 정점이었다. 그들은 결국 로맨틱해야 할 호텔에서의 정사가 아닌, 상대에 대한 감정적 얽흐러짐을 뒤로 한 채, 헤어져야 했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니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상투적인 저주도 내려졌다.


    만일 로맨틱 코미디 류의 멜로 영화를 상상했다면 이것은 최악의 결말에 근접했다고 해야 한다. 로맨틱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로맨틱한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한 기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예쁘지도 않고 핸섬하지도 않은 중년의 두 남녀가 아름다운 기억마저 지워버릴 듯 하기 때문이다.



    6. 천천히 멀어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은 곧 다시 만난다는 점이다. 그렇게 싸우고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만난다. 셀린은 떠나지 않았고, 제시는 버티지 않았다. 그들은 석양 무렵의 카페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시는 18년 전의 기차처럼 셀린에게 다가갔고, 셀린은 못이기는 척하고 제시를 따라 호텔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천천히 멀어질 것이다. 이 영화의 전언이 어떠하든 간에, 부부는 천천히 멀어진다. 그들은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고, 그들은 천천히 멀어지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다르다거나 같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부부는 빠르게 만났다가 천천히 멀어지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멀어짐에 대해 〈비포 미드나잇〉은 아직 할 말을 다하지는 못했다.


    만일 이 〈비포〉 시리즈의 후속작이 더 존재한다면, 아마 그것은 멀어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부부로 산다는 것은 그 멀어짐에 어떻게든 적응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에는 찬란했던 한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유적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결국 〈비포〉 시리즈는 ‘사랑’의 찬란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그 감정의 유적으로 남는 삶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단정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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