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느와르 영화의 계보와 새로운 조폭 영화


  • 느와르 영화의 계보와 새로운 조폭 영화

     

     




    김남석(부경대 국문과 교수/영화평론가)

     

     



    1. 한국형 느와르 영화의 계보와 <범죄와의 전쟁>

     

    1994년 개봉된 <게임의 법칙(Rule of the game, 1994)>(장현수 감독)은 ‘한국형 느와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어둠의 세계에 뛰어들어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용대, 박중훈 분), 그 젊은이에 의해 이용당하는 주변 사람(태숙, 오연수 분), 이 젊은이를 이용하려는 주변 사람들(만수, 이경영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불가사의한 사랑, 조직의 냉혹한 논리, 난무하는 폭력, 법칙처럼 찾아드는 젊은이의 죽음. 이러한 일련의 서사는 암흑가를 상징하는 검은 색과 어둠을 직시하는 카메라의 힘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고, 한국 영화로 하여금 새로운 색깔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후 느와르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적어도 1990년대는 그러했다. 1997년 이창동의 <초록물고기(Green Fish, 1997)>가 나타나서야 ‘어두운 세계’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아릿한 감성을 통해 삶의 다른 측면을 조명해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러한 정서와 미학은 이 영화만의 독자적인 것이었지, 한국 영화 내에 느와르 영화가 생성해내는 기류나 조류는 아니었다. <초록물고기>는 강렬한 영화였지만, 느와르의 흐름을 주도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형 느와르 혹은 ‘조폭영화’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친구(Friend, 2001)>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느와르 영화’라기보다는 ‘성장영화’에 가까웠던 이 작품은 부산의 로컬리티(locality)를 이용하여 낯선 암흑가의 풍경을 유년시절의 경험처럼 친근하게 옮겨놓은 효시작에 해당했다. 걸쭉한 사투리와 맹목적 우정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가 느와르 영화의 미학을 지니는 것을 방해했지만, 대신 암흑가가 아닌 유년기라는 다소 이질적인 작품 배경을 선사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후 조직폭력배들의 세계는 한국 영화에서 대단히 넓은 지형도를 차지하는 만능 소재가 되었다. 한국영화는 앞 다투어 ‘조직폭력배(이하 ‘조폭’)’들을 영화에 등장시켰고, 각종 장르가 이러한 조폭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코미디 장르가 결합하기도 했고, 학교라는 영역이 연결되기도 했고, 사회 고발성 영화에도 곁들여졌다. 양념처럼 조폭들이 영화에 등장했고, 사람들은 어느 시점까지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분명 조폭들은 한 때 한국영화를 점령했던 흥미로운 소재였다. 일반 사람들의 주변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감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조폭들의 세계는 의문 그 자체일 수 있었다. 그들도 분명 대한민국 국민이었지만,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싸움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고, 때로는 칼이나 총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알았다. 일상의 자잘한 세목에 사로잡히지 않고 큰 밑그림을 그리면서 이른바 ‘한탕’을 준비하는 대범함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부러움은 그들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들은 규율과 시선이라는 현대인의 불편한 삶의 방식을 마음껏 넘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감정을 폭발하고 싶을 때 폭발할 수 있고, 폭력을 사용하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을 확보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동시대의 현대인이었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다른 시대의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폭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영화들은 ‘조폭영화’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느와르 특유의 빛깔과 의미 혹은 개성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요소들을 선보이는 수준에 대부분 머물고 말았다. 암흑가의 논리는 그러한 일련의 영화들보다는 보다 처절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 몇 편의 영화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한 조폭영화’들 틈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2005년의 <달콤한 인생(A Bittersweet Life, 2005)>이나 2006년의 <사생결단(Bloody Tie, 2006)> 혹은 2007년의 <우아한 세계(The Show Must Go On, 2006)>가 그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영화들을 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이 세 편의 영화를 부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2000년대를 지나면서 조폭영화가 많아졌고, 다양해졌고, 그래서 지겨워졌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전성시대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개봉 당시에 <친구>처럼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다. <게임의 법칙>처럼 선구적이지도 못했고, <초록물고기>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세 편의 영화는 어둠의 세계를 바라보는 예외적이지만 특이한 관점을 선취하고 있었고, 서사의 흐름을 가다듬어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조폭영화에서 벗어나 한참동안 단절되었던 느와르 영화의 계보와 명맥을 이으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2011년 윤형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Nameless Gangster : Rules of Time, 2011)>는 이러한 느와르 영화의 계보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게임의 법칙><초록물고기><친구><달콤한 인생><사생결단><우아한 세계>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동참하는 작품이다. 더구나 이 작품은 각양각색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인 완성도를 점치기 어려웠던 그 동안의 느와르 영화 계보에, 다양한 측면에서 완성도를 확인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2. 최익현과 최형배의 대결, 혹은 욕망의 복사

     

    <범죄와의 전쟁>의 서사는 결국 두 라이벌로 모아진다. 친구이자 적이었고, 그러면서 동지였지만, 서로를 배신해야 했던 두 사람. 흥미 있는 점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집안사람’이라는 한국적 인척 관계에 기반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외국영화에서 말하는 ‘패밀리’ 개념을, 한국적 핏줄의 친연성으로 대체해 놓은 셈이다. 하지만 이 두 개념 사이에는 세밀한 차이가 존재한다.

    세관 공무원으로 적발한 마약을 내다 팔고 한몫을 챙기려는 최익현(최민식 분)이 동료 세관원의 도움으로 부산 조직폭력배의 젊은 보스 최형배(하정우 분)를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악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분명 사업상의 거래였지만, 세관원을 그만두어야 했던 최익현에게는 남다른 기회로 여겨진 것도 사실이다. 최익현은 사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최형배를 옭아 넣기 위해, 최형배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조직의 보스였고 무자비한 깡패였지만, 아버지의 명령 앞에서 무력했던 최형배는 최익현을 할아버지 항렬 친척 어른을 이르는 ‘대부(大父)’로 모실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영화가 다른 조폭영화와 다른 점은 최익현의 등장 때문이다. 그는 한국 관객이 익히 보아오던 깡패 조직의 ‘보스’와는 생래적으로 다른 인간형이다. <우아한 세계>에서 송광호가 연기했던 조직의 보스 ‘강인구’는 ‘생계형 가장’이라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신선함을 전해 주었다. 조폭이 생계를 걱정하다니. 이 당연한 지적에 많은 이들이 조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은근한 경외심을 다시 따져보아야 했다.

    <우아한 세계>에서 강인구는 조폭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잔소리하는 마누라에게 돈을 가져다주어야 했고, 자식들을 외국으로 어학연수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가는 비참한 것이었다. 가족들이 떠나고 자신만 남은 집. 그 집에서 강인구는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홀로 집을 지켜야 하고, 가족들의 안부를 영상으로 보는 것만으로 막대한 가장의 의무를 달래야 하는, ‘우아하지 못한’ 조폭일 따름이다.

    최익현은 이보다 더 근원적인 생계형 조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범죄와의 전쟁>은 이러한 최익현의 가정을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다. 가난한 동네, 좁은 방, 많은 식구들. 부양한 가족들과 가난한 가정의 모습은 최익현이 필사적으로 암흑가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최익현이 대부가 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물론 암흑세계로의 최익현의 출발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고, 부양할 가족에 대한 의무였다. 하지만 최익현은 최형배의 힘을 목격하는 순간, 자신이 꿈꾸던 세계의 모습을 엿보았다는 확신에 휩싸인다. 그 시초는 최익현이 마약 처리 자금을 받고, 최형배와 술을 마시기 위해서 들른 바(bar)에서 비롯되었다. 퇴폐적인 분위기, 싸구려 양주, 테이블 너머로 보이는 무료한 표정의 여인들. 그 세계는 최익현도 평소 알고 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최익현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기운을 발견한다. 그것은 힘에 대한 경도였다.

    최익현은 집안 어른으로 행세하며 최형배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고,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옛 상사 조계장(김종구 분)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권위로도, 경력으로도, 위계로도, 심지어는 배짱이나 기술로도, 이전까지의 최익현은 조계장을 넘볼 수 없었지만, 최형배의 행동대장 창우(김성균 분)의 일갈에 조계장은 무력해졌다. 강렬한 눈빛과, 내뱉듯이 토해내는 욕설, 그리고 뒤를 생각하지 않는 ‘무대뽀’ 근성.

    이러한 조계장을 걷어차면서, 사회 질서와 원칙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일단을 엿보게 되면서, 최익현은 그 일단의 세계로 자신도 틈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렇게 최익현과 최형배의 동업이 결성되었고, 최익현의 암흑가 진출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많은 한국 영화들이 조폭을 영화의 특정 소재로 삼았던 이유는 현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현대인들은 일상의 규격화 된 틀 속에서 일탈을 꿈꾸곤 한다. 지켜야 할 수많은 금기와 의무 그리고 사회적 책무와 관습적 약속은 개인의 삶을 정위시키는 필수불가결의 요건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영혼의 해방을 구속하는 불가항력의 금제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조폭영화를 제작하고 관람하고 논의했던 이유는, 조폭의 삶이 일상인의 삶에서 벗어난 삶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법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로 인해 법률적 혹은 관습적 절차를 무시하고, 힘으로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대담한 삶의 방식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일상의 삶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잘한 일상의 세목들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이른바 금지당한 것들을 누리는 호사스러운 면도 지니고 있다.

    진정한 느와르 영화라면, 그러한 화려한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더 큰 금기와 더 작은 일상과 더 가난한 영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겠지만, 일차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고 거침없이 행동하며 타인을 제압하는 압도적인 모습에, 한국의 관객들이 현혹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행하지 못했던 폭력에 대한 욕구조차 이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기 위해서 수많은 눈치를 보아야 하며, 법과 금기라는 규칙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제약들을 지켜야 하겠지만, 환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속 세상에서는 이러한 제약들을 벗어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총이 등장하고, 전쟁이 등장하고, 미지의 모험과 낭만적 로맨스가 영화 화면을 차지하는 것도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언정 ‘찌든’ 일상과 ‘구질구질한’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건달’의 세계로 진입하기 이전의 최익현은 ‘힘없는 자아’에 불과했고, 최형배는 그 자아가 닮고 싶어 하는 ‘이상적 자아’에 해당했다. 최익현은 최형배를 통해 자신이 갈 수 없었던 세상의 끝을 경험하고,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형배는 최익현의 롤 모델이자, 목표였다고 하겠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 이론에 따르면, 최익현은 최형배의 욕망을 복사하여 자신의 것인 양 갖게 된다. 최형배가 부산 조직의 보스로서 누리는 힘과 카리스마 그리고 아우라는, 곧 최익현이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의 원천이 된다. 최익현은 이런 것들을 갖기 위해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이러한 최익현의 욕망은 돈이나 이권과 연관된 것으로 나타난다. 최익현은 일식집을 운영하면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들을 사귀고, 교회를 다니면서 접근하기 어려운 인맥에 접근하여 사적 교류를 트게 되며, ‘로비’와 ‘아부’를 통해 중앙 정계와 끈끈한 유착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인적 관계는 최익현을 ‘반달’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이른바 건달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부류.

    하지만 최익현에게는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잔인함이다. 최익현을 통해 영화는 암흑가의 무자비함에 대해 목격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최익현이 최형배를 집안사람이라고 하대할 때 느닷없이 날아온 행동대장 창우의 주먹, 이웃 조직의 보스인 김판호가 관리하던 술집을 점령하고 최형배가 김판호의 머리에 내려치는 맥주병, 행동대장 창우를 잔인하게 응징하는 최형배의 매서움.

    이러한 종류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은 이른바 느와르 영화가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는 영화적 요소들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낯익은 풍경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범죄와의 전쟁>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최익현이라는 ‘어정쩡한 존재’에 의해 목격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암흑가와 일상 세계의 양 편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존재인 최익현을 통해, 일반인이 목격할 수는 있되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욕망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다.

    최익현은 최형배를 욕망의 매개자로 삼아 그의 개성과 목표를 대신 성취하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미덕은 이 영역에 대한 날카롭고 설득력 있는 접근이다. 많은 조폭영화들이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와 사시미와 총을 등장시켜, 그들의 무서움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것은 삶의 중층적인 논리와 연결되지 않은 피상적인 위협일 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실감나지 않는 황당한 설정일 뿐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최익현이 최형배의 욕망을 복사하면서, 이러한 매서움과 잔인함에 대한 동경을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익현은 최형배의 욕망을 복사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욕망을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로 인해 최익현과 최형배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나고, 그 간극이 최익현과 최형배의 사이를 균열시킨다. 더 큰 문제는 건너갈 수 없는 간극을 최익현이 어떻게 해서든 극복하려 한다는 점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욕망의 매개자와 욕망의 모방자를 통해 그 간극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익현은 최형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암흑가에 대한 매력이 실제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임을 실감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을 복사하려고 드는 최익현의 내적 욕구이다. 절대 ‘최형배’가 될 수 없음에도 최익현은 자신의 뿌리 깊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이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최형배는 자신의 품성이 암흑가에 적합하다고 믿고 있고, 권력이라는 다른 힘으로 폭력이라는 물리적 힘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우스꽝스러운 최형배의 모습과 행동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신념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어야 마땅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정․관계를 휘어잡는 그의 모습에는 간과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3. 대부를 꿈꾸는 사람들

     

    1972년 프란시스 포드 코플라가 연출한 영화 <대부>는 전 세계 관객을 매료시키고, 다양한 입맛의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끌어낸, 그야말로 몇 안 되는 수작이다. 이 영화는 출시된 이후 세간의 화제를 넘어, 영화사의 기념비로 기억되고 있으며, 인생을 배우려는 많은 이들의 직간접적인 전범이 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도 영화 <대부>의 흔적은 강하게 남아 있다. 일단, 호칭이 그러하다. 최익현이 최형배에게서 얻은 호칭은 ‘대부’이다. 이때의 대부는 한자어로 ‘大父’를 가리키며,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유복친 외의 남자 친척’을 뜻한다. 하지만 최익현에게 ‘대부’라는 뜻은 최형배의 할아버지 항렬의 남자 친척이라는 단순한 의미에 그쳐서는 곤란했다. 최익현은 ‘代父’, 즉 ‘어떤 분야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남자 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그가 일차적으로 닮고자 하는 사람은 ‘최형배’였으며, 최형배처럼 암흑가를 주름 잡는 조직의 보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현실적인 힘이 없었으며, 건달이 되는데 필요한 담력과 잔인함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공무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고위 공무원과의 인적 교류, 즉 ‘로비’에 통달한 지역 유지로 거듭났다. 그는 로비 업계의 ‘대부’가 된 셈이다. 하지만 그가 최형배처럼 되기 위해서는 ‘호가호위’의 허세가 아니라, 그 자체로 ‘힘’ 즉 ‘폭력’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최익현은 최형배처럼 되고자 했지만, 반면 최형배는 최익현처럼 되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 잠재한 남성적인 힘, 즉 폭력에 대한 경도를 암시한다. 198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보다 이러한 경도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힘이 곧 권력이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위로는 정치권력의 쟁취가 힘에 의해 이루어졌고, 국가 간 질서 유지도 힘의 논리가 우선했다. 사회에서는 상사의 힘이 강대했고, 집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살아 있었으며, 여성을 짓누르는 남성의 힘이 물리적 힘을 빌려 나타나기도 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힘은 어떤 의미에서는 ‘멋’이었고 ‘삶의 철학’이었다. 윤종빈은 그릇된 가치관이 버젓이 판치는 세상의 모습을, 힘을 추구하는 자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내에 남겨두었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 자체를 단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갖춘 대부가 되고자 했고, 그러한 욕망이 지금 이 시대에도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통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대신 대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세상의 야유와 맞설 수 있어야 했다. 비판과 맞서야 했으며, 후대의 평가에서도 자유로워야 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야유와 비판과 평가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우리들에게 ‘대부’를 꿈꾸게 한 지도 모르겠다. 영화 <대부>는 암흑가 인물들의 힘과 경쟁을 통해, 삶의 추악한 면을 들추어내기도 했지만, 복수와 평정이라는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을 충족시킨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힘에 대한 열망과 추구가, 인간에게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가를 새삼 확인시켜 준 영화였다. <범죄와의 전쟁> 역시 동일한 욕망의 궤도 위에서 탄생한 영화이다.

    가까이서 바라본 ‘대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추악하지만, 멀리서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열정적이다. 그들 역시 인간이 숙명적으로 장착하게 마련인 욕망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의 시대에 힘을 갈망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따랐고, 동시에 그 욕망으로 인해 패망하는 결말도 감수했다.

    결국 ‘대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영향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힘에 대한 갈망을 복사하여 탄생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우리였다. 문제는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러했다는 점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 이 원고는 이미 발표된 「대부를 꿈꾸는 사람들」의 일부를 발췌하여 이 지면에 맞게 요약․수정․정리․재구성한 글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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