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학교에서의 폭력과 사적인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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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의 폭력과 사적인 복수


    김남석(부경대 국문과 교수/영화평론가)




       1. 학교에서의 폭력


    학교에서의 폭력은 한국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  <인 어 베러 월드><돼지의 왕>은 학교에서의 폭력이 사회에서의 폭력으로 이어지며, 두 폭력 사이에는 인과적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적 연구에 의하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학교에서의 폭력은 사회에서의 폭력의 초석이 되고 있다.


    2012년에 개봉된 <돈 크라이 마미(Don't Cry, Mommy, 2012)> 역시 이러한 관점에 서 있는 영화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폭력적 양상뿐만 아니라 강간이라는 성적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인 어 베러 월드>와 달리, 사적인 복수에 대한 심정적 지지를 호소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현실을 비틀어 가상의 세계로 옮겨놓는 형식을 취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은 영화 속의 세계가 어디까지 가상의 세상이고, 영화 속 일들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기며 스스로 안심하곤 한다. 따라서 영화는 현실을 닮았으되, 현실이 아닌 이야기를, 긴장감은 전해주되, 현실(극장)에서는 안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예술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아무리 그 이야기가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고 강조해도 제한적인 측면에서만 실제와 연관될 수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에 서 있곤 했다.


    하지만 〈돈 크라이 마미〉는 통상적인 영화가 전해주는 유보적인 입장을 의심하게 만든다. 작품의 오프닝에서 명시한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는 설정 때문만이 아니다. 연기자들의 연기가 대단히 ‘리얼’해서만도 아니고, 소품과 촬영이 뛰어나고 시나리오에 군더더기가 없어서만도 아니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우리’의 혼란한 가치관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돈 크라이 마미>는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잠시간의 행사용 개봉이었지만, 적지 않은 인기와 관심을 끈 바 있었다. 이것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적 발언 때문이다. 2011년 <도가니(silenced, 2011)>와 유사하게, <돈 크라이 마미>는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벌어지는 문제적 상황을 영화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 미성년자에 의한 미성년자 성폭행.


    이러한 소재 자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에 의한 미성년자 성폭행은 자극적인 소재이고, 관객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소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도 이러한 지적이 행해진 바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소재는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도 남기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소재로서의 성폭행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다면, 현실 세계의 문제점과 불합리를 구성원들에게 자각시키고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의 미학적인 기능이기보다는 사회적 기능에 가까우며, 정서적 감동보다는 계몽의 효과를 염두에 둔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고 또 제한적이다. 영화는 현실의 탈출구로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극적 환상(illusion)을 제공하여 현실을 버텨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영화는 관람 행위를 통해 취미로서의 역할을 병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청춘남녀의 데이트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할 일 없는 이들의 시간 때우기 용 오락이 될 수도 있다. 그 의미보다는 관람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사회적 계몽 즉,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고 수용자들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사회적 활동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아마 <돈 크라이 마미>는 이러한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짙게 부여받은 영화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이러한 영화적 성향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에 증가하는 추세이다. 2011년 <도가니><부러진 화살(Unbowed, 2011)>이 그러한 예이며, 2012년 <돈 크라이 마미><남영동1985(Namyeong-dong1985, 2012)>도 동일한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전에도 많은 영화들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그 자각과 개선을 위해 현실에 입각한 영화를 표방한 바 있다. 미국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의 영화 <JFK(JFK, 1991)><닉슨(Nixon, 1995)>은 올리버 스톤이 살았던 시대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조감하는 지식인의 발언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례와 동시대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영화가 분명 사회적 책무를 가지고 있고, 그 의무를 직간접적으로 수행해 왔다는 통념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에는 미학적, 오락적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도 있지만, 사회적 임무를 담지한 영화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돈 크라이 마미>는 사회 고발성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2. 불편한 관람의 이유


    그래서 이 영화는 보는 이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화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 불편함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찾아보자. 첫째, 은아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은아’는 첼로를 전공하는 여고생으로 천진난만한 외모와 밝은 성품을 가진 아이였다. 비록 연약해 보이는 외모로 표현되었지만, 엄마의 이혼 심경을 ‘쿨’하게 물을 정도로 대담한 측면도 지닌 아이였다. 그녀의 대담함은 동급생 ‘윤조한’에게 접근하는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있다는 심정을 알리는 대목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행동한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무뢰한인 두 사람이 개입하면서, 부질없는 꿈으로 전락했다. 윤조한과의 기대했던 만남은 ‘박준’과 ‘한민구’가 나타나면서 ‘끔찍한 악몽’으로 변질되었고, 은아는 성폭행 당한 가련한 희생자로 전락했다. 부어오른 얼굴, 온몸의 찰과상,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는 그녀의 심적 고통을 보여준다.


    은아 역을 연기한 남보라는 이러한 변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앳띤 동안의 평화롭고 당차던 얼굴이, 핏기를 잃고 내려 깔린 시선으로 변화면서, 보는 이들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자식을 둔 관객들은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의 고통을 받았다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남보라의 연기는 사실적이었고, 또 충격적이었다.


    은아의 엄마 역(유림)을 맡은 유선의 연기 역시 인상적이었다. 은아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후, 은아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동영상을 보고 분노에 떠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분노하는 유림의 연기는 동일한 맥락에서 사실적인 연기였고,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충격을 전하는 연기였다.


    사실 이 영화에서 유림은 실제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딸을 잃은 엄마의 참담함과, 이어지는 사적 복수를 감정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 연결 고리는 당연히 유림의 심정 변화이고, 이러한 변화는 유선의 폭발적인 연기가 없었으면, 실현되기 힘든 구조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유선의 연기는 이 작품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딸을 잃고, 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망친 이들에게 그 댓가를 돌려주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유림의 모습은 연기자 유선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가 배우의 예술임을 확인하는 멋진 증거 중 하나이다.


    분명 이 영화는 남보라의 연기와 유선의 연기, 즉 은아의 죽음과 유림의 복수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유도했고 적지 않은 사회적 공감대를 끌어낼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사람의 연기, 이 두 캐릭터의 창출은 주목되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요소, 즉 유선의 연기와 남보라의 이미지 변화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영화 자체에 지나치게 몰입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배우의 잘못은 아니다. 배우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고, 관객들은 이러한 배우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 이 영화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의 몰입은 객관적인 거리를 차단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할 정도로 강력했다. 우리 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와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에 의한 미성년자의 성폭행이 지니는 양면성을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죽은 두 여인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파괴에 이르도록 종용하는 이들은 ‘남성’이다. 은아를 성폭행하는데 참여하는 미성년자 세 명도 그러하지만, 이러한 행위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하고 엄벌하지 못하는 이들도 남성들로 표현된다. 담당검사, 판사, 심지어는 담당 경찰관도 이러한 인물 명단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로 인해 이 영화는 가혹한 남성, 혹은 폭력적인 남성이라는 암묵적인 도식을 창출해내었고, 이것은 일종의 영화적 이미지로 굳어진다. 실제로 성폭행은 강한 힘을 가진 남성이, 힘이 모자란 여성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일방적인 성적 욕망을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표출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따라서 남성에 의해 주로 자행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범죄이며, 그 반대의 경우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몇 가지 무의식적인 도식을 생성하게 된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혹은 힘에 의해 조율되는 현실 대(對), 연약한 여성들이 피해를 입는 사회 혹은 힘없는 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이라는 무의식적 대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남/여, 폭력/희생, 불합리/자기 방어의 이분법적 사고를 생성하고, 이로 인해 성폭행의 문제를 힘과 욕망에 사로잡힌 남성의 문제로 보도록 종용하는 시각이 강해진다.


    그로 인해 연약한 약자의 복수에, 우리는 심정적 반발을 줄일 수 있다. 유림은 솜방망이 같은 처벌로 가해자를 보호하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의 손으로 가해자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품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유림의 행로를 통쾌한 복수의 시각으로,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마 유림의 복수부터는 실화와는 관계없이 영화 제작 측의 상상이 개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상상력의 표출에 대해 개인적인 기호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영화는 환상과 상상력의 결합일 수밖에 없음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상력이 영화 내내 생성된 도식 남성/여성, 가해자/피해자, 폭력/희생, 악/선, 사회 모순/사적 복수 사이의 연관성을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당화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분법적 사고는 이러한 문제점 뒤에 노정되어 있는 복잡한 사회 양상을 살피는데, 부작용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적 거리감을 제거하여 이 문제의 해결책을 법 개정 혹은 처벌 강화 등의 문제로만 논점을 몰고 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욕망은 기본적으로 힘과 권력에 대한 맹신과 관련이 깊다. 미성숙한 청소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어른이라는 이 사회의 핵심 계층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욕망의 추구를 힘과 권력을 통해 얻으려는 사회적 풍조는 미성숙한 자아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힘과 권력을 통해 얻으려는 행동 양식으로 정당화시킬 여지가 다분하다.


    은아의 입을 테이프로 봉하고 강제로 치마를 벗기며 강간자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놀랍게도 아이들의 대화 내용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들은 어른들의 그것을 닮아 있으며, 하나의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배의 그것과 흡사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가해자 ‘박준’과 ‘한인구’를 조직폭력배의 형상으로 다루고 있다.



    3. 냉정한 독법이 필요한 이유


    그렇다면 이러한 아이들이 탄생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영화가 냉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어른에 가까운 강간자들에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법의 아량을 베푸는 것에 불만 어린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미성년자에 가까운 아이들이 어른처럼, 조직폭력배처럼, 힘을 추구하는 어른 세계의 권력자처럼 행동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다루고 말았다.


    유림과의 합의를 위해 모인 강간 가담자의 부모들처럼, 문제적인 요소가 다분한 부모 때문인가. 마치 강간 가담자의 부모들은 죄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문제적 인간들로 처리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이창동의 <시(poetery, 2010)>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바 있다. 강간 가담자들의 부모는 ‘철면피’이거나 ‘냉혈안’으로 묘사되어, 강간에 관여한 아이들의 문제가 가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인상은 강간 폭력 등의 청소년 범죄가 결손 가정 혹은 하층 가정의 문제인 것 같은 전언을 형성하게 된다.



    4. 두 가지 해답 사이에서


    폭력을 다루는 이 영화가 냉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해자가 이 세상에 격리되어야 한 ‘짐승 같은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와 관계없는 사회 일각의 ‘음지’에 기생하는 쓸모없는 ‘일군의 무리’라는 도식적, 이분법적 사고를 만들어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군의 무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인식, 즉 우리만이 ‘정당한 피해자’라는 인식은 사회의 이분법적 균열을 가중시킬 것이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일방적인 선이 생겨나면서, 모든 피해는 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자각도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선과 악의 문제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치유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져다주었던 흥분이 가라앉으면, 조금 더 냉정한 시각으로 이 영화 내의 설정을 보게 된다. 〈돈 크라이 마미〉에서 은아가 강간당하고 자살하는 시간은, 지켜보는 이들을 ‘짐승 같았던 시간’으로 끌고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충격이, 이 작품이 원하는 충격이 되기 위해서는 한층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었어야 했다. 피해자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하면서도, 사회에 가중되고 있는 총체적 문제를 해결해 가는 시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냉철함이나 객관성이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이고, 무조건적인 사적 복수가 아니라고 결론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비교해 볼 수 있다. 가령 <인 어 베러 월드> 같은 영화에서는 사적인 복수가 폭력의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그러한 복수에 대해 생각(상상)하는 것마저 막을 수는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안톤의 경우). <돈 크라이 마미>는 이러한 복수를 전면화한 작품으로, 폭력에 대한 폭력의 응징을 정당화하는 듯 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냉철함이나 객관성이 모자란 설정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회에 만연한 폭력성은 그 해답은 외면한 채, 문제제기만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가 그토록 폭력적인 것도 어쩌면 그 해답을 찾지 못한 과격한 우리의 답답함 때문은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에서의 폭력은, 현실에서의 폭력을 닮았고, 두 폭력 사이에는 차고 넘치는 저울 같은 관계가 성립되고 있다는 점이다.



    5. 글을 다 쓰고 난 이후에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말문’을 잃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글문’을 읽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이 영화가 세계사적 걸작도 아니고, 2012년에 나온 주목할 만한 영화 중의 으뜸도 아니었지만, 이 영화를 본 충격은 상상외로 오래갔다. 그것은 내재된 욕망과 표출된 폭력 사이의 결과가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꾸는 욕망과 우리가 목격해야 하는 폭력은 그만큼 불일치하는 것 같다. 이것은 두려우면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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