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관찰, 이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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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 이주, 귀환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관찰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음’의 예술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엿보기’의 미학을 바탕으로 탄생했으며, 현대의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이러한 관음증(Voyeurism)을 공식적으로 허용 받고 있다. 관음증(Voyeurism)은 상대방의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를 주시하여 시각적 쾌락을 획득하는 것을 일컫는 증상을 가리키는데, 불 꺼진 폐쇄된 공간에서 숨죽이며 타인의 삶을 응시하는 현대 관객들은 이러한 관음증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관극 행위는 숨길 수 없는 본연의 욕망에서 발원한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어쩌면 탄생 직후부터―‘볼거리’를 소원하는 존재였다. 당연히 볼거리에 대한 유혹은 다양한 예술 장르를 탄생시켰다. 미술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이 이렇게 탄생했고, 연극이 동일한 이유로 유행했다.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일부로서의 ‘시각’을 수용했고, 이러한 시각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숱한 시도들이 생겨났다. 보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었고, 지배하는 것이었으며, 아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점점 새로운 볼거리에 대한 욕망으로 번져나갔다.


    볼거리에 대한 유혹은 극단적인 볼거리를 낳기도 했다. 시체 전시장이 대표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볼거리에 대한 욕망이 점점 커진 근세의 유럽에는 ‘시체’를 구경하는 풍습이 확산되었다. 파리에 시체 전시장이 있었는데―처음부터 관람용은 아니었지만―이 전시장은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인간의 욕구를 극단적으로 실현한 사례에 해당했다. 시체는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신성함의 끝’이어야 했지만, 반대로 ‘호기심의 시작’이기도 했다. 모르그가 있었다는 이 보관소는, ‘인간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볼거리를 찾아 헤매는 인간의 욕구는 시선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예술 형식을 탄생시켰다. 그 중 하나가 영화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훔쳐보기의 대체 방식이며, 타인의 삶에 대한 염탐의 장르였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전공(직업) 영역 역시 다양해지고 세분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성원들은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방식을 선택하여 각자의 사회에 적응해나갔다. 이른바 분업화로 인해 구성원들은 삶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다룰 필요가 없어졌고, 심지어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분야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자신의 전공(직업) 이외의 분야에 무지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전공 이외의 영역은 취미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하는 일’이 전문화되면서 이웃 영역의 지식과 정보에 대해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고, ‘사는 방식’이 세분화되면서 거주지 이외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접근로가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본 호기심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엿보고, 다른 영역을 넘겨보기를 즐기는 종족이었다. 그런데 사회는 점차 이러한 욕망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인간 스스로도 이러한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때 영화는 이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영역, 다른 직업과,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접근’을 공식적으로 허용했고, 이에 대해 답변으로써 역시 공식적인 관음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화의 기능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강화, 확대, 심화되었다. 영화는 전공과 직업과 각자의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늘 참신한 소재를 찾거나, 새로운 시각을 확보하거나, 미지의 관념을 도입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가 본 적이 없는 장소를 제시하거나, 본 적이 없는 물건(혹은 생명)을 창조한다거나, 경험하기 어려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결과물이다. 이러한 새로움은 비단 외계나, 미래, 예언이나 괴물, 혹은 특수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웃, 이웃의 전공, 전공의 차이, 차이의 본질이 모두 영화의 소재이자 새로움의 근거가 될 수 있고, 자아와 집단 그리고 사회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규명이 그 의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분명 우리의 곁에 있지만 잘 모르는 모든 것이, 영화의 소재이자 인식의 대상이 된 것이다.



    2. 동물원에 대한 관찰, 동물원에서의 관찰


    에드윈 감독의 〈동물원에서 온 엽서〉는 동물원을 관찰의 공간으로 설정한 영화이다. 나는 이 작품을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고,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동물원이라는 소재가 인상적이었고, 그 동물원이 누군가(동물이 아닌)의 삶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놀라움을 선사받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지난 영화의 역사에서 동물원이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정향 감독의 〈미술원 옆 동물원〉은 비록 동물원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아니지만 동물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킨 영화였고, 2011년에 개봉한 로멘틱 코미디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We Bought a Zoo)〉 역시 나쁘지 않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들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동물원의 모습만을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주말에 잠시 방문하는 관광지로서의 동물원이 아닌 동물원을 보여준 점은 인상적이지만, 그 동물원의 진정한 내면을 볼 수 있는 장치는 마련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동물원에서 온 엽서〉는 관조의 시각을 투여한 영화라는 차이점을 보인다.


    동물원은 근대적 사고의 산물이다. 인간들의 지리 관념이 확장되면서 심상 지리로서의 전세계가 중요해졌고, 인간들은 전세계의 각종 동물이 모인 공간을 통해 관념적 모험과 여행을 즐기곤 했다. 또한 동물원은 인간들이 만든 대표적인 구경거리 중 하나이다. 그 공간에서 서로 만날 수 없었던 동물들은 하나의 군락을 이루게 되고, 그 군락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영화의 서두에서 소개된 내레이션이다. 동물원에는 세 가지 부류의 동물들이 살아간다는. 첫째 관찰당하는 동물들. 하지만 이 동물들은 도리어 숨어서 자신을 관찰하러 온 사람들을 거꾸로 관찰하기도 한다고 한다. 둘째 관찰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하루의 일정한 시간에 동물원을 방문하여 동물을 관찰하며 아이들과 즐거운 한 때를 계획한다. 셋째 동물원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동물원을 시각적 유희의 장소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삼고자 한다. 〈동물원에서 온 엽서〉는 바로 이 세 번째 부류를 주요 관찰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작고 어리고 연약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살 집으로 동물원을 택했고, 기꺼이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동물들을 돌보고, 동물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돌보고,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녀의 일은 남과 동물을 돌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어떤 사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마술사였고, 기본적으로 동물원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는 이 동물원을 떠날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남자를 따랐고, 그 남자의 뜻에 따라 동물원에서 이주했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동물원을 떠나 자신의 서식지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듯, 남자 마술사 역시 동물원을 떠나 거리로 돌아갔고, 남자의 보살핌을 갈구했던 소녀 역시 남자를 따라 동물원에서 거리로 거주 장소를 바꾸었다.



    3. 이주의 형식, 거주의 비유


    요란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이주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웃집 마실에 소풍가듯, 동물원을 나가 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낡고 버려진 집이 있었고, 그곳은 어떤 면에서는 동물원과 비슷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술사와 함께 살았다.


    언뜻 보면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큰 눈으로 주변을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 다만 그녀의 관찰 대상이 달라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녀는 동물원을 다니면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다니면서 구경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람들, 자동차, 건물들, 놀이터, 그리고 음지를 구경해 나갔다.


    동물원의 모든 동물이 누군가에게 관찰의 대상이듯, 세상의 사람들은 소녀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별 것 아닌 것임에도 특별해보이기도 했다. 특히 마사지 숍에서의 일화는 상당히 흥미롭다.


    마술사는 처음에는 ‘스파’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한 마술 쇼를 했다. 하지만 남자는 한 곳에 머물기 싫어하는 그의 방랑벽이 도졌는지, ‘불꽃’과 함께 사라졌고, 소녀는 스파의 마사지 걸이 되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동물을 돌보던 여자는 이제 거리의 남자들을 돌보고, 동물을 씻기던 손은 이제 남자의 성기를 씻기는 손이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거주지를 다시 ‘거리’에서 ‘음지’로 옮겼다.


    역시 소녀의 이주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는 도시의 음지를 다룬 많은 영화를 보았다. 임권택의 〈창〉은 성을 팔아야 하는 집창촌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바 있고, 〈반두비〉는 돈을 위해 여고생이 찾아야 하는 유사 성매매 업소를 낯선 손길을 공개한 바 있으며, 〈비스티 보이즈〉는 성매매 주체가 여성이 아닐 수 있다는 힌트를 알려준 바 있다. 이밖에도 무수한 영화들이 음지로 흘러간 여인들, 그녀가 팔 수 있는 성의 종류와 방식, 그리고 그녀들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공을 들인 바 있다.


    그럼에도 〈동물원에서 온 엽서〉가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녀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들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음지를 찾아드는 손님들은 동물원을 찾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고, 그녀가 베푸는 서비스는 동물들에게 베풀었던 서비스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이 지점에서 그녀가 살았던 동물원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 된다. 하지만 평화롭고 자비로운 동물원은 좀처럼 약육강식의 논리에 휩싸인 인간의 사회와 등질적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동물원과 우리의 사회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의 사회는 동물원과 같은 것일까.


    동물원이 지닌 함의와 이미지가, 이 영화를 진부하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 그녀가 끊임없이 카메라의 관찰 대상이 되면서도 그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도, 그녀 주변에 놓여 있는 동물원 때문이다. 동물원은 그녀가 마사지 걸이 된 이후에도, 작품의 중요 배경이 되고 있으며, 도시의 음지와 끊임없이 맞서는 장소가 되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유령처럼, 환상처럼, 동물원의 여기저기 서 있거나, 그곳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녀를 통해,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선이 동물원에도 존재함을 알려준다.


    그녀의 이주는 실상 동시적인 것이다. 그녀는 동물원→거리→음지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물원과 거리와 음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동물원에도 있고, 거리에도 있으며, 음지에도 있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영화에서 그녀의 이주가 실은 동시적인 삶의 행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인간적인 삶은, 그녀가 거주하는 동물적인 삶과 대비된다. 이 영화의 관찰 방식대로 바라보면, 사회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물원이기 때문이다.



    4. 귀환의 숨은 이유


    소녀는 남자들의 시선 속에 포획된 듯 위태로웠지만, 의외로 그녀에게는 육체적 침탈이 가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묘한 점 중 하나가 이러한 육체적 침탈이다. 마술사도, 조직폭력배도, 스파 손님들도 그녀를 그냥 놓아둔다. 그녀는 우리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 우리를 나갈 수 있었던 기린처럼 살았다.


    그러한 그녀였지만, 전혀 위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육체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 그녀는 동물원 버스에 몸을 싣고 동물원을 떠날 수 있었다. 동물원 버스를 타는 바람에, 그녀가 지나는 공간과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은 다시 한 번 영화의 시선에 포착된다.


    작은 밀실들은 동물 우리를 연상시키고, 탕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는 사람들은 강 속의 하마와 닮아 있다. 위험해 보이는 보스는 사자 무리의 그것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새로 들어온 여인을 고르려고 한다. 그 장면은 맹수가 짓는 표정과도 흡사하다. 그 옆으로 그녀가 지나간다. 자신이 맹수 우리를 지나면서도 그녀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전혀 못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한 가지만 존재한다. 동물원에서 온 차량. 아마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 차량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이 선물이고 신호이고 해방이라고 느낀다. 그녀는 이제 마술사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 차량을 이용하여, 자신이 이주해 온 곳을 돌아, 원래의 지점으로 돌아간다.


    먼저 마술사와 머물던 공간에 들른다. 그녀는 그곳에서 선물을 찾는다. 아름다운 드레스. 더구나 그 드레스는 여러 겹의 서로 다른 옷을 내장하고 있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외양처럼, 그녀 역시 다양한 옷을 입을 수 있다. 그 중에서 그녀는 성인의 여성을 상징하는 예쁜 원피스를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원점은 동물원이다. 그녀는 동물원에서 성장하고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여인이었으니까. 동물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 부류 가운데, 처음부터 그녀는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부류였으니까.


    음지를 떠나면서, 그녀는 마술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마술사를 기다려야/찾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기다림이 어떠한 방식으로 끝을 맺을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동물원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루었다.


    기린의 배를 만지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웠던 이 일은 에드윈 감독이 귀환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설정한 일대 사건이었다. 에드윈 감독은 여인이 어떠한 운명을 지니게 될지 말하기보다는 그녀가 원하는 일을 통해 그녀가 처한 상태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 영화는 모호한 전언들로 가득한 영화이다. 소녀는 동물원에 남았고, 그곳에서 성장했고, 또 때가 되자 남자를 따라 그곳을 나갔다. 동물원이 집이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녀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여인이다. 하지만 에드윈 감독은 그곳이 동물원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녀는 왜 동물원이어야 한다고 말할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누군가를 관찰하며 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비유이자 축소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내재한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동물원을 돌아다니는 기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얌전히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물원에 사람이 사라지면,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기린.


    소녀는 기린처럼 세상을 돌아다녔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세상은 은근히 높은 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높은 벽으로 구회된 것처럼 보이던 동물원은 의외로 낮은 담장에 불과했다.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 동물원처럼 어슬렁거리는 시선들의 집합소 같은 것이 아닐까. 은근히 높기도 하지만 의외로 낮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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