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노년의 삶과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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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삶과 새로운 삶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노년의 인문학’과 ‘노인의 사회학’


    최근 인문학의 관심 중 하나가 ‘노년’ 혹은 ‘노인’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의 흐름과 관련이 깊다. 한국 사회는 이미 ‘고령화사회’(노인 인구 비율 7~14%)로 접어들었고, ‘고령사회’(14~20%이상)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초고령사회’(20% 이상)로의 이행도 시간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 전체가 노령의 인구를 건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빠져들게 되었다. 학자나 비평계에서도 학문적 1~2세대들이 은퇴하면서, 이른바 학계와 평단의 원로들을 양산해냈고, 그 원로들은 은퇴 이후의 학문적 활동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은퇴와 잉여 시간 그리고 노년 인력의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양상을 창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노인’의 모습을 담은 영화나 연극 혹은 문학을 적극적으로 생산해 내기에 이르렀다. 가까운 작품 〈은교〉 역시 ‘노년’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노년의 화두가 대두되기 이전에 ‘노년’을 다룬 작품이나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삶이라는 대상은 다양한 층위에 걸쳐 있을 수밖에 없으니, 노인의 삶 또한 일찍부터 문학적․예술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년의 인문학’ 혹은 ‘노인의 사회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오늘날의 화두를 통해, 노인(노년)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과 달라지고 있는 지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은 노인을 지자(智者)나 현자(賢者)의 관점에서 즐겨 다루었다. 노인은 세월의 무게만큼 경험과 연륜과 지혜와 인격을 지닌 존재로 취급되었다. 젊은 세대들이 용기와 무모함으로 상징되는 세대였다면, 노인들은 지혜와 현명함으로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 세대였다. 그래서 노인들은 전통적인 사회의 관점에서는 과거의 기록이었고, 현안의 답변이었고, 미래로 향하는 참조 사항이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노인의 지위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과거의 사회에서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 혹은 고기잡이를 나가기 위해서, 노인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젊은이들은 씨를 뿌려야 할 때와 곡식을 거두어 들여야 할 때를 노인에게 물어야 했고, 노인들은 물을 가두어야 할 때와 물을 풀어야 할 때를 지시할 수 있었다. 구름의 위치와 바람의 방향을 보고 폭풍우를 예견하는 노인의 능력은 어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그러니 노인의 경험과 지혜는 그 자체로 젊은이들의 존중의 대상이었고, 한 사회의 좌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농경과 어업이 사회 생산의 중심에서 물러나고, 경험이 아닌 과학이 도입되면서 노인의 역할과 영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젊은이들은 노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이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농사와 어업은 이제 노인들이 따라오기 힘든 최신 기술의 접합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제 농촌과 어촌에는 노인의 말을 들을 젊은이들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당연히 노인의 위상은 추락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현명해진다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일로 변했고, 세상이 급속도로 변하면서 노인의 지혜보다는 소년의 정보가 각광받게 되었다. 우리는 ‘페이스북’의 사용법을 노인에게 물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인들이 젊었을 때에는 페이스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대신 모르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물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들은 이제 나면서부터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중무장한 세대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최첨단 정보와 기기를 다루는 시간은 노인들의 세대에 비해 훨씬 길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온라인 게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블로그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트윗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상품을 사야 더 싸게 살 수 있고 모르는 길을 더 안전하게 찾을 수 있는지. 젊은이에게 물어야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시절이 도래했다.



    2. ‘지자로서의 능력’과 ‘현자로서의 위상’을 상실한 현대의 노인


    진광교 감독의 〈할머니는 일학년〉은 노년의 삶에 대해 색다른 시각을 열어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지자’ 혹은 ‘현자’로서의 노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포기한 도입부의 설정부터 확인된다. 이 작품에서 할머니는 일자무식의 문맹 노인으로 설정되었다. 그녀는 평생을 시골 마을에 갇혀 살면서, 아들이 보내주는 편지조차 읽지 못하는 처지로 살았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그녀는 할머니였지만, 아마도 젊은 날 그녀의 삶 역시 이러한 할머니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맹으로서의 시골 할머니’는 우리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문맹에 가까운 노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길을 묻기 위해서 그들에게 몇 번이나 설명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고, 간신히 얻어 들은 그들의 답변이 예상을 벗어나 당황해 할지도 모른다. 도시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잉여의 삶을 살아가는 예외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분명 그들은 현대 사회의 주축도 아니고, 우리 사회의 리더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사회의 일각에 존재하지만, 그들의 삶은 특별히 눈여겨 볼 필요가 없는 주변부의 인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노년의 인생을 흥미롭게 그려 주목을 받은 영화가 〈집으로〉였다. 이 영화는 한 도시 소년의 눈에 비친 초라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소년의 시선을 통해 영화 내부를 들여다보면서, 우리네 (외)할머니가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광경을 역시 신기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영화에서 할머니의 삶이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느티나무처럼 할머니의 삶은 정주의 삶과 정태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바뀌는 것은 할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도시에서 온 소년이었다. 할머니의 삶은 초라해보였지만 실제로는 위대했고, 한심해 보였지만 속 깊은 진정성을 갖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년은 할머니에 동화되었고, 소년의 변화는 바라보는 이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우리는 할머니의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과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켜야 했다. 이것이 과거 영화가 노인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집으로〉의 할머니는 초라했지만 위대한 현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의 정주와 정태적 삶은 그 자체로 찬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이전의 영화는 적어도 노인의 삶을 다룰 때, 정태적 삶이라는 관례화된 틀을 애써 버리려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예전의 영화는 노인의 삶과 그 지향점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설정하는데 익숙했다. ‘문맹’의 경우를 예로 들면, 영화 속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할머니는 문맹일 수 있고, 그 상태는 정태적인 삶의 일부로 수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기조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일학년〉의 할머니는 이러한 패턴을 거부하고 있다. 그녀의 삶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변하기 시작했고, 정태적 삶은 곧 역동적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의 삶에 끼어든 한 사람으로 인해 가속화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손녀 동이. 총각 아들이 입양해서 키우던 딸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손녀라고 생각되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이해 못 한 동이는 아버지가 귀환을 기다리면서, 할머니의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는데, 동거만 놓고 따진다면 〈집으로〉의 동거 양상과 비슷하다.


    문제는 이 영화의 중심이 소녀가 아닌 할머니라는 점이다. 할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면서, 아들이 남긴 유품으로서의 일기와 예전 편지를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욕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인문학에서 노년의 삶은 지혜와 현명함의 상징이었지, 욕망과 그 실천으로서의 삶은 아니었다. 노인은 지혜를 통해 욕망을 누르고, 현명함으로 실천 요구를 억제하는 존재여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일학년〉에서는 이 지혜와 현명함 대신에, 욕망과 그 실천을 목격하게 된다. 할머니는 내면의 절실한 이유로 인해, 글을 배워야 했고, 읽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 절실함도 과거의 영화에서는 주목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가까운 영화 〈은교〉를 예로 들어보자. 국민시인 이적요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은교를 소유하고 싶었고, 은교를 통해 젊음을 구가하고 싶었다. 다만 이적요만 해도, 욕망과 그 실천 사이에서 상당히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에게는 현실적 욕구도 있었지만, 이 욕구를 참아야 하는 외적 시선도 존재했다. 물론 이적요 역시 욕망과 그 실현으로 인해 예전의 ‘노년’ 캐릭터와는 차별화되는 인물이지만, 캐릭터 내부에 내장된 진실만 놓고 본다면 지혜와 현명함을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2012년 들어서 재개봉하며, 단순하지 않은 주목을 받고 있는 한국형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에서의 두 노인도 비슷하다. 그들은 과거의 아픔을 숨기고 현실의 삶을 건사하는데 집착하는 노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울려 사는 기쁨을 누리게 되면서, 그들만의 세상(동거)을 만들겠다는 욕망을 앞세워나갔다. 그리고 그 욕망은 현실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더 예민하게 관찰하고 집중적으로 살펴야 할 문제겠지만, 2012년 연극과 영화계에서 노인의 ‘욕망’과 ‘절실함’의 문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화두는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움직임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노인은 사회의 소외된 계층으로 부상할 것이며, 이미 부상해 있는 이주 노동자, 이주 여성 등과 어울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될 것이다(〈할머니는 일학년〉에는 이미 이러한 단초가 나타나 있다).


    노년 인문학 혹은 노인의 사회학에서 새롭게 주목하는 노인들은 욕망을 앞세우고 이를 실현할 방도를 모색하는 인물들이다. 과거처럼 욕망을 억제하거나 정태적 삶을 고수하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잃어버린 노인의 위상과도 관련이 깊다. 이제 노인은 연륜만으로 사회의 수장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대접받는 시대는 끝났다고 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노인이 되는 세대 자체가, 예전부터 노인에 대한 맹목적인 존중을 인정하던 세대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과거 청년 세대부터 바라보던 평등한 세대로서의 노인 세대에 자신들 스스로가 진입했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로 인해 노인의 입장이 아닌 청년의 동격으로 지금의 청년들과 경쟁해야 한다. 변화된 입장은 변화된 사회 적응을 요한다.


    〈할머니는 일학년〉에서 할머니가 손녀에게 글을 배우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달라진 노년의 위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설정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노인은 권위나 숭앙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이거나 경쟁자이거나 오히려 가르침을 받는 수혜자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할머니도 ‘학교’에 가야하고, 젊은이들에게 배워야 하는 시대임을 새삼 상기시킨다. 아이들과 할머니는 모두 배움의 도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평등한 존재이다.



    3. 과거 삶의 소환과 미래 삶의 설계


    노인은 ‘지나온 삶’이 ‘다가올 삶’보다 큰 부피를 지니는 존재이다. 그래서 기존의 영화에서 노인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속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노인을 다루는 영화에서 ‘과거’는 필수 요소가 되며, 이러한 ‘과거’를 소환하기 위해서 영화는 ‘회상’의 방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인의 등장은 과거 시간의 등장이며, 빈번한 회상의 계기이며, 극중 현재와 비교되는 시간의 재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작품에 형성된 ‘현재’라는 시간 내에는, 미래와 과거로 가는 다양한 시간적 분기점이 형성되곤 했다. 그런 측면에서 노인은 다양한 시간과 사건을 끌어들이는 이정표 구실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노인의 새로운 역할이 기대되면서, 이러한 기능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기능이 과거 시간의 재현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대나 욕망의 표출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분야에서 노년 인문학의 관심 증대는 궁극적으로 작품 내 시간의 흐름과 사건 전개에 변화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일학년〉에서 이러한 변화를 찾아보자. 애초 아들의 죽음은 할머니의 삶을 더욱 정태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방송국 기자로 뉴스에 출연하던 ‘금쪽같은’ 아들 재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예측은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어머니의 상실감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녀는 어느새 이웃에게 화를 내고, 손녀를 타박하며, 찌푸린 얼굴과 독살스러운 말투로 고집을 부리는 노인으로 변화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종종 ‘헛것’을 보듯, 어린 아들의 환영을 보기도 했다. 과거의 시간과 정태적 삶에 구속되는 인물로 변한 듯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할머니는 이러한 제약에만 갇히지 않으려 했다. 전술한 대로, 그녀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읽고 싶다는 욕망’을 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은 미래의 시간을 움직일 수 있는 열쇠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래를 결정적으로 부여한 계기는 손녀 ‘동이’였다. 한글 공부를 하는 동이를 통해 할머니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미취학아동 동이를 통해 학교에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마련했다. 그러다가 동이가 더 이상 할머니를 가르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자, 할머니는 거꾸로 자신의 배움을 동이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삶을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배움을 동이에게 전달하는 행위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역할을 인식할 때만 가능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할머니가 배움을 위해 학교를 다닌다는 설정은 흥미롭고 또한 신선하다. 애초 의도야 아들이 남긴 편지와 유품을 읽기 위해서였겠지만, 이러한 과거 지향적 시간관은 곧 ‘읽는다’는 욕망과 ‘가르친다’는 동기 부여로 인해 ‘미래지향적 시간관’으로 탈바꿈되었다. 죽은 아들에 대한 회한에 갇혀 사는 ‘침중한 노인’이 아니라, 손녀의 미래와 자아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역동적 개인’으로 변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신’이야말로 최근 노년 인문학이나 노인의 사회학에서 주목하는 변화이다. 현대 사회에서 노인은 지자의 역할과 현자의 위상을 잃어버린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로 인해 과거와 정태적 삶에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변신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인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시간의 그늘에 갇히는 존재이기보다는, 현재의 삶 속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노인상은 삶의 층위를 다양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삶의 층위를 스크린에 구현하는 영화의 층위도 다양질 것이다. 노인은 ‘꿈꾸는 존재’가 될 수 있고, ‘활기차게 변환하는 캐릭터’가 될 수 있으며, 과거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시간을 설계하는 삶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할머니는 일학년〉에서 할머니는 과거로의 통로를 여는 존재―죽은 아들의 삶과 현재의 삶을 잇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로 열린 길을 여행할 수 있는 존재―어린 손녀와 함께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역할은 이 영화가 단순히 노인의 삶을 과거의 시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4. 느린/성근 시간과 빠른/조밀한 시간


    노인의 삶은 비교적 정태적이기 때문에, 이 삶을 구성하는 시간은 대체로 성글게 마련이다. 그들의 일상을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의 단위’로 세분할 수 있다면, 노인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일의 단위는 젊은이들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일의 단위보다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적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삶을 이루는 사건들은 대체적으로 단조로울 가능성이 크다.


    특히 직장에서 은퇴한 경우나 전문화된 영역을 전공 영역으로 삼지 않는 노인들은, 일어나고 일하고 잠자리에 눕는 단조로운 시간만이 그들의 몫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흔하고, 그들 스스로 세분화된 삶의 층위들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지 않은 일상을 보내는 노인들의 사례를 찾아온다고 해도, 노인에 대한 주변 인식이 대체로 그러하다는 상식 자체를 뒤엎기는 힘들 것이다.


    〈할머니는 일학년〉의 할머니 역시 느리고 단조롭고 성근 속성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영화가 그녀의 일상을 세세하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대개의 시골 노인처럼 일어나고 밥하고 밥 먹고 일하고 돌아와서 잠자는 단조로운 시간으로 하루를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화면이 그녀의 일상만큼이나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엌에 있거나 툇마루에 있거나(주로 밥을 먹으며) 들에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제외하면, 그들은 별다른 할 일이 없는 존재였다.


    그들이 움직이는 활동 범위도 넓지 않았다. 그녀가 위치한 공간도 집과 이웃집과 밭이 거의 전부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하루는 시골 마을에서 흔히 목격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였고, 그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녀는 별다른 해야 할 찾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마도 그녀의 삶에 한 가지 낙이 있다면 아들이 나오는 뉴스 정도를 보는 것이었을 게다.


    〈할머니는 일학년〉의 도입부는 이러한 그녀의 삶을 언뜻언뜻 보여주고 있다. 밥상을 차리는 장면, 들에서 일하는 장면, 잠자는 장면 등이 그것이다. 달라질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카메라는 무감각하게 이를 암시하고 있다. 틀림없이 그녀 자신에게 그러한 시간은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의미가 타인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노인의 시간은 성근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동이가 할머니의 집에 오면서부터이다. 동이로 인해 할머니는 자신의 성근 시간에 채워 넣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공부를 하는 일이었고, 글자를 배우려는 열망이었고, 학교를 가는 시간이다. 그에 따라 영화의 씬이 조밀해졌고, 영화의 시간이 촘촘해졌으며, 영화의 사건도 다양해졌다. 할머니는 그야말로 빠른 시간과 조밀한 일상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고, 이러한 시간의 변화는 씬의 다채로운 운영을 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할머니와 손녀는 다양한 구도를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할머니의 공부를 도와주는 손녀의 등장 이후에, 할머니 혼자 덩그라니 들어와 앉아 있곤 하던 화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손녀가 문간에서 기다리고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구도가 탄생했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하나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는 구도도 가능해졌다.


    여기에 이웃집 이주 여성 ‘누엔’이 결합되면, 더욱 다채로운 카메라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들은 공부라는 화두와 학교라는 목표로 인해, 통일된 피사체로 기능할 수 있는 질료로 통합되었고, 카메라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묶어지는 다양한 관계와 구도를 담아낼 근거를 얻게 되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씬 내의 움직임도 자극했고, 영화 전체의 시간과 커트의 빈도 그리고 씬 내부 지속 시간의 변화도 초래했다. 한 마디로 영화는 더 많은 커트와 더 복잡한 구도와 더 빈번한 씬 전환 그리고 더 빠른 시간 진행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효과는 노인의 정체된 시간을,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조밀한 시간으로 바꾸어놓았다. 〈할머니는 일학년〉의 씬 구성이나 장면 전환이 다른 영화에 비해 복잡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입부와 그 이후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인식과 감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변화로 인해, 관객들은 배움 전후의 삶이, 노인의 삶과 새로운 삶의 갈래 표지에 해당함을 인정하게 된다. 이것은 시간의 변화에 따른 삶의 변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5. 사회적 합의와 맹목적 열망


    과거에는 노인에게 요구하는 바가 분명했다. 노인은 지자나 현자가 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자세나 입장을 지켜야 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처럼 맹목적이거나 무계획적이어서는 곤란했고, 그들은 쉽게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해야 했으며, 그들은 함부로 움직이거나 섣불리 선택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신중함을 넘어 부동(不動)의 묘리를 지킬 수 있는 신심을 지닌 존재여야 했다.


    이러한 요구는 공통된 합의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합의는 싫든 좋든 과거 노인이 지녀야 할 노인상을 결정지었다. 그들은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한 집단의 원로로서, 한 국가의 운영자로서 도리와 염치를 지켜야 했고, 다른 세대에게 모범을 보이는 세대로서 원칙과 입장을 따라야 했다. 이것을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합의는 노인에게 일종의 강요로 전달되었다.


    가령 노인은 머리를 염색하기보다는 백발을 드러내는 편이 미덕에 가까웠다. 노인이 붉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면, 단정하지 못한 행위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노인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의 말을 듣는 것이 적절한 처신으로 평가받았다. 생각 없이 말을 내뱉고 이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은 노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에 해당했다. 노인은 욕심을 부려 어떤 것을 얻기보다는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젊은 세대들이 누릴 수 있도록 뒤편으로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고 여기곤 했다. 새로운 삶에 대한 관심이나 물건에 대한 집착은 금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통념과 상식을 〈할머니는 일학년〉에 대입해보자. 할머니는 한평생 문맹으로 살아야 했다. 주위 사람들도, 아들도, 무엇보다 본인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어쩔 수 없는 사실로 수용하고 있었다. 문맹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노력이 없다고 해서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할머니가 문맹이라는 사실에 적응하면서 그들 주변의 삶을 꾸려왔다.


    이러한 삶의 패턴은 사회적 합의를 낳고 할머니의 삶을 일정한 틀에 가두었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글자 편지를 쓰지 않았고, 이웃 주민은 화가 났을 때를 제외한다면 이 약점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할머니도 자신이 글자를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구태여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과 타자 그리고 집단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생성해놓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 내에는 ‘할머니라면 글자 정도는 못 읽을 수 있다’라는 양해심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더 이상 유효한 합의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많은 이들이 할머니의 문맹에 대해 타박하지 않는다고 해도, 할머니 본인이 자신의 문맹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글을 배워야 했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절실한 논리나 체험이 다른 이들에게도 그만큼 절실하게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맹목적인 고집’을 들고 나온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을 따름이다. ‘사회적 합의’와 ‘노인’이 어울린다면, ‘맹목적인 열망’은 ‘청년’에게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맹목적인 열망’이 ‘노인’과 결부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대응과 할머니의 변화는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최근 관심이 증폭되는 노년의 인문학은 사회적인 합의와 상식적인 편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맹목과 노인을 연결할 수 있는 창의적 시각이 요구하기 시작했다. 맹목과 노인이 창의적으로 결부되는 순간 노인의 내면에 도사린 절실한 염원이 드러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다. 이 염원은 어떠한 사회적 합의로도 누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노인의 사회학’에서 필요한 것은 이렇게 강력한 충동과 노년의 결합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결합을 용인하고, 그 필요성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구상해야 한다. 예술은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시스템과 새로운 가능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학문, 어떤 관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노년의 인문학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도 아니고, 소수의 천재에 의해 발명된 것도 아니다. 노년의 삶과 그 삶에 대한 고민은 예전에도 존재했다. 그 고민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술도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이 시점에서 이 문제는 새로운 각도의 의문과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날의 노년 인문학이 삶의 통찰과 인내심과 포용적 태도를 강조했다면, 오늘날의 새로운 노년 인문학은 내적 충동과 모험심과 새로운 시도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노년의 삶이 예전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도록 만든다. 이제는 노년의 삶과 새로운 삶의 결합을 어색하지 않도록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노인의 몫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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