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적요로운 인생에서 놓인 은빛 다리

  • 적요로운 인생에서 놓인 은빛 다리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적요, 고요함 혹은 취함


    적요를 한자로 하면 어떻게 써야할까.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뜻일까寂寥〕, 아니면 필요한 것을 취하거나 구한다는 뜻일까摘要〕. 소설가나 연출가에게 원뜻을 묻지 않고, 의미만을 따져 해답을 구한다면, 아마도 단어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는 없을 것이다


    전국민에게 시성으로 대우받는 국민 시인, 이적요. 그는 숲처럼 깊고 물처럼 고요하고 무거운 공기처럼 가라앉은 공간에 거처하고 있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모든 것이 오래전부터 자리에 있던 공간이다. 숲의 나무 하나, 담장에 걸쳐진 계단 하나, 서재에 놓인 책과 물건 하나에도 제자리가 부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원고를 담아두는 반다지였다. 시인은 반다지 역시 나무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옮겨서는 된다고 말한다. 시인 이적요는 모든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게 함으로써, 정주의 삶을 그들에게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 부여된 정주의 삶은, 시인의 삶이기도 하다. 그는 교과서에 수록된 <동백꽃>이라는 시로 전국민의 마음에 정주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자리는 정해져 있고, 자리는 존경과 추앙이라는 절대적인 지표로 매겨져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적요로울 수밖에 없다. 그가 움직인다는 것은 국민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고, 그와 함께 살아온 대상 모두가 움직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흔들려서는 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적요의 삶을 부여받은 시인은 어떠한 심정일까. 영화 <은교> 오프닝에서 이러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있는 대목이 있다. 시인이 가냘픈 자신의 몸과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성기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육체적 삶은 이미 활발하게 움직일 있는 나이를 넘었지만, 그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는 눈은 그러한 나이를 무심하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혹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눈에서 다른 욕망을 읽은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적요로운 삶을 강요당한 시인의 속마음에, 그러한 삶을 거부하는 몸짓이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말년의파우스트 명성과 명예가 아닌젊음 택했다. 존경과 추앙보다는사랑 선택했으며, 정신의 지고한 지위를 버리고육체의 현란한 흔들림 기꺼이 수용했다. 이적요 역시 동일한 선택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그에게 선택의 기회가 왔다. 제자리에 있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선택할 없고, 어떻게도 움직일 없다고 믿던 그에게, 이전의 적요를 깨는 하나의 대상이 주어졌다. 대상은 그의 세상을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하나의 다리라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적요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어떤 것을 취한다는 뜻도 된다.



    2. 은교, 은빛 다리 혹은 감춰진 교태


    은교는 銀橋 아닐까. 어쩌면隱嬌 수도 있다(나는 원작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 혹은 시나리오에서 어떠한 의미로 풀이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설령 내가 보고 있는 뜻이 아니라고 해도, 나의 해석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적요로운 삶에 염증을 느끼는 시인에게 나타난 은교는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가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번째 인상은 교태로움嬌態 자체였다. 아무도 없는 , 그것도 외딴 집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든 여인, 아니 소녀. 하얀 허벅지 살을 드러내고 살짝 흐트러진 상의 사이로 보일 펼쳐진 가슴. 그녀의 모습은 노시인에게 교태로움 자체여야 했다. 그렇다면 은교는감추어진 교태로움 뜻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시인의 은빛 세계에 연결하는 다리일 수도 있다


    시인에게 은교는 파우스트에게 그레첸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는 마법을 선물 받았지만, 이적요에게는 그러한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 더구나 이적요는 자신이 젊음을 선물 받을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만드는 존재와 만나야 했다


    서지우. 그는 이적요의 분신이자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단순한 제자를 넘어 이적요의 삶과 글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여야 했다. 이러한 서지우의 헌신에 스승 이적요는 권의 소설을 대필해주고, 소설로 서지우는 소설가로 입문한다


    하지만 서지우의 등단과 명예는 이적요의 혼란을 야기한다. 영화 <은교>에서는 과정에은교 출현을 삽입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의자에서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는 은교의 모습을 이는 비단 이적요뿐만 아니다. 자리에는 서지우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서지우는 이적요의 마음이 은교를 향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 챈다


    지라르 견해대로 하면, 시인의 마음은 제자의 마음으로 복사된다. 스승이 간절히 원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은 제자가 욕망을 결정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러면서 제자의 욕망은 중개자인 스승의 욕망을 닮아간다. 더구나 서지우의 경우에는 스승과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경쟁자로서의 스승을 상정하면서, 이러한 욕망의 복사 층위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는다


    스승이 없다면 자신도 있을 없다는 열등감과, 스승의 타락을 지켜볼 없다는 충정심, 그리고 자신이 없는 세계를 선점해서 바라보고 있는 능력에 대한 선망이 복합적으로 뒤엉키면서, 서지우는 한편으로는 스승을 버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승을 닮으려 하는 양자적 심리를 취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은교 서지우의 감추어진 마음으로 향하는 계기였다. 서지우의 현재 마음과 숨겨진 마음을 잇는 다리였던 셈이다. 자신의 내부에 꿈틀되는 욕망의 진앙으로 옮겨갈 있도록 해준감추어진 다리 셈이다. 그래서 서지우는 은교를 탐할 있는 이유를 얻게 된다.



    3. 부재하는 은교의 그림자


    시인과 제자는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게 되지만, 정작 대상이 되고 가교가 되는 은교의 자리는 영화에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의 삶에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로만 설정되고, 끝까지 이러한 우연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은교나, 비를 맞고 시인의 집으로 찾아온 은교, 혹은 지하 서재로 내려와 제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은교는 시인에게나 제자에게나 혼란스러운 존재가 아닐 없다. 반면 이유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은교의 위치는이라는 용어로 정리될 있겠다. 요즘 아이들이 사용하는 용어라고 정의된 단어는 의외의 상황에서 겪은 놀라움을 표현할 쓰는 일종의 감탄사라고 했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을 처음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이해했다. 은교가 자신의 실수를 가리기 위해서 엉뚱한 뜻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운 용어이다. 실제로는이라는 가르침을 뜻하는 용어에서 나왔겠지만, 사용자의 무지와 오해로 인해 다른 뜻으로 전이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이라고 말할 담기게 되는 엄숙함이 희화화되면서,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장난스러움이 단어 전체를 지배해버렸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은교는 대상이다. 은교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즐거움을 전할 아니라, 그녀의 출현에 담긴 의외성은 인식적 혼란과 감정적 착종을 끊임없이 야기하기 때문이다. 가슴에 새기게 되는 문신이나, 젊은 청년으로의 환상, 서지우에 대한 질투 등은 이러한 혼란과 착종이 몰고 결과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인에게 은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불러일으키는 당황스러운 존재 혹은 숨겨진 욕망 자체여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은교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은교는 시인에게나 제자에게나 당황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말은 그녀가 지닌 성적 매력까지 포함해서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이 치명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지우는 육체적으로 조숙한 은교가 아니라, 오히려 미성숙한 소녀를 은교의 의미지로 내세우고자 했다. 만개한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풋풋하고 미성숙한 육체의 아우라가 필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선택은 연출가의 선택이며 또한 권리일 것이다. 하지만 연출가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달리 여지를 남긴다.


    카메라는 은교를 통해 은교라는 17살의 소녀가 드러낼 있는 최대치의 낯선 매혹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영화는 그러한 장치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원에 잠들어 있는 은교의 모습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것이었다. 삼류 소설이나 성인 잡지에 나오는 흔한 설정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관념적으로 그려낸 뻔한 장면에 불과했다.


    카메라의 매혹도 관객을 사로잡지 못했다. 은교의 모습은 성적 관능과 매혹을 넘어 젊고 싱싱한 육체에 대한 선망의 시선을 이끌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 카메라 효과는 이러한 매혹과 선망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것은 비를 맞고 시인의 집으로 찾아온 은교의 모습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났다. 그녀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성적 판타지의 범주에 머물 , 경계를 넘어 획기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결과, 시인이 은교의 모습에서 낯선 삶에 대한 환희를 느껴야 하지만, 이것은 영화적 설정으로만 남고, 실제 관람에서는 충족되지 않는 관념으로 남고 말았다. 이러한 지연 정체된 미적 효과는 끊임없이 의문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은교는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치명적 매력을 지니지 못한 소녀는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하는가.


    은교는 느닷없이 나타나 시인의 적요를 깨는 존재였지만, 적요의 파괴는 시인 삶의 파멸과 직접적으로 연동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은교와 서지우의 섹스가 주는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은교는 관객이 보기에는 느닷없어 보이는 선택을 한다. 시인이 아닌, 제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연인 관계에 육박한 시인이 아니라, 속되기 이를 없는 제자를 선택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영화에 대한 해석(감상)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 있다. 은교는 선하고 절대적인 존재이고, 존재로 인해 시인이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해석할 있기 때문이다. 증거로 시인이 아름다운 단편 <은교> 꼽을 있겠다


    하지만 은교는 시인에게 다른 의미일 있다는 가능성까지 타진해야 한다. 일세의 영명과 반평생의 적요를 은교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지니는 존재이기도 해야 한다. 그녀는 느닷없이 시인의 삶으로 들어와, 그의 삶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낯선 것들의 가치를 주목하게 만들었지만, 이로 인해 마음속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하게 만들었다. 결과 빚어진 서지우의 (타살에 가까운) 죽음은 별도로 차치하더라도, 시성이라는 시의 높은 경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완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인의 삶을 폐허로 만드는 일이었다


    젊은 제자 서지우에게도 은교는 파멸의 이미지였다. 자신의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점은 미루어둔다고 해도, 은교는 아버지 같았던 시인을 시샘하고 꺼려하고 내리누르려는 욕망의 진원지로 작용했다. 그래서 그녀를 탐하겠다는 그의 욕망은 시인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파멸 의지와 다를 없게 된다


    분명히, 은교는 사람을 파멸하고 사람의 지향점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에게서 선한 모습만을 취할 수는 없다. 그녀는 본질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녀의 일으킨 삶의 혼란은 아름다움이 아닌 파괴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은교가 단편 소설 <은교> 서지우의 작품이라고 믿는 과정을 보자. 은교가 서지우가 작품이라고 판단할 , 이러한 판단은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처음부터 <은교> 시인의 작품이라고 믿었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은교는 시인의 창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제자와 섹스를 것이 아니라, 시인의 창작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제자와 섹스를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마치 오해로 인해 서지우를 탐하는 설정은 어딘지 어색하기 이를 없다. 은교가 판단하는 과정에서, 당연히할아버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젊은 남자 섹스를 하는 양면적인 모습이 드러났어야 했다.


    은교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탈출하는 것이어야 했다. 누가 자신을 아름답게 그렸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가치는 17세의 소녀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고, 본질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는, 맑고 이상적인 존재여야 이유가 없다. 그녀를 맑고 순결하고 이상적인 존재로 보는 것은 시인의 시선으로 충분하다. 그녀는, 자체로는, 맑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것은 더구나 없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시인이 것이 하나의 순수였지만, 실제로 손에 떨어진 것은 묻은 새였어야, 작품의 아이러니와 비극성은 현실적인 층위를 벗어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를 처음부터 바라보기 위해서 서지우가 필요했던 것이므로, 서지우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은교의 등장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삶을 의탁하기 위한 방법이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비를 맞고 시인의 집으로 , 그녀는 의문 가득한 삶의 곡절을 파멸의 그림자로 길게 드리운 존재가 되었다. 손찌검을 하는 어머니와, 반복되는 가출, 그리고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대담한 포즈와 안에 숨겨진 불길함. 모든 것은 그녀의 뒤편에 웅크린 삶의 어떠한 측면을 암시하는 듯했고, 이러한 어두운 면은 작품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본모습으로 우러나와야 했다.


    하지만 <은교>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를 철저하게 지웠고, 그녀에게 확실한 면죄부를 전하기에 급급했다. 결과고등학생이 섹스를 하는지 알아요?”라는 질문에외롭기 때문이라는 상투적인 대답을 일관하고 말았다. 이러한 대답이야 말로 영화에서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라고 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은교의 아름다운 내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은교의 모습을 아름답게 읽어내야 하는 시인의 절박함과 실제로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는 은교의 실체 속에서 인식적 괴리를 경험했어야 했다. 그래서 서지우가 필요했고, 그러한 서지우를 버리고 죽여야 하는 이적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바람과 정당성을 미처 돌보지 못했다.



    4. 성적 유혹을 넘어 삶의 근원적 위기로


    파우스트가 선택한 사랑은 황당한 것이었다. 요즘의 관점으로 환원하면, 어처구니없는 해당한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게는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적요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은교는 삶의 재앙이었지만, 적어도 이적요 자신에게는 놀라운 선물일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 이적요는 은교로 인해 삶의 활력과 가치를 일시적으로나마 되찾을 있었지만, 대가로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하고 지상의 삶으로 추락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부정해야 했고, 자신의 제자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명성과 명예를 떠나 자신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없다. 더구나 싸움은 처음부터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높은 경지의 정신적 수준에서 낮은 수준의 경지로 하락한다는 것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일일 있다. 스캔들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쌓아온 정신적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일대의 시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은교>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가 <은교> 보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가지 묻고 싶다. 정신의 높은 경지에 오른 이도 젊음이라는 유혹에서는 자유로울 없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유혹을 억누르기 위해 평생을 쌓아온 자제력마저 그토록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당연한가.


    영화 <은교> 지고한 경지/젊은 매력의 구도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안에 펼쳐질 무수한 경우의 수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말은 이적요의 선택이 무모했다거나 근거 없다는 것이 아니라, 수양의 경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선택 가능성을 작가가 제대로 따져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작가는 은교가 지니는 치명적 매력을 한쪽 방향으로만 해석하려 했다. 유혹은 분명 후회를 부르고, 후회는 인생의 부정적인 가치와 연결되기 마련이다. 은교의 등장은 이러한 부정성과 맞닿아 있어야 했다. 영화는 점을 간과했다. 그래서은교 아름다운 유혹일 수는 있지만, 상징으로서의 참다운 위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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