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마음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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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마음에 지은 집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안과 밖의 경계와 소통


    세계적인 건축가의 책을 읽거나 그들이 만든 건축물을 접해 보면, 건축이라는 분야가 공간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고유한 접근 방식의 변증법적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령 우리가 살았던 집들을 보자. 과거의 집들은 내부를 보호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담장은 높고 안과 밖의 경계는 명확하다. 외부와 차단되는 내부의 공간을 고유하게 만들려고 하는 생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학개론〉에서는 ‘오래된 한옥’이 이러한 옛날 집의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현재로 오면서, 집은 외부와 내부의 공간적 단절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개조된다. 담장은 점점 낮아지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문 역시 확장되다가 이제는 집 전체가 출입문일 수 있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과거의 문이 잠그는 기능을 주로 담당다면, 현재의 문은 자유스러운 출입을 위한 통로로 그 개념이 바뀌고 있다. 외부가 들여다보이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된 집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건축학개론〉에서 이러한 개방적 집 구조는, 승민이 리모델링하여 선보인, 바다를 향해 넓은 창을 단 현대식 가옥으로 구현되고 있다.


    우리의 현재를 보자. 대학은 담장을 허물고 내부를 공개하기 시작했고, 도시에서 건물의 창은 점점 커져서 벽면 그 자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건물마다 로비라고 부르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필요한 한 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테라스가 확장되면서, 과거에는 밖의 공간이었던 거리의 일부가 이제는 안의 공간과 뒤섞이게 되었다.


    거꾸로 말하면 안과 밖의 구별을 명확하게 구획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우세해지고 있다. 안이지만 밖이 될 수 있고, 밖이라 할지라도 안에서 함부로 배제하지 않는 공간. 이러한 공간의 활용과 배치는 가치관의 전도에 따른 것이다. 어쩌면 기실, 두 개의 공간, 두 개의 구획이 실제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포용적 사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주변에서, 확장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2. 버려진 마음의 공간


    두 채의 집이 있다. 하나는 전통 가옥으로, 버려진 집이었다. 방과 벽은 내부를 감싸 안는 형국으로 배치되어 있고, 높은 담장과 좁은 문으로 인해 안과 밖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내부에 작은 마당이 있지만, 이 마당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마당은 숨어 있기 좋은 공간이 된다. 이러한 공간의 모습은 누군가의 마음을 닮았다. 가을임에도 꽃을 심고 가꾸는 서현의 마음이 이 공간에 투영되어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 집의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없다. 당연히 이 집의 마당에서도 바깥의 사람들을 쳐다볼 수 없다. 두 개의 시선은 교차되지 못하고 차단되는 형태의 집이었다. 서현의 마음도 좀처럼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는 구조였다.


    다른 한 집도 버려진 집이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벽이 있었지만, 그 벽은 막 허물어지려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그 벽을 허물고 방 자체를 확장하고 공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 공사는 중단된 상태이지만, 언젠가 재개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마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 집으로 이르는 길도 비록 적당한 경사를 이루고 있지만, 철저하게 차단된 형태의 길은 아니었다. 이 집도 마음을 닮았다. 오랫동안 버려졌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누군가를 향해서 마음을 열려는 사람이 방문했다는 점도 그러하다. 적당히 개방되어 있지만, 또 적당히 차단되어 있는 점도, 알 듯 모를 듯한 마음의 구조와 유사했다.


    〈건축학개론〉은 이 두 채의 버려진 집으로부터 출발한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는 30대의 양서현이 걷고 있는 현대식 가옥이 카메라에 포착되고 있다. 좁은 공간, 허물어진 벽, 뜯어진 마감재, 먼지 쌓인 마루. 그곳은 분명 누군가가 버린 공간으로서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집 한 켠에, 노크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공간도 숨어 있었다. 30대의 양서현은 그 공간으로 들어가고, 그 공간이 복잡하지만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또 하나의 버려진 공간은 20대의 두 남녀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한옥집이다. 그 한옥집은 건물 벽면 자체가 내부의 공간을 강력하게 감싸 안으며 고집스러운 인상을 전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집. 그 집은 그래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첫사랑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에 서툴렀던 젊은 날의 미숙한 마음과 너무나 닮은 집이다.


    두 공간은 누군가에 의해 리모델링된다. 현재의 집은 건축가가 된 승민에 의해 리모델링되고 있고, 과거의 집은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해야 했던 서현에 의해 청소되고 정리된다. 그러면서 버려졌던 집들이 누군가의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핵심 전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건축학개론〉은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집이라는 공간은 물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집은 마음과 더욱 닮았다. 우리는 마음 속 어떤 공간을 버려두고 살아간다. 그 마음 속 공간이 익숙한 손길에서 벗어나 방치된다면, 집처럼 황폐화되고 쓸쓸하게 버려질 것이다. 첫 사랑은 그 속에 숨어 있었다. 버려졌던 공간, 황폐해서 좀처럼 찾지 못할 것 같은 공간. 그 공간은 분명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리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집처럼 버티고 있었다.



    3. 기억과 현실을 오가며 건축한 마음의 집


    〈건축학개론〉은 두 개의 플롯을 넘나드는 구조로 지어진 2층 건물 같은 영화이다. 이미 만들어진 1층이 과거라면, 새로 만들고 있는 2층은 현재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는 1층 집을 둘러보고, 그에 맞추어 2층 집을 짓는 설계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가령 30대의 승민이 첫사랑의 기억을 되짚어서 30대의 서현에게 맞는 집을 짓는 이야기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30대의 승민에게 자신이 살 집을 지어달라는 서현의 부탁은, 20대의 서현과 승민이 맺었던 인연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의미를 온전하게 해석할 수 없다. 2층 집이 1층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과거와 현재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며 상대의 이야기를 보완하고, 보이지 않게 설명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플롯 구조는 두 개의 이야기를 넘나들 수 있는 특수한 매개 요소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더블 플롯의 원조 격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리어왕〉을 보자. 이 작품의 메인 플롯(main plot)은 악한 딸에게 버림 받는 왕의 이야기이고, 서브 플롯(sub plot)은 악한 아들에게 버림 받는 귀족의 이야기이다. 두 아버지의 선한 자식들은 악한 자식들에 맞서 싸우는 공통점도 내비치고, 그로 인해 두 아버지가 불행해진다는 결론도 동일하다.


    두 개의 이야기는 나란하게 진행되면서, 가끔 서로의 권역을 침입하고, 그로 인해 더 큰 이야기로의 확대를 모색할 수 있게 된다. 〈리어왕〉의 두 개의 이야기를 넘나드는 매개 요소는, 아버지/자식, 돌봄/버림, 선/악, 효행/악행이라는 키워드이다. 이러한 동질적 성향을 이해해야, 두 개의 이야기가 공조하여 진행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건축학개론〉에서 현재의 서현과 승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서현과 승민을 이해해야 하며, 이렇게 형성된 ‘과거에 대한 이해’를 거쳐야만, ‘현재의 서현과 승민’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두 플롯의 기본 골자는 안식처로서의 집을 만들고(혹은 발견하고) 그곳에서의 정주를 꿈꾸는 인간의 바람이다.


    장소는 사람들에게 정주에의 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어떤 공간을 발견하게 되면, 그 공간과 관련된 기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태어난 집에 가면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고, 다녔던 학교에 가면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걸었던 거리나 놀았던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곳에 쌓여 있는 시간의 켜를 발견하게 되면, 시간의 켜 속에 함께 내장된 기억과 삶을 발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가 꿈꾸는 정주의 삶을 확인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건축학개론〉은 정주를 꿈꾸는 인간의 바람을 보여주기 위해, 집의 속성을 매개 요소로 삼았다. 과거의 집이 서현이 가꾸는 집이었다면, 현재의 집은 승민이 리모델링하는 집이다. 과거의 집이 폐쇄와 칩거의 공간이었다면, 현재의 집은 개방과 소통의 공간이다. 과거의 집이 헤어짐의 아픔을 가리켰다면, 현재의 집은 시간을 건너 다시 이어진 만남의 기쁨을 뜻할 수 있다. 과거의 집이 단절된 끝이었다면, 현재의 집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이러한 자질들은 과거/현재, 서현/승민, 폐쇄/개방, 칩거/소통, 헤어짐/만남, 아픔/기쁨, 끝/시작의 대조적 성향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반면 두 개의 집은 모두 정주의 꿈을 이어가고 있고, 두 개의 집은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다루고 있으며, 두 개의 집이 마음의 비유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정주, 사랑, 마음이라는 키워드는 집의 동질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학개론〉은 두 채의 집을 짓고, 두 채의 집 속에 담긴 대조와 유사의 관점을 찾아내도록 부추기는 영화이다. 그 미묘한 의미의 연쇄를 이해해가는 이들에게, 이 작품을 해독하는 작업은 건축물의 숨은 원리나 의도를 찾는 작업만큼 흥미로울 수 있다. 그것은 아련한 기억을 뒤쫓는 작업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 후에,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 안에 숨어 있던 진실을 뒤늦게 발견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픔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삶의 매력일 수도 있다. 삶의 진실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픔이겠지만, 그래서 삶은 다시 도전할 만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매력이기도 하다. 사랑의 마음 역시 비슷할 것이다. 미욱한 마음과 고집스러움 그리고 어이없는 오해로 인해 어긋나 버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아픔이겠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출발과 오지 않은 미래 그리고 도전의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력일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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