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강요된 용서와 피할 수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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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요된 용서와 피할 수 없는 선택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묻힌 작품을 꺼내 보다.


    이정향의 영화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지 않은 놀라움을 일으키곤 한다. 1998년 〈미술관 옆 동물원〉은 당초의 예상을 깨고 이외의 흥행 성적을 거두면서 영화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관객의 숫자가 많다는 것만으로 작품에 대한 질적 평가를 결정할 수는 없겠지만, 관객의 호응을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는 수준 높은 완성도를 지닌 영화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정향은 데뷔작으로 흥행에 성공한 감독치고는 다소 긴 침묵을 지키다가, 4년 만인 2002년에 〈집으로〉를 들고 영화계로 복귀했다. 이 영화는 이른바 2000년대 한국영화의 정서와 감수성을 획기적으로 뒤집은 영화이다. 화려한 배우나, 짜릿한 액션 씬, 혹은 강렬한 볼거리를 동반하지 않고도, 평소 영화를 즐겨 보지 않던 사람들까지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장면을 억지로 만들지 않고도, 참신한 소재와 따뜻한 시선과 완성된 연기 그리고 자연스러운 설정만으로도,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멋진 사례였다. 이후 이 영화는 200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매김되었고, 영화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을 개척한 전례로 기억되었다.


    그 뒤 이정향은 9년 동안 침묵을 지킨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소식을 궁금해 했고, 그녀의 새로운 영화를 기대했다. 아마도 자신이 만든 영화적 틀과 기존의 성과를 넘어서기 위해서, 새로운 발상과 훈련에 몰두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추측하기도 했다. 장고에 빠졌던 이정향은 드디어 2011년 10월 〈오늘〉이라는 영화를 들고 한국 영화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영화의 개봉 시점에서 관람할 수 없었다. 사정이 있어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없었고, 한동안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2012년이 되어서야 철지난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아마 이 영화를 기다리면서, 이정향에 대해 어떤 기대감을 쌓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 개봉 시점에서 이 영화를 놓치면서, 기다린 시간만큼 더 많은 호기심을 겹쳐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는 순간, 집요함과 이질감에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상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된다. 관객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평론가들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철저하게 사라지는 영화가 되었다. 그동안의 이정향의 영화 이력과 비교하건데, 이러한 결과 역시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 닮은꼴의 여인들


    이정향의 영화는 종종 그녀의 영화를 기대하는 이들의 의표를 찌르곤 한다. 그녀의 영화를 전혀 기대하지 않던 시절에는 깜짝 개봉으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고,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대치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곤 했다. 그것은 어떤 의문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의문은 영화를 보면서 일정 부분 해소되곤 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 영화에 대한 영화였고, 〈집으로〉가 순수 동심에 대한 영화였다면, 〈오늘〉은 용서에 대한 영화이다. 우연한 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다혜. 그녀는 약혼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17살 소년을 용감하게 용서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의 용서를 실수나 억지라고 간주한다. 약혼자를 죽인 사람을 그처럼 쉽게 용서할 수는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혜는 진심으로 그 소년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복음하기 위해서 방송국 PD라는 직업마저 그만두고, 사형수의 탄원을 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취재해야 하는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를 살해한 이들을 위해 대신 용서를 구했던―즉 사형수들에게 자비를 요청하는―사람들이었다. 이른바 ‘큰 용서’를 실천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해야 하는 다혜의 삶은 점점 정체 정체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삶은 ‘죄를 지은 사람들’과 ‘그 죄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인과관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죄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도 응당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는 ‘당위로서의 용서’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강요된 용서는 그녀의 삶의 반경을 줄어들게 만들었다.


    이때 그녀의 삶으로 또 하나의 ‘용서’라는 화두를 지닌 소녀가 뛰어든다. 그녀가 지민이다. 지민은 다혜 친구의 여동생이다. 또한 다혜가 약혼자를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날의 정황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지민의 오빠 지석은 다혜의 친구이자, 다혜 약혼자인 상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날 지석은 만취가 되어 상우에게 도움을 청했고, 상우는 생일인 다혜마저 놓아두고 지석을 챙기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막상 지석이 있던 장소에 도착하자, 지석은 이미 여동생 지민이 데리고 간 후였다. 혼자 남게 된 상우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혜는 홀로 남게 된다.


    지민은 평소 상우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홀로 남게 된 다혜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혜의 생일을 기화로, 다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다혜의 집을 찾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민의 방문은 다른 목적을 지닌 것으로 판명되지만, 처음에는 상우의 기일이자 다혜의 생일을 위로하기 기억하는 착한 손님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민이 다혜 옆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들은 축하나 위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지민은 어떤 답을 구하기 위해서 다혜를 찾았다. 그 답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자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지민에게 다혜는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행한 사람이었다. 자신 역시 그러한 용서를 강요받고 있는 처지에서 다혜의 삶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 여인의 황당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용서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다혜를 지민은 이해하지 못했고, 집과 아버지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지민을 다혜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혜는 지민이 당하는 폭력의 실상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민이 던지는 용서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지민 역시 다혜에게 용서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망각하고 다혜의 용서를 위선으로 속단하는 나쁜 태도부터 앞세웠다. 다혜의 마음을 듣기보다는, 다혜의 선택을 의심하고 재단하려 했다. 다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민의 삶을 이해하기보다는 지민의 삶을 고치려고만 들었다.


    두 여인은 실상 같은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 실체가 용서였다면, 그 용서의 근원에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민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다혜는 자신이 용서했던 소년이 더 큰 폭력을 일삼는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두 여인의 삶은 폭력으로 인해 응어리져갔고, 그 폭력으로 인해 심적 무게감만 더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두 여인의 고민이 실은 두 사람만의 고민이 아님을 쉽게 눈치 챈다. 이정향의 이 작품이 다소 식상해지는 지점이 여기이다. 두 여인은 지나치게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로 인해 거의 동일한 삶의 피해를 입고 있었으며, 그래서 너무나 유사한 닮은꼴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서사의 기본적인 틀은 낭비 없는 동일함(구조적 동형성)으로 점철되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동일함이 지나치게 적용되는 바람에 복잡한 삶의 문제를 손쉽게 재단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이 작품의 한계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여지도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쉽게 용서하고 누군가의 폭력을 잊는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유효한 일인가. 아니 한 인간의 자비로운 선택만을 강요한다면, 이 사회에 즐비한 문제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인간의 용서가 다른 인간들의 문제를 좌시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3. 용서의 화두와 오늘의 문제


    용서의 문제는 영화에서는 즐겨 종교적인 교리와 어울린다. 가령 이창동의 〈밀양〉은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 대한 용서를 거론한 바 있다. 이때의 용서도, 한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사건에 대한 용서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삶의 방향을 상실한 인간이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용서는 쉽게 내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용서는 어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있다. 용서의 진위도 문제가 된다. 〈오늘〉의 다혜처럼, 용서라고 믿었던 것이 회의였고 갈등이었고 위장이었다고 판명된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삶을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어서, 거짓으로 행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에서도 같은 전언을 다루고 있다. 용서가 용서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 가령 반대급부로서의 증오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증오에 대한 권리는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도, 증오할 수 있는 원리는 없다.


    다혜는 자신의 삶을 잃고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원래의 삶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라는 방식으로 그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다. 지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그녀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방법은 용서뿐이었고, 정상적 삶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여인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셈이다. 그녀들에게 일차적인 용서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의 위선적 자기 방어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정향의 영화는, 영화계를 떠나 살았던 이정향의 그동안 고민을 보여주는 듯 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정향이 이러한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가 궁금해진다. 혹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용서라는 화두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영화가, 그 동안 그녀가 풀어야 했던 어떤 숙제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은, 영화적으로는 그다지 유효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정향의 고민이 배어 있는 〈오늘〉의 화두일 것이다. 이 화두는 용서와 폭력일진대, 하필이면 왜 그 제목을 ‘오늘’이라고 지어야 했을까. 폭력은 늘 일어나고, 용서 역시 그 폭력의 끝에서 꼭 따라 붙는다고 할 때, ‘오늘’은 어떤 의미일까. 용서하지 않고 그 폭력을 직시하자는 뜻일까, 아니면 용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신중해야 한다는 뜻일까.


    이 영화가 지닌 진정한 매력은 미학도, 참신함도, 완성도도, 새로운 경지도 아니다.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화두’와 ‘용서라는 위선에 관한 문제’이고, 그러한 문제들 속에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어떤 이들의 선택에 대한 고민’이다. 그 고민이 너무 진지해 보여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관객이 없었을 지라도, 그 고민 속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남달라 보이고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아마도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동안, 그들의 폭력으로 지쳐갈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용서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늘 망설이고 후회하고 반항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끝은 늘 용서일 수밖에 없고, 삶으로의 어정쩡한 귀환일 수밖에 없다. 더 유감인 것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도 그러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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