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석의 영화 이야기
  • ▶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는 힘 혹은 여유
  •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는 힘 혹은 여유

     






    김남석(부경대 교수, 영화평론가)

     

     

     

    1. 흐트러진 시작

     

    영화 〈완득이〉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흥행 호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윤석(‘똥주’ 역)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파격성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초 예상을 깨고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 ‘완득’ 역의 유아인의 연기도 덧붙여질 만하다.

     

    이 영화의 시작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아버지(곱추)의 탭댄스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아들 완득. 어느새 그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어 아버지의 행상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혼내주는 삽화가 이어진다. 어린 아들의 손에 나가떨어지는 불량배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시작은 약자를 괴롭히는 악한들을 물리친다는 고전적인 통괘함을 앞세우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 장면들은 ‘똥주’라고 불리며 학생들에게 막말을 하는 담임선생님과 문제 성향이 다분해 보이는 어떤 반의 풍경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을 보면, 〈완득이〉는 학생들의 성장과 교육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담임선생님과 완득의 관계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끼어드는 각종 삽화들. 완득의 애처로운 삶과 동주의 우격다짐의 삶이 충돌하는 자리에, 슬금슬금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닥다닥 붙은 관계로 사생활 침해가 예상되는 동네에서,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옆집 남자가 대표적이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 남자는, 처음에는 지나가는 인물처럼 나타나지만 점차 그(옆집 아저씨 역, 김상호 분)와 그의 여동생(호정 역, 박효주)은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웃 간의 분쟁을 그린 영화인가.

     

    영화는 한참을 혼란스럽게 만들다가, 이번에는 완득의 어머니를 소개한다.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는 완득에게, 동주는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울러, 그 어머니가 필리핀 여성이며 지금 다른 곳에서 식당일을 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이름은 이숙희. 완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따로 떨어져 살고 있을 뿐이지, 이혼한 것도 사별한 것도 아니었다. 완득의 정신적 혼란은 가중되고, 영화의 중심은 다시 완득의 성장과정에 맞추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완득의 방황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완득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신체장애를 앓고 있은 아버지, 그 아버지를 따라 다니는 정신 장애 삼촌(민구 역, 김영재 분), 그리고 이상한 담임선생님, 마지막으로 외국인 어머니. 누구의 말대로 어색한 조합이 아닐 수 없는 가족 구도였고, 이상한 가계 구도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완득의 내면 심경을 비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가출’한다고 써놓은 문구를 자신이 가장 먼저 보아야 하는 완득의 심정조차, 이 영화에서는 더 이상 동정이 대상이 아니다. 으레 나타나기 마련인 비련의 테마나, 우울한 정서도 가급적 배제된다. 대신 작가는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눈물이나 비애가 아닌 유머나 여유를 선보이려 한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완득의 눈으로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관객들로 하여금 보도록 해주는 것에만 있다고 믿는 듯 하다.

     

    완득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낯설고 이질적이고 다소 어이없는 것이기는 하나,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 만물이 자신만의 질서와 궤도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궤도와 질서의 한 가운데 편입된 상태임을 인정하고 말하는 듯 하다. 완득의 입장에서 보면, 신체장애가 싫다고 아버지를 싫어할 수 없으며, 남들보다 모자라 보인다고 삼촌을 비난할 수도 없다. 더구나 어머니가 외국인이라고 그리움의 정서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완득에게 세상은 ‘혼란’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혼란을 과장해서 그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완득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관객들은 다시 제자리로 찾아올 수 있다. 울거나 비감에 젖지 않고, 웃으면서 그 혼란과 혼란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되찾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를 되찾게 도와주는 또 하나의 캐릭터가 ‘똥주’이다. 도저히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말투와 기행을 일삼는 인물. 그는 막말을 하지만 깊은 속을 지니고 있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 같지만 상대를 배려하고 그 안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존중할 줄 안다. 더구나 그는 평등하고 공평하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동주의 역할은 완득이 이탈하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완득과 보조를 맞추면서 세상의 어지러운 면을 직시하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직시는 관객을 향한 정문일침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가 다니는 교회를 통해, 그가 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버젓이 자행되는 불법과 모순을 보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파렴치한 의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2. 함께 사는 삶

     

    어느새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때 경모와 우상의 반열에 올랐었던 백인들(특히 미국인들)을 비롯해서, 각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 전통적인 이웃인 일본인과 중국인들까지. 우리는 그들에게 어떠한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백인들(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일종의 경모의 시선을, 유럽인을 중심으로 한 서양인들에게 막연한 신비감을, 일본인에게는 내면적인 경계심을, 중국인들에게는 폄하의 시선을. 이러한 시선의 종류에는 분명 개인 차가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경제와 정치의 주도권을 준 이들에게는 상향의 시선을, 역사적으로 대척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대척의 시선을, 경제와 문화면에서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는 하향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최근 외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제 3세계 노동자, 소위 말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 그것이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은 동남아시아인들, 중국의 북쪽과 서쪽에 붙은 작은 국가인들, 중국 연변 지방의 조선족 동포들을 아우른다. 대개는 경제적으로 후진국이고,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국가들이다. 그들은 경제적 부를 꿈꾸며 한국을 찾은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들 중에는 경제적 원인으로 인해 한국으로 팔려온 신부도 상당하다. 그녀들은 남편의 재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일종의 매매혼을 하기도 한다.

     

    이들이 어느새 우리 주변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 역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단일 민족 국가관을 강조하던 한국도 이들의 존재와 다음 세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텔레비전과 거리에서 다문화 가정, 다문화 사회의 본질과 장점을 계몽하는 광고를 쉽게 목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에서도 이러한 동참에 동조하고 있는 것일까. 〈완득이〉는 완득의 어머니를 매매혼의 여성(필리핀 여인)으로, 동주의 아버지를 불법체류자를 악용하는 악덕 기업주로 설정하여, 이주노동자와 유색인종의 문제를 영화 상으로 다루고자 했다. 완득이를 통해 필리핀 어머니를 마음으로 수용하고 깊은 정신적 유대를 쌓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동주를 통해 아버지에게 악용당하다가 버림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함께 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시선 변화를 촉구하는 기능을 맡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한국인과 외국인의 공존 혹은 화합을 그리려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완득은 윤하(강별 분)를 사귀면서 학교 내에 존재하는 계층 간의 차이를 넘어서고 있다. 일등인 윤하와 꼴등인 완득이가 학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만나게 된 것이다. 완득의 가정 구도 또한 이러한 파괴된 위계의 시점에서 볼 수 있다. 신체장애인 아버지, 정신장애인 삼촌, 외국인 어머니, 문제아 완득이 모인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살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동주와 그의 이웃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욕을 일삼으며 동네 사람들의 빈축을 사던 이웃집 아저씨와, 무협소설을 쓴다는 괴짜 여동생은, 어느새 소중한 이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몰려드는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 그들은 적어도 동주의 교회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영혼이 될 수 있었다. 영화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기 위해서 이처럼 다양한 광경을 담아내어야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흐트러진 시작이었지만, 점차 흐트러진 사건들의 조각이 모이면서 광의의 일체감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3. 웃음과 여유, 비감을 버리고 인정의 시선으로

     

    2000년대 한국 영화는 외형적으로나 내실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제작 편 수, 작품 수준, 관객 수, 관련 종사자 수, 상영 인프라(극장 수와 배급사 수),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 인식 등에서 놀랄만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비약과 성취가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될 전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다양한 장르의 등장이다. 한국 영화의 제작 편 수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장르와 확대된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소위 말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영화들도 상당하다. 상업적 흥행영화가 만들어지는 와중에 진지한 사회의 문제를 다루려는 영화도 함께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이것은 영화 산업이 전반적으로 균형을 찾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완득이〉는 분명 상업영화이다(모든 영화는 상업적 목적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 경우에는 관객들의 성향을 고려하여 수익을 얻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을 둔 영화를 지칭하기로 한다). 하지만 작품 내부에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깊게 함축한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를 영화적 소재로 다루면서, 그들의 아픔과 한계를 이해하려는 작가의식을 곁들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흥미로운 것은 외국인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영화적 맥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후 이러한 영화들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뚜렷한 결과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물에 속하는 영화들로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2009년), 육상효 감독의 〈방가방가〉(2010년), 장훈 감독의 〈의형제〉(2010년)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들은 ‘한국인’과 ‘외국인’, 즉 ‘내국인으로서의 한국인’과 ‘한국 내 거주하는 외국인’의 대립과 긴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들의 골격은 한국인과 외국인(심지어는 연변 동포 및 북한 사람도 포함)의 대립과 갈등을 전면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정착․유지․강화되고, 이에 따라 경제적․산업적 구조가 재편되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점차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한국 사회가 다원화․개방화되면서 한국 내에 다른 민족과 인종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그들은 한국인들의 이웃과 동료가 되어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 한국 사회 내부에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주 노동자들과, 한국말을 서툴게 사용하는 다른 민족 출신 신부들과, 같은 민족이지만 국적이 다른 한국계 외국인들, 그리고 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내부인도 아닌 탈북자들이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 ‘낯선 타자’들에 대해 21세기 한국인의 관념과 사회적 모순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세 편의 영화는 주목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세 편 영화만큼 주목을 끄는 경우는 아니지만, 〈초능력자〉 (2010년, 김민석 감독) 등에서도 외국인의 모습은 낯설지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초능력자〉에서 외국인(버바 역/아부다드 분, 알 역/에네스 카야 분)은 한국인의 눈요기에 그친 감이 없지 않다. 영화는 그들의 애로점과 삶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들은 핍박받는 외국인이나 차별받는 외국인이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한국어를 잘 사용하고 한국 문화에 익숙한 우호적인 이웃으로만 그려진다. 그들은 우리에게 신기한 외국인일 따름이다. 물론 이 세상 어딘가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현실의 문제를 놓고 감안할 때 그들의 모습은 왜곡된 측면이 적지 않다. 이것은 〈초능력자〉라는 영화가 상업영화의 기조를 강하게 담보한 채 제작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완득이〉는 두 맥락의 영화들 중간에 위치하는 영화이다. 이 작품은 상업영화의 성향을 띠면서도, 한국 사회의 문제적 현실을 부각하여 지적하는 역할도 병행하고 있다. 따라서 〈완득이〉는 두 영화적 흐름의 장점을 취한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완득이〉의 문제의식이 비단 외국인 노동자 혹은 이주자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계층과 사회적 그룹이 소개되고 있다. 신체장애자, 정신장애자, 혼혈인, 저학력자 등이 외국인 이주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 내부에서도 차별과 위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완득의 모친(외국인 신부)은 남편이 곱추(신체장애자)라는 이유로 따로 떨어져 사는 인생을 선택했다.

     

    〈완득이〉는 사회에 존재하는 엄연한 위계와 차별을 타자의 시각으로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사회 내부의 시선으로 옮겨와 주체의 시각으로 표현하고자 한 영화이다. 완득이는 그러한 측면에서 타자와 주체의 중립 지대에 위치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교육을 받고 있으며 한국적 사고를 지닌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무시 받는 아버지를 두고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국과 외국의 혼혈인이다. 이른바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는 복합적 가족 형태의 한 일원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완득이 캐릭터의 설정은 문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창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완득이는 사회적 차별과 계층 간 위계의 한 가운데에서 각 방향에서 진행되는 압력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사회적 소외자들의 교차로에 선 인물인 셈이다. 아버지에 대한 사회적 폄하, 삼촌에 대한 연민,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 정규 교육 상에서의 문제아 취급, 학업 성취도 저하로 인한 혼란 등이 그에게 가해지는 각 방향에서의 압력이다.

     

    하지만 영화는 완득이에게 비감 어린 표정이나, 수세적인 행동, 연민을 자아내는 연기 등을 지시하지 않았다. 완득이는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고, 연민보다는 유머를 자아내는 연기를 고수하고 있다. 그의 결단은 무모해 보이지만, 자신만의 장점을 지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자 친구를 얻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고, 킥 복싱을 미래의 직업으로 선택하는 일에서도 주위의 인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결국에는 어머니를 만나고, 어머니를 마음을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가정으로 복귀하게 만드는 일도 해낸다.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은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웃음과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 비감을 쥐어짜지 않고도 문제적 상황을 직시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유와 웃음은 완득이라는 독창적인 캐릭터에 기반했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완득이를 보조하고 영화의 추진력을 나누어 맡았던 동주의 역할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지만, 완득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무시 못 할 매력과 뛰어난 현실감 그리고 유효적절한 설정이 이 영화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에 번져나가는 문제적 상황을 관객들이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강요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강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결국 완득이라는 캐릭터와 현실을 직시하는 여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점이 외국인 노동자를 다룬 영화에서 이 영화가 한 걸음 진전할 수 있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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