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 ▶ 8장. 삶의 선택 (최종회)
  • <연재/ 이윤택 연기론 _ 영혼과 물질 >

    8장. 삶의 선택 / 햄릿과 돈키호테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입을 통해 연극은 자연의 거울 a mirror held up to nature 이라고 말한다.그 뒤를 이은 리얼리스트들은 연극은 현실의 거울이라고 이어간다. 연극은 현실과 함께 가는 작업이다. 현실이 태평무사하면 사랑과 공존을 논하고, 현실이 어려워지면 죽음과 저항의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 연극은 본래적으로 정치적이고 시대와 함께 간다.  

     잔인한 달 4월은 시대적으로 4.19 혁명의 달이고, 문화사적으로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같은 날(4월 23일) 죽은 달이다.  투르게네프는 인간의 성격 유형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만큼 두 작가는 동서고금을 통털어 가장 위대한 성격 창조자였고, 그들은 ‘햄릿’과 ‘돈키호테’를 통해 ‘타락의 시대 명예로운 인간의 길’을 제시하였다.  
     

     한국사회 속에서 4.19 혁명 또한 시민들이 성취한 명예혁명 성격을 지닌다.학생과 시민계층의 자발적 참여로 이룩한 4.19 혁명은 한국사회가 전시대적 식민 잔재와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비로소 근대 민주주의의 길을 연 시발점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인의 의식은 식민 잔재와 독재에서 벗어난 자유시민의 명예를 획득했다. 자유시민의 명예로운 권리는 뒤이은 군사정권 사대에는 저항의 힘으로 작용하였고, 30여년이란 긴 통제와 억압의 시대를 견디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4월이 오면 시인은 피가 끓고 태양은 뜨거워진다.
     햄릿의 조울증이 시작되고 묻혀 있던 전시대의 망령이 일어선다.

     춘곤증에 지쳐 늘어진 시골 마을 한 귀퉁이에서 늙은 돈키호테는 낡은 갑옷을 꺼내 입고 비루먹은 망아지라도 타고 길 떠날 채비를 서두는 것이다.  그러나 2009년 4월 지금 이곳 한국사회는 의외로 조용하다. 더 이상 불온한 시가 쓰여지지 않고, 죄의식의 한가운데를 겨누는 햄릿의 극중극도 준비되지 않는다. 재치발랄한 시골의사가 있다는 소문은 들리지만, 그가 쓴 글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만한 베스트 셀러의 영향력을 보여줄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에서 4월은 더 이상 잔인하지 않다. 정작 세상은 더욱 잔인한 양상을 띠는데 왜 시인은 불온한 시를 쓰지 못하고, 저항의 극이 준비되지 못하고, 세상을 가로지르는 재치발랄하고 황당무계한 상상력이 등장하지 못할까. 햄릿의 선택은 이제 빛을 잃은 것일까, 돈키호테의 출정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새 명예로운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사는 것일까?


     8-1. 햄릿의 선택과 결행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16,7세기 유럽이나 지금 21세기 한국사회나 세상 사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도시 상공업의 발전이 가속화되던 엘리자베스 시대는 사상 유례없는 권력 쟁투와 세속화의 양상을 드러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이성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주창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내를 죽인 살인자요 쉴새없이 여자를 갈아 치우는 부도덕한 인간성을 드러내었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통해 겨누는 시대의 칼날은 먼저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응징이었다. 삼촌의 음모와 어머니의 배신이 야합한 권력, 장인이 될 플로니우스는 부도덕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그의 사랑 오필리어까지 그들의 음모에 넘어가는 앞잡이가 된다. 그와 같이 자란 친구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자신을 감시하는 정탐꾼이자 살해자의 역할을 주저하지 않는다. 햄릿은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여 조울증에 시달리고 환영을 본다. 햄릿의 조울증은 그 점에서 타락한 세계 은폐된 죄의식이 안겨준 병이다. 정당하지 못한 세계를 결코 허용하지 못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극 <오이디푸스> 이후 명예로운 인간이라면 짐져야 할 시대적 책무였다.  
     

     오이디푸스는 “ 지난 시대의 허물은 그냥 덮어두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걱정하라”는 삼촌 클레온의 충고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건 인간으로서의 정당성과 명예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는 오이디푸스의 진실찾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된다. 아비를 살해하고 어미와 같이 사는 죄를 저지른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파 내고 스스로 추방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이때 비로소 해방된 자아를 확인한다.

     “ 내가 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같이 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은 사실 내 탓이 아니다. 아폴론이다. 운명의 장난이다. 그러나 나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결코 받아 들이지 않겠다. 나는 운명에 저항하겠다. 그러므로, 내 눈을 찌른 것은 신이 아니다. 바로 나다. 나의 선 택이고 나의 결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사회에서 목숨 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의 명예심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은폐된 죄의식을 안고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나 스스로를 단죄하더라도 해방된 정신을 얻겠다는 의식이 명예로운 인간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햄릿이 기어코 밝혀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죄의식이다. 근친상간과 권력찬탈이라는 소재는 <오이디푸스>와 <햄릿>이 공통적으로 다루는 죄의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극적 행위로 제시되는 것이 선택과 결행이다.

     To be or Not to be......  
     

     지금까지 인류가 글로 쓴 문장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일컬어지는 <햄릿>의 이 대사는 선택과 결행을 앞둔 인간의 명예로운 삶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냥 단순하게 ‘살것인가 죽을 것인가’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대로 존재할 것인가 존재 하지 않을 것인가’로 번역할 때에는 실존적 질문이 된다. 부당한 세상을 묵인한 채 그냥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그냥 내던져진 채 살아갈 것인가 내 던져 지지 않을 것인가’로 번역될 때는 주체적 삶에 대한 엄중한 물음이 된다. 실제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햄릿은 구체적인 갈등요인을 전개시킨다.

      “폭군의 횡포, 세도가의 모욕, 사랑의 고통,무성의한 재판, 관리들의 오만, 소인배의 불손, 세상 곳곳 악취를 풍기며 썩어들어가는 부패, 이 더러운 똥통같은 세상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소냐..... 그 누가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역경에 신음할소냐 ”  
     

     여기서 우리는 햄릿의 고뇌가 바로 시대상에서 비롯된 고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살아있는 인간들은 겁쟁이가 되고, 창백한 사색으로 그늘이 지지. 의기충천하던 뜻은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음을 옮기다 실행을 포기하고 말지 않는가.”  
     

     자탄한다. 햄릿의 자조섞인 탄식은 부패한 사회 속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지금 이곳 21세기 한국사회 속에서도 꽤 직접적인 현실감으로 느껴진다. 과거사 진실 규명위원회란 이름의 국가 특별 조직이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고, 또 이미 어렵게 만들어 놓은 조직을 애써 축소하려는 근래의 움직임은 또 무언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 근현대사 전체가 햄릿이 제기하는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고 민주의원 의원들이 결국 신탁 통치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남북 분단의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것이고, 잘못 꿰어진 첫 단추는 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분단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그 결과 지금 북에서 미사일을 쏘고 일본이 핵무장을 주창하고 나선다. 반백년이 지나도록 사회구성체의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사회. 그나마 반쪽 땅에서 조차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미 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극심한 자체모순과 갈등을 안고 사분오열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정치가들이 햄릿의 부왕처럼 살해되었고, 왜 전직 대통령은 명예롭게 퇴진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던지 세속적인 비아냥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잘못된 선택과 결행이 자초한 비극의 현장은 지금 이곳 한국사회 만큼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 자체가 햄릿의 독백처럼 거대한 죄의식의 감옥일 뿐이다.
     그래서 4월은 그 짧디 짧은 명예 혁명의 기억을 봄날 물안개처럼 퍼뜨린다. 


     














    8-2. 돈키호테, 세상을 가로질러 가다

     
     그러나 음울한 덴마크 성의 왕자가 앓는 시대의 병 보다 더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세상이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16세기 남유럽일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태어 났을 때 남유럽은 이미 마키아벨리즘의 절대군주제가 시대적 요구로 제시되었고, 스페인은 가톨릭의 제도적 권력 아래 놓여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민족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적 침탈과 식민지배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시대였다. 이런 전체적 질서가 요구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개인의 주체성을 찾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만큼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권리행사는 없다. 게다가 마키아벨리즘이 요구하는 새로운 군주제 공화국의 시대적 요구는 정치와 도덕을 아예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권력은 정치적 목적이 정당하다면 악덕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일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정치사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의 탈도덕화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면서 보편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정당한 목적이라는 것이 특정 국가와 민족의 정당성으로 적용될 때, 상대 국가나 민족에게는 부당한 권력 행사로 비치기 마련이다. 실제 그들의 절대군주제가 나아간 것은 제국주의적 침탈과 식민 지배였고, 세르반테스는 이탈리아에 주둔한 스페인 군대의 병사 였다. 그 스스로 제국주의적 침탈의 앞잡이로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가슴에 총탄을 두방이나 맞았고 왼손은 평생 불구가 된 대가로 표창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병사 세르반테스는 귀국선을 타고 가던 중 해적에게 붙잡혀 알제리에서 5년동안 노예생활을 한다. 억세게 재수 없는 인간 세르반테스의 삶은 그 이후 죽을 때까지 궁핍과 불운의 나날이 연속된다. 가난을 벗어날 요량으로 농가의 딸과 결혼하고, 난생 처음 소설과 희곡을 써 보지만 역시 돈은 안되고 소송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을 들락거린다. 한때 돈 안되는 문학을 등지고 세금 수금원도 하고, 어디 가톨릭 추기경의 비서자리 하나라도 얻어볼 요량으로 세상을 기웃거리지만, 되는 일이라고는 없다. 이 억세게 재수 없는 인간이 그나마 행운을 얻은 것이 소설 <돈키호테>가 당시 베스트 셀러로 팔려 나간 것인데, 이 또한 돈이 아쉬워 매절로 선수금을 받은 덕분에 인세 수입 한푼 받지 못 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죽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자신의 극장과 저택을 보유한 채 자신과 함께 하는 극단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세익스피어에 비해 세르반테스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은 자신의 아내를 포함해 세명 뿐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반테스의 그 어떤 글에서도 햄릿의 우울도 주저도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한탄도 저주도 없다. 돈키호테는 끝없이 꿈꾸고 실행할 뿐이다. 돈키호테의 행각은 너무나 황당무계해서 미친 노인 대접을 받지만, 다른 한편 너무도 재치발랄해서 주위 사람들의 은근한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세르반테스는 결코 부패한 현실과 직접 부딪치지 않았다. 그는 아예 시대를 붙들고 고민하는 <햄릿>의 진지함 따위를 건너 뛰어 버렸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진지함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돈키호테의 진지함은 자신의 꿈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현존하는 세계, 세속화된 세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세속화된 세계를 일방적으로 덧칠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세르반테스의 글쓰기는 더욱 과격하고 무정부적 양상을 띤다. 그냥 평민으로 살아가던 시골 독서인이 어느날 갑자기 중세 기사의 복장을 하고 길을 떠난다. 세속적인 현실로부터의 이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주막집에서 만난 주인을 성주라 부르면서 기사의식을 치르게 해 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한다. 주막집 주인은 속으로 조롱하면서도 돈키호테의 요구를 들어준다. 주막집 주인으로 살아가던 작자가 성주 대접을 받았으니 기분 나쁠리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과대망상적 글쓰기의 특성이 드러난다. 돈키호테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명명하는 둘시네아는 옆 동네 시골 유부녀다. 그래서 아예 실제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상상 속의 여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속물적인 시골뜨기 산초 판자도 이런 돈키호테의 과대망상에 넘어간다. 언젠가 자신이 지배하는 섬이 있는 영주를 시켜 주겠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산초 판자는 속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면에 은밀히 도사리고 있던 욕구가 분출된 것인가? 세르반테스는 바로 이런 인간의 내면 깊숙이 도사린 욕구를 터뜨려 세속화된 세상을 생기발랄한 환상으로 가로질러 가 버린 것이다.

     상상력은 달을 해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달을 보여줄 수는 있다. (바슐라르)

     
     돈키호테의 상상력이 비록 현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세속적인 세계를 뛰어 넘는 다른 세상을 펼쳐 보인다. 나는 이 황당무계한 상상력의 세계에서 인류 최초의 배우의 모습을 발견한다. 서구연극의 원형이 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등장하는 ‘허풍쟁이’-그는 서구 연극사에서 최초의 어릿광대로 기록된다. 대지의 자손들이 비바람과 모진 세상의 시련을 견뎌내고 열매 맺은 과일을 술로 담궈 먹으면서 떨었던 허풍!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면서 마음껏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대시켰던 허풍쟁이의 모습이야말로 돈키호테의 원형이다. 이는 그 어떤 종교적 정치적 탄압과 착취가 짓누르더라도 살아 있음으로 명예로운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스페인 농민들의 무정부적 대지의식이 낳은 상상력이기도 한 것이다. 


     8-3. 문제적 인간의 광태(狂態)

     
    세속화 시대라는 게 무엇인가?

     <햄릿>에서 드러나는 세속화의 징후는 먼저 타락한 권력이다. 정치가 지니는 권위와 존엄성이 추락한 시대를 들자면, 지금의 한국사회 만큼 철저하게 추락한 현상도 보기 힘들다. 이제 누구도 정치가를 믿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가장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었던 참여정부 사람들은 지금 줄줄이 감옥행이다. 새로이 들어선 정부는 <돈키호테>가 창조되던 남유럽사회처럼 국가 제일주의 마키아벨리즘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준다. 경제가 제일이다는 논리 앞에 그 어떤 정치가의 명예도 윤리도 무력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윤리가 무시되는 세속적인 사회 속에서 예술이 저항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제시되는 것이 광태(狂態), 즉 미친 짓이다. <햄릿>의 우울과 <돈키호테>의 엉뚱한 기사편력 또한 미친 짓으로 드러난다. 나는 이 광태(狂態)를 드러내는 작품 속의 성격을 ‘문제적 인간’으로 명명한 바 있다. 필자가 쓰고 연출한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연산의 광증(狂症) 또한 부패한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선택과 결행의 에너지로 파악한 것이다.


     광증(狂症)이 세속적인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피바람을 부를 때 비극적 파탄을 맞게 되고, 광증(狂症)이 황당무계한 어릿광대 짓거리로 희화화 되면 희극이 된다. 그러나 이 비극적 구조와 희극적 구조는 동전의 앞 뒷면처럼 한몸이다,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비록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갔지만 같은 날 죽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한몸처럼 죽었다.
     


     세속화의 두 번째 양상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성의 타락과 여기에 따른 사랑의 부재이다. 오필리어의 순결은 왕의 지시와 아비의 은근한 종용으로 인해 파괴된다. 결국 햄릿에게 수녀원에나 가라는 비난을 듣는데, 수녀원이 암시하는 유폐된 사랑, 혹은 당시의 속어적 해석에 의하면 창녀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저주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성이 권력에 의해 굴절되고 사회적 지배 구조 속에서 이용당하는 것이 세속화의 징후라면, 탈렌트 장자연의 죽음은 또 다른 오필리어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세상에 이용당하고 더러워진 자신의 순결성을 죽음으로 지워버리려 한 희생의 결과라는 점에서 장자연은 우리 시대의 오필리어 일수 있고, 얼마나 많은 이 시대의 오필리어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세르반테스가 제시한 순결의 상징은 오필리어 처럼 처녀도 아니고 높은 집안의 공주과와는 애시당초 거리가 있는 인물을 설정한다. 돈키호테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웃동네 유부녀다. 별 볼일 없이 매일을 가사노동으로 살아가는 유부녀에게 어느날 문득 기사가 나타나 자신을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 순간 그 유부녀의 삶은 경이로운 환상에 의해 명예로워진다. 세로반테스는 세속적인 삶에 저항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 자체를 환상의 힘으로 높이 들어 올려 버전 업 시켜 버린다. 그래서 그 긴 소설 <돈키호테>에서 사랑의 화신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제시하고 있는 세속화 시대의 세 번째 징후는 천박한 대중취향의 볼거리와 악취미다. 런던은 꽃미남 소년들로 구성된 통속적 레파토리에 관객이 몰려들었고, 정작 명문 극단들은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문을 닫거나 지방을 순회하는 유랑극단 신세를 면치 못한다. <햄릿>에 등장하는 순회극단은 원래 도시 극단이고 상당한 명성을 지닌 배우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햄릿은 “그 극단이 왜 도시에 있지 않고 지방을 떠돌고 있지?” 반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햄릿은 바로 이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해 지방을 떠돌고 있는 극단과 함께 극중극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배우는 어떤 존재이며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연극은 한 시대의 거울이라는 표현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대중문화계가 티뷔 드라마에 등장하는 꽃남들로 점령되고, 어릴 적부터 기획되고 조련된 소녀가수들에게 열광하는 것도 세익스피어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는 세속화 현상이다.


     세르반테스가 살던 당시의 스페인은 의식은 사라지고 허울만 남은 기사들의 무용담이 대중을 사로잡던 시대였다. 16세기 전반 스페인 독자층을 사로 잡았던 기사 스토리 텔링은 초인적인 무용담, 고결한 여인에 대한 사랑,국왕에 대한 충성 등을 축으로 하고, 기상천외한 공상소설 성격을 지닌다. 세로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기사 스토리 텔링 구조를 전면적으로 뒤집어 버린다. 돈키호테는 싸우면 십중팔구 패하는 허약한 기사며, 국왕에 대한 충성 따위는 아예 없다. 주막집 주인을 성주로 섬기고 기사 작위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국가주의적 권위 따위는 내팽겨친 모습이다. 스토리는 환상의 극을 달리면서도 결국 초라한 현실로 되돌아 온다. 환상이 사라져 버린 비루한 현실, 남은 것은 궤짝 속에 담겨진 자신의 여행기 뿐이다. 세르반테스는 이점에서 상상력의 마술사이면서도 그 상상력을 현실 속에 내려 놓을 줄 아는 리얼리스트였다. 우리는 있지도 않는 환상을 찾아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속에 펼쳐지는 환상이 비루한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삶의 생기 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는 명예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8-4. 상상력의 힘 

    8-4-1. 햄릿의 극중극  


    (W.셰익스피어 작/ 이윤택 연출/ <햄릿> 극중극 장면) 


     햄릿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사유하고 상상하고 이윽고 실행한다. 실행을 위한 준비 단계 또한 철저하고 현실적이다. 극중극을 꾸미기 위해 대본을 수정하고 연기 스타일을 주문하고 그의 친구 호레이쇼에게 관객으로 앉아 있는 왕의 눈치를 살피게 한다. 햄릿의 목적은 정당하지 못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는 일이다. 독살 당한 아비에 대한 복수, 남편을 배반한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단죄까지 계산해 넣고 있다.


     그러나 햄릿의 복수극은 이성적인 사유와 준비 끝에 실행의 단계로 나아가지만, 결정적으로 실행의 단서를 잡는 것은 상상력의 힘이다. 그는 가톨릭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연옥의 세계-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는 유령의 세계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무대공간 속에 불러 들인다.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엄청난 상상력이 방출된다.


     아폴론이 지배하던 그리스시대는 신이 내린 예정된 운명에 의해 인간 존재가 결정되었다. 가톨릭이 제시한 연옥의 세계 또한 인간의 운명을 관리하는 일종의 신의 하부구조인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신이 금지시킨 연옥의 문을 열고 유령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가톨릭의 연옥이 지니는 규칙-예를 들어 유령이 먼저 인간에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까지 무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세익스피어의 불온한 상상력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신의 영역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간의 영혼과 만나게 하면서 그 상상력의 힘으로 세속적인 현실을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의 세계도 극중극이란 이성적인 구조 속에서 형상화 된다. 신의 영역인 불가시의 세계가 인간의 영역인 연극적 상상력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롤랑 바르트의 ‘신의 영역을 상상력이 대체한다’는 상상력론과 만나게 된다
    . 롤랑 바르트는 신의 존재까지도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최고의 완성품으로 보았다.
     

     신은 존재한다.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인간의 상상력 속에 있다.

     
      <햄릿>의 극중극은 결국 유령의 상상력과 현실적 저항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인 셈이다. 결국 세익스피어가 보여주는 세계는 연극을 통해 현실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맥베드>에 등장하는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문장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인생은 연극이오 세계는 무대다.


      8-4-2. 어릿광대의 길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인간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도 세익스피어 처럼 냉철한 이성과 사려 깊은 사유의 힘으로 세속적인 현실과 맞서지 않았다. 그의 저항의 방식은 즉흥적이고 기발난 발상에 의존한 유머였다. 그는 애시당초 평민 출신이었고, 세익스피어처럼 신분 상승의 의지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가 동원하는 작품 배경도 라만차의 들판이고 풍차고 시골 주막이고 동네 이발소다. 그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냥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간 소시민에 불과한 인간이었다. 그가 전적으로 의존한 글쓰기의 밑천은 스페인 민중들이 지니는 건강한 낙천성과 풍자정신이었고, 무엇보다 살아 있음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그는 부패한 세계에 저항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세익스피어 처럼 무신론자적 불온함도 보이지 않았고 죽을 때는 신의 품에 안기기를 원했다. 가톨릭의 영역인 연옥의 세계는 들여다 볼 엄두도 내지 않았다. 동키호테의 눈에 비친 세속적 현실 자체가 연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키호테의 저항은 해프닝의 영역에 머문다. <햄릿>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호레이쇼 외 모두 죽는다. 호레이쇼는 사실 관찰자의 역할이므로 복수극에 뛰어들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1부에서만 6백여명이 넘는 인물을 등장시키지만 누구도 죽지 않고 죽이지 않는다. 무서운 싸움과 전대미문의 모험을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낙천적인 세계는 없다. 
     
     

     바슐라르가 “결핍된 부분을 지적하기 이전에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그는 세익스피어처럼 자신의 결핍을 붙안고 뒹굴면서 연옥과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란 어릿광대를 내세워 세상의 결핍된 부분에 상상력을 실어 나르는 펜 노동자였다.


     소설 <돈키호테>는 그 후 수많은 드라마의 원전이 되어 주었다. 그 중 지금도 여전히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주제곡 ‘이루어질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을 소개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이 노래를 한번 불러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나면, 문득 ‘세상이 밝게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돈키호테가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의 힘은 이렇게 결핍된 현실을 채우는 삶의 낙천성이다. 



    그 꿈 이룰수 없어도

    싸움 이길수 없어도 

    슬픔 견딜수 없다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이게 나의 가는 길이요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길을 따르리라

    내가 영광의 이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날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세상은 밝게 빛나리라

    이 한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힘이 다 할때까지 가야해

    저 별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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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이윤택 연기론 영혼과 물질}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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