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 ▶ 7장. 영혼과 물질
  • <연재 / 이윤택 연기론 - 영혼과 물질> 

    7장. 영혼과 물질  


    연기적 상태란 구체적 어떤 삶의 에너지로 진행되는 과정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연기자 개인
    의 소양문제라고 하고, 재능이나 끼가 좌우한다고
    말 한다. 연기란 것이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이면서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는 표현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를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가?
    나는 이를 영혼과 물질이란 개념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7-1. 영혼이 눈뜨는 상태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프라스는
      “나는 가끔씩 푸른 전류가 내 뒷골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을 맞이한다. ”
    라고 말한다. 나는 이때를 영혼이 눈뜨는 상태, 그리고 수직적 상상력의 출발 지점
    이라
    고 해석한다. 어느 순간에 푸른 전류가 내 뒷골을 타고 척추를 타고 내려와 뒷발꿈치 밑으로 방사
    면서 번쩍하고 눈이 떠지는 것을 연기에서는 엑스터시, 혹은 황홀경이라고 말한다.  이 상태가 영혼
    이 눈뜨는 상태.
    이것을 한국식으로 말하면 접신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신과 접한다. cross, contact.
    신, 우주, 불가시의 영역,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만난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만난다. 이것이 연기적상태
    의 출발점이다.

     

     리얼리즘 연극은 인간의 정신과 몸 안에서 해결하려 한다.  나의 인식, 나의 감정, 말, 몸, 소리에서 시
    작한다.
      그래서 굉장히 구체적이고 리얼하다.  그러나 상상력과 정신성의 입장에서는 취약한 공간성을
    드러낸다.
      근래 서구 연극이 동양연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양연극이 지니
    는 불가시의 공간성의 세계, 접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노는 서구 현대연극
    에 영향을 주었다. 스즈끼다다시 메소드를 만들었고, 로버트윌슨
    은 이 일본의 전통 연기양식을 현대연
    극 메소드로 수용했다.
    노의 내용은 망자를 불러내는 이야기이다.  노자체가 죽은 영혼과의 대화로 구
    성된다.



     어느 한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여행 하다가 어느 지역에서 잠을 잔다.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귀신이 나타난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당신이 누구시오? 왜 이렇게 죽
    었어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억
    울하게 죽었소...... 그러면서 그 억울함을 풀어내는 것이다.

     

    ‘노’는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가요 도이 장가는 두 장군을 추도하는 형식인데 노의 형
    식과 구조가 같다.
      도이장가풍의 놀이는 고려의 귀족들 사이에 궁정 잔치극의 형태로 공연이 되었다.
    그래서 노는 한국의 신라 고려시대 전통 공연양식이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 것이다.

     

     7-2.영혼의 공간성

     영혼이 눈뜨는 상태. 이것이 연기적 상태의 출발아다, 지금 여기 나는 왜 존재하는가?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자.  일단, 첫째, 살고 싶다. 저 멀리 살고 싶다. 이마가 저 멀리 향한. 하늘. 인간영역의 공간성이 확장 된다. 하늘 내지는 천상. 하늘과 천상을 이야기 한다. 주로 밝음의 세계. 아침의 하늘, 봄의 하늘은 이마에서 하늘오 열린다. 뒷통수가 서늘하다. 이것은 북녘, 서녁, 죽음. 소멸 공포. 이런, 소멸의 세계. 밤하늘, 북서풍.뒤쪽의 아우라. 이 아우라가 바로, 죽음, 전멸의 세계. 태허의 세계이다. 이마에서 열리면 천국, 뒷통수에서 열리면 소멸과 큰 허무의 세계, 영혼이 눈뜬다 라고 했을 경우 인간의 영혼 앞뒤가 다 열리는 것이다.  

     둘째, 가슴이 맺힌다. 여기서 인간의 속내. 인간의 느낌이 명치 깊은 쪽에 모여듭니다. 명치가 열리면 낙천적, 낙관적인 세계로 열립니다. 우리는 호연지기를 위해 ‘가슴을 펴라.’ 고 말들 한다. 명치가 오그라 들면 슬픔, 고통의 세계다.

     

     셋째는 자궁과 남근의 세계다. 생식과 생산, 욕망의 세계가 열린다. 자궁이 열리고 남근이 일어선다. 엉덩이쪽으로 숨이 모이면 좌절과 어둠, 검은 욕망. 타락. 광기의 세계가 들끓어 오른다. 엉덩이의 영혼은 저수지, 배설, 잡스러운 것. 미친 것. 광기 등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렇게 말합니다. “ 저년 요사스럽게 엉덩이 흔드는 것 좀 봐라.”

     

     나는 지금 추상적인 영혼의 세계를 인간의 구체적인 생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영혼이 눈뜨는 상태는 뇌가 열리면서 공간이 열린다. 밝음의 세계, 어둠의 공간이 열리고 그것이 안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명치에 맺힌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할 때는 가슴이 열린다. 이때 명치를 들어 올려야한다. 죽고 싶다, 할 때는 명치가 안으로 꺼진다. 가슴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다. 골반 자궁이 열리고 남근이 선다. 생산과 생식과 적극적인 삶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이다. 자궁이 닫히고 페니스가 서자 않는다. 자궁이 응축되고 남근이 쇠퇴하면 우리영혼의 배수구는 음습한 저수지가 된다. 추악하고 더럽고 나쁜 욕망이 스며들고, 사이코 패스적인 욕구가 엉덩이 쪽에 모인다. 모든 영혼은 다리를 타고 뒷꿈치를 타고 아킬레스건을 통해서 지하의 세계로 타 내려간다.

     충동과 검은 욕망이 지하의 세계를 대변한다. 영혼이 이마를 타고 올라가 하늘로 가면 초월, 뒤로 가면 열반이다. 욕망의 뿌리가 인간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서 하늘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공간성이다.

     

     거대한 공간과 시간 속에 놓인 영혼과 물질인 인간. 이것을 받아드리는 영혼의 출구는 눈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의 공간성은 셰익스피어 극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리어왕은 심심찮게 자연을 부르고, 태풍아 몰아 쳐라 요구합니다. 햄릿과 맥베스에서는 불가시의 세계-연옥이 열리고 귀신들이 돌아다닙니다. 셰익스피어가 연극은 ‘자연을 향해 쳐들려진 거울’이라고 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거울은 영혼의 세계를 되비추어 준다.

     

     이제 부조리극이 영혼과 물질에 대한 얘기를 시작해 보자. 부조리극의 특징을 보면, 일련의 리얼리즘 경향의 연극과 양상이 다르게 전개된다. 그래서 다들 난해하다고들 한다. 그건 영혼과 물질에 대한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연극을 논리적인 사유로 보려는 시각 때문이다. 리얼리즘연극에서는 인간을 전지적 존재로 파악한다. 여기서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이 몸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연기는 자연스러워야 하고 생각이 분명해야 한다. 리얼리즘연극은 가장 실제적인 느낌이 들도록 연기해야 합니다. 인간을 전지적 상태로 보기 때문에. 정신이 분명하면 몸도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부조리극에서는 종종 영혼과 몸이 분리된다.

     

     부조리극에서는 배우의 몸의 움직임이 대단히 중요해 진다. 사실 부조리극 연기는 찰리 채플린에 힘입은 바 크다. 베케트 배우들은 몸이 기하학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인간이 나뭇가지처럼 걸려있다. 인간을 영혼과 분리된 물질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연기의 통념이 바뀐다. 어느 순간부터는 배우는 하나의 나뭇가지처럼 걸려있는 존재가 되면서 배우는 영혼과 분리된 물질화된 객체가 된다. 여기에 대해 그 어떤 설명이나 주장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표현될 뿐이다.

    영혼과 물질이 해체되고 분열되면서 연극은 엄청난 상상력의 확장을 일으킨다.

     

    지금 21세기야 말로 영혼과 물질이 분리되고 확장되는 시대다. 디지털이라는 것이 그렇다. 자유로운 변형과 이미지의 세포 분열을 일으킨다. 셰익스피어는 그 점에서 이미 디지털적 상상력의 소유지였다. 태풍을 부르고 귀신을 부르고, 무대는 특별한 장치 없이 자유로이 공간 이동해 버린다. 무대 장치없이 장면이 자기 마음대로 바뀐다. 자유 연상의 상상력이다. 그래서 21세기에도 셰익스피어는 사랑받고 있다. 21C 셰익스피어가 부활한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가지고 있는 영혼과 물질의 자유로운 상호 교환성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과 물질의 상호 소통과 호환성은 리얼리즘 연극에서도 빛나는 장면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체홉의 「갈매기」를 분석해 보자.

      

    7-3.「갈매기」분석


     니나

    내가 걸어간 땅에 입 맞춘다고 한 건 왜 그런 거죠? 난 죽어야 할 여자예요. (책상에 몸을 기댄다) A. 너무 피곤해요! 좀 쉴 수 있었으면......! (머리를 들고) 나는 갈매기...... 아녜요...... 나는 배우예요. 네 그래요! (아르카디나, 트리고린이 웃는 소리를 듣는다. 듣다가 왼편 문으로 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 본다) 저 사람도 여기 있군요...... (트레블레프에게 간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저 사람은 연극을 싫어해서 항상 내 꿈을 비웃었어요. 나도 점점 연극에 대한 신념을 잃고 정열을 잃게 되었죠. 그리곤 사랑의 고뇌와 질투, 내 아기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이 일기 시작했어요...... 나는 점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여자가 되어갔고 내 연기는 점차 거칠고 시들해졌죠...... 무대 위에서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서 있어야할지 몰랐고 목소리도 조절할 수 없었어요. 자기 연기가 엉망이라는 걸 알 때 그 기분은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난 이제 기쁨과 환희를 갖고 연기하는 진짜 배우가 됐어요. 난 이제 정말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다는 걸 믿어요. 내가 여기 온 이후 난 계속해서 걷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내 영혼이 커지고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난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연극이, 그것이 쓰는 것이든 연기든 중요한 건 명성이나 갈채가 아니었어요. 중요한 건 바로 참아낸다는 거예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신념을 갖고 어떻게 견디어 나가느냐하는 거죠. 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젠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아요. 내 사명을 생각하면 이젠 삶이 두렵지 않아요.

     

    트레블레프
    당신은 자기 길을 발견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고 있군요.

     

    니나
    (가방을 들며) 가야겠어요. 안녕히. 내가 좀더 훌륭한 배우가 되면 그때 와서 봐 주시겠죠? 자, 이제...... (그의 손을 꽉 잡는다) 내가 진정 배우가 된다면......
    혼자 가겠어요. 마차가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 어머니가 그 사람을 데려왔군요. 트리고린을 보면 아무 말도 마세요......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랑해요. 전보다 더 그를 사랑해요...... 단편 소설 감이죠...... 하지만 난 그를 사랑해요. 더욱 열렬히 사랑해요...... 기억하시죠? 그땐 모든 게 얼마나 부드럽고 순수하고 따뜻하고 또 즐거웠어요? 우리의 느낌은 부드러웠고 섬세한 꽃과 같았죠...... 그 대사들 기억하세요?

     ‘모든 인간들과 사자들, 독수리, 사슴, 거위, 거미......그리고 깊은 물 속에 사는 말 없는 물고기, 불가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까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 땅 위에서 사라졌네......수천년 동안 이 땅은 새로운 생물을 잉태하지 못한 채 처량한 달은 헛되이 이 땅을 비추고 있네. 수풀 속에 왜가리, 덤불 속 오월의 딱정벌레도 더 이상 울지 않는구나...... 춥고, 춥고, 추워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졌구나. 무섭고 무섭고 무서워라. (사이) 모든 생물은 먼지로 변했고 영원의 물질은 이것을 돌과 물과 구름으로 바꾸어 이들의 영혼은 모두 하나가 되었네. 그리고 그 위대한 영혼은 나...... 바로 나, 나의 내부에는 알렉산더의 영혼과 시저의 영혼, 셰익스피어, 나폴레옹 뿐 아니라 하등 동물인 거머리의 혼까지도 살아 있다. 내 속에는 인간의 의식과 곤충의 본능이 하나가 되어있으니 나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나의 내부에서는 여러 삶이 하나씩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나는 혼자다. 백 년에 한 번 입을 열어 말하지만 내 목소리는 이 공허를 메아리칠 뿐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들 창백한 빛이여, 너희도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너희는 동트기 전 썩은 늪에서 태어나 아침 햇살이 비출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뜻도 없이, 삶의 약동도 없이 떠돌아다니는구나. 영원의 물질의 아버지인 악마는 네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지 않을까 두려워 돌이나 물과 마찬가지로 너희를 원자로 전환시키고 있어 너희는 끊임없이 바뀌어가고 있다. 우주 안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건 영혼뿐. (사이) 물 없는 깊은 우물 안에 던져진 죄수처럼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무엇이 닥쳐올지 알 수 없네.

     

     「갈매기」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니나의 연기는 벽에 부딪친다. 어떻게 이 영혼의 대사를 표현해낼 것인가?

     
     스타니슬랍스키도 체홉의 이 시적 영혼성을, 인간성을 띠어 넘은 자연과 우주와 불가시의 세계가 비추는 물질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점에서 체홉은 불우한 극작가였다. 
    불가사이하고 논리적 해석이 불가능한 부분이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작가는 본래적으로 추상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다. 상상력 자체가 무정형의 불투명성을 지닌다. 글을 써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본인 스스로도 해석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공간과 만나고 주술적인 언어를 토해 내게 된다. 설명이나 해석을 뛰어넘는 코스챠의 글쓰기에서 드러난다. 체홉이 대단한 초현실주의 사고를 가지고 썼다고 보지 않지만, 여기 극중극의 언어로 제시되는 코스차의 언어는 이성적 사유와 감정을 뛰어 넘는 영혼의 글쓰기다.

     

    분석해 보자.

     

    첫 단계는 니나가 돌아왔다. 코스차가 자기 방으로 안내한다.

     

    -쉬려고 왔어요.

     

    왜? 세상이 너무나 힘들고 피곤하니까. 그러나 이 휴식의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니나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왔다는 것을 뒤에 알 수 있게 된다.

      

    -불을 반만 꺼주세요.

    ( 앉았다.)

    -너무 피곤해요. 쉴 수 있었으면.난 갈매기.

     

    여기서 니나의 영혼은 열리기 시작한다. 불을 반만 꺼 달라는 대사에서 바깥 현실과의 분리를 알 수 있고, 바깥 현실과 분리된 세계에서 나나는 자신을 갈매기라고 말한다.
    갈매기는 영혼의 상징이자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물질이다.

     

    이어서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온다.

    - 난 배우예요.’

     

     여기서 갈매기와 배우의 존재가 교차된다. ‘나는 갈매기’란 말은 환유적 언어다. 논리적 언어가 아니라 영혼의 언어, 물질 언어, 시적언어. 전의식의 언어이다. 그러나 ‘난 배우예요’.할 때는 인식의 언어. 의지의 언어이다. 여기서 서로 다른 언어의 정신영역이 겹쳐지는 것이다.

      

    ‘난 갈매기’란 상상의 언어와 '난 배우예요’의 자신의 입장이 한 문장으로 제시되는 셈이다.  그 다음 대사는 아주 현실적인 대화가 전개된다. ‘저 사람도 여기 있군요.’에서 니나의 시선은 건너 방 바깥 세상으로 향하고, ‘하지만 상관없어요.저 사람은 연극을 싫어해서 내 꿈을 비웃었어요“ 에서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세계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에서 자신의 입장으로 되돌아 온다. ‘난 이제 기쁨과, 환희를 갖고 연기하는 배우가 되었어요. ‘걷고 생각했어요. 걷고, 걸으면서......’ ‘매일 같이 내 영혼이 커지고 강해지는 걸 느꼈어요.’

    ‘난 이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참아낸다는 거죠’

     

    여기서 니나의 입장은 분명해진다. 삶과 연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리얼리즘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야 말로 배우들이 성경처럼 읊조리는 명대사다.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한 메타적 연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려던 니나가 되돌아 서서 코스챠가 썼던 옛 대사를 읊조리기 시작하면서

    자금까지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어져 버린다. 사색과 정서적 호소력으로 전개되던 언어가

    불가해한 단어의 혼잡스런 충돌로 들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이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연기하는 여배우를 본 적이 없다.

    여기를 잘 하고 못 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도대체 이 대사가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이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과 사자들, 독수리, 사슴, 거위, 거미.........’

     

    인간이 아닌 짐승들, 자연의 물질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대사는 일상적이도 않고 이성적이도 않고 의식적인 신념도 아니다.

    영혼과 물질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언어는 지금까지 체홉의 언어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자유 연상의 언어들이다.

    짐승에서 먼지 돌 물 구름으로 전개되던 물질적 낱말들은 급기야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고

    한다. 그 하나된 영혼 속에 알렉산더 시져 세익스피어 나폴레옹, 그리고 나의 영혼이 만나고, 하찮은 곤충 거머리의 혼까지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로 변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영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양한 해석을 가할 수 있다. 언어들은 일상적인 수평적 언어가 아니라, 자유롭게 수직적인 공간을 떠 다니는 단속적인 이미지들 뿐이다.

    우리는 이 자유 연상의 독백체에서 나름대로 느끼고 감응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언어가 바로 영혼의spiritul 울림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의 연기는 지금껏 전개된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연기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다.

    여기서 니나 역을 맡은 배우는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

     

    나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막에 나오는 극중극 장면부터 연기 및 연출의 밑그림을 개성적으로 포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스챠가 연출하는 니나의 연기는 절대 일상적이고 이성적이거나 더욱이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이어서도 안 된다.

    신비하고 불가해한 초자아적 표현이 선행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나의 입술과 얼굴에 회칠도 하고, 포대기를 두르고, 손에 초를 들고, 무슨 제사장처럼 주문을 외우듯 웅얼거리고, 곤충처럼 기기도 하고, 소리도 꽥꽥지르고, 그렇게 난리법썩을 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코스챠의 충동과 욕구의 언어가 먼저 외형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고, 이 외형적 연기는 아르까지나가 “데카당!” 이라고 비난하는 무의식적 기류를 내비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막에서의 기괴하고 불가해한 소동극은 4막, 지금에 와서는 나름대로 내면화되고 승화된 모습으로 정제되어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세상을 가로질러 온 니나의 체험이 변증법적으로 섞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상상력의 개념을 상기 시킨다.

    베이컨이 제시하는 체험과 사유의 변증법적 세계가 토해내는 그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체홉의 「갈매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영혼과 물질의 상호 호환성은 사실 동양의 초자아적 세계와 만난다. 불교의 유식론은 인간인 내가 모든 것과 같다는 물아일여의 사유가 일찍 자리 잡았고, 장자의 “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에서는 인식론을 벗어난 자유연상의 초자아적 상상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체홉의 이 난해한 대사는 동양적 사유로 풀어내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모든 것이 소멸. 죽음의 세계. 허무로 떨어진다.

    모든 생명들은 썩어지고 죽어진, 어둠의 카오스 세계로 간다.

    그 속에서 인간의 모든 것은 썩고 , 다 죽어지는데, 남는 것은 영혼뿐이다.

    알렉산더의 영혼, 시저의 영혼. 인간의 위대한 영혼도 결국은 ‘나는 혼자다.’ 는 수퍼 에고로 귀착된다. 석가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세계다.

     

    그 다음은 ‘알 수 없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원자. 모든 것이 물질 원자로 분리될 뿐이다.

     

    체홉의 언어에서 동양의 장자, 불가사상으로 대입이 되고, 이것이 니체적인 슈퍼에고와 만나고, 뒤에 가면 물질로 분해되면서 마르크시즘과 만나고, 결국 나 혼자만 남는다.

    이 혼자의 나야 말로 초자아다.

    결국 나는 혼자고 모든 만물 속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혼자 존재한다. 원자로 분해되는 이 상황 속에서. 삶이라는 것은 영원히 미궁이다.

    체홉이 당도한 이 세계야 말로 고도의 연극성을 지닌 영혼과 물질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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