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 ▶ 6장. 내면


  • 영혼과 물질 




    (이윤택. 연출가)

                      





    6장.내면inner space


     

    내면이란 무엇인가?

     

    연기하는 주체로써의 배우가 어떠한 내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점에서

    내면은 인간 의식의 저수지다.

    무엇보다 여기서 연기를 하게 하는 동기 유발이 이루어지고,

    배우의 입장, 관점, 태도가 결정된다.

     

    배우들을 훈련시키다 보면,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하는 배우가 있고, 어떤 배우는 분명하게 말을 잘 하는데 감정이 박탈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배우는 즉흥성이 풍부하고 신명이 넘쳐 흐르지만 언어에 대한 지각능력이 약한 경우를 본다. 어떤 배우는 언어 표현이 분명한데 매력이 없고 정서적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도 한다.

    이런 차별성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각자의 내면-의식의 저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개인의 감정, 감각, 지각, 사유체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이 내면적 요소들이 조절, 통합, 배분, 변형되면서 각자 서로 다른 삶의 양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연기의 세계다.

     

    배우를 꿈꾸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훈련과정은 숨쉬기 발성 발음 신체 훈련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과정은 외형적인 연기양식을 위한 훈련과 테크닉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외형적 연기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결국 배우 자신이고, 배우 자신의 내면이 명령하는 인식, 혹은 욕구인 것이다.

    이 배우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통한 자아 발견의 과정이 더욱 중요한 연기의 출발점이 된다. 이 과정이 바로 배우의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이다.

     

    우리가 배우를 꿈꾼다면,

    먼저 배우를 꿈꾸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색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6-1. 프로이드의 내면

     

    6-1-1 무의식이 삶을 지배한다

     

    프로이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심리 분석을 시도한 위대한 정신분석학자이다.

    프로이드는 인간 내면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단계로 분석해 내었다.

    의식은 현재적 시점의 인식이다. 지금. 여기. 나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전의식은 주로 기억과 관련된다. 지금 현재 내가 어떤 것을 기억할 수 있고, 유추할수 있는 것, 그래서 현재적 시점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전의식이다.

    무의식은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으로서 꿈의 세계이다. 이 꿈도 발현된 상태가 있고 잠재된 상태가 있다.

     

     

     

    프로이드는 여기서 인간이 의식의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은 아주 짧다고 본다. 거의 대부분 의 시간을 무의식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인간의 행동은 사실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인식은 인간 행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거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반복 행위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타인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행위를 무대에서 펼쳐 보여야 하는 배우에게 무의식의 세계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준다. 왜냐하면, 연기란 본래적으로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세계라기 보다 증명할 수 없는 열정과 욕구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의식적인 시간은 순간적이다. 강의를 할 때, 들을 때, 판단을 할 때,. 생각을 해야 할 때, 실천을 해야 할 때는 의식이 작용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무의식의 상태가 분명하다.

    잠자는 시간은 거의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깨어있는 시간도 프로이드에 의하면 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난 네가 이유없이 싫어’ 할 때, 이유없음은 그 영역이 무의식의 명령인 셈이다. ‘난 네가 그냥 좋아’ 라고 말할 때, 그냥 좋은 것은 없다. 그냥....의 속에 무의식의 정서적 호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산다’ 라고 말하지만, 정확치 않은 표현이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의식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프로이드의 말대로 우리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무의식은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본능이다. 인간이 지니는 원초적, 혹은 본래적 욕구다. 우리는 본능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본능을 성적 에너지를 중심으로 분석해 내고 있다. 본능이란 이름의 무의식은 결국은 성의 본능이고, 성의 본능이 바로 쾌락을 추구한다. 쾌락이라는 특징이 무의식의 인자다. 예술 창작의 동기가 쾌락 추구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을 간다면,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그대로 창작 심리학으로 적용될 수 있다. 연기자에게 최종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은 절제의 미덕이지만, 최초의 창작 동기는 쾌락이다.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의 세계를 의식의 단계로 끌어 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프로이드 치료심리학의 출발점이다.

    무의식의 성본능은 근본적으로 싱싱한 ‘삶의 충동’이다. 살아있고자 하는 충동으로서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삶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것이 왜곡되고, 고착되고, 퇴행성의 장애를 받으면 치명적인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버린다. 특히 인간 본래적 욕구는 소년기인 10~12,3세 에 거의 결정되고 만다. 교육 철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4-7세에 이미 인간의 성격 형성이 결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구강의 시기, 항문의 시기, 남근의 시기를 거치면서 개인의 무의식은 결정되어 버린다. 엄마의 젖을 빨고, 물고, 잡아 당기는 1~2세사이에 모유를 먹여야 건강하게 성장한다는 관습과도 통하는 논리다. 이 시기에 결함이 생기면 애정 결핍의 증세가 무의식의 세계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항문의 단계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변을 시원하게 잘 봐야 하는데 변이 막힌다거나 억지로 강요당하면 무의식에 결함이 생긴다. 똥을 누기 싫은데 누라고 하는 경우라든가, 특히 어린애가 똥을 쌌을 경우 매질은 치명적이다. 개나 인간이나 똥 누고 오줌 쌀 때 나무라면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간섭을 하게 되면 고집스러워지고, 자폐증이 내면에 자리잡는다. 프로이드의 분석이다.

    나이가 10~12세가 되면 남근의 시기가 온다. 이 시기를 프로이드는 대단히 중요한 성장기로 본다. 이 시기에 남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여자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벗어 나기 시작한다.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입사(入社)단계를 맞이한다. 이 괴정에서 무사하게 고비를 넘지 못하면 사회적 장애가 자리 잡는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무의식이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일상적 삶 또한 무의식적인 충동과 욕구가 지표 밑의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핵심이고,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이 현대 예술 창작의 중요한 통로로 적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극은, 특히 혼돈과 전망 부재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적 질서와 합리적인 형실주의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세계는 이성과 현실적 합리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증명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이 한 시대를 관통하고, 인간은 충동적인 야만의 가면을 쓰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건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는 의식의 세계가 아니었다. 충동과 광기의 무의식이 세계를 지배한다.

    20세기 현대예술은 바로 이 충동과 광기의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세익스피어의 일련의 연극은 프로이드적인 성심리분석의 매력적인 텍스트가 되어 주었다. 「햄릿」의 광기는 어디서 오는가? 햄릿과 거트루트, 그리고 클로디어스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은 결국 남근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근친상간적 대결 구도 아닌가. 「리어왕」의 광기는 또 어디서 연유하는가? 리어왕과 세 딸 사이의 관계는 어떤 성심리 분석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런 연극의 프로이드적 해석은 유진 이오네스코와 페르난도 아라발에 이르러서 희곡 창작의 질료가 되기 시작 한다. 유진 이오네스코의 사이코 패스는 주로 기억의 전의식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작품 전편에 흐르는 것은 무의식의 충동과 광기다. 아라발은 노골적으로 근친상간적 성의 세계를 다른다. 이러한 성적 도착과 충동의 무의식은 독일 극작가 하이너 뮐러에 이르러 성의 전환에 까지 도달한다.

    우리들의 일상이 무의식이 지배를 받듯이 연극 또한 무의식의 내면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면서 현대 연극의 한 기류를 형성해 나간 것이다.

     

    6-1-2. 프로이드 심리학의 키 워드와 현대연극

     

    프로이드는 이 단계에서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자아 형성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다. 자아는 무의식을 조절하는 현실인식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명제가 자아의 인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는 단계가 자아의 형성과정이다. 이 자아 형성은 교육과 지식을 매개로 한 사회화 과정속에서 만들어 진다.

    그러나 자아의 형성만으로 인간 존재가 규명되지 않는다. 초자아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 초자아의 영역은 가정교육, 양심, 도덕. 희망. 이상 등 미래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영역

    이다.

     

     

    자아의 단계만 강하고 초자아가 약한 인격은 유로시스라고 한다.

    그러나 자아의 현실감각이 없으면서 꿈만 꾸는 인격을 사이코시스라고 한다.

     

    이 사이코시스와 유로시스는 현대연극에 있어서 문제적 인간의 성격을 창조하는데 결정적인 모델이 되어 준다. 프로이드 정신분석은 이 싸이코시스와 유로시스의 두 성격 형성의 인자가 서로 충돌하고 자극을 주는 변증법적 인자로 작용한다는 것을 규명해 내었고, 이 프로이드의 내면탐색은 현대예술의 중요한 키 워드가 되어준 것이다.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것과 그것에 저항하는 것, 그리고 그 두가지 축 사이의 불안이 프로이드 심리학의 구조다.

    프로이드에게 가장 중요한 심리적 동인은 불안이다.

    예술적 불안, 상대에 대한, 존재에 대한 불안.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 등.

    이 불안은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다.

    삶의 충동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죽음에 대한 충동이 전쟁과 공격과 파괴를 만들어 낸다.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 의해 인류사는 쓰여진다. 이 사이에서 불안에 대한 방어기재가 등장한다.

     

    억압,

    반동

    투사

    합리화,

    전이

    고착

    퇴행

     

    등 프로이드가 제시하는 심리적 방어기재는 다양하다.

    프로이드가 제시한 심리적 동인으로서의 방어기재들은 그대로 훌륭한 연기의 내면적 질료로 적용될 수 있다.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즈의 일련의 가정비극들은 바로 이 프로이드적 불안과 심리적 방어라는 측면을 가장 심도있게 극작술에 작용시킨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유로시스의 전형으로서 인색한 아버지를 창조했고,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싸이코시스의 전형적 여성이 창조되었다. 여기서 내면연기라기 보다,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가 제시된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리얼리즘 연기, 아메리칸 씨네마 액팅의 전범이 되어 준 것이다. 한국의 연출가 이해랑 선생은 미국 여행을 다녀 오신 후, 바로 이런 심리적 내면을 표현해 내는 연극에 매료당하신 듯 하다. 본인이 직접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기하고 연출하면서 어떤 연극을 꿈꾸었는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드가 제시한 내면의 키워드였다.

     

    억압, 반동, 투사,합리화, 전이, 고착, 퇴행성......

    이러한 심리적 징후가 인간의 행동 특성으로 드러나면서 그자체가 대단히 훌륭한 연기 양식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이 프로이드의 심리적 키 워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이 징후는 그대로 연기적 표현의 텍스트가 되니까.

     

    억압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감추는 심리 행동이고,

    반동은 초상집에 저승사자들이 큰 성기를 흔들고 나오는 식의 죽음에 대한 반동적 행위다.

    투사, 투사라는게 참 재밌다. 자신의 내밀한 존재를 바깥세계나 타인을 통해 대체하는 것

    이다. ‘너 참 못생겼네’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못생겼다는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합리화는 소피스트들의 무기이며 그리스에서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말의 희롱극을 이루었다.

    전이는 아버지한테 맞고 애궂은 개를 패는 행동이다.

    고착, 퇴행. 이것이 현대 심리극에 자주 등장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떤 부분만 가면 판단이 정지되고 얼어붙어 버리는 심리적 행위가 고착이다.

    퇴행성. 유아적 퇴행성, 세상이 너무 거칠고 험하고 무섭고 불안하니까 엄마 자궁속으로 다시기어 돌아가려고 하는 본능적 욕구가 퇴행이다. 아라발, 한국의 장정일 등의 글쓰기가 유아적 퇴행성의 사례가 되어 준다.

    장정일 시분석하면서. 유아적 퇴행성. 요즘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영원히 나이 들고 싶지 않은, 유아적 퇴행성.

     

    마지막 단계로 제시하는 키워드가 승화이고, 이 승화의 키 워드가 바로 연극의 본질에 가 닿는다고 생각한다.

    승화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방어해 나가는 심리적 행위이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하고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오히려 섞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놀이판에 뛰어든다. 아이들에게 만화를 보여주는데 만화를 다 보면 가 버리니까, 자신이 바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는 심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연극을 하게 된 동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날 별로 안 좋아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놀이판을 스스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점에서 연극이야 말로 인간의 심리적 불안을 방어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6-2. 프로이드, 그 이후

     

    6-2-1.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누가 그렸나?

     

    배우란 존재는 한마디로 문제가 있는 불안한 인간들이다. 자기존재에 대해서 불안하지 않은 사람들은 연극하지 않는다. 보지도 않는다. 잘난 사람들은 자기가 배우보다 잘생겼는데 애써서 힘들게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못난 사람들이 하는 거다. 그래, 못난 사람들이 연기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바슐라르의 입장이다. 결핍에 대한 보상이고, 프로이드적으로 심리적 방어기재인 승화의 심리적 행위이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프로이드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왜? 그렇게 인간의 결핍과 트라우마를 까뒤집는가 하는 의문이다. 프로이드의 임상병리학은 대단히 야만적이고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파악한 사람이 바슐라르다. 프로이드는 억압되어 있는 심리적 동기를 끄집어 내어 털어내면서 치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바슐라르가 제시하는 상상력의 치유법은 다르다. 심리적으로 결핍된 사람들에게 억결핍을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슐라르가 제시하는 상상력의 힘이다.

    결핍된 자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가? 에 관심을 기울이라. 그리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게 하라.

    구석기시대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누가 그렸을까? 아마 사냥을 나가지 못한 여자나 노약자 혹은 병약한 남자들이 그렸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사냥을 간다. 다리절름발이나 노약자들이 동굴에서 벽화를 그린다. 그 병약한 사람들이 그리는 벽화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건강한 동물의 모습이다. 이게 바로 콤플렉스 예술론이고 상상력의 힘이다.

     

    6-2-2. 융의 집단무의식

     

    6-2-2-1원형 (原形 archetype)

     

    프로이드가 서구적이고 개인중심적인 사고라면, 융은 대단히 동양적인 사고로 접근한다. . 인간은 집단 무의식을 갖는다. 집단무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형이다.

    이것이 융이 만든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발견이다.

    현대 예술가에게 빛이! 특히 동양 사상을 현대예술에 적용시킨 당사자가 융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란 것이 어디서 오는가. 무의식이라는게 과연 개인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성격인가.

    융은 인간의 무의식도 개인의 것이 아니다는 결론부터 내세운다.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습성, 풍속, 민족의 특성. 종의 문제.... 이런 것이 모두 합쳐져서 집단무의식이 형성된다.

    집단무의식은 그냥 파편화된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상징 체계를 지닌다. 상징체계가 신화고 민담이다. 그래서 유럽종 다르고 아시아 종 다른 집단무의식을 갖는다. .

    이게 바로 융이 발견한 인류학적 성찰이다. 지금까지 떠돌았던 신화나 민담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의 내면으로 끌어당긴 위대한 발견자가 칼 구스타프 융인 것이다.

    신화, 민담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에 답겨져 있는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 그 집단무의식은 원형이 있고, 독자적인 상징체계를 이룬다.

    예를 들어 우리민족의 원형은 곰 토템이다.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면 그는 천신족이다.

    한반도에는 호랑이족과 곰족이 있었다. 천신족은 호랑이를 선택하지 않고 곰을 선택했다.

    곰은 미련스럽고 참고 견딘다. 자기 인내적이고 호랑이처럼 왈가닥 거리지 않고 튀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신화는 곰처럼 미련하다.

    예를 들어서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몸을 바치는 행위는 곰처럼 미련한 여자의 행동이다. .

    바람피우고 도망간 놈을 기다리는. 춘향이는 또 얼마나 미련스러운가.

    호랑이 입장에서 보면 성질나서 참고 견딜 수가 없다.

    우리민족은 참고 견디며 지키는 집단 무의식을 이어 받은 것이다.

    1.

    6-2-2-2.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자아가 대체된 무의식적 존재다. 자기가 아니고 어떤 미적가치. 혹은 이상적 가치. 혹은 집단적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그것이 페르소나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그리스 시대 코러스들이 쓴 가면이다.

    내가 어떤 가면을 쓰면서 사회적 문화적 역할을 하는 것, 이것이 페르소나다. 이것은 그대로 연기론으로 적용된다. 페르소나는 배우가 맡은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다.

     

    연극의 발전은 페르소나의 가면을 점점 벗겨내면서 자아와 페르소나의 격차를 줄이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현대연극에 이르면 자아의 페르소나는 결국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는다.

     

    고대에는 큰 가면을 썼고,

    엘리자베스시대에 오면 가면 대신 가발을 쓴다.

    리얼리즘시대에 오면 가발조차도 벗겨지고 일상인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동일화 된다.

    그러나 부조리극에 이르면 오히려 모습이 구겨지고 찌그러지고 기괴한 형상을 지니기

    시작한다. 인간의 내면이 드러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가면을 쓰고 온몸에 횡칠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부여된 가면이 아니라, 충동과 야만의 무의식이 솟아 오르는 인간 무의식의 페르소나다.

     

     

    6-2-3. 푸코의 문제적 개인

     

    6-2-3-1.판옵티콘

     

    푸코는 인간의 의식을 사회적인 권력과 지식의 관계로 분석해 낸다.

     

    푸코는 세계를 현상적으로 봤다. 고고학적으로 삶의 의식을 분석 한 철학자다..

    푸코는 플라톤이 그리스시대에 창안한 원형감옥을 인간의 의식을 분석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재현했다. 판옵티콘은 죄수들만 노출되고, 감시자는 안 보인다.

    지금 이곳이 바로 핀 옵티콘이 그물망처럼 인간의 삶을 감시하고 조종하고 있다.

    미디어, 그리고 우리 눈에 잘 안 보이지만, 우리들 일상을 낱낱이 찍어대는 저 위대한 CCTV존재, 그것이 바로 판옵티콘이다.

    이게 바로 권력의 구조이고, 인간은 결국 순응하고, 제도화되고, 상품화된다. 푸코의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거대한 감옥 그 자체다. 이미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덴마트는 거대한 감옥 그 자체” 라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우리들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근본적으로 감옥에 갇혀 산다.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적 인간이 등장한다.

    그의 무기는 지식이다. 순응이냐? 저항이냐? 이것이 문제다.




     

    6-2-3-2. 저항

     

    여기서 푸코는 오딧세우스의 항해 에피소드를 내세운다.

    오딧세우스가 항해하다 섬의 마녀에게 붙들려가 돼지가 되었다. 전부 꿀꿀 거리는데, 오딧세우스만 인간의 영혼을 잃지 않았다. 부하들은 돼지가 되어 좋아하는데, 나는 결코 돼지 일수 없다. 인간의 기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주체적 지식이고 저항의 힘이다.

    주체적 지식은 객체화에 저항한다. 객체화에 대한 저항이 제도화된 성을 무너뜨린다. 이렇게 권력과 지식, 객체와 주체의 저항에 의해 성은 무너지고 쌓이고 무너지고 쌓인다. 이것이 역사다. 푸코의 지식 고고학은 그대로 연극의 존재근거를 구명하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

     

    그리스 비극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거부의지’ 로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주체적 저항의 의식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신이 내린 운명적 저주에 의해 파괴된다. 이건 운명이란 객체가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이고 폭력이다.

    그리스 시대에 공연된 「오이디푸스」는 본래적으로 주어진 운명, 혹은 제도에 순응하지 않으면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적 결과에 떨어진다는 교훈적 의미를 지니면서 공연되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염세주의적인 경향을 띠면서 공연되기도 하고, 국내 공연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푸코의 저항의 관점을 대입하면 「오이디푸스」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헤석되면서 모더니티(현대성)을 확득한다.

     

    “내게 저주의 운명를 내린 것은 신이다. 그러나 스스로 내 눈을 찌른 것은 신의 손가락이 아니다. 나다, 내 손가락이다, 나의 선택이고 나의 결행이다! ”

     

    이렇게 해석되고 번역된 대본을 배우가 연기한다면, 오이디푸스야 말로 신(판옵티콘)에 저항하는 주체적 개인(오이디푸스)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문제 제기적 개인, 주체적 지식의 저항력이야 말로 현대연극이 가장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할 의식이다. 이것이 모더니즘이고, 모더니즘의 정신은 개인적 주체의 자유와 해방의 길의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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