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 ▶ 4장. 놀이

  • 이윤택 연기론 

                영혼과 물질




    이윤택(연출가)


     



    4장. 놀이

     

     

     

    한권의 책이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묻고 싶다. 나의 독서체험에 의하면, 그렇다.

    나는 고교시절 독서대회에 나가기 위하여 3권의 책을 읽어야 했다. 「삼국유사」「플라토」 , 그리고 「택리지」다. 독서대회에 나갈 목적으로 책을 읽었지만, 이 3권의 책은 그후 지금까지 내 삶과 예술작업의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내 연극이 한국의 신화와 상상력에 젖줄을 대고 있다면, 그건「삼국유사」덕분이다. 내가 이상주의 연극관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내가 플라토니즘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인간과 자연의 친화력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그건 「택리지」가 내 혈관과 신경세포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연극이 다분히 인류학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호이징어의 「호모 루덴스」덕분일 것이다. 호이징어는 그의 저서 「호모 루덴스」에서 연극과 배우에 대한 언급은 적다. 그러나 그의 놀이 개념은 그대로 광범위한 연극의 개념으로 적용될 수 있다. 배우를 위한 인문학 2번째 강의에서는 이 책을 중심으로 놀이의 연극성을 추출해 내려 한다.

     

    나는 호이징어의 호모루덴스를 읽고 연극이 단순한 무대 행위가 아니라, 인류의 거대한 삶의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연극 만들기는 그대로 내 삶의 전부이며 내 삶이 곧 인류의 한 장으로 편입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연극은 곧 내 삶의식이고 삶행위였다.

     

    오늘 강의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배제하고, 가능한 「호모 루덴스」내용을 훑어 나가면서 호이징어의 생각들을 연극으로 적용시켜 나가 보기로 한다.




     

    「호모 루덴스」는 인류학자가 쓴 책이다. 저술 방법은 인류학뿐만 아니라 종교, 언어학 -작가는 18개 국어를 구사한 사람이다- 신화, 법학, 스포츠, 심리학까지 모든 부분을 망라해서 놀이의 개념을 규명해 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연극을 위해 쓴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호이징어가 쓴 놀이의 형태는 이미 셰익스피어가 제일 많이 써먹었고, 호이징어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런 놀이의 형태가 최고로 발전된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 (셰익스피어에서 라신느까지)다. 문예사조에 대입해서 언급하자면, 그 이후로 리얼리즘 문화가 도래하면서 연극에서 놀이의 기능이 쇠퇴한다. 그러나 전후 세계대전을 치르고 현대 부조리극이 등장하면서 다시 놀이의 시대가 등장한다. 놀이의 상승과 하강이 연극사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호모 루덴스」는 그대로 인류학을 배경으로 한 연극사적 주해서가 된다.

     

     

     

     

     

    4-1. 놀이의 개념

     

    연기는 진지한 놀이이다.

    놀이와 진지함이라는 말이 상반된 것처럼 들리지만 결국은 진지한 놀이다.

     

     

    배우들은 ‘진지함’과 ‘놀이’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고비를 넘는다.

     

    배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평소에 가지는 불만은 ‘연극이 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배우를 꿈꾼다.’는 것이다. 다들 자기 나름대로 연극을 생각한다. 그러나 연극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화사적 배경이나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연극을 선택하고, 연극을 하면서도 연극이 무엇인지 공부하지 않는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선택한 것 안에서만 연기를 한다. 그렇게 되면 연극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 가치와 재미를 체험할 수 없다. 계속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의 영역 안에서 맴돈다.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다가 흥미를 잃거나 중도에 좌절감을 느끼면 가볍게 포기해 버린다. 이러다 보니까 연기의 참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연극배우에게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호이징어의 「호모루덴스」는 배우들이 읽어야 할 필독 인문학 서적이다.

     

     

    오늘은 전 시간에 강의했던 무정형의 상상력이 어떻게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는가 하는 점에서 연극이란 영어; play 그대로 play (놀이)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겠다.

     

    우리가 ‘연극은 언어 이전에 존재했다’ 라고 말할 때, 언어 이전에 존재했던 연기적 행위가 바로 놀이다. 놀이는 놀랍게도 언어 이전의, 문화보다도 이전의, 더 놀라운 것은 인간 이전의, 모든 살아 있는 생물체들의 행위라는 것이다. 왜? 동물들도 노니까. 어쩌면 식물도 놀 수 있을 것이다. 놀이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 현상이다.

     

    놀이에는 자연현상으로서의 규칙이 있다.

     

    4-1-1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같은 집에 모여 사는 개들이 짖으면서 싸울 때, 자세히 보면 상처가 나지 않는다. 다른 집 개들이 들어오면 피를 내면 싸우는데, 같이 사는 개들 사이에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같이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규칙이 있는 놀이다

     

    4-1-2. 놀이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욕구이다.

    놀이는 본능적이다 ? 아니다. 놀이는 정신이다? 의지다? 아니다. 그러면 놀이는 뭐냐?

    놀이는 욕구이다. 본능과 욕구는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본능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이고 욕구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를 향한 것이다.

    욕구가 어디서 나오는가? 자신 밖의 대상이 있을 때 놀이 욕구는 충동질한다.


    왜 연극을 하려고 했을까? 자신만의 방에서 자기 혼자서는 연극을 할 의욕이 분출되지 않는다. 세상과 만나고 싶을 때 놀이 욕구는 발동한다.

     

    4-1-3 놀이는 존재의 과잉이다.

    놀이는 인간 존재 속에서 넘쳐나는 것을 발산하는 행위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지난 상상력강의에서도 언급 했듯이 과잉에 대한 발산이며 결핍에 대한 보상이다. 그리고, 긴장에 대한 이완이다.

    놀이에 의지가 섣불리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기 중심적인 본능이 아니다. 놀이는 욕구다. 욕구라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호이징어는 “자연은 긴장과 쾌락과 재미를 함께하는 놀이를 선사한다다”고 말한다. 여기서 재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란 무엇인가?

    재미란 특정한 의지, 사상이나 세계관, 의무 등이 없다. 재미는 삶의 총체성이다. 그러면 삶의 총체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총체성이라는 것은 논리성을 초월한다.(초논리성) 이성적인 것을 초월하는 총체성이다. (비이성) 초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삶의 과잉이다.

     

    여기까지가 놀이의 개념이다. 왜 노나? 과잉되었으니까. 강아지들을 풀어놓았으면 놀지 않았을 것이다. 강아지들을 가둬두니까 난리를 치고 노는 것이다. 이것이 과잉이다. 과잉의 운동성이다. 이것이 놀이다. 결국 연극은 과잉이다. 삶의 과잉이다.

    바쁘면 연극 보러 옵니까? 아니다. 살다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연극 보고 싶다 이것이 과잉이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배우들은 과잉된 인간이다. 내적으로 과잉되어 있지 않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 문제는 과잉된 그 자체가 배우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 과잉된 욕구가 연기를 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4-2. 놀이의 성격

     

    4-2-1 놀이의 탈일상성

    놀이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상에서 계속 놀면 욕먹는다. 놀이의 반대말은 일이다. 또 하나, 놀이의 반대말은 열심히! 다. 놀이는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배우들에게 절대로 하지 말라는 말은 "열심히 하겠습니다."다. 일을 열심히 하지 열심히 놀지는 않는다. 연극은 일이 아니다. 연극은 충동이다. 이것이 원형적 놀이이다.

     

    4-2-2 놀이는 시적 은유다

    놀이는 정신과 자연 사이의 방전현상이다. 즉, 놀이는 현실 밖의 독자적인 세계를 만든다. 독자적인 세계는 바로 시적 세계다. 문자로 쓰인 최초의 놀이유형은 시다. 시라는 게 뭐냐? 현실과 나, 자연과 나 사이에서 방전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시적 상태라고 부르자. 놀이 문화의 중심은 바로 시다. '놀이는 은유다'라고 얘기 했을 때 놀이는 시적 은유다.

     

    4-2-3 놀이는 제의다

    놀이가 사회적 의미를 지니면서 제의성을 지닌다. 제의란 뭐냐? 신성한 종교적 의례, 희 생의식의 축제, 가족 제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호잉징어는 사회적 제의로서 법과 질서, 상거래 까지 사회적 놀이의 형태로 간주한다. 호이징어가 제시하는 사회적 놀이는 다양하다. .

    가. 종교적 제의

    나. 재판

    다. 상업적 행위 투기, 증권거래

    라. 스포츠

    마. 정치, 예를 들어 국회 청문회도 사회적 놀이다.

     

    호이징어의 논리를 따르자면, 모든 세계의 움직임, 삶의 형태가 다 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인생은 연극이오 세계는 무대다’는 명 대사와 만난다. 호이징어는 17세기 세속 연극의 시대 the age of world theater가 놀이 영역이 폭발했던 시기라고 언급한다. 세익스피어에서 라신느까지가 연극의 놀이 기능이 확산되었던 시기였고, 여기서 인생은 연극이오 세계는 무대다 라는 명 대사가 창조된다. 그러나 인생을 무대에 비유한 자는 플라톤이다. 그 점에서 셰익스피어는 플라톤의 이상주의 연극관에서 도덕을 삭제해 버린 이상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4-3. 놀이의 미학

     

    놀이가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를 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야 놀지 말고 진지해져." 이런 말은 잘못된 말이다. 놀이와 진지함을 반대개념으로 많이 보는데, 그렇게 고정화 시킬 수 없다. 대부분의 놀이는 대단히 진지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놀이는 사기가 굉장히 많다.

     

    4-3-1. 운율과 조화

    놀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아름다움의 구체적인 요소는 운율과 조화다.

     

    4-3-2. 놀이는 자유시간이다.

    자유인데 일시적인 자유이다. 일시적인 시간과 제한된 공간 속에서의 자유이다. 놀이는 자유시간이다. 일종의 여가시간이다. 희랍어로 스콜 (자유/ 여가시간)인데, 스콜라로 발전한다. 철학자들이 자유시간(쉬는 시간)에 애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학교가 된 거다. 당시 학문하는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돈을 받고 지식을 팔았다. 그런 사람들이 쉬는 시간(스콜)에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 학교가 되었다.

     

    놀이는 삶의 여가이고 막간극이다. 놀이의 가장 높은 형식은 축제, 더 높은 형식은 의식이다. 사회적 공동의식의 가장 높은 형식은 축제와 의식이다. 놀이는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 때문에 집중된 긴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놀이의 스타일은 적극적인 긴장의 황홀경을 추구한다. 놀이를 무관습성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놀이는 반복된다. 놀이가 반복되면서 정신적 창조물 혹은 문화유형이 된다.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신성한 금역, 이 안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고유한 질서가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놀이의 규칙과 방법론이다. 막 노는 것이 아니다.

     

    4-3-3. 놀이의 질서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며 질서 그 자체이다. 왜냐? 놀이는 불안정하고 혼돈된 삶에서 일시적이지만 삶의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 질서가 필요한가? 일상이 불완전하고 혼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된 시간 공간 안에서만이라도 삶의 완벽성을 추구한다. 고요한 질서를 요구한다. 그리고 놀이의 고유 질서가 문화이다. 놀이와 질서가 합쳐져서 미학이 되었다. 미학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 정확하게 말하면 미학은 노는 법이다. 잘 노는 법이다. 한국 연극인들 가운데 미학과 출신이 많다. 이 미학이라는 것은 질서 잡힌 형식을 창조한다.

     

    놀이는 결국 질서 잡힌 형식을 요구한다. 놀이의 질서 잡힌 형식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연극이다.

     

    이것이 놀이의 생명력이다. 형식이 생명력을 부여한다.

     

    놀이의 질서 잡힌 형식을 위해 어떤 미학(노는 법)이 있는가?

     

    가.긴장

    나.평형

    다.안정

    라.전환

    마.대조(대비)

    바.변주

    사.결합과 해체

    아.해결

     

    이 놀이의 미학은 그대로 연기의 규범이 된다. 특히 연출가들이 이런 것들을 잘 고려해서 장면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고 우리를 매혹시키는 미학. 관객을 사로잡는 놀이의 생명력.

     

    그래서 놀이는 종종 우리에게 마법을 건다. 놀이는 마법이다. 마법의 가장 큰 성격은 뭔가? 율동과 조화다. 율동과 조화의 마법. 이것이 놀이의 미학이다.

    놀이의 미학을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보자,

     

    긴장이란 무엇인가?

    인생이 불안하고 위태롭기 때문에 긴장이 일어나고 그 긴장을 풀어내기 위해서 긴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놀이는 경쟁적 성격을 지닌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경쟁이다. 왜 긴장을 주느냐? 해소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드라마의 논리이다. 놀음, 도박, 스포츠는 놀이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하는 사람에게 긴장과 경쟁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놀이의 원칙이 있다. 용기 끈기 역량이 요구되고 가장 중요하게 필요한 것은 공정성이다. 공정성이 없는 놀이는 재미없다.

     

    4-3-4. 놀이와 단체

    놀이의 형태는 일시적이지만 계속 반복 지속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단체가 형성되고 사회화를 볼 수 있다.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함께 있다는 감정,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감정, 일상성(의 규범)을 거부하고 있다는 감정을 함께 나눠 갖는다. 놀이와 단체의 관계는 머리와 모자의 관계와 같다. 놀이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모자(관) 란다.

    단체는 목표를 가진다. 중대하고 엄숙하고 성스러운 목표를 가지는 것이 고대에서 필요했고, 그 단체의 목표를 설정한 사람이 플라톤 (이데아론)이다. 그래서 서양철학자 중에서 놀이의 철학을 가장 먼저 세운 사람이 플라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놀이를 통해서 국가를 정화시키고자 했다.

     

    4-4. 진지한 놀이

     

    4-4-1. 비의

    놀이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일상을 파괴하기 때문에)를 조성한다. 놀이는 비의다.(비밀스런 의식이다) 비의의 가장 오래 된 형식은 가면이다. 탈일상적인 세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변장술이다. 이것은 오래된 놀이의 비의성이다. 한 마디로 다른 존재로 이전하는 것이다. 다론 존재로 이전되면서 일상과는 다른 환상, 신비로운 경외심, 자유, 해방감을 느끼면서 탁 터놓고 놀 수 있다. 이렇게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놀이는 진행된다.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물질적인 이해관계도 없고 어떤 유익도 얻을 수 없다. 단지 고유의 법칙 속에서 고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놀이라는 자유로운 행위는 독특한 단체의 형성을 촉진하고, 그 단체 특유의 방법으로 일상과 다른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갖추려는 경향이 있다.

     

    4-4-2. 상상의 현실화

    그들이 꿈꾸는 놀이의 방식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호모루덴스」에 의하면, 현존재보다 더 아름답고 더 장엄하고 더 모험적인 것을 상상하면서 표현하려 한다. 그것이 놀이이고 연극이다.

    그러나 무대를 보면 어떤 아이는 왕비고 왕자이고 아버지며 간악한 마녀이고 호랑이가 된다. 놀이를 하는 동안 그런 인물이 될 그럴 정도로 도취되지만, 일상 현실을 잊어버리는 법은 켤코 없다. 왜냐하면 아이가 표현하는 것은 형상화이다. 상상의 현실화이다. 자기 현실을 형상화 시키는 형상화이지 실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희망을 형상화시키는 것이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행위자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착각하지 않는다.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마스크를 쓴 것을 알고 있지만 감동하고 놀란다. 왜냐? 그것이 놀이에 대한 합의고 동참이다.

    연기란 결국 상상의 현실화이고 실제화이다. 연기에 있어서 리얼리티는 뭐냐? 실제가 아니다. 자기 상상의 실제화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놀이는 상징적 형상화이고, 신비적 현실화이다. 보이지 않고 표현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이런 형상화를 통해 신성한 형식(연기 형식)을 획득한다. 참여하는 사람(관객)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질서보다 더 높은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것을 표현의 현실화라고 부른다.

     

    4-4-3. 일상의 빛

    놀이는 울타리가 쳐진 제한된 공간 (무대,마당) 안에서 시행된다. 일시적인 고요의 세계가 울타리 쳐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그 놀이가 끝나도 효과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인 세계에 빛을 던져주며 다시 신성한 놀이철이 돌아 올 때까지 자기 일상생활에 질서와 안녕을 약속한다. 이게 바로 축제, 의식, 연극의 기능입니다.

    관객이 왜 연극을 보러 오겠는가? 한 편의 연극을 통해서 행위자들이 실제보다 더 높은 더 아름답고 더 장엄하고 더 모험적인 상상을 현실화 시키는 것이다.

    관객들은 현실화를 통해서 사로잡힘 단계에 들어서고, 그 일시적인 공간이 끝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참가했던 사람의 기억이든 관람했던 사람의 기억이든 일상의 생기, 빛으로 충만해진다. 그래서 일상의 빛으로써, 다음 연극을 볼 때까지 다음 축제가 이루어 질 때까지 일상을 견디어 낸다. 이게 연극의 사회적 특성이다.

    지금 내가 한 말은 계절제에 대한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가무가 천하를 바른 길로 이끌고 자연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물이라고 했다. 중국 계절제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동맹, 영고와 같은 것이다. 이 성스러운 것은 드로메놈과 드라마로 표현된다. 드로메놈은 축제에 참여하는 그 자체, 축제 그 자체. 그냥 동참하는 것이고 드라마는 표현으로 연기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좀 더 발전 된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4-4-4. 왕은 배우였다

     

    그래서 놀이는 모방이 아니고 메타다. 삶의식 자체이고, 삶의 양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호이징어는 심리학을 공격한다. 이런 심리학자들은 표현되는 연기(드라마)를 보상적인(자기 결핍에 대한) 어떤 대용품이라고 말한다. 호이징어는 목적에 적합한 행위를 실제로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놀이는 그냥 자연의 질서이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냥 노는 것이다.

    제의라는 것은 표출, 과잉이다. 극적 표현의 형상화이다. 상상의 현실화, 실제화이다. 사실은 모방이 아니고 자연의 질서였다. 어디서 이런 단서가 나오는가? 계절의 변화, 별자리의 바뀜, 곡식의 익음, 사람과 짐승의 삶과 죽음 이라고 하는 자연의 질서를 고대인들은 관찰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동물세계와 식물 세계의 현상, 삶과 죽음, 공간과 시간의 개념 달과 해, 태양과 달의 운행에 대한 관념과 법칙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질서(존재의 진행)를 놀이로서 재현, 재창조하려고 했다. 우주 질서의 재창조. 그래서 이것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놀이한다. 왜 자연을 놀이했을까?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놀이를 사회질서로 현실화 시켰다. 왕은 태양이요, 왕권은 태양의 운행이다.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태양놀이는 국가의 질서로 자리 잡혔다. 그래서 옛날의 왕들은 저 혼자 죽지 못하고 제의 형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왕은 배우였다. 어디서 놀이가 탄생했는가? 자연과 우주에서 온다는 것이지. 인간이 죽고 사는 것 해와 달 별자리 원리에서 놀이의 원리를 찾았다. 해님 달님 놀이, 그런 놀이 없는 나라가 없다. 별자리나 띠를 말하는 것도 다 자연의 운행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자연의 법칙과 운행이 고대의 놀이가 되었다. 그 놀이가 바로 사회형식으로 자리 잡았고 국가를 이룬 것이다. 연극의 기원은 우주(순행)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거부 이렇게 말 하는 것이다.

     

     

    4-4-5. 사로잡힘, 혹은 샤만

     

    우주 운행의 원리를 사회질서로 세울 수 있었던 미학은 무엇이었는가? 고대인들에게 이런 표현되지 않은 삶과 죽음은 사로잡힘(샤만), 즉 전율하며 황홀경에 빠지는 형태로 표현된다. 최초의 연극은 사로잡힘의 형태이다. 삶과 자연의 변화에 대한 전율(깨달음)은 사로잡힘이란 반사적 행위로, 나아가 예술 형식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창조적 상상력이 탄생한다. 우주 질서에 대한 미학적 신비적, 초논리적 인식이 제의의 논리로 구축되었다. 제의의 논리는 우주적 사건을 현실화 시킨다. 그것이 신화다. 우주적인 사건을 극화시킨 것이 놀이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의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원초적 놀이를 과잉이라고 했다. 어린아이 동물들의 놀이는 과잉이지만 우주의 순행 자연의 현상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우주 질서가 개입된 것은 인간의 정신이 개입된 것이다. 이 둘은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구분은 있어도 아이들의 놀이, 우주질서 운행에 대한 정신적인 놀이, 정치적인 놀이, 상업적인 놀이 이런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장음 율동 조화 등 놀이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호이징어는 말한다. 이 말은 놀이에 관념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4.-4-6.놀이의 관념

     

    놀이의 관념적 형태는 시다. 시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놀이는 성스러운 진지함과 결합된다. 어린이들은 거의 성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게 논다. 무대 위의 연기자도 자신의 연기에 완전히 몰두하면 성스러운 진지함을 지닌다. 바이올린 연주자도 마찬가지이다. 놀이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장엄한 성스러움이다. 놀이에 관념이 포함되면서 놀이는 장엄한 성스러움, 진지함의 형태로 나아간다. 가장 큰 놀이의 성스러운 진지함이 드러나는 것이 종교적 제의이다. 이런 성스러운 종교적 제의를 놀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다. 왜? 놀이와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있지 않는가? 제한된 시간 일요일, 제한된 공간 교회, 특별한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즉 놀이 그 자체이다. 단지 성스럽고 진지할 뿐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놀이를 하느냐?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만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교회 가는 것은 놀러가는 것인가? 틀렸나? ......맞다. 인간은 교회에 놀러간다. 예배는 놀이 중에 가장 성스럽고 진지한 놀이다. 왜? 목적은 없으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는 놀이는 치사하지만 예배에는 목적이 없지만 의미가 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놀이와 성스러움을 하나로 보았고 놀이의 개념을 정신의 최고 영역으로 보았다.

     

    놀이는 진지하다. 놀이하는 사람은 심신을 다 바쳐 그 놀이에 빠지기 때문이다. 단지 놀이라고 가볍게 할 수 있나? 아니다. 놀이는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할 수밖에 없다. 놀이를 진지함과 구분하는 사람은 놀이를 모르는 구경자다. 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진자하다. 놀이를 보고 웃는 것은 관객일 뿐이다. 놀이하는 사람은 웃을 여유가 없다. 놀이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놀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즐거움은 긴장이다. 심신을 다 바쳐서 놀다보면 긴장으로 가서 급기야 정신의 고양을 이끈다. 놀이는 자유분방과 무아경의 극단으로 고양된다. 그래서 놀이는 성스러운 진지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스러운 진지함은 가변적이다. 누가 건드리거나 방해하면 깨진다.

     

    4-4-7. 놀이의 서사

     

    놀이는 잠재적으로 '하는 척한다.' 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놀이에는 '실제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밑에 숨어있다. 무대에서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놀이는 하는 사람이든 보는 사람이든 완전한 환상은 아니라는 것에 서로 동의한다. 사람들이 놀이라는 것을 기획 할 때, 귀신 가면을 쓰고 귀신 소리를 내고 모래위의 발자국을 찾고 피리를 불어서 조상의 목소리를 나타낸다. (독일의 귀신놀이 축제에서) 그러나 참여자들은 모두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이 계획하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숲에서 일어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여자들에게 하면 황홀감과 무서움, 유치한 허풍, 오싹함..... 이런 반응을 한다. 그러면 동참자는 완전히 속았는가? 아니다. 가면 뒤에 누구인지 안다. 가면이 협박적인 몸짓으로 다가오면 여자들은 소스라치듯 놀라고 소리치며 달아난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쇼가 아니다. 인류학자 옌제에 의하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이고 한편으로는 전통이 부과한 역할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귀신놀이를 하면은 '악' 소리를 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이 배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의 습성이고 놀이를 망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악'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행위자와 거의 대등한 조건의 놀이 요소이다. 그래서 믿는 체(make believe) 하기의 요소가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알면서 동시에 속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속는 쪽을 택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아는 체 한다. 진짜 현명한 사람은 속아준다. 미개인들과 아이들은 바로 좋은 관람자이다. 믿는 체하는 것은 뭐냐? 그 역을 잘 행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바로 호이징어의 놀이론이며 연기론이다.

    (2008. 12. 13 오후 2시 밀양연극촌)

     

     

    4-5. 놀이의 역사

     

     

     

    인간이 잘 노는 시대는 언제일까? 기원전 4세기부터 그리스 시대까지 그 때가 가장 잘 놀았을 것이다. 단군 이전의 시대에도 잘 놀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했던 가장 최초의 놀이는 무엇이었을까? 여행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발생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걸어서 맨발로 왜 그렇게 다녔는가? 자기 일상에서 떠나는 것. 이것이 놀이의 출발이다. 그렇게 안 떠났으면 인류는 아프리카에만 있었겠지?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서 여행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4-5-1. 원시 축제의 놀이는 증여의식으로 시작되었다.

     

    축제의 시작은 많이 주고 베푸는 사람이 명예를 갖고 승리자가 되었다. 많이 베푸는 사람이 왕이 된다. 싸움을 할 때도 상대를 죽이지 않고, 자기 부하를 죽이는 자가 존경을 받았다. 이런 놀이의 미덕이 지켜지던 시대가 바로 평화의 시대였다. 사마천이 이야기 하는 은나라 한나라 왕조의 시대 요순시대 이게 바로 신화의 시대였다.

     

    4-5-2. 가무가 천하를 평정한다

    최초의 싸움은 험담싸움, 즉 욕질이었다. .

    험담싸움은 아프리카에서 시작했다. 욕을 큰소리로 가장 잘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험담싸움이 번져나가면서 물리적인 싸움이 뒤따랐다. 호이징어의 말을 따르면 중국에 야전이라고 있는데, 날라리를 불면서 싸웠다. 중국의 야전은 전투라기 보다는 엄청난 소란이었다. 첸카이커의 영화 「현 위의 인생」 을 보면, 세상이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는데, 한 가인이 절벽 위에서 현을 뜯고 노래를 한다. 그 소리에 싸움응 멈추어진다. 여기서 가장 중국적인 고대놀이는 음악이었다. 가무가 천하를 평정한다. 가장 중국적인 놀이는 바로 가무였다.

    원래 놀이라는 말 자체가 현을 조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헣듯 고대의 놀이적 특성은 싸움이 아니었다. 싸우는데도 규칙이 있었다.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제한된 시간, 공간이 있고 엄청난 긴장과 질서가 있다. 그 점에서 전쟁은 명확하고 엄청난 놀이이다. 그러나 현대의 전쟁은 놀이를 상실하면서 대량 살상극으로 변했다. 고대의 전쟁은 적에 대한 예우 포로에 대한 예우 승자와 패배사이의 예우가 있다. 적장이 승리하거나 죽으면 서로 모자를 벗고 예우를 갖추었다. 이것이 전쟁의 규칙이었다. 전쟁의 규칙이 기사도와 사무라이와 화랑도를 만들었다. 사실 기사도는 놀이의 형태가 전쟁까지 간 것이다.

     

    4-5-3.대리전 투기

    놀이의 규칙이 타락한 것은 로마 말기 부터이다. 놀이의 의미와 규칙을 상실하면 인간의 본능의 대리전 양상으로 타락한다. 로마 말기의 원형경기장은 인간 본능의 대리전으로 볼 수 있다. 대리전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로마가 망한 것은 놀이 정신이 추락하고 로마 시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놀이를 구경하면서 대리만족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기의 무목적성과 무의미성은 결국 삶과 사고, 행동이 지니는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며 외부의 모든 충동에 무관심해지고 이러한 소모적인 무관심은 국가적인 힘의 낭비로 이어진다. 결국은 스스로가 참여하지 않는 목적이 없는 볼거리로 대리만족하는 이러한 투기성 놀이는 국가적으로 힘의 상실로 이어졌다. 놀이가 제의인데 대리제의를 하면서 망한 것이다.

    지금 한국을 보라. 투기가 어디서 이루어 지는가? K1, 프라이드., 갖가지 한국형 격투기가 방송을 탄다. 인간의 본능적 야만성을 K1, 프라이드를 보면서 푼다. 남을 욕하고 싶지만 욕 하지 않는다. 괜히 싸우기 싫으니까. 모든 험담과 욕설은 어디로 들어가는가? 지상파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으로 간다. 방송 연예프로가 거의 의미없는 말따먹기다. 강호동은 귀중한 놀이판인 씨름판을 떠나 말놀음꾼이 되어 대리전을 치르느라 바쁘다. 로마 말기의 글레디에이터가 지금 여기 티뷔 화면 속의 강호동으로 등장한 느낌이다. 무적의 씨름꾼이 텔레비전 속에서 의미없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쉴새없이 놀고 있다. 현대를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인간이 놀이성을 잃어버리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리만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연극이 21세기에 나가야할 방향은 너무나 분명하다. 관객들을 텔레비전 앞에서, 방에서 끄집어 내 광장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광화문 앞에서의 촛불시위는 엄청난 놀이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축제이다. 그런 축제 문화가 바로 건강한 놀이이다.

     

     

    4-5-4. 한국의 험담놀이

    우리의 놀이문화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우리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언제였는가? 문헌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정조 시대에 가 닿는다. 17-18세기는 조선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르네상스 라인을 형성한 놀이의 번성기였다. 그 당시 이미 조선에서는 시조가 정형시의 율격을 깨뜨리면서 사설시조가 나왔다. 그 시절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지금 우리 리듬도 안 끊어지고 우리 놀이 장단 다 지키면서 현대화 되었을텐데 왜 외국시를 번역해 들여와 현대시로 받아들였을까?

    조선 말기에는 이미 신재호가 광대론에 대한 개념을 내세우고 판소리가 우리 말 놀이로 잘 넘어오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외국 것을 받아들이면서 서구 연극을 중심에 놓았을까? 사실은 이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놀이양식은 뒷전으로 밀려 났다. 잔존하고 있는 우리의 험담놀이를 흥부 쫓겨나는 대목을 통해 보자

     

    불난데 부채질 결혼식에 패싸움

    외상술값 억지 쓰고

    미나리꽝에 소 몰아넣기 오대 독자 불알까기

     

    이게 일종의 험담 구조인데 이런 것이 세익스피어에 의해 영국의 고전극이 되었다. 우리 홍보가에는 이런 훌륭한 험담 구조가 있다. 훌륭하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리듬과 조화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말의 리듬과 조화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험담놀이가 있다는 것을 지금 늦게라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5-5. 동서양의 놀이

    호이징어는 각 나라의 어원을 가지고 놀이를 고찰했다. 그리스에서 놀이가 파이디아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가벼움, 즐거움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아곤이라고 하는데, 투기, 싸움, 파이팅을 놀이로 본다. 투기를 놀이의 특성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가 독보적인데 인도 같은 데서는 투기가 없다. 그 대신 인도 산스크리트어는 놀이에 대한 의미가 많다.

    하나는 크리라티 라는 말인데 훌쩍뛰기, 깡총뛰기란 의미다. 무용이나 연극 전반에 이르는 언어 이다. 쉽게 말하면 발이 무거우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또 다른 하나는 '뒤바키'란 언어다. 농담, 익살, 조롱, 잡담 등인데, 생각의 반짝임이 말놀이로 이어졌다.

    또 하나는 '라스' 갑작스럽게 나타남, 돌연한 소리를 지르는 것, 활활 타오르는 것,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무엇에 몰두 하는 것이다. '릴라' 라는 말은 마치 무엇처럼 흉내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이 있는데도 투기는 없다. 이것이 서양과 동양의 큰 차이이다. 서양은 놀이를 투쟁으로 보는데, 동양의 놀이에 투쟁은 없다.

    중국에서는 '완' 이라는 의미가 있는데,즐기다 장난치다, 희롱하다 날뛰다 농담하다 만지다 냄새 맡다, 만지작거리다 이게 다 '완'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는 유희가 있는데,

    '유', 놀이 '희' 희극, 말고도 완이 있다. '희'는 상황 배열 위치, 연극에 대한 개념적인 영역까지 포함한다.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구도적이다. 또 '젠'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르곤'과 같은 투쟁의 성격이 있다. 아메리칸 인디안에게 '토아니'는 색정적인 것 치근덕거린다란 의미가 있고, '칵치' 라는 겨루기가 있다. 일본어의 아소뷔라는 말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존귀한 사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동경에 도착했다.' 를 '당신은 동경에 도착하는 놀이를 했습니다.' 로 표시 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는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사망놀이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로 표현했다. 바로 일상적이지 않은 존귀한 놀이로 생각했다. 일본사람들은 놀이라는 개념을 일상을 벗어난 존귀한 것으로 생각했다. 게르만에서는 놀이가 관념과 섞여서 용해되어버렸다. 칸트는 상상력의 놀이, 관념의 놀이, 우주적 관념들의 정체적인 놀이....이런 식으로 철학적 정신적 사유와 놀이가 결합되어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독일 사람들은 정신적인 영역(철학)까지 놀이로 끌어들인 셈이다.

     

    동서양 놀이의 역사를 일별해 보았다. 제법 세밀하게 놀이의 의미를 어원을 통해 열겨한 이유가 있다. 놀이란 말을 연기란 의미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연기의 세계가 굉장히 다양하게 느껴질 것이다. 연기는 정말 존귀한 움직임이다. 치근덕거리고 팔짝 뛰고 풀쩍 뛰는 것부터 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확인한 놀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해 우리가 연기라고 생각해 온 영역은 얼마나 제한적인가. 훌쩍 뛰고 깡충 뛰고 치근덕거리고 갑자기 나타나고 큰 소리 지르고 이런 모든 것들에서 상상력 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연기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연기는 깡충 뛰는 어린애들 몸짓부터 농담, 잡담에다 철학적인 사유까지 이미 다 들어있다. 그런데 우리는 연기의 영역을 이렇게 폭넓고 구체적으로 상상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만큼 제한적으로 연극을 해왔는지 놀이의 어원 하나만 가지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4-6.놀이의 양식

     

    4-6-1 음악

    놀이의 첫 단계는 음악이다. 다시 뮤지컬이 등장하는 것은 고대 축제의 복귀일 수 있다. 관객이 몰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는 악기를 다루는 기술을 놀이로 보았다. 그래서 음악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반복, 질서, 율동, 변화 그리고 청중과 연주자를 일상에서 벗어나서 고상한 즐거움으로 바뀌게 해주는 것으로 믿었다. 음악은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시키고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완벽한 놀이의 양식이다. 음악 이상 완벽한 것은 없다. 음악이 최고의 놀이 예술이다.

     

    4-6-2. 사랑의 유희

    네덜란드어의 놀이라는 말은 개들이 짝짓기 할 때 교미하는 것을 말한다. 그 정도로 놀이는 섹스어필 한 것이다. 섹스어필하지 않으면 놀이가 되지 않는 다..

    스웨덴어로 '레쉬' 는 호색 이란 의미의 놀이다. 그러나 성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의 행위를 위한 준비와 성교 이전까지의 도입부가 놀이의 영역이다. 바이텐 비크 교수는 모든 놀이 고유의 특징은 섹스하기 전까지의 감정과 액팅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여자들이 남자들을 꼬실 때 일부러 튕기고 은근히 치장하는 것, 경악하는 것, 과장하는 것 이런 것이 다 놀이로서 사랑의 유희다. 구애과정이야 말로 아름다운 놀이다.

     

    4-6-3. 예절놀이와 험담놀이

    포틀래치는 호이징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놀이의 양식이다.

    고대에서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이유는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축제 때 흥청망청 쓴다. 또 하나는 한 추장이 구리로 만든 냄비를 태워버리고 모포뭉치를 불 태우고 카누를 때려 부순다. 그리고 상대방은 최소한 그것과 비슷하거나 그것 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을 파괴할 의무가 있고 그렇게 부수는 냄비 파편을 경쟁자에게 도전적으로 보내거나 그 파편들을 명예의 표시로 전시한다. 그것이 '커투' 족의 특징이다. 그리고 만일 한 추장이 자신의 경쟁자를 모욕을 주고 싶으면 자신의 종들을 죽였다. 그러면 상대방은 복수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더 많은 수의 종들을 죽였다. 이것이 원래 포틀래치이다. 싸움을 하지 않고 화를 남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린다.

    '쿨라' 라는 것은 증여의식. 예를 들자면 자기 마누라를 손님에게 받치는 것. 이것은 내가 얼마나 여유있는 인간인가를 주면서 자기의 명예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포틀래치는 누가 하느냐? 부르주아. 자기 것을 주면서, 아량을 베풀면서 명예를 높이는 것이다. 포틀래치의 정 반대는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 줄게 없는 사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하는 놀이가 바로 험담시학이다. 귀족은 힘, 기술, 지혜, 재산, 용기, 관용 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덕을 포틀래치를 통해 증명하고 자신이 상대방을 능가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고 자화자찬 하는 행위가 포틀래치이다. 뽐 냄. 무대 위에서 귀족들은 야량을 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허풍, 조롱, 험담, 입씨름, 허세 이런 것들로 간다. 포틀래치를 실행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지껄임이다.

     

    중국에서 예절 시학이 있다. 귀족들은 예절시학으로 놀이를 즐겼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욕설과 비난의 시학을 했다.

     

    옛날부터 양반은 남을 욕하지 않는다고 하지. 그리스 시대부터 자화자찬으로 우월성(포틀래치) 을 과시할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욕설과 조롱을 격렬히 퍼부었고 그것이 풍자가 되었다.

     

     

     

    4-6-4. 풍자

    풍자는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시작되었다.

    대중앞에서 풍자시와 비방시는 가장 중요한 조롱의 양식이었다. 아르킬로프스는 비방의 날카로운 풍자를 구사했고, 이것이 뒤에 대중적 비판의 수단으로 발전했다. 디오니소스제전에서 노래도 욕으로 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욕하는 것 이것이 놀이가 되었다.

     

    4-6-5. 재판

     

    재판이야 말로 가장 드라마틱한 가장 잘 정돈된 연극적 놀이다.

    재판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곳에서 단일한 사건을 다룬다. 판사들은 복장을 하고 관, 모자를 써서 일상에서 탈피한 모습을 드러낸다.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금역이란 점에서도 극적 울타리는 만들어진다. 거기에서 말놀이가 전개된다. 험담과 변론이다.

    재판관은 법복과 모자를 쓰고 탈일상적 존재가 된다.

    재판극에는 신의 심판, 운명적인 심판도 놀이로 들어간다.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인 운명의 재판극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우리는 어디로 넘어갈지 모르는 불안한 저울질을 본다. 재판에서의 험담시학이 발전 된 것이 소송 극이고, 세계 최고의 소송 극은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 자신을 존귀하게 하는 것, 험담, 재판, 투기 이런 것들이 전부 연기의 양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4-6-6 최초의 배우는 시인이었다

     

    시는 정신의 놀이터다. 시는 철학적 사랑의 꿈이다. 그래서 최초의 배우는 시인이다.

    서구 최초의 배우 바테스는 음유시인 이자 예언시인이다. 고대에서 시는 제의, 오락, 기예, 수수께끼, 신조, 마술, 점, 예언, 경기까지 주재한다. 예를 들어, 늙은 주술사는 노래를 불러 상대를 땅 속으로 늪 속으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노래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험담, 허세, 허풍, 힘겨루기, 우주론적 지식의 경쟁, 신부를 얻기 위한 경기, 인내력 시험, 신탁 등을 바테스는 수행한다. 모두 시적 환상 속에서 통합했다. 지금 시인과는 전혀 다르다. 시인이 바로 배우고 연출이자 작가였다.

     

    바테스는 1. 악마에 홀린 사람

    2. 신들린 사람 -샤만

    3. 헛소리하는 사람으로 불리웠다.

     

    바테스는 민중의 교육자이며 상담자였다. 여기서 고대 배우는 탄생한다.

    노르웨이에서는 '툴러', 앵글로색슨족에서는 '틸레', 현대 독일에서는 '쿨트레드너'라는 말을 사용한다. 제사장인데 이 사람들은 기도문을 낭송하기도 하고 성극의 연기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사제가 되기도 하고 개인들에게는 주술가 역할을 했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다채로운 기예를 지닌 바테스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무당이었다.

    바테스는 궁중을 들락거리는 시인 겸 연설가, 혹은 익살 광대의 역할에 불과 했으나 많은 역할을 했다. 종교적 내용을 낭송하고 굿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모든 신화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시적 전설을 알고 있다. 민족의 전설과 역사를 알고 있고 모든 축제에서 대변인 노릇을 하며 영웅들과 기타 훌륭한 인물들의 가계를 암송할 수 있는 존재다. 그의 특별한 직책은 웅변 시합, 지혜시합의 심판을 보는 것이다.

     

    바테스는 중세기로 가면서 음유시인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음유시인은 바테스가 타락한 형태이다. 중세기가 되면서 자유로운 인간들(음유시인)이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대중축제에서 대변인 및 낭독자였고 공식적인 자랑꾼, 허풍쟁이 배우였다. 이런 음유시인들은 놀이는 분명 신성했지만, 그 방법은 쾌활하고 탐닉하고 환락하고 흥겹게 진행했다. 이 형태는 창가, 송시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황홀경속에 창조되었다. 이들이 등장하는 시가와 장소는 계절제, 특히 봄의 제전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무용조곡 「봄의 제전」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바테스의 존재를 현대음악의 구조 속에 담았다.

     

    놀이는 시의 형태로 드러났다. 시는 젊은 남녀들이 서로 희롱하고 이끌리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유서 깊은 사랑의 유희다 세익스피어가 이 유서 깊은 놀이를 극화한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다. 이 사랑의 유희는 연쇄적 운율시의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한 음절을 읊으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다른 음절을 읊는 것이다. 일본 '하이꾸'가 그렇고, 고려시대의 별곡체가 그렇다. 서로 주고받는 담시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여기서 바테스들은 그냥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다. 배우는 시인적 기질을 갖고 있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민족의 역사나 전통을 전해주는 이야기꾼이 된다.

    한민족 최초의 서사시는 바리데기 설화인데, 이 설화가 굿 사설의 형태로 이어져 오는 것도 이런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리데기 설화의 발생은 고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훌륭한 음유시인 바테스의 존재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

     

    또 하나 음유시인이 했던 가장 흥미로운 것이 사랑의 법정놀이, 즉 사교놀이다.

    이런 놀이 시학은 중국의 안남, 이슬람, 에스키모, 프랑스 랑그도크 지방 등 다양한 문화형태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시적인 재판놀이이다. 사랑의 문제에 대해서 놀이 형식으로 된 논쟁적이고 궤변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먼저 비난, 대화, 교창(합창), 문답놀이 식으로 진행되면서 사랑을 걸고 소송을 벌인다. 자유, 성적 충동, 사교적인 교감, 명예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된다.

    사랑의 법정놀이는 우리 신화에서 가장 많이 존재한다. 처용가, 서동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가 다 사랑의 법정놀이 형태다. ,

    호이징어는「호모 루덴스 」에서, 극동지방의 시는 '마법을 풀기 위해서 시를 지어라'라는 과업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신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도솔가'다. 호이징어가 한국의 설화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엄청난 지적 탐험을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시인이자 배우인 바테스는 신화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바테스들이 연기하는 신화는 점점 인간적이 되어 갔고, 그래서 그리스의 신들은 행동이 무질서 하고 몰취미적이고 천박하기 까지하다. 신화가 문학으로 연극으로 편집되면서 신들도 인간적이 되었다. 그래도 플라톤은 신화를 고결한 영혼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 인간적인 사랑으로 보았다. 결국 시에서 다루는 것은 사랑과 투쟁이었다. 이 사랑과 투쟁을 운율과 조화미에 종속 시켰다.

     

    4-6-7.놀이로서의 희곡

     

    희곡은 행위, 포이에시스로 번역된다. 시라고 하지 않고 창작/행위라고 한다.

    서사시는 축제 현장에서 낭송되다가 읽기위한 것으로 제한되면서 놀이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소설이 된다.

    서정시는 음악과 관계가 끊기면서 놀이적 기능에서 밀려난다.

    극시만이 반드시 배우의 연기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영원히 놀이와 연관되어 진다.

    극시인이야 말로 광활한 놀이의 계승자였고, 연극이야 말로 유일한 놀이 전통의 계승자였다. 연극은 연기로 행해진다. 그래서 영원히 놀이와 관련되고, 놀이의 중심은 배우다.

    그래서 연극은 놀이, 영어로는 play가 되었다.

     

    비극이나 희극 모두 놀이에서 나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테네의 희극은 디오디소스 축제에서 방탕한 축제 행렬 (코모스)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시기였다.

    '파라바시스' 라는 합창단이 여러 줄로 나뉘어 청중을 마주보며 조롱, 비웃음을 던지면서 그 희생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연기자들은 남근형상의 의상이나 분장 혹은 짐승의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별 새 개구리 등 인간을 동물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원래 우화적인 형상화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을 앞에 두고 그들을 비판하고 실랄한 조소를 던지는 것은 고대축제의 험담, 허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4-6-8 비극의 기원

    원래 인간 운명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고민하기 위한 무대문학이 아니고, 원래 비극 또한 놀이 의식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놀이 의식으로 먼저 존재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화의 주제를 실제로 시행해 본 것이다. 플롯과 함께 연속적인 사건을 무언과 대화의 형식을 통해서 실현했다. 이런 신화놀이를 문답형식의 작품으로 쓴 것이다.

    연극 역시 국가가 이런 축제를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관리하고 관여했다. 월계관을 놓고 상을 주었고 이류 삼류 시인들이 많았다. 관객들의 비평은 날카로웠고 대중은 비극이 내포하고 있는 교훈적 암시를 이해했고 마치 축구경기의 관중처럼 긴장을 나누어 가졌다.

    문체와 표현의 오묘함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시민들은 새로운 합창단을 기다렸고 심지어 합창단이 되기 위해서 일 년 내내 연습했다.

    연극의 실제 공연상황도 굉장히 투기적이고 경쟁적이었다. 그 투기적인 호기심은 정치적 논쟁까지 번졌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관점을 공격하는 것인데, 당시 아리스토파네스가 최고의 철학자와 작가인 소크라테스 유리피데스를 조롱허기도 했다. 연극이 공연되는 분위기는 디오니소스적 황홀경과 열광적인 환희의 분위기였다. 연기자는 가면을 씀으로써 일상생활에서 빠져나오고 다른 자아를 묘사한다기 보다는 스스로가 다른 자아의 화신이 되고 현실화 체험에 이르게 되었다. 관객은 연기자와 더불어 그런 정서적 일체감에 휩쓸려 갔다.

    최고의 작가 에스킬로스이다. 그의 과장, 격렬한 언어는 엄청난 상상력 놀이는 성스러운 놀이와 부합된다. 투기장을 방불케 하는 최고의 지적 정서적 놀이형태가 연극이었다. 이러한 놀이는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구분이 아예 없었다.

    에스킬로스의 경우 가장 엄숙한 진지함의 체험이 놀이의 형태로 성취되었다.

    유리피데스는 심오한 진지함 경박스러움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진실한 시인이란 '비극적이고 희극적이고 인간의 삶 전체는 희극과 비극이 혼합된 것으로 느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실체였다

     

    연극 행위라는 것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오래되고 광활하고 강력한 놀이였던가?

     

    4-6-9. 소피스트의 궤변법이 희극이 되었다

     

    소피스트는 예언자, 무당 요술사, 시인들의 모습에서 이어받은 입장이다. 바로 앞에서 말한 바테스의 역할을 한다. 이들은 놀라운 지식과 신비한 기술을 가지고 공개시학에서 경쟁에서 굴복시켰다. 철저한 투기다. 이것은 고대사회의 사회적 놀이인데 명예를 과시하려는 투기의 욕구이다.

    소피스트의 모습은 동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소피스트의 모습은 브라만의 인도에서 수수께끼를 푸는 승려와 닮은 데가 있다. 수수께끼 시합에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자의 목을 베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일정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고 돈을 받았다.

    고르기아스는 세치 혀로 많은 돈을 벌어 금으로 자기상을 만들어 신전에 바쳤다. 유명한 소피스트가 한 도시를 방문하면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금의 가수 이상이다. 그것은 운동경기의 영웅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직업적인 스포츠 맨과 맞먹는 직업이었다. 그 행위는 상대를 논쟁의 올가미에 넣거나 넉아웃 펀치를 먹이는 등 순수한 말놀이였고 올바른 대답이 나올 수 없는 비꼬인 질문을 던졌다.

    프라타고라스는 소피스트의 궤변을 고대의 기술이라 했다. 때로는 지혜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장난기 넘치는 헛소리가 되기는 하는 재치시합이었다. 놀이와 진지함 사이의 구분이 불가능해졌다. 소피스트에게는 모든 속성이 드러난다. 소피스트는 절대 불성실한 모습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목민의 방랑성과 기생성을 타고난 권리이로 갖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익살, 파라독스, 아이러니, 문체, 수사 모두 소피스트에서 나오는 것이다. 소피스트의 전신은 바테스이다.

    궤변법은 놀이의 원형인 수수께끼에서 나온다. 게임 혹은 정신의 놀이로서 트릭이 담긴 질문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이러한 방법은 그리스인들의 대화법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연쇄, 중립, 부정 기만, 반증, 논법등이 있다.

    수수께끼이론 이라는 책이 있다. 보상 벌금 등을 거는 농담 질문 놀이도 있다. 이것을 그리포스 라고 한다. 대답이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을 질문 한다. 바로 청기 백기 놀이이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나는 인간이다. 그래서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이런 식의 궤변이다. 여기에 대해서 디오기네스는 "당신의 말이 진실이기를 바란다면 네 자신에서 출발하라" 고 말했다. 질문들도 장식되었는데 소피스트의 화려한 장광설 이것이 세익스피어로 넘어갔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론도 연극이 되었다.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만든 것이다. 궤변은 보통의 수수께끼 우주론적 신비 양쪽 모두에 가깝다.

    파리메에두우스는 존재에 대한 질문도 "매우 힘든 놀이인데요" 하고 말한다. 존재까지도 진지한 놀이로 받아들였다.

    최초의 대화편은 엘리아의 제논이 썼다.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계산된 기술, 이것은 바로 드라마에 적용된다. 플라톤의 대화편도 사실은 소피스트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유머로 기술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신들은 농담을 좋아한다. 신들의 이야기도 농담으로 표현해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철학적 몰두를 유쾌한 오락으로 여기고 있다. 철학의 출발은 수수께끼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수수께끼는 축제에 따르는 여흥이었다. 우파니샤드도 그렇다. 순수철학을 희생하면서 수사학이 발전시켰다. 때로는 어린애 같은 말장난이 그 심오성을 잃기도 한다. 고르기아스가 그런 경우이다. 고르기아스 스스로는 놀이였다고 말한다. 소피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논리는 모순, 이중논법, 이중적 추론이다. 색증시공, 공증시색 같은 것. 모든 판단을 영원한 모호로 암시한다. 우리는 진실을 모른다. 우리는 단지 말장난 할 뿐이다 접근할 뿐이다. 진실로 모르는데 말장난하면서 다가간다. 형식이 좋을 때 합법적이 된다.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말이 설득력을 얻을 때 소피스트가 부도덕한 목표를 추구할 때는 사기꾼이 된다.

    117-18세기 셰익스피어에서 라신느까지 세속연극의 시대가 소피스트의 천국이었다. 음악과 가발이 같이 놀고, 경박한 합리주의, 로코코의 우아함, 바로크의 과장, 살롱의 매력을 합쳐진 연극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위대한 소피스트의 전통은 니체가 물려 받은 듯 하다. 니체는 현대 철학을 놀이로 상승시킨 작가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고대 소피스트의 궤변을 현대의 고전으로 계승해 낸 위대함을 본다. 니체는 로고스적 진지함이 지배하는 세계에 파토스적 놀이가 충전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진지한 놀이를 완성한 것이다.

     

     

     

    2008. 12. 19 오후 2시 밀양연극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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