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 ▶ 3장. 상상력
  • 이윤택의 연기론_3


    영혼과 물질



    이윤택(연출가, 영산대 교수)



     


    3장.상상력

    3-1 나무의 상상력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영감에서 직관에 이르는 인간의 정신 영역이다.

    영감에서 직관에 이르는 정신 영역은 전혀 체험하지 않았던 것, 결코 현실적이지 않은 것, 논리를 초월하는 세계이다.

    이런 영감에서 직관에 이르는 세계는 사실 우리가 자주 만나는 세계이기도 하다.

    꿈 속에서 낯선 길을 헤맨다든지, 처음 본 사람을 만난다든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귀신과 대면하기도 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신영역을 뛰어넘는 초과잉 초현실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원형적 의미의 상상력이고, 시적 초자아(詩的 超自我) 상태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적 초자아(詩的 超自我) 상태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영역으로서 동양정신에서는 존재의 출발점이 된다.

    天上天下唯我獨尊

    나는 하늘과 땅 위에 홀로 존재한다.

    나란 존재는 하늘아래 있다. 그러므로 하늘이란 공간이 제공하는 자연과 우주의 광활한 공간이 인간에게 경외감과 신비스런 느낌으로 열린다. 이는 분명 현실 저 너머의 세계며 인간의 지각 능력 밖에 존재하는 신성이며 무한대의 상상력이다. 인간의 원형적인 상상력인 광명신화(光名神話)의 세계는 하늘에서 온다. 그래서 하느님, 혹은 하나님의 신이 자리 잡는다.

    나는 땅 위에 있다. 땅의 상상력은 죽음과 재생의 상상력을 제공한다. 인간은 죽으면 땅에 묻히고, 다시 생명의 싹은 움튼다. 땅 밑의 세계는 종종 지옥불의 세계로 인용되고, 인간의 욕망 불안 공포가 마그마의 형태로 흐르면서 어둠의 상상력으로 자리 잡는다.

    나는 그 사이에 있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석가가 발견한 상상력의 세계는 자연친화적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무수한 잔가지를 향하는 보리수 나무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재양식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무의 상상력’ ‘식물적 상상력’으로 불리운다.

    여기서 우리는 상상력이 어디서 솟아나는 인간의 정신작용인가를 감지할 수 있다.

    지상(현실) 저 너머의 세계-무한대의 자연과 우주 공간이 상상공간이다.

    그리고 지상(현실)의 속-보이지 않는 엄청난 마그마가 흐르는 지하 공간이 상상력을 싹틔우 는 밭인 것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숨 쉬는 나무다.


    석가의 깨달음으로 시작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규명은 이렇게
    영감과 직관의 초자아적 언어처럼 느껴지지만, 또한 깨달음이란 측면에서 지각적이다. 동양정신은 감각과 지각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융합된 일원론의 세계다.

    곧 공이오 공이 곧 물질이니

    色卽是空 空卽是色

    느낌과 생각과 행위와 의식도 이와 같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하늘, 땅, 인간의 관계를 서로 소통하는 유기체로 인식하는 동양의 형이상학metaphysics은 느낌과 생각, 행위와 의식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상호 열린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자극을 주는 유기체로 보았다. 상상력은 바로 인간과 자연 우주 공간 사이의 교감에서 걸러지는 무정형의 영혼으로 보았다.

     

    3-2. 상상력은 다른 달을 창조할 수 있다

    서구의 상상력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두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첫째,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세계, 즉 지각에도 없고 기억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이런 경우 상상력은 자연계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된다. 19세기 낭만주의가 유행할 때는 예술창작에 있어 이성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오로지 상상만이 본질적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술이 현실의 단순한 모방보다는 새로운 표상을 제시하는 영혼의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상상력이 갖는 새로운 창조의 힘에 보다 큰 의미를 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상력은 영감(靈感)에서 직관에 이르는 정신영역이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우리의 체험 포함된 기존인식과 사물에 대한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상상력도 체험의 잡다한 요소들(감각·정서·의미 등)을 융합하게 하고, 생기를 주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칸트는 감각적 지각의 자료들을 사유 속에서 능동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규정했다. 상상력은 감각과 오성(悟性)을 종합하여 현실적 인식을 성립시키며, 감각을 통해 현실에서 체험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을 연결시켜주는 의식적 장치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상상력이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조직화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론자인 베이컨은 체험과 기억의 재생을 상상력의 중요한 변수로 보았다. 그러나 기억은 예술이 아니다.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성이고 사유고 해석이다. 그래서 사유는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것이 체험과 사유의 변증법적 재생산 과정이다.

    베이컨의 경험주의는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 이후 로고스(이성) 중심적 사고에 상상력의 잣대를 들이댄 최초의 상상력주의자로 일컬어 진다.

    고대 그리스 시대 플라톤이 인간의 의식 가운데 합리적 사고, 이성적 인식을 강조한 이후로 르네상스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에는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개념이 확립되어 예술에 있어서 상상력의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감과 직관에 의존하는 가변적 상상력의 세계를 기만이라고 치부하고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의 로고스 중심 이데아론은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 받았었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의 방탕한 축제 행렬에서 비롯된 그리스 희극은 황홀경과 열광적인 환희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연기자는 가면을 쓰면서 일상으로 부터 이탈하고 다른 자아로 변신한다. 관객 또한 일상에서 해방된 분위기로 흽쓸려 간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감각적 세계 속에 교묘하게 조롱과 비웃음의 관점을 개입 시킨다. 에스킬루스의 과장되고 격렬한 극 언어와 엄청난 놀이행위는 진지함과 경박함의 이분법을 뛰어 넘는 극적 상상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그의 저서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이론을 통해 어둠과 광기의 비극적 상상력을 부분적으로 옹호 한다. 어둠 욕망 광기로 얼룩진 파토스적 비극의 세계를 실제 극언어로 부딪치면서 일종의 시뮬레이션 작용을 통해 인간 정신이 정화될 수 있다는 상상력 옹호론을 펼친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가 확립되고 경험주의적 사고를 거치면서 비로소 이성적 인식과 다른 직관이나 상상력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의 P. 시드니는 신(神)은 무(無)의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했고 시인도 세상에 없는 형상들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이는 시인이 자연을 모방한다는 개념을 벗어나 시인의 자발적인 창조적 동인(動因)을 인정한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견해였다.

    여기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F. 베이컨은 철학이 이성적인 지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T. 홉스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무수한 감각적 체험의 잔재를 가지고 새로운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말했다.

    18세기초 영국의 J. 애디슨은 상상의 기능을 현실에서 체험하는 현상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보다 새롭게 꾸며 완전하게 할 수 있는 능력으로 파악했다. 체험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을 때 그것이 이미지로 나타나며,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도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체험의 감각들을 종합하여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주의에 입각한 상상력의 인식은 신고전주의가 가지고 있던 이성 중심의 문학관을 거부하고, 예술이 과학과 다른 분명한 의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에 입각한 상상력의 개념은 예술가의 인식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험주의 철학자들의 관점은 상상력이 어디까지나 이전의 체험을 벗어나는 개념은 아니었고, 상상력을 이성과 동일한 차원에서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개념은 낭만주의시대에 이르러 부정되고 발전되었다. 낭만주의는 문학에 있어 이성의 지배를 거부하고 문학의 개인성, 주관성을 강조하고 감성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즉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주관적 표현이라고 보고, 개인의 독특한 감정과 표현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인의 주관적 표현은 구체적으로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상상력을 이성에 대치되는 능력, 또는 이성을 초월하여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능력으로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해 이루지 못했던 실재의 발견을 상상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의 사물은 그냥 의미없는 것들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의 상징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실재의 발견은 이성의 힘보다도 직관과 영감을 통한 상상으로 가능한 것이다.

    낭만주의를 통해 발전된 상상력의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영미계통의 형식주의 이론 및 심리학과 결합되었다. 초현실주의의 예술관에 중심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S.T. 콜리지와 I.R. 리처즈의 상상력에 대한 이론을 거쳐 20세기 형식주의에서는 상상력을 시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사유의 형상적 능력으로 보았다. 복잡하고 혼란된 이미지를 일치시키거나 균형·조화시켜 시에서 이미지를 조화롭게 하는 1차적 원동력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한편 S.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감을 얻은 초현실주의는 상상력을 심리현상의 하나로 보고 무의식의 발현을 시에서의 상상력의 기능과 연관시켰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의식의 표출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인의 자유로운 영감의 발현과 차이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예술에서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코울리지는 상상력을 Landing Space(한 계단씩 올라가다가 쉬는 지점, 그 지점에서 새로운 시야가 트이는 상상력의 지평이 된다.)로 표현하면서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코울리지는 아이들의 놀이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행위 혹은 기호를 상상력의 출발로 보았다. 아이들이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기차놀이를 할 때 드러나는, 구체적인 것(기차)을 추상적 혹은 기호적으로 표현(칙칙폭폭) 해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장인적 혹은 물질적 상상으로 재현적 상상력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상상하며 질그릇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즉 추상적인 것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구체적(토기)로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생산적 상상력으로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 해체는 기존 과거의 기억과 경험이다. 재구성은 뉴 비전(new-vision), 즉 새로운 관점이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해체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힘이입어 상상력의 창조적 역동성에 대한 이론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바슐라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정신분석의 억압의 의식화를 통한 '치료'가 아니라, 억압을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로 '승화'시킴으로써 그 당사자가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었다.

    왜 글을 쓸려고 하는가? 왜 배우가 되려고 하는가? 바슐라르에 따르면 결핍되어 있고, 결핍에 따른 심리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핍과 억압의 삶, 바꾸어 말하면 자유롭지 못한 식민의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내재된 심리적 억압에 대한 관찰은 상당 부분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들의 행위와 다른 상상력의 역할을 바술라르는 제안한다.

    심리 치료사들이 환자들의 존재의 무거움을 직접 풀어내거나 그 사람의 불행을 파헤쳐 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가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물어보고 그것을 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불행을 건드리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게 해라.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말한다

    상상력은 달을 해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상상력은 '다른 달'을 창조할 수 있다.

    바슐라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물질과 외형이다. 대상을 형태로 보지말고 무정형의 물질로 보라. 그리고 대상이 원하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라는 것이다. 예술 행위라는 것은 결핍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행복해진다. 이것이 바슐라르의 역동적 상상력이다. 신이 죽었다고 하지 말고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가 그 빈자리를 채우라는 것이다. 상상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의 절정의 상상력은 공기의 상상력이다. 무거운 존재일수록 가벼워야 한다. 상상력은 공기에 있다. 그것의 유형은 숨쉬기이고 무형은 동양의 기氣와 통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바슐라르는 이 공기의 상상력을 지극히 동양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바슐라르에게 상상력의 절정은 열반이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죽음 보다 더 치명적인 결핍과 억압은 없다. 죽음의 상상력을 열반이란 자기 해방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바슐라르에 의해 동서양의 상상력은 일치점에 도달한다.

    흄은 “모든 지식은 감각을 통해 생겨난다. 모든 관념들은 감각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순수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상상력주의론에 도달한다.

    분석철학자 비트켄슈타인 또한 “형이상학은 언어가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영역이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급기야 롤랑 바르트는 “상상력이 신의 역할을 대리한다." 단언하면서 현대 예술에서 상상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신의 역할로 대체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예술이 궁극적으로 가는 것은 행복론이며, 이것이 현대 예술론이 세기말적 허무와 비관적 세계관을 걷어내고 기야할 새로운 희망의 지평인 것이다. 기억은 예술이 아니다.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성이고,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는 삶의식이고, 이러한 삶의 의지가 직관과 영감의 힘을 아 창조해 내는 것이 상상력의 세계인 것이다.

     

    3-3. 상상력과 배우

    왜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인가? 이제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연극은 상상력의 과잉이 빚어내는 삶의 의식이고 행위다.

    왜 배우를 꿈꾸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막연하거나 사소한 이유를 대면서 얼버 무리기 일쑤다. 그러나 그들이 배우를 꿈꾸는 이유를 종합해 보면,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이고, '이대로'라는 의미는 이성과 현실이 지배하는 제도적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삶은 현실적 삶의 껍질에 갇혀 있지만, 그 껍질을 깨고 분출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일상적이고 제도적인 시간에서 해방되고 싶은 충동질이 곧 상상력의 분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적이고 일상적인 자아에서 영감과 직관의 힘으로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는 초자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결국 공기처럼 무정형이다. 이 무정형의 상상력에 체험, 기억, 관념, 현실 등이 뒤섞이면서 구체화 된다. 이것이 예술이고 연극이다. 그래서 연극은 과거의 기억과 체험을 상상력이란 창조적 과정을 거쳐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 그 바뀌는 과정에서 변수로 등장하는 것이 결핍이다.

    결핍이 드라마의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억압된 것, 죄의식, 심리적 트라우마 등 과거의 결핍이 극적 단서로 제시되고, 드라마란 구조가 지니는 미적 완결성을 통해 행복에 도달하던지, 아니면 정화된 비극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이란 운명적, 혹은 제도적 힘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만, 제 손으로 자기 눈을 찌르면서 죄의식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모습으로 승화된다.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 삶의 정당성이며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오이디푸스는 가르쳐 준다.

    배우는 결국 이런 결핍에서 승화의 단계로 나아가려는 초자아적 존재이다. 그들은 결코 범속한 인간이 아니며, 제도적 삶에서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성 밖의 사람들 (아웃 사이더)이며, 결국 자유로운 삶을 위한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제도적 삶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억눌린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므로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핍을 채워준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거나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승화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고 존재 이유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심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배우에게 필요한 영감, 혹은 직관이란 무엇인가? 실제 배우가 무대에서 상상력이 발현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상상력의 발현은 어떤 구체적 대상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연극 「울고 있는 저 여자」[신인 극작가 김현영이 쓴 소극장 연극. 2004년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수상작이다. 2005년 7월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그해 10월 서울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남미정 연출/김소희 이승헌 출연)]

    에서 ‘저 여자’가 내 영감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저 여자는 왜 지하철에서 울고 있을까?’ 란 의문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여자’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인이다. 그러나 ‘울고 있는 저 여자’가 나의 영감, 혹은 직관을 자극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타자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곧 영감이다. 현대 예술에서는 영감을 슬픈 나의 내면이라 하는데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슬픈 나의 내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 '슬픈 나'인가?

    인간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생명을 다룬다. 유한한 생명 속에서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 절대 고독 때문이다. 외로움을 극복하기위해 연극을 한다. 그리고, 결핍 때문이다. 왜 예술을 하는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연극을 통해서 아름다워진다. 결핍된 내면을 미적 완결체로 채워 나가는 것이 상상력의 힘이다.

    상상력은 논리와 현실성을 초월하는 직관의 힘을 빌린다. 「울고 있는 저 여자」에서 여자는 문득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말한다.

    “사랑해”

    이 충동적인 언어는 전혀 현실적이지도 해석적이지도 않다.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입장은 먼저 "미친거 아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반응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저 여자’의 슬픈 내면을 직관으로, 혹은 영감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영혼에게는 자극을 준다. 그 말은 사실 자신의 슬픈 내면이 갈구하던 것이었으므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억눌려 있던 그 어떤 충동이 불쑥 솟아 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살아 있는 자의 연민이라고 부를 수 있고, 배우는 바로 이 삶의 연민을 타자와 공유하는 이타적 존재이다.

    상상력의 출발은 충동이다.

    1차적인 상상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충동, 혹은 광기이다. 한 눈에 반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랑이다. 왜 한눈에 반할까? 타인에게서 자신의 슬픈 내면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서로 알아가며 조건을 따지는 것은 현상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 상호 이해의 과정이다. 연극은 상호 이해의 과정이라기 보다 증명할 수 없는 충동과 광기를 다룬다. 이것이 낭만주의의 신호탄이 되었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과 죽음의 드라마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연극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충동적인 사랑은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재창조된다. 그 이유는 다양한 해석과 관점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이 되비추는 삶의 거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여기서 종교적 인종적 사회적 갈등과 집단무의식이 드러내는 폭력성과 희생의 의미를 읽어낸다. 이러한 재창조의 상상력은 인간의 오성적 작용이며 주체적인 해석과 관점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2차적 상상력이고 연극이 지니는 종합성이다.

    배우의 상상력은 충동과 자극의 에너지에서 이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오성적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배우의 상상력은 개인적 내면이라기 보다 집단무의식의 전형이며, 타자와 세계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껴안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이 배우의 길이다. (2008.12.05밀양연극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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