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完)이윤택 연기론_영혼과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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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과 물질



    이윤택(연출가, 영산대 교수)
     

    2장. 연기의 원리

    2-1. 한국연극의 원형은 굿

    -고대무당에게서 배우의 원형을 발견해내다

    제가 했던 최초의 연극작업은 굿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연극의 원형은 굿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25년 동안 연극작업을 하면서 굿이 한국연극의 원형이라는 믿음은 더욱 분명해졌고, 이제 굿의 원리를 연극적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제가 발표하는 내용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

    굿은 하늘이라고 하는 우주공간과 땅이라고 하는 자연 공간, 즉 우주와 자연 사이에 놓여있는 인간의 제의적 행위입니다. 무당은 굿을 수행하는 행위자입니다.

    무당은 일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무당의 삶입니다. 무당들에게는 한국에서 소도(sodo)라고 하는 독자적인 주거지역이 따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솟대라고 하는 높은 장대가 걸리면서 일상과 다른 배타적 영역이 정해졌고, 그 배타적 영역에서 굿을 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소도는 굿을 행하는 공간으로서 바로 한국의 원형적인 극장이었습니다.

    국가의 현실적인 권력도 이 지역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민중들은 어느 누구나 일상의 영역에서 소도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희망을 기원하고, 삷의 고통을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당들은 무엇인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의식을 베풉니다. 그 의식이 바로 굿의식입니다.

    그래서 굿의식이라는 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즉 일상에서 꿈꾸는 희망을 하늘과 땅에 빌고, 일상에서 받은 아픔과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무당들은 일상밖에 존재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독특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굿의식이 호이징어가 말하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아르또가 꿈꾸었던 제의극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아르또는 ‘극장은 교회고 배우는 사제’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국 전통의식으로서의 굿은 타락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치유의 의식이었고, 무당은 의식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신비롭고 다채로운 굿양식을 표현해 내는 퍼포먼서(행위자)였습니다. .


    2-1-2. 일상과의 거리 두기

    “배우는 일상인이 아니다.“ 라는 말은 한자문화권에서 ” 俳優-人, 非/ 인간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은 일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에게는 일상과 엄격한 거리두기를 요구합니다.

    연희단거리패의 배우들이 특정한 공간, 즉 밀양연극촌, 도요창작스튜디오, 혹은 서울에서도 독립적인 숙소 생활을 하는 것은 일상적 삶의 습성에서 자신을 떼어내려는 의지에 다름 아닙니다,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공동생활을 합니다. 이는 절에서 생활하는 승려나 사제관에 사는 사제들과 공통된 부분입니다. 일상적인 욕망을 가진 자들은 연희단거리패 연극을 하기 힘듭니다. 영화배우나 TV 탈렌트를 꿈꾸는 배우들은 연희단거리패 배우로 적합지 않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이루기 전에 자신이 맡아야할 연극적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대 무당이 수행했던 영혼 구제 현실 정화의 신성한 의무와 일치합니다.



     

     

    2-1-3.거리와 공간에 대한 인식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과의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연희단거리패는 분명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숨입니다.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은 숨쉬기를 통해서 일상적인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직립 보행 이전의 상태로 숨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단전 호흡, 굴신 호흡, 혹은 전신 호흡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숨의 변화는 단순한 몸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숨을 자신의 몸 속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자리잡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숨을 바꾸어 자신의 몸 속에 머물게 하면 일상과 거리가 생깁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주 분명하게 “예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숨을 바꾸어 몸 속에 머물게 하면,

    자신의 내면(內面)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현상적 모습의 자아와 내면에서 눈뜨는 자아의 거리를 인식하게 됩니다.

    즉 현존하는 나와 내적 존재로서 나의 거리를 인식하는 것,

    여기서 연희단거리패의 연기 메소드는 출발합니다.

     

    일상적인 삶은 물리적인 시간의 순행에 따라 진행되는 수평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문득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인식하는 순간,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정지되고, 하늘 아래 땅 위에 홀로 수직상승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석가는 이를 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자신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자신의 숨에 따라 세상은 보이고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시간의 조종자가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제1의 거리라고 명명합니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네 .나와 너는 우리란 한 호흡으로 소통할 수 있네. 그래서 나는 너고 너는 나며 나와 너는 우리다. 이것이 타자 지향성의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제2의 거리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한 호흡과 운율 위에서 춤출 때 상호 소통과 조화의 관계를 열어 나갈 수 있습니다. 연기 앙상블은 바로 이런 서로 다른 인간들이 한 호흡으로 만날 때 가능해 집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인식할 때 제3의 거리와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여기서 배우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세계 속에 던져진 객관적 상관물(Subject Matter)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 속에 던져진 피사체라는 것, 그만큼 실존적 주체이며 객관적 존재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연기(演技-보이는 기술)란 표현의 주체성과 객체성이 만나게 됩니다.

    나와 관객 사이에 제4의 거리가 설정됩니다. 무대를 제4의 벽이라고 명명했을 때, 배우와 관객은 직접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물고, 배우와 관객이 같이 숨쉬기를 시작할 때 극장은 그대로 한 호흡으로 일체감을 이루게 됩니다.

    숨을 통해 이 네 가지의 거리와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극장에서 배우들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러나 연극이 요구하는 거리와 공간은 극장 안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나와 현실과의 관계에서 제5의 거리가 설정됩니다. 연극은 현실(자연)을 되비추는 거울‘이라는 르네상스적 연극미학 이래 연극의 현실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브레히트가 배우들에게 매일 신문을 읽게하고 토론을 즐긴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연극은 현실을 반영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와 현실 사이에 제 5의 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제6의 거리는 나와 자연, 그리고 나와 우주 사이에서 형성되는 공간인식입니다. 일찍이 석가가 “나는 하늘 아래 땅 위에 홀로 존귀한 모습이다”(天上天下唯我獨尊) 했을 때 형성되는 광대무변의 거리와 공간인식. 한국 전통연희에서 배우를 광대(廣大)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배우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物我一如)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에서 노니는 인간. 한국 전통연희에서 광대의 몸 사위가 도약과 사방치기 움직임의 특성을 지니는 지니는 것도 이런 광대무변의 공간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번 뛰어 땅을 박차고 구름 저 너머를 보고, 사방으로 팔 다리를 휘둘러 하늘을 깨운다. 인간은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뻗친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자연과 우주와의 교감은 동서양을 통 털어 고대연극의 기준이었습니다. 태양과 별자리의 순행이 연극의 원리가 되었고, 신화가 창조되는 상상력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동양의 고대 철학자 장자(莊子)는 자연과 우주 속에서 노니는 인간의 모습을 소요유(逍遙遊)의 미학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갈등과 투쟁이 아닌,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동양연극의 사유공간이기도 합니다. ‘가무(歌舞)가 천하를 평정할 것이다’ 는 고대 중국의 미학은 첸 카이커 감독의 영화 <현위의 인생>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와 만날 때 제7의 거리가 형성됩니다. 이는 죽음의 세계, 동양에서는 구천,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연옥이라고 부르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결핍은 죽음에 대한 소멸공포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불안과 결핍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메우는 것, 이것이 고대 굿의 절대적 소명이었습니다. 산 자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위무하고, 소멸에 대한 결핍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 그리하여 열반(Nirbana)의 황홀경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굿의식은 불가시의 세계에 대한 인간적 도전과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인간의 주체적 선언은 롤랑 바르트에 이르러 “신의 역할을 상상력이 대신한다.”는 예술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상상력은 공기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보이지 않는 추상적 세계에서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을 열반:니르바나(Nirbana)로 설정했습니다. 현대연극이 풀어야 할 과제 또한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이 죽은 사회는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혼돈의 세계입니다. 이성과 논리가 현실성을 잃고, 잘 짜여진 그 어떠한 현실적 패러다임도 전혀 현실성이 없습니다. 지구 환경은 갈수록 파토스적 혼돈과 욕망이 들끓는 종말론적 세계로 곤두박질 칩니다. 불가시의 세계, 연옥과 같은 어둠의 공간에서 생산된 뱀 파이어 좀비류의 싸구려 호러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연극이 감당해야 할 절대적 명제는 무엇인가? 배우들은 이 엄청난 혼돈과 결핍 속에서 그 어떤 신성한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전망이 불투명한 야만적 세계 속에서도 신화의 힘과 상상력으로 삶의 정당성을 높이 세웠던 고대 무당들의 신성한 역할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삶에 대한 불안과 결핍을 메우기 위하여 굿은 존재했고, 굿의 신비스럽고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저항했습니다. 연옥의 악마와 싸우는 신부들에게 최고의 무기는 성경과 십자가였지요. 성경이 신성한 의식이라면 십자가는 악령을 퇴치하는 메타(Meta-)적 무기였습니다.

    앙토냉 아르토는 바로 이 불가시의 세계와 온몸으로 싸운 무당이었고 사제였습니다. 그의 무기는 논리와 이성이 아니었습니다. 광기와 욕망과 죽음의 공포와 함께 뒹굴었습니다. 피터브룩이 잘 짜여진 연극 만들기를 등지고 고행의 길을 떠난 이유, 그로토스키의 연극이 뉴욕에서 극장이 아니라 교회에서 첫 공연을 가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연극은 볼거리도 현실적 교양물도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연극은 불가시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결핍을 메우기 위한 상상력이었고, 불굴의 정신성을 동반한 저항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고대 굿의식과 양식은 바로 이 제7거리와 공간에 대한 문화적 산물입니다. 일본 전통극인 노 또한 죽은 자를 불러내는 굿의식과 양식입니다. 일본의 또 다른 행위예술인 부토는 아예 죽은 자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서 영혼의 안식을 구하려는 어둠의 미학입니다.

    나와 불가시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제7의 거리와 공간은 결국 내 속에 존재하는 욕망 광기 어둠 소멸 고독 등 무의식의 세계와 만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제7의 거리는 제1의 거리로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숨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교감하는 거리론 혹은 공간론입니다.

     

    2-1-4.말과 몸의 통합적 연

    어떻게 굿에서 연기적 원리와 스타일을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무당들이 지니는 행위의 특성은 신명이란 파토스적 에너지와 주술이란 운율의 힘입니다. 신명이란 특유의 한국어로서 일본어나 유럽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닙니다. 거칠게 말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폭발적인 감정과 충동이 솟구치면서 인간을 무한한 열정으로 휘몰아 가는 내적 에너지입니다. 아르토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에서는 광기(Maddness)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리 적절한 비유는 아닙니다. ‘죽음을 인식하면서 반동적으로 강렬하게 삶의 황홀경에 취하게 하는 에너지’ 가 신명입니다.

    신명의 에너지는 바로 폭포수 같은 주술적 운율감을 제공합니다. 주술성은 일단 반복적 숨의 에너지를 통해 몸과 말의 놀라운 운동성을 획득하게 하는 리듬감각입니다.

    주술은 일단 말로 이루어집니다. 주술적 언어는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소통의 도구가 아니고 의미전달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말 그 자체의 울림이 운동성을 지니면서 말이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고 춤이 되는 것이지요.

    말의 논리성을 파괴하고, 말로 이루어진 이성(logos0을 해체하는 것 입니다. 논리와 이성으로부터 해방된 언어, 이것이 주술입니다. 어떻게 이 주술적 화술을 구사 하는가? 역시 숨입니다. 숨으로 정신과 육체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느낌을 숨으로 녹이고 숨으로 녹아들어간 인간의 의식과 느낌은 온몸으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저는 “온몸으로 말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을 전달하는 것은 머리이거나 가슴이거나 입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말하는 것이죠. 머리칼에서 발바닥까지. 이것이 숨의 몸성 입니다.

    몸은 그냥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연극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다양한 표현 기재로 적용됩니다. 머리칼에서 발바닥까지, 손가락 끝까지, 눈알까지, 코끝까지, 명치, 단전, 골반, 관절 등 모든 몸의 부위에 이르기까지 전율처럼 흘러 들어가는 신명의 에너지를 느껴야 합니다. 이러한 신체에 대한 인식은 이미 메이홀드 그로토스키 등 현대연극을 이끈 연출가들 그리고 배우들에 의해 탐색되어오고 있었습니다. 연희단거리패 또한 한국연극의 원형인 굿에서 무당들이 보여준 다양한 신명과 주술성으로 표현되는 몸성을 독자적인 연기체계로 습득해오고 있었습니다.

    무당들은 자신의 영혼과 몸을 객관화 시켜 다양한 표현을 할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해 내었습니다. 무당들이 보여주는 소리, 신들린 움직임 등은 영혼과 몸을 한 호흡으로 조절하면서 구사하는 고도의 연기술입니다.

    여기서 말과 몸, 의식과 양식, 영혼과 몸이 하나가 되는 통합적 연기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신체가 따로 구별되지 않고 유기적인 통합성을 갖는데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숨입니다. 연희단거리패 메소드는 바로 무정형의 기체와 같은 의식을 숨으로 실어 날라 몸과 소리와 말로 전이시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공기와 같다고 말할 때 공기, 그것을 인간의 주체적 입장으로 마시는 것이 숨입니다. 이 주체적인 숨쉬기가 상상력이란 무정형을 구체적인 몸으로 실어 날라 소리 내고 말을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 바로 이게 숨의 연기론입니다.

     

     

    2-1-5.리얼(real), 그 진실의 황홀경에 대하여

    연기를 리얼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서구 현실주의 성향의 연극이 보여주는 실제성,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연스러움과 구체적인 연기는 우리를 경탄케 합니다. 스타니 슬라브스키에서부터 데이비드 메멧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구의 현실주의 성향의 연극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귀중한 텍스트가 되어주고 있지요.

    그러나 저는 연기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를 연기의 표현양식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형적인 즉, 눈에 보이는 연기양식에서 리얼리티를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리얼리티는 연기자 본인의 진정성, 혹은 내적 동기에 닿아있습니다. 어떻게 연기를 하건 연기스타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연기라 하더라도 연기자의 입장과 태도가 연기적 진실의 황홀경을 드러낼 때, 그 진실의 황홀경이 관객에게 구체적 감동으로 전해질 때, 리얼한 연기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진실을 연기해야한다는 측면에서는 서구연극과 상통하지만, 표현까지 실제적인 삶의 모습에 도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오래 동안 습득된 교양과 제도적 습성에서 비롯되는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의 진실성은 어떻게 표현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배우의 의식이 진실한 입장과 태도를 유지하고 배우의 영혼이 관객과 소통된다면 그것이 바로 리얼(real)이지요, .

    결국 제가 생각하는 리얼리티는 배우의 내적 동기에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주의 혹은 사실주의 연극이라는 말 자체가 연기의 영역을 제한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2-1-6. 연극에 서사구조는 별스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오점설 이라든지 서구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성(plot)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기승전결이 딱 떨어지는 극적구조, 연극의 서사적 이야기 전개를 따르지 않습니다..

    잘 짜여진 극이라는 것은 그리스극 이후 근대극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기준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잘 짜여진 극은 분명한 동기 제시, 예정되는 위기, 절정을 거쳐서 대단원으로 막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체홉의 4막극이 보여주는 잘 짜여진 구성을 생각해봅시다. 1막에선 도착하고, 2막에서 관계가 이루어지고, 3막에서는 충돌하고 4막에서는 떠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잘 짜여진 극의 구성을 저는 인위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연극성을 스스로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혹은 삶은 연극처럼 잘 짜여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구연극은 어떤 이상적 삶의 모형을 제시하는 것인자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교훈적이고 일방적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서구의 연극에서도 이러한 잘 짜여진 극적구조를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더불어 많은 극작가들이 잘 짜여진 극적구조를 해체했습니다. 이런 잘 짜여진 극적 구조로서는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작가의 일방적인 관점과 구도에 의해서 극이 오히려 단순해진다는 것이지요. 영미 현대희곡에서 드러나는 가족사 중심의 일상극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시시콜콜한 문제를 두고 괜스리 심각하게 고민하고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 결과는 단순하고 멜랑코리한 결론에 당도하고 말지요.

    브레히트가 당대의 현실주의 연극들을 무드극, 분위기 극이라고 비판하면서 극적구조를 해체한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현실을 좀 더 폭넓게, 자유롭게 좀 더 다양하게, 진실 되게 표현하려면 그런 잘 짜여진 구조를 해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연희단거리패 역시 현대연극의 해체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오구-죽음의 형식> <바보각시-사랑의 형식> 등에서도 각 장면이 에피소드적으로 묶여 있어서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현실은 그렇게 잘 짜여진 것이 아닐뿐더러 ‘어쩌면 영원히 잘 짜여지지 않을것이다’ 라는 비관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20세기 말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지구의 삶이 대단히 불투명한 혼돈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짜여진 세계, 바람직한 사회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혼돈 속에 놓여진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인간 그 자체의 문제에 더 집중합니다. 잘짜여진 극이 주제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배우 개인 개인이 각각 연극적 주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제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선택은 관객들의 몫이 됩니다.

    <오구-죽음의 형식> 경우 주제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관객의 물음에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배우들이 바로 주제재이고, 관객들이 그 속에서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지요.

     
     

    2-1-7. 배우가 곧 주제다.

    ‘배우가 곧 주제다’ 라는 것이 연희단거리패가 씨어터 컴퍼니가 아닌, 씨어터 트룹인 이유입니다. 연희단거리패 거리패는 배우조직으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배우가 어떤 극의 구성을 따라가서 극중 인물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고, 배우 그 자체가 각자 연극의 주체로 무대에 서는 것이지요. .

    <바보각시>에서 취객은 취객의 입장에서 주체적이고, 실직청년, 우국청년, 앵벌이, 파출소장, 밤처녀는 각각 자기 발언을 하고 모두 자기 주체성을 드러냅니다. 바보각시는 그런 각기 다른 주체들을 다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연희단거리패의 특성이고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이 주체적 존재인 이유입니다..

    배우들이 얼마나 깊은 사유를 전달하는가에 따라서 연극의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배우들이 얼마만큼 폭넓게 이야기하는가에 따라서 연극의 넓이가 바로 결정되어 버립니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연극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짓는 치명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그만큼 치명적으로 신성한 의무를 지닙니다. 배우는 그 자체 주제를 가지고 있는 의식의 소유자이고 그 의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인간(metaphysics) 입니다.

     

    2-1-8. 배우와 연출과의 관계

    그래서 연희단거리패거리패의 배우는 연희단거리패의 성격을 규정짓는 극작 연출가(이윤택)과 의식의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항상 의식의 통일성이 전제됩니다. 왜냐하면 연희단거리패의 성격을 결정짓는 연출가 이윤택의 의식은 곧 배우의 존재양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이윤택의 연극적 관점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경우엔 연희단거리패거리패의 배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와 연희단거리패의 분명한 특성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가능한 다양한 연출을 만나고 다양한 작품을 만나고 싶은 배우들의 욕망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결코 저는 그런 배우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의 의식을 선택하고,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이상주의적 공동체의식을 확인하게 됩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연극에 대한 이상주의 연극공동체, 이것이 연희단거리패의 절대적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은 다양성을 띱니다.

     

    2-1-9. 연기의 원리는 하나, 스타일은 다양하게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에게 가장 존중되는 것이 개성입니다. 10명의 배우들이 무대에 설 때, 10개의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원합니다.

    그러나 배우들이 지켜야 할 연기의 원리는 있습니다. 숨을 어떻게 쉬고, 말을 하고,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등의 연기적 기준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기준에 따라 배우들은 자기 개성대로 연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연기하라’는 방법적 제시는 별로 없습니다, 만일 10편의 연극을 만든다면, 10개의 서로 다른 연극 스타일이 창조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스즈끼 다다시나 로버트 윌슨 처럼 공연양식적 일관성을 연희단거리패에서 찾기 는 힘들 것입니다.

    때문에 연희단거리패의 레파토리들은 실제로 서로 다른 스타일들입니다. <햄릿>과 <오구>가 전혀 다르고, <오구>와 <바보각시>가 또 다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레파토리들 사이에서도 연기적 원칙은 존재합니다. 숨쉬는 법, 화술, 몸의 움직임 등에서 연기 메소드적 일관성은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연희단거리패의 연기적 방법론은 존재하지만 스타일은 찾기 어렵습니다.

     

    2-1-10. 배우는 메타(Meta-)다.

    배우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입장에서 그 자체 주체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표현하는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배우와 배우 상호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조화, 앙상블, 무대 전체를 이끌어가는 리듬, 무대에서 객관적 존재로 위치해야 하는 공간인식 등에서 적확한 연기적 메타로 존재해야 합니다. .

    뿐만 아니라, 무대 위에서 형성되는 빛(조명), 소리(음악성)과의 조화도 고려해야합니다. . 배우, 빛, 소리는 대등한 조건에서 상호 결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배우는 무대의 소리와 빛과 어울리는 공감각적 존재입니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이미지화 해야 합니다. 배우의 얼굴은 또 다른 가면이며 실제 가면, 인형들과도 어울려야 합니다. 연희단거리패에 등장하는 가면과 인형은 그자체가 연극적 상징이며 배우의 얼굴 또한 객관적 상징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해야하는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메타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11. 작란(作亂)을 통해 저항한다.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연극은 작란입니다. ‘작란-난을 꾸미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상적으로 단순 반복되는 삶, 제도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삶, 사회 윤리가 요구하는 삶, 이성이 요구하는 질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요구하는 논리, 죽음에 대한 순응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이 명령받고 요구 당합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명령하고 순응하길 바라는 삶의 구조에 대한 거부의 의지가 ‘난을 꾸미는 것‘이지요.

    인간은 강요받고 명령당하고 교육받고 길들여지고 순순히 죽어가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고, 이것이 곧 연극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길들여진 사회, 명령하는 사회, 혼돈된 사회, 일방적인 사회, 타락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힘이 곧 연극의 힘이고, 작란을 통해 삶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인간입니다. 고대무당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 시킨 채 하늘을 향해 드높은 솟대를 세우는 것 처럼, 하늘과 땅에 대고 ‘나 여기 존재하고 있소!“ 생명의 깃대를 높이 수직적으로 쳐 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연극입니다. .

     

    2-1-12. 어린아이, 야만인, 시인의 모습으로

    배우는 논리 이성 합리성 등으로 무장된 제도적 인간임을 거부하고, 본래적 존재-아이의 모습으로 되돌아 갑니다. 아이가 지닌 천진성이야 말로 놀이하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는 욕망, 광기, 본능, 야만성은 연기의 원천적인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강력한 야만성이 제도적인 삶을 무너뜨리는 연기적 활력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현실, 이성, 논리를 뛰어넘는 삶의 이데아를 꿈꿉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시적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배우는 시를 쓰지 않지만 온몸으로 표현하는 시인이어야 합니다. 삶의 어둠과 빛을 수직적으로 관통하면서 지상에 아름다운 광채를 드리우는 인간,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배우의 모습입니다.  (서울연극올림픽 연기 메소드 발제와 워크샵 /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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